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6
#기독론 #재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과연 어떻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이실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편재성이 없다는 개혁주의가 풀어야 할 난제 중 하나 아닐까?
#20220306
#요한계시록 #Revelation 3:21-22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寶座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寶座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To the one who is victorious, I will give the right to sit with me on my throne, just as I was victorious and sat down with my Father on his throne.
Qui vicerit, dabo ei sedere mecum in throno meo : sicut et ego vici, et sedi cum Patre meo in throno ejus.
Ὁ νικῶν δώσω αὐτῷ καθίσαι μετ’ ἐμοῦ ἐν τῷ θρόνῳ μου, ὡς κἀγὼ ἐνίκησα καὶ ἐκάθισα μετ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ἐν τῷ θρόνῳ αὐτοῦ.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적지근한 적당주의 신앙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토하여 내치리라는 최악의 경고와 책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경고와 책망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키는 성도들에게는 주님께서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신다는 최고의 상급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물론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세속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하고 풍족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어서 주님의 경고와 책망을 듣고 행여나 토하여 내쳐지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어 돌이켜 회개한 후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부유한 것들을 대가로 해서 주님께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바르는 참된 성도가 있다면 그는 주위의 모든 교인들의 비아냥과 조롱을 비롯한 여러 고난들을 스스로 받기로 한 것이므로 장차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지 않고 주님께서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차갑게 하시거나 뜨겁게 하실 요량으로 욥의 재산과 가족들과 건강까지 한번에 몰수하신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세속적인 부유한 것들을 전부 몰수해 가셨을 때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거나 욥의 아내처럼 여호와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죽어버리지 않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혹독한 시련임을 인정하고 잠잠하고도 묵묵히 견뎌내는 성도들도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사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실로만 보자면 아무런 상급없이 그저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겠지만 주님께는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조차도 사랑스러운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직 상거가 먼데도 먼저 알아보고 뛰쳐나가서 오랜기간 씻지도 못한 더러운 몰골도 상관하지 않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깨끗하게 씻기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가죽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짐승을 잡아 동네 잔치를 벌이는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맞아주신다는 것이다.
22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Whoever has ears, let the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Qui habet aurem, audiat quid Spiritus dicat ecclesiis.
Ὁ ἔχων οὖς ἀκουσάτω τί τὸ Πνεῦμα λέγει 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
자기에게 재난이 오기 전에 다른 라오디게아 교인이 당하는 풍비박산을 보고서 두려움을 느끼고 돌이켜 회개하는 라오디게아 신자와, 이미 풍비박산의 재앙을 겪고 있으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동안의 자기의 미적지근한 적당주의 신앙을 회개하며 묵묵히 감내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를 받은 성도들이다.
주님의 편지를 받을 일곱 교회들 중에서 두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칭찬만 들었고 세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들었으며 나머지 두 교회는 오로지 책망만 들음으로써 일종의 대칭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공통적으로 칭찬하신 것은 당신의 복음을 참되게 믿고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며 신실하게 복음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고, 공통적으로 책망하신 것은 거짓 가르침을 용인하는 것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것과 복음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복음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오늘날 교회들은 주님을 2천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한없이 연약하시고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넘치시는 인간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실 편지 내용을 말씀하시는 모습에서는 구약의 여러 걸출한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처럼 영광과 권세와 위엄과 능력이 넘치시며 은혜와 긍휼보다는 한없는 공의로우심이 더욱 강조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안이하게 여기는 오해를 빨리 버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단호하신 심판주이심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
#20210306
#신명기 #Deuteronomy 5:22-33
여호와의 음성 듣기를 두려워하다(출 20:18-21)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모세가 자신의 유언과 다름없는 설교로 이스라엘을 훈계한 모든 것은 모세 자신의 육적인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르신 말씀임을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르신 모든 말씀의 축약본이자 엑기스는 다름아닌 영원한 십계명임을 가르친다. 이는 모든 설교자는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교인들에게 전해서는 안되고 사나 죽으나 매순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오직 성경의 진리만을 가르쳐야 하며 교회와 성도들은 설교자에게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과 가르침을 요구해서는 안되고 자기의 부패한 심령을 날카롭게 찌르는 성경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매순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모든 사역과 언행들이 얼마나 십계명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보며 점검해야 한다.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의 찬란함은 죄인으로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그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이스라엘이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천둥번개와 흑운 등의 자연현상으로 한없이 낮추어 드러내셨어도 이스라엘은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질려 얼이 빠져버릴 정도여서 모세에게 자기들 대신 여호와를 뵈러 가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모세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특별히 존귀하게 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뵙기 위해 흑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여느 백성들처럼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구약의 어떤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백성들에게 그 날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밝고 즐거운 날이 아니라 크고 두려운 날이니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는 오늘날 절대다수의 교인들이 신비하고 황홀한 영적체험을 바라는 것과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고백을 별 뜻 없이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절대다수의 교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쁨과 환희로 몸소 체험할 수 있으며 예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그 마지막 날에 자기들은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교인들의 그러한 착각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기쁨이 아니라 절망과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마냥 한없이 연약하시고 착하시고 선하시고 부드러운 모습만 보이셔서 마지막 날에도 그러실 것이라 여기는데 그렇게 예수님의 영광과 심판을 가벼이 여기다가 마지막 날에 골로 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패역함과 완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교회와 교인들은 과연 주 예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그 날에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복음이 아니라 그저 정치 이념에 사로잡혀서 긍휼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향해 떼거지로 모여 대적하고 온갖 험악한 저주와 비방과 모욕을 일삼으면서 과연 마라나타를 기쁨과 즐거워할 수 있을까? 교회를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면서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감당할 수 있을까? 피해자에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고서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심판을 담대하게 받을 수 있을까?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식상해 하고 하찮게 여기며 인품이 온유해지지 않고 완고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교인이 과연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여호와께서는 처음부터 모세가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설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영광과 위엄을 체험함으로써 여호와께 경외함을 가지고 그 요청을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섭리하셨다. 즉 이스라엘은 스스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겸손하게 모세에게 요청했더라도 이는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셔서 더불어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고백이자 요청이므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신 것이었다.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고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견고하게 인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이시자 하나님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혜사로 주셔서 우리의 영에 거하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 마치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을 행하고 견고히 인내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성령의 역사냐 성도의 의지냐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것을 나눌 수 없듯이 우리의 영과 성령께서 연합된 것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절대다수의 교회와 교인들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서 오늘날에도 이 땅의 부귀영화가 믿음의 결과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한 교회나 교인들은 하나같이 그 과정이 선하지 않고 온갖 불법과 불의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복음을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부귀영화 자체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특정 정치경제체제만이 복음의 절대적 가치에 부응한다면서 이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목사가 정치적 목적의 집단 시위를 주도하고 교인들이 예배를 빙자하여 모여 정치적 목소리를 내곤 하는데 이 또한 실상은 복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상과 이념을 우상숭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식으로 복음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받을 심판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불못일 것이다.
#20200306
#창세기 #Genesis 제 43 장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다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애굽에서 1차로 얻어온 곡식이 다 떨어져가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다가 답답한 마음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베냐민을 동행시키지 않으려는 아버지 야곱에게 강하게 항변한다. 그러면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 베냐민의 안전을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야곱에게 맹세한다. 여기서 유다는 맏형 르우벤보다 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르우벤은 비겁하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두 아들을 담보로 세웠으나 유다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야곱도 더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드디어 베냐민을 아들들과 동행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전히 옛 이름으로 불린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놓은 이 시점에서 다시 하나님께 새로이 받은 이름인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다. 그가 베냐민을 내어놓을 때 했던 신앙고백에서와 같이, 그는 지금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인 베냐민을 내려놓게 됨으로써 비로소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이 여행 중일 때에는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고백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것과 같고 에스더가 백성을 위해 금식 후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갈 때 죽으면 죽으리라 한 고백과 욥이 모든 자녀들을 잃고 나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시점이 바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입으로나 찬양으로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한 생명 다 바치겠노라고 쉽게 내뱉지만 실상은 내 작은 이익 조차도 벌벌 떨며 내놓지 않는 경우가 더 허다하다.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감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의 아들들, 게다가 주위 모든 족속에게 두려움을 떨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여서 여전히 이유없는 호의를 두려워하고 애굽 총리의 청지기에 불과한 사람을 자기들의 주라고 부르며 구차하게 변명하기 바쁘다. 사자처럼 담대해야 할 의의 아들들이 죄로 말미암아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라 하더라도 고의건 부지불식강이건 짓게 되는 죄는 우리의 양심을 담대하게 하지 못하고 소인배를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들은 비록 완벽을 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과거에 저질러놓고 아직도 회개와 청산을 하지 않은 죄들이 있다면 할 수 있는대로 서둘러 하나님께나 피해자에게나 용서를 구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죄의식을 가진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용서 받기 전에는 두려움에 떨며 매사에 전전긍긍 했을지라도 이를 계기로 어찌 됐건 회복의 기미를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교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그 때가 회개해야 되는 때인지도 모르고 자기 교회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뿜뿜하고만 있다.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요셉의 형들이 비굴할 정도로 처량하게 낮추어 겨우 변명을 하자 요셉의 청지기는 애굽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들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그러고서는 청지기로서 요셉의 형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한다. 아마도 요셉의 청지기 또한 자기가 주인으로 모시는 요셉의 인품을 보고서 보디발과 같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자기가 섬기던 애굽의 우상들을 버리고 요셉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다. 이는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인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찾다가 리브가를 만났을 때 보인 신앙과도 유사하다. 사도 바울은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다스림 받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며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다스리는 사람을 거역하지 말고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그 외에도 우리가 5-10계명을 끊임없이 순종함으로써 세상의 도덕성보다 더 탁월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도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에 감화를 받게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모든 한국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석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교회의 성품과 덕성은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흉악한 신천지와 같은 부류 취급을 받고 있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마귀의 악취를 풍기는 것이 현실이다.
시므온은 비록 인질로 잡혀 있었어도 아마도 요셉이 극진한 호의를 베풀어서 그럭저럭 불편하지 않게 생활했을 것 같다. 그래도 유다의 말처럼 벌써 두 번이나 왕복할 만한 기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는 어느 정도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을까 싶다.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요셉의 다정한 성품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형들을 맞이한 요셉은 먼저 아버지 이스라엘의 안부를 묻고 안녕하시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리고 자기 유일한 혈육인 동생 베냐민을 20년만에 보게 되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참지 못하고 몰래 눈물을 흘리고 온다. 게다가 자기를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에게도 부드럽게 말하며 음식을 나누어주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갖는다. 그의 이런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은 물론 타고난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철없던 소년시절에 갑작스럽게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온 후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연단된 성품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원래 사람의 천성은 죄악된 것이어서 표범의 얼룩처럼 지울 수 없고 구스인의 피부처럼 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는 없는데, 이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여김을 받은 우리는 거룩해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성품 중에 주위에 피해를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타고난 천성으로 치부하여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합리화를 해서는 안되고 우리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입어서 끊임없이 선을 끼치는 성품으로 바뀌어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규모가 크거나 교회를 오래 다니거나 목사나 장로 등의 주요한 직분을 맡을수록 겸손하기 못하고 거만하고 교만하여 목이 굳어가는 자들이 비일비재 하다. 연륜과 지위가 높아질수록 교만해지는 것은 세속 조직의 특성이다. 교회에서는 그와 반대로 연륜과 지위가 높아질수록 온유하고 겸손하며 너그럽고 다정해가야 한다. 교회와 신자라고 하면서 후자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세속적인 전자의 모습이 강해진다면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요셉의 형들은 시므온이 풀려나고 베냐민이 특별 대우를 받으며 요셉이 자기들과 즐겁게 식사하는 것을 보고서야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곡식만 잘 사고 모두와 함께 편안하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