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하였다
이사 61,9-11; 루카 2,41-51 / 성모 성심 기념일; 2023.6.17.(토).; 이기우 신부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신심은 예수 성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으셨고, 아드님께 하느님 신앙을 가르쳐 주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 신심의 전통은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초대 교회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성심의 주요한 고비들, 즉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마다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셨던 성모 마리아께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자 노력하였고, 자신들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예수 성심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주요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역사가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흘러갔어도 신자들 사이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근세기에 성모 신심이 가장 뜨거웠던 곳은 영국과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였고, 이곳 출신 선교사들이 19세기 조선에 들어와 이 신심을 전해줌으로써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도 성모 성심을 열성적으로 지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두 가지 사실(史實)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라우렌시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한국명 범세형) 주교가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느(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 출신이어서 각별한 성모 신심을 물려받아 전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뜨거웠던 남프랑스 지방 신자들의 영향으로 앵베르 주교는 박해 받던 조선교회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자,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공경할 수 있도록 교황청에 청원하였습니다. 이때가 1841년입니다.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신심이 믿을 교리로 정식 반포된 때는 1854년인데, 13년이나 앞서서 앵베르 주교는 이미 그 신심을 박해받던 조선 신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겁니다. 필시 조선 왕조가 가했던 천주교 박해를 하루 빨리 종식시켜 달라는 뜻과 또 박해 중에 신자들이 배교함이 없이 신앙을 증거하는 치명의 은총을 베풀어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훗날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 1898년에 명동성당을 축성할 때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이신 무염시태 성모께 이 성당을 봉헌하였습니다.
앵베르 이후의 선교사들도 박해시기 동안 매괴회(玫瑰會), 성모회 등의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성모 신심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모 신심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활발해지게 된 계기는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 모란 신부가 1953년에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첫 회합을 가짐으로써 도입하면서부텨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에 속한 단원 신자들은 매주 회합 때는 물론 매일의 의무 기도를 통하여 까떼나(Catena. ‘사슬’, ‘고리’라는 뜻으로서 레지오와 단원과 성모님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일상기도)에 적혀 있는 성모 찬송을 바칩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의 파스카 과업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지향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무일도에서도 저녁기도 때마다 찬미가로서 이 성모 찬송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모 찬송에서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찬송을 드리는 파스카 과업은 세 가지 지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령께서도 이사야 예언자에게 알려주셨고 예수님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가 수행할 파스카 과업의 방향으로 알려주신 큰 방향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향 자체가 하느님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미천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활동을 주로 하셨음은 그들을 끌어올리시는 일에 해당합니다. 처녀 시절 주님의 탄생을 예고받고 엘리사벳을 만난 자리에서 읊었던 이 노래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는 물론 마리아의 일생 내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다짐한 지향이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그들을 찾아다니시고 어울리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함께 잔치를 베푸신 활동은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일에 해당됩니다. 이 지향 역시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는 물론 마리아의 일생 내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다짐한 지향이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미사의 지향인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일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조목조목 기억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우리들의 성모 신심이 간직해 온 지향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모 성심은 예수 성심을 본받기 위한 것이며, 특히 예수님의 파스카 과업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에게 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업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듯이, 여러분의 성모신심이 예수님의 복음을 더욱 잘 기억하고, 그 복음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행동에 가열찬 엔진이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께 대한 신심이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대한 신심 모두 우상숭배 풍조와 무신론 사조로 인해 세상의 죄에 물들어가는 세태에서 신앙에 바탕한 진리와 사랑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영적인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