지금 沃川에는 芝溶祭라고 읍내에 각 전주에다 안내깃빌을 달고
축제 준비(9.22~25일까지)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인물은 鄭芝溶(1902. 6. 20)일본과 합병되기전에 태어나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詩人으로 대표적인 詩는 다들 아시다 싶이
<<鄕愁>>라는 시인데 음악 歌辭던지 鄕土詩로서 알려저 있어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이지요.
#정지용프로필 먼저!
1945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경향신문 편집국 국장
1939 #문장지 추천위원
1933 구인회
1930 #시문학 동인
1929~1945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
鄭芝溶 ‘鄕愁’ <1927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해질 무렵)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여러 모양의 별들이 섞여 빛나는 모습)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어떠세요 정지용이 태어나던 고향에 향수 느껴 오지 않으세요.
이 鄭芝溶은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의 살아간 내력을 잠간 알아 보겠습니다
정지용(鄭芝溶, 1902년 6월 20일 ~ 1950년)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 세례명은 프란치스코(方濟角)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고 사인은 폭사로 추정된다.
그의 생애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1]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 정태국 대까지는 옥천군 군동면 수북리(현 옥천읍 수북리) 화계마을의 연일 정씨 집성촌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정지용이 태어난 후 아버지 정태국은 이후 후실 문화 류씨를 들여 슬하에 남동생 정화용(鄭華溶)과 여동생 한 명을 더 두었다. 출생지인 옥천읍 하계리 39번지에 정지용 생가가 있다. 근처에는 박정희 前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의 생가도 있다.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청록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정지용은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시단을 대표했던 인물로 꼽힌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개척자 등의 수식도 심심찮게 붙을 정도로 거물로 평가된다. 한국시인협회장이었던 이근배는 "정지용 시인 자체가 그냥 한국 시문학사다라고 할만큼 정지용 시인이 끼친 우리 한국시사, 특히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대 유명시인(청록파 시인 전부 포함)을 발굴하기도 하고 그들(윤동주 등)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주로, 절제된 어조와 이미지즘이 특징으로 꼽힌다.일제 관련 시 딱 하나를 써서[2] 이것이 친일 문학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시의 어조 자체가 전쟁을 찬양하고 일제를 드높이는 어조인지는 굉장히 모호해서 친일시인지 자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당 시는 타지에서 죽어간 전사자에 대해 절제된 어조로 언급하기는 하나 그 이상의 전쟁과 일제에 대한 찬양이나 영광을 논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지용 시인의 당대 전쟁 관련 작품 자체가 <이토> 딱 한 작품이라 저것을 친일시라고 문
제 삼을수는 없었다 여기 까지만 씁니다 너무 길어서
육영수 생가앞에 생활 모범양식을 배우는 건물들
여기는 향교였습니다. 향교는 이조세대에 지방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곳이라 합니다
공부전당이었습니다. 이렇게해서 정지용이 태어났나 모릅니다
바로 이웃에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