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 경기도 연천 고량포리 '산라 경순왕릉'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설인귀의 전설
경향신문 2007.08.24
김응하 장군은 고려 명장 김방경의 12대손이다. 1619년 요동정벌에 출전, 전사했을 때의 나이는 39살이었다.
한국전쟁때 총탄세례를 맞은 김응하 장군의 비석.
그후 장군과 관련된 일화는 신화로 승격된다. 당대에 기록된 ‘충렬록’과 ‘김장군전’ ‘김장군 후서’(홍익한이 씀) 이후에도 장군의 이야기는 재창작되거나 재구성된다. 18세기까지 사대부 문집에 실린 주요 작품만 해도 조경(1568~1669)의 ‘증영의정김장군신도비명(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송시열(1607~89)의 ‘조증요동백김장군묘비(詔贈遼東伯金將軍墓碑)’, 홍세태(1653~1725)의 ‘김장군전’, 이재(1657~1730)의 ‘김장군응하전’ 등 다수이다.
이승수 한양대 강사에 따르면 ‘동야휘집(東野彙輯)’과 ‘역대유편(歷代類編)’ 등 각종 야담집에도 김장군의 이야기가 꾸준히 전승되고 있다.
“김장군이 세가 다하여 오래된 버드나무 구멍에 숨었는데 한 오랑캐 병사(후금군)가 (장군을) 죽였다. 오랑캐 추장은 ‘이런 충의의 인물을 죽이다니…”하면서 도리어 죽인 자를 처형했다.”(역대유편)
“~적병이 뒤에서 창을 던지니 목숨이 끊어졌지만 오히려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가 발발(勃勃)하니 적이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오랑캐의 추장이 시신을 묻으려 했는데 공의 시체만은 썩지도 않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연려실기술)
장군은 이렇게 조선 역사를 빛낸 전쟁 영웅으로 추앙됐다. 장군은 생전에 평소 생활신조로 삼았던 5조(條) 30계언(戒言)을 남겼다. 내용 가운데는 ‘간사함으로써 광명한 것을 미워하거나(以陰譎疾光明)’ ‘자기 말이 쓰이지 않으면 얼굴을 붉히고 성을 내거나(言不見施發怒面赤)’ ‘형세를 가지고 재산을 탐하려 하거나(以形勢取財貨)’ ‘남의 잘못을 끌어내 자기 잘못을 감추려 하거나(誘人誤事欲掩己跡)’ ‘내 입에서 나온 언사는 어기지 말아야 한다(言出吾口使不敢違)’는 등 곧은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수두룩하다.
굳이 장군의 행적을 과장되게 치장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장군의 평소 지론만 살피면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시대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던 장군에 대한 헌창사업은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예전 같지 않다. 민통선 이북에 있는 장군의 빈묘 역시 이젠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오로지 문중원로들의 자랑거리로만 남아있다. 세상인심이 이토록 무심한 것인가.
〈이우형|현강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