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무림에 첫걸음
그로부터 약 일 개월 후, 봉황탄(鳳凰灘).
본시 이곳은 강소(江蘇) 소주성(蘇州城)의 외곽 백 리 하에 자리잡은 천궁산(天穹山) 아래에 펼쳐진 황무지로 규모는 넓었으되 사방이 돌무더기에 가시밭이라 모든 이에 쓸모 없다 버려진 땅이었다.
하나 그 지세(地勢)를 면면히 다시 보면 평원을 감싸안듯 둘러쳐진 천궁산의 형세와, 불과 이십여 리 밖에 대장강(大長江)의 수맥인 소주하(蘇州河)의 넓은 물줄기가 가로 세로로 도도히 흘러 어떤 모종의 쓰임새에 따라서는 최적의 자리로 보이기도 했다.
신시(申時) 무렵.
한창 찌는 듯하던 무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 이곳에 얼핏 보기에도 그 모습들이 한결같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다섯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선두에 선 것은 작달막한 키에 딱 벌어진, 지독스레 완강한 어깨와 고집스럽기 그지없이 보이는 굳게 다문 입술을 지닌 백의청년!
나머지 따르는 청년들은 흡사 선풍옥골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용모의 미청년 하나와, 팔층 석탑을 방불케 할 만큼 거대한 체구에 시커먼 검은 피부를 지닌 거구의 청년.
또한 독수리같이 매서운 눈을 가진 청년과, 그중 어린 듯이 보이는 아직 치기가 남아 있어 보이는 곱상한 소년이었다.
그중 역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선두에 선 작달막한 백의청년.
용모로나 체격으로나 다섯 중에 가장 뒤처져 보이는 그가 별나게 가장 먼저 눈에 띈다는 것은 어쩌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도 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워낙 강인해 보이는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에서 타오르는 듯이 이글거리는 정열적인 빛, 또한 일반으로 보기에는 너무 고집스럽게 악다물려진 입술로 인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누군가?
광천양,
헌원숭,
흑탑,
공손혁,
소오!
바로 그러했다.
이들은 바로 일차에 청해의 서녕성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던 그들 다섯 청년들이었는데!
한데 이들이 여기에 모습에 나타내었다 하면, 급기야 맏형인 천양이 조부 광천사의 허락을 받고 청해를 떨치고 나왔다는 것!
실로 놀라웁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신시(申時)라 해도 아직 분명히 찌는 듯 뜨거운 뙤약볕이 기승을 부렸지만 그래도 사방이 넓게 터진 곳이라 봉황탄에는 간혹씩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도착하자 계속 타는 듯한 눈을 돌려 주위를 두루 살펴보던 천양이 문득 멀리 황무지 건너편의 숲을 주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괜찮군! 숭, 정확히 보긴 본 것 같다! 이 정도면 터전을 일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군!"
헌원숭은 특유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찾으면 더 좋은 곳도 없지는 않겠지만, 이만한 지형을 지닌 곳은 실로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갈은 밀어붙이고, 가시는 쳐내면 그만일 터인즉!"
천양은 가볍게 시선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해봐라. 하지만 말했듯, 나는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자신 있느냐?"
헌원숭은 차분히 포권을 취했다.
"반드시 해 보이겠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알고 있사온즉!"
"엄중한 일이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운을 다 걸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천양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혹 부족한 것은?"
그러자 언제나 말이 없던 날카로운 독수리 눈의 청년, 공손혁이 손을 모아 가볍게 포권하며 말을 꺼냈다.
"자금(資金)입니다. 그간 경영해 왔던 객잔, 상회 등을 다 매각했지만 역시 그것으로는 턱없이 태부족인 액수더군요."
천양은 다시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금릉상회(金陵商會)의 장(張) 대인(大人)을 찾아가서 상의해 봐라! 그 사람이라면 성사될 일이다만, 만에 하나라도 부결되면 다시 연락하고!"
"금릉상회?"
순간, 모두의 얼굴에 크게 흠칫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형님!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그는 우리가 상대해 온 지방 거상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고리대금업자에 소금 항아리라 정평이 자자한 인물이온데…?"
그러나 천양은 부러지게 대답했다.
"악독하지 않고서야 당대에 그만한 재산을 모았을 리 없지! 아무튼 부결되면 연락하도록! 방법은 많으니."
"그리 하겠습니다."
이에 공손혁이 포권으로 대답하는 사이, 소오가 치기 어린 눈에 호기심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하면, 큰형님께서는? 일단 소제들과는 접촉(接觸)을 끊으신 후에…?"
천양의 부리부리한 눈에 얼핏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난 그 동안 삼패의 위세도 둘러볼 겸 이곳저곳 다니면서 말썽이나 좀 피워 볼 생각이다! 그중 특히 신비에 가려져 있다는 벽파문을 집중해서!"
소오의 치기 어린 눈에 커다랗게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말썽이라면 대형보다는 제가 더 일가견이 있사온데! 함께 움직이면 안 될까요?"
그러나 천양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쉬운 말썽 아니다! 자칫하면 크게 위험할 뿐더러, 더욱이 너희는 여기서 숭을 호위하며 도와야 한다."
실망!
"하오나 이곳은 인적조차 없는 곳이온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양은 다시 고집스런 입가에 한 줄기 고소를 떠올리며 도착하면서부터 줄곧 주시하던 건너편의 숲을 가리켰다.
"바보 소리! 귀를 기울여 보거라. 이게 어디 조용한 것인지."
이에 소오 등 네 청년은 크게 의아한 기색으로 비로소 건너편 숲을 응시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마침 소슬바람이 불어서일까.
"사람 살려요!"
홀연 바람결에 실려 주시하던 숲으로부터 아주 가녀리기는 하지만 분명 깨알 같은 한 여인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이에 소오 등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흠칫하는 표정을 지으며 급급히 다시 시선을 천양에게로 돌렸다.
"여자의 비명 같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사온데…."
천양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전부터 들려오고 있었지! 행인이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하오면 어서 가서 도와야…."
그러나 천양은 다시 한 줄기 기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다지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무리와 다소 떨어진 곳에 또 다른 기척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미 그들에게는 다른 응원자가 와 있는 느낌이다."
실로 놀라운 일!
이에 소오 등은 다시 크게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그럴 수가? 숲은 수백 장이 넘게 떨어져 있사온데…."
하지만 천양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빙긋 미소지었다.
"조금 더 두고 보자꾸나. 공연히 중도에 나서는 것은 그에게 언짢은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
"도저히 이해가…."
그러나 이때였다.
흡사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해 주듯 돌연 건너편의 숲으로부터 다시 펑펑! 하며 연거푸 내가장력이 격돌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느닷없이 호통이 들썩하게 울려 오기 시작했는데….
"네 이 놈들!"
"으아아악! 웬 놈이냐?"
소오 등은 이 돌연한 사태에 당연히 한 번 더 크게 흠칫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하지만 직후 천양의 미간이 다소 찡그려졌다.
"기습에 실패했다! 일곱 중에 겨우 둘밖에 처치 못했군."
"그, 그건 또 무슨 말씀?"
하나 천양은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특유의 커다란 몸짓으로 홱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나타나 있던 기사(騎士)가 실력이 없다는 뜻이다."
* * *
그리고 같은 무렵,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너편의 숲속.
그곳은 소주성을 향해 길게 뻗은 숲 사이의 소로였는데, 과연 벌어진 소란이 입증해 주듯 길 중간쯤에는 흉흉한 살기와 더불어 흉측한 시비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처음에 습격을 받아 비명을 지른 듯한 것은 길가 한옆에서 부서진 가마를 세워 둔 채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한 삼십 세 전후의 미부(美婦)와 역시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두 명의 가마꾼.
그리고 습격한 듯이 보이는 인물들은 똑같이 흰 경장에 푸른 덧옷을 걸친 흉흉한 표정의 일곱 장한들이었는데, 그중 둘은 과연 천양의 말마따나 이미 급습을 당해 절명한 듯 입에서 시커멓게 피를 토한 채 길 한쪽에 뻐드러져 있었다.
또한 끝으로 그 둘을 거꾸러뜨린 채 습격을 당한 아낙을 돕고자 나타났다는 기사(騎士)!
그는 의외로 초라한 모습을 한 젊은 걸인(乞人)이었다.
때에 찌들은 누더기를 걸친 육 척 가량의 호리호리한 체구에 봉두난발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모습이었고, 역시 시커멓게 때가 묻은 밋밋한 표정 없는 얼굴을 한….
그러나 두 눈에서만큼은 시퍼런 안광이 비수처럼 예리하게 뿜어져 나왔고, 허리춤에 다섯 개의 큼직한 매듭을 묶은 허리띠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보면 필시 심상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이자 저 유명한 개방( 幇)의 제자(弟子)임이 분명한 것 같았는데….
하나 습격을 한 일곱 청의장한도 하나같이 눈에서 흉흉한 정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보아 분명 예사로운 내력(來歷)을 지닌 위인들은 아닌 듯 보였다.
문득 그중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퍼렇게 날이 선 박도(朴刀)를 움켜쥔, 얼굴에 돈짝만한 퍼렁 점이 있는 장한이 젊은 걸인을 향해 흉흉하게 말을 던졌다.
"흐흥! 능지처참을 해 마땅한 놈 같으니! 행색을 보니 네가 분명 개방의 제자렷다? 한들 감히 본 벽파문(碧琶門)의 일을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벽파문(碧琶門)!
놀랍기 그지없는 명칭!
실로 현 무림의 정세를 다시 일러 살펴볼 것 같으면, 현 강호에는 군림삼패(君臨三覇)로 불리어지는 세 개의 방파가 가장 크게 그 세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끝이 없을 만치 넓은 중원.
남북 심삽 개 성의 수백 군소방파를 모두 합쳐도 감히 맞서지 못할 만큼 크나큰 세력을 지닌 세 개의 방파!
이들을 천하인들은 곧 일정(一正), 일마(一魔), 일사(一邪)라 호칭해 불렀는데…. 그중 하나의 마(魔)로 칭해지는 일마(一魔)가 바로 벽파문(碧琶門)이었다.
더불어 삼패 중에서 가장 신비함을 지닌 곳이기도 한 곳!
이들은 근거지를 저 험악한 산서성(山西省)의 오대산(五臺山) 깊숙이에 위치한 절명곡(絶命谷) 안에 두고 있었으며, 발촉한 것은 약 삼십여 년 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하각처의 기라성 같은 고수(高手)들을 끌어모아 삼패로 불리기까지 급성장을 해 왔으나 아직도 문파를 일으킨 수뇌(首腦)가 누구인지, 혹은 용담호혈 같은 그 속에 어떤 고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다 파악이 안 되는 그런 기괴한 곳이었다.
해서 세간에서는 그 신비함을 들어 이들을 일마로 칭하기 시작했었던 것인데, 또한 그런 만치 울던 아이들도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칠 정도의 막강한 세력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맞선 젊은 걸인, 그 역시도 중원 유사 이래 최대의 방파로 불리는 개방의 출신이라 그런지 결코 녹녹치 않게 대답을 했다.
"웃기는군. 삼패의 이름을 앞세워 협박을 하려고는 한다마는, 너희가 감히 그것도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벌건 대낮에 아녀자를 겁탈하려는 꼬락서니하고! 철담백면(鐵膽白面) 자량(慈量)이 이 일을 알면 참도 좋아하겠군!"
철담백면 자량!
"어떠한가? 이 일을 한 번 그에게 고해 바쳐 볼까?"
"이 놈이…?"
순간, 흉흉하던 다섯 장한의 얼굴색이 핼쑥해졌다.
"다시는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 줘라!"
이어 그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 급급히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버럭, 호통과 함께 쉭쉭! 시퍼런 박도(朴刀)를 휘두르며 느닷없이 한꺼번에 젊은 걸인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하나 젊은 걸인의 재간의 더욱 뛰어나, 찰나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연기처럼 허공으로 뽑아 올리더니 그대로 벼락 같은 직격의 일 장을 뿜어내었는데….
"어딜?"
펑!
"아악!"
찰나, 주위에는 다시 가죽공이 터지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부지불식간에 쏘아 간 젊은 걸인의 장력이 격중된 듯 급습해 오던 장한 중 하나가 피를 토하며 저만치로 날아가 쓰러졌다.
"둘째가 또…?"
하지만 급습해 가던 장한들은 한 번 움찔하는 눈치를 보이긴 했으나, 어지간히 싸움에 단련된 듯 결코 손속을 늦추지는 않았다.
전후좌우, 젊은 걸인이 허공으로 몸을 빼올리며 장력으로 하나를 쳤다 싶은 순간 어느 새 함께 몸을 뽑아 올리며 번쩍! 번쩍! 사방에서 박도로 그를 후려쳐 온 것이다.
"천근추(千斤鎚)!"
위기중중(危機重重).
그러나 젊은 걸인의 몸놀림도 역시 만만치가 않아 그러한 경황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고 몸의 중량을 모조리 두 발에 싣는 천근추의 절묘한 수법으로 번개같이 떠올렸던 몸을 그대로 일직선으로 다시금 아래로 떨어뜨리며 네 장한의 칼날을 피해 갔다.
"이 놈! 어디로 가느냐?"
하지만 협공에 익숙하여 이미 이 수법을 미리 아는 듯, 그 즉시 보다 높이 솟구쳐 공세를 가했던 퍼렁 점의 장한이 돌연 버럭 호통을 터뜨리며 몸을 곤두박칠쳐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 손을 뻗어 왈칵 벼락 같은 일 장을 들입다 쏟아 냈는데….
퍼엉!
"앗!"
찰나, 장내에는 다시 한마디 숨막히는 비명이 토해지며 아래로 떨어지던 젊은 걸인의 몸이 퍽! 저만치 숲 한쪽으로 퉁겨졌다.
미처 피할 사이 없이 장력이 그대로 그의 좌측 어깻죽지를 스쳐 가며 후려쳤던 것이다.
"걸렸다!"
그러자 네 장한은 즉시 쾌재를 부르며 한꺼번에 다시 번개같이 그를 따라 쏘아 가며 박도를 휘둘러 무수한 검영으로 단숨에 그의 몸을 수십 조각으로 난자하려 들었는데….
하지만 또한 그들이 일으킨 무수한 칼 그림자가 젊은 걸인의 몸을 뒤덮기 직전이었다.
"잠깐, 멈추어들 보거라!"
돌연 덮쳐 가던 그들의 귓전에 짤막하나마 다부진 위압감 가득한 음성이 터지는가 싶더니, 퉁! 장력에 맞아 밀려가던 젊은 걸인의 몸이 다시 무형중의 무언가에 부딪친 듯 탄력 있게 허공으로 튀어올라 장한들의 칼세례를 피하게 한 뒤 저만치 숲 한쪽 옆으로 떨어지게 했다.
"이건 또 웬 놈이…?"
찰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어 버린 네 장한은 표정이 벌레 씹은 꼴로 일변해 급급히 다시 땅으로 내려서며 홱 시선을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대체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음성이 들려온 곳은 또한 숲길의 한쪽 가장자리였는데…. 그곳에는 얼핏 보기에도 한결같이 지닌 기세(氣勢)가 실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다섯 청년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서 있는 모습이 가득히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천양과 네 아우들!
하지만 느닷없는 방해꾼으로 인해 두 번씩이나 일을 망친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어, 퍼렁 점의 사내가 다시 흉흉히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신경질 섞인 호통을 토해 냈다.
"대체 뭐라는 뼈다귀들이냐, 너희들은? 무슨 일로 남의 일에 나서는 것이지?"
그러자 천양이 특유의 고집스러운 어투로 부러지게 대답했다.
"입이 걸은 놈들이군!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광세무적 절대무이 오직유일 무검왕자 광천양이라는 사람이다."
명호라 치면 너무나 엄청나고도 긴 별호.
이에 네 장한들은 일순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되물었다.
"뭣? 천상천하 광세무적이 어쨌다고?"
하지만 천양은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부러지게 말했다.
"기억력까지도 나쁜 놈들이로군! 천상천하 유아독존 광세무적 절대무이 오직유일 무검왕자 광천양이라니까!"
그러나 역시 길긴 길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광세제일… 아니, 광세무적 절대무이… 젠장, 길기도 하다!'
그러자 이 거창한 명호의 앞뒤를 맞추려고 한참을 생각하던 퍼렁 점의 사내는 곧 그런 따윈 무시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도 길어서 잘 모르겠다! 하나 어쨌건 이름은 광천양이 분명한 것 같은데, 네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냐?"
하지만 천양은 여전히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대답했다.
"별것 없다! 그저 너희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좀 물어 보려 할 뿐이었으니, 대답만 해 봐라."
"애송이 놈이…."
퍼렁 점 사내의 안면이 더욱 흉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의도가 그저 뭔가를 좀 물어 보려는 것뿐이라 하니, 속히 서둘러 보내 놓고는 젊은 걸인 등과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터지는 속을 꾹 참았다.
"좋다! 그럼 후딱 물어 보거라! 대체 알고 싶은 게 무어냐?"
이에 천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다만 행색을 보아하니 너희들은 분명 몰염치하기 짝이 없는 떼강도가 분명한 것 같은데, 벌건 대낮에 숲속에서 이런 강도 짓을 하는 재미가 어떤 건지 그걸 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기 그지없는 발언!
"무에야? 무어가 어째고 어째?"
찰나 네 장한은 그만 기가 꽉 막혔다.
기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세상에 질문을 해도 유분수지!
이에 퍼렁 점의 사내는 어이가 없는 한편 기절을 할 만큼 울화가 치솟아 올랐다.
"보자보자하니 세상에 정말 뭐가 이런 놈이…. 네가 지금 그걸 제정신으로 하는 수작이냐?"
하지만 천양은 여전히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아니라면 어찌 너희들 같은 몰염치한 강도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겠느냐?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공자 앞에서나 가서 할 질문인 게다!"
"이런 때려 죽일! 아무래도 이 놈이 필시 돌았거나,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임에 분명하다!"
"썩어질 놈! 그렇다면 소원대로 들어 주지!"
이에 장한들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올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일제히 펄쩍 몸을 솟구쳐 앞뒤 가리지 않고 박도를 휘두르며 천양을 후려쳐 왔다.
하지만 순간, 그들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일어났다.
"놈들! 버러지만도 못한 하찮은 것들이 감히 누구에게 칼부림을 하겠노라고!"
흑탑!
바로 그러했다. 천양이 미처 어떤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지금껏 묵묵히 지켜보던 그가 한마디 천둥과 같은 호통과 함께 훌쩍 거대한 몸을 솟구치며 그대로 솥뚜껑 같은 손을 쭉 뻗쳐 장한들을 향해 쌍장을 후려친 것이다.
"어헉! 아니?"
그러자 흥분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우선 천양만을 노리고 덮쳐 왔던 네 장한들은 이에 그만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두서없이 천양을 쳐 가던 몸을 급변시키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상가상 흑탑이 손을 뻗자 그 즉시 덩치만큼이나 거창한 장강대해 같은 암경이, 우르르! 하는 뇌성까지 동반한 채 숨막히게 들이 밀려들었기 때문!
"일제히 들이쳐라!"
이에 장한들은 일순 안색이 사색이 되어 소리치며 일제히 칼을 버리고 허공 중에서 함께 쌍장을 날려 밀려오는 흑탑의 장력을 마주쳐 갔는데….
퍼어엉!
"아아아악…!"
"크으!"
그러나 격돌의 순간, 홀연 주위의 공기가 한꺼번에 진동을 일으키는 거대한 폭음이 터지며 그렇게 장력을 맞받아 갔던 네 장한은 또한 일제히 숨막히는 비명, 분수 같은 피화살을 토하며 사지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 사방으로 퉁겨져 가 제멋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는데….
흑탑의 일 장, 그것은 실로 그렇듯 녹녹한 것이 아니었다.
밀려올 때의 산악 같은 암경도 그러했지만, 격돌하자 속에는 흡사 만 근의 철퇴로 사지를 난타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진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
"쿨룩쿨룩…!"
"이럴 수가? 한갓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가…."
이에 네 장한은 온 전신의 기혈이 일제히 거꾸로 역류하는 듯이 커다란 충격 속에 나동그라지고 나서도 울컥울컥 연거푸 시커먼 피를 토하며 한참 동안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흑탑은 그들을 보는 듯 마는 듯, 천양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할까요? 하는 꼴들이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봐, 살려 둔들 세상에 득이 없는 인간들 같사온데?"
말 한마디에 이제 그들의 생사가 달린 것!
하지만 천양은 그들을 더 이상 핍박할 생각이 없는 듯 다부지게 말했다.
"벽파문의 체면을 봐서 보내 줘라! 그만하면 되었다!"
흑탑의 화등 같은 눈이 곧 바로 장한들에게 옮겨졌다.
"운이 좋았군. 생각 같아서는 당장 요절을 낼 것이되 참는다. 어서 꺼져라."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거구에 우렁우렁한 음성!
"가, 가세! 우리들 적수가 아닐세!"
이에 장한들을 행여나 마음이 변할세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급급히 길도 아닌 숲속으로 우선 피신부터 해 종적을 감췄다.
그 꼴을 보며 소오가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질문했다.
"저런 놈들에게 용서를…, 대낮에 부녀자를 덮치려 할 정도로 흉흉한 놈들이라면 머지않아 또 사고를 치고 말 터이온데…."
천양은 담담히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해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살려 보낸 만큼 더 이득이 생길 것 같아 보낸 것이다."
기이한 말.
그러나 평소에 천양을 잘 아는 소오 등은 대뜸 그에게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때 마침 저만치 한쪽에서 위기에 처해져 있었던 미부와 개방의 젊은 걸인 등이 그에게로 다가와 정중히 포권을 했다.
"고맙소이다, 형장.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바!"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니, 마음 쓰시지 마시오. 보다 많이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 마음이 좋구려."
"불초는 개방의 오결제자 파의개(破衣 ) 백군(白君)이라 하오."
천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청해 사람 광천양인데, 이렇다 할 별호 같은 것은 없소이다. 혹시라도 인연이 있어 다시 뵙게 되면 계속 가르침 주시기 바라오."
젊은 걸인의 눈에 가볍게 흠칫하는 기색이 스쳤다.
"이대로 그냥 떠나시겠다는 말씀?"
천양은 다시 특유의 선이 굵은 동작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 있는 들 더 무엇하겠소? 그럼 백 대협께서는 기왕 나섰으니, 계속 옆의 부인을 좀 안전하게 모셔 주시기 바라오."
이어 천양은 더 볼일이 없다는 양 훌쩍 커다랗게 어깨를 돌려 헌원숭 등을 대동하고 성큼 항주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파의개 백군!
그러자 개방의 이 젊은 걸인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응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흔적이 없어지자 혼잣말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굉장히 상대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가진 사람이로군. 무림에서 아직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이어 그는 서둘러 옆의 미부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부인도 일단 항주 쪽으로 갑시다. 거기서 행장을 다시 꾸리시되, 나는 저들을 좀 주시해 봐야겠소."
미부에게는 그가 커다란 실로 은인인 셈. 어찌 마다고 하겠는가? 그저 깊숙이 읍을 함으로써 사의를 표명할 뿐이었다.
* * *
삼패(三覇), 그리고 일정(一正), 대영웅맹(大英雄盟)!
그로부터 사흘 후 천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절강(浙江) 항주성(杭州城)의 측근 백여 리 밑, 동천목산(東天目山)에 자리잡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치 거대한 무림성(武林城) 대영웅맹(大英雄盟)의 입구였다.
현 무림정도를 이끌어 가는 대웅주(大雄主)가 있는 성!
본시 역대(歷代)로부터 무림맹이란 천하무림에 중대한 사안(事案)이 있을 때만 무림첩(武林帖)을 발송해 중원무림의 태산북두로 일컬어지는 소림(少林), 무당(武當) 등 천하 유수의 군웅들이 운집해 일의 해책을 논의(論議)해 온 실체가 없는 곳이었으나 발촉을 하게 된 동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 년 전에 일어난 존마(尊魔)의 난(亂)으로 인해서였다.
마존(魔尊) 운중독비(雲中毒臂) 상군악(尙群嶽)!
또한 약 백여 년 전에 홀연히 천하에 모습을 드러낸 개세의 효웅(梟雄)!
거대한 돈황의 이권 다툼을 두고 하루같이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싸움을 벌이는 무림의 정세를 살펴보자면 언제 어느 시대인들 천하에 효웅이 없었겠는가마는, 그러나 이 존마의 난은 실로 그 규모가 엄청났다.
운중독비 상군악, 대체 언제 어느 문파에서 이렇듯 엄청난 인물을 배출해 내었던 것인지….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자면 그는 철저히 신비(神秘)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배출된 문파가 어딘지, 또는 출생이 어디인지….
그러나 다만 밝혀진 바로는 일신의 무력(武力)과 지닌 야심이 하늘을 찌르는 인물로, 그는 무림에 등장하기 무섭게 천하각처의 사인(邪人)들을 지닌 바 출중한 무예로써 휘하에 끌어모아 호북의 무창(武昌)에 존마성(尊魔城)을 세우고 그 영향력을 차차 천하각처의 군소방파에 뻗쳐 갔다.
마령불복(魔令不服) 시천하(屍天下)!
또한 이 간략한 하나의 어원이 전해 주듯 그는 스스로의 휘하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인물들은 그 즉시 일천 아수라군(阿修羅軍)이라 명명되던 휘하의 대군(大軍)을 일으켜 모조리 참살하는 엄청난 살겁(殺劫)을 일으켰는데….
무림 장악!
그의 뜻은 분명한 것이었다.
이에 참다 못한 천하의 의협지사들은 곧 그에게 더 이상 살겁을 일으키지 않도록 일차적인 경고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미 상군악의 세력은 너무나 커져 있었고…, 결과 그는 오히려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칠대문파를 급습했다.
그로 인해 칠대문파는 불과 수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불바다에 휩쓸렸고, 이에 비로소 그의 무력이 실로 하늘을 뒤집어엎을 만한 것임을 깨달은 무림인들은 급급히 무림첩(武林帖)을 발송, 무림맹을 발촉시켜 천하각처에 흩어진 정, 사, 마, 삼대의 영웅들을 운집시킨 후 당시 최강의 협객이라 일컬어지던 신도(神刀) 북궁진천(北宮震天)을 맹주로 삼아 상군악을 휘몰아쳐 갔다.
결국 상군악과 존마성은 무림 전체를 상대로 혈전을 벌이기에 이르른 것!
하지만 일렀듯 그의 지모와 무력은 역시 천하에 가히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가공하여 전 무림이 그를 공격해 갔음에도 무려 일 년여에 거쳐 그는 싸움을 지속했고, 접전이 시작된 지 무려 일 년 반 만에서야 존마성은 사방이 포위된 채 천하 최강의 무인들의 협공 속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접전! 무려 일 년 반이나 지속된 기간이 말해 주듯 운집한 영웅들이 마침내는 상군악과 그의 존마성을 허물어뜨리기는 했으나 무림맹 쪽의 피해 역시 엄청났다.
이는 전 무림의 총 운집된 힘이 하나의 방파를 협공해 휘몰아쳐 간, 어찌 보면 거의 일방적이라 할 만큼 가벼운 싸움 같기도 하였으나 어이없게도 상군악과 그 휘하의 일천 아수라군은 허물어지기까지 전 무림맹인들을 거반도 훨씬 넘은 팔할이나 척살(刺殺)해 낸 사상 유례조차 없는 엄청난 반격을 가했던 것!
결국 접전은 백중지세로 간발의 차이로 간신히 영웅맹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천하무림에는 즉시 커다란 힘의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다시 말해 상군악의 난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컸기에 또 언제 무림의 이런 허약한 틈을 타 존마성과 유사한 효웅이 등장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모두의 가슴을 조이기 시작한 것!
이에 소림, 무당 등 접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인물들은 다시 중지를 모아 어느 정도의 힘이 복구되기까지 당시의 무림맹을 해산시키지 말고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여타의 효웅들이 도발하지 않을 때까지 각처를 돌보게 하자는 데에 뜻을 맞췄다.
이후 그들은 이 항주의 동천목산에 대영웅성을 세우고 역시 존마성의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신도 북궁진천으로 맹주로 봉위한 후 이곳을 무림 전역 각처의 대소(大小) 시비를 가리는 곳으로 지정해 계속 그 맥락을 유지해 왔다.
그렇게 이어져 온 대영웅성의 역사가 어언 백여 년!
그러다 보니 또한 오늘에 와서 대영웅성의 덩치는 너무나 비대해졌다.
흡사 동천목산을 통째로 휘감기라도 한 것처럼 성을 둘러싼 성곽의 둘레만 해도 무려 십여 리.
칠파일방을 위시해 맹주령으로 동원시킬 수 있는 각처의 군소방파가 무려 천여!
이만한 규모의 대영웅맹이라면 누가 봐도 이젠 가히 함부로 도발할 만한 인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쩌면 너무 믿음이 강해서 일어난 안도감이었을까?
여백을 깨뜨리고 작금에 이르자 무림의 저변에는 또다시 벽파문, 만붕방 등등의 초대규모의 방파들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며 그 야심을 드리우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대영웅맹이나 무림인들은 여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기실 아무리 세력이 하늘을 찌르는 그들일지라도 설마 휘하에 일천여의 무림 방파들을 동원시킬 힘을 가진 대영웅맹을 상대로 감히 도발을 벌여 올 만큼 간담이 큰 효웅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므로!
'하지만 늙었어! 더욱이 지난 백 년의 세월과 지나치게 커져 버린 덩치가 모두에게 방심감을 심어 줘 결과, 여타 효웅들을 마음놓고 자라게 해 준 꼴이 되어 버렸으니….'
이에 천양은 생각하며 동천목산을 통째로 휘어감은 듯 둘러져 있는 거대한 성벽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윽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치솟은 대영웅성의 거문(巨門) 앞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거문 위에는 과연 천하의 대무맹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영웅천하(英雄天下), 수호무림(守護武林) 등등이라 수놓아진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또한 성문 좌우로 각각 열 명씩의 황의적삼을 걸친 위풍당당한 수문위사들이 위맹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오가는 인물들을 살피는 모습이 가득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천양이 조금 더 성문 쪽으로 접근하자,
"서시오! 통행패가 없는 이상 함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성문 좌우를 지키던 무사들 중 두엇이 대뜸 앞으로 나서 창을 교차시키며 천양의 발길을 막았다.
이에 천양은 특유의 정열적인 빛이 뿜어지는 눈으로 성문과 가로막은 위사들을 함께 쓸어 보며 다부지게 입을 열었다.
"나쁜 뜻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경계심은 풀어도 좋소! 나는 청해에 사는 광천양이란 사람인데, 잠시 맹주님을 좀 뵙고자 왔소!"
말을 꺼내자 대뜸 찾는 이가 천하 군웅들의 수뇌인 영웅맹주!
이에 위사들은 크게 아연해하며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맹주님을 찾으시다니…, 일반적인 개인의 시비와 은원을 하소연하려는 것이라면 청원부(請願部)를 찾으셔야 할 것인데,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것이오?"
이에 천양은 여전히 눈 하나 깜박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맹주님에게 직접 드려야 할 말을 어찌 여기서 함부로 꺼낼 수 있겠소? 다만 이 일에 작게는 장차 영웅맹의 흥망이 걸렸을 뿐 아니라 크게는 무림 전체의 풍운이 걸렸을 정도니, 즉시 면담을 맹주님에게 청해 주시오!"
"영웅맹과 무림 전체가 직결될 만치 중대한 사안?"
순간적으로 위사들의 표정에 흠칫, 더욱 커다란 놀라움의 기색이 스쳤다.
기실 맹주를 만나고자 한다에서부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툭툭 던지고 있는 천양의 말들은 하나같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던 엄청난 일들!
하지만 그러한들 자신들이 지닌 신분이란 게 고작 수문위사.
외객과 맹주를 만나게 간할 정도의 권한이 그들에게 있을 리 없다.
"알겠소. 하다면 잠깐만! 곧 상부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소."
이에 수문위사는 서둘러 대답한 후 허둥지둥 급급히 성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약 일다경 후 황급히 뛰어 들어간 수문위사가 데리고 나온 인물은 대영웅맹의 대내총관(待內總管) 직을 맡고 있는 팔비응신(八臂鷹神) 잠안(潛安)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약 오십여 세의 나이에 하얀 염소수염을 기른 조그마한 키에 통통한 체구의 인물이었는데, 맹의 대내총관 직을 맡고 있는 만큼 지닌 무위가 이미 노화순청을 상회했고, 또한 성품이 어린아이처럼 유쾌하고도 활달한 인물로 무림에 정평이 자자한 터였다.
또한 직책이 직책이라 하루에도 수백여 각양각처의 인물들을 면접하는 만큼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롭기로도 유명했는데….
'오, 예사의 인물이 아니다!'
이에 팔비응신 잠안은 나오자 대뜸 이 완강한 젊은이의 다부진 몸에서 뿜어지는 기백이 한눈에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역시 대영웅맹의 대내총관답게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입을 열었다.
"험, 험! 노부는 여기 영웅성의 대내총관 직함을 맡고 있는 팔비응신 잠안이라고 하이. 한데 자네가 맹주님을 뵙고자 했었던가?"
천양은 특유의 커다란 몸짓으로 힘있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불초 청해의 말학후진 광천양! 인사드립니다!"
선이 굵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하나하나의 행동이 커다란 그의 힘있는 모습!
잠안은 왠지 자꾸만 이러한 천양의 모습이 미덥고 마음에 좋았다.
"헛헛헛…, 꽤 싹싹하군! 한데 맹주님께 드려야겠다는 중요한 이야기의 내막은?"
"일러 말씀드렸지만, 어찌 그러한 일을 이런 자리에서 쉽사리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삼패에 관한 건이라고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삼패!
순간 잠안의 눈에 얼핏 기이한 광채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실 가뜩이나 근자에 이르러 위세를 뻗치고 있는 만붕방과 벽파문에 관한 일이라면 무림인들 모두가 뒤숭숭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
"헛헛헛…. 그래, 알겠네. 뭔가 했더니만 역시 그런 것이었구먼! 하다면 역시 중차대한 내용이 아니 될 수 없으니, 일단 자리부터 옮겨서 의논하기로 하세나!"
이에 잠안은 곧 내심 뭔가 큰 것이 있다 싶은 확실한 느낌이 들었지만, 과연 늙은 생강답게 내색하지 않고 웃음으로 간단히 얼버무리며 광천양을 대동해 서둘러 대영웅성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한식경쯤 후.
"헛헛헛…, 잠시만 기다리게! 곧 맹주님께서 거동하실 것이니!"
이윽고 긴한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만나기를 청한다고 상부에 기별을 한 잠안이 천양과 함께 도착한 곳은 국죽원(菊竹院)이라 불리는 대영웅성 내의 접객원(接客院)이었다.
하지만 원내의 실내로 들어선 천양은 일순 내심 커다란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는데….
화려함의 극치!
바로 그러했다. 들어가 본즉 외객을 맞이하는 국죽원의 접객실은 대막을 건너온 페르시아의 타는 듯 붉고 화려한 양탄자가 깔린 아래, 도처에 금은으로 장식된 번쩍이는 가구들과 하물며 팔선탁까지 턱하니 수백 년은 족히 묵었음직한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품이 일견하여 들어서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기가 죽을 만큼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던 것.
따라서 이곳은 무림맹주가 협객들을 맞이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마치 어느 천하 갑부 저택의 거실에 들어선 것과도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이에 천양이 잠시 어리둥절하여 좌우를 살펴보는 사이 잠안이 팔선탁의 자리를 권하며 다시 웃었다.
"헛헛…, 뭘 그리 두리번거리고 있는가? 어서 이리로 앉게."
그제서야 천양은 비로소 잠안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요즘 영웅성은 경기가 매우 좋은 것 같군요."
이럴 것도 없이 이 화려한 접객실에 대한 가벼운 일침.
그러나 잠안은 쾌활한 성품만큼이나 별 곡해 없이 대답했다.
"헛헛…, 천여 군소방파로부터 들어오는 수익이 수월치 않으니 꽤 괜찮은 편이지.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하네."
그러고 나서는 은근한 눈으로 천양을 보며 다시 물었다.
"허허…, 한데 어떠한가, 광 소협? 어차피 곧 맹주께서 납시겠지만 무료한 사이에 가지고 온 소식을 좀 귀띔해 줄 수 없겠나?"
"총관께 먼저?"
잠안은 괜스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헛헛…, 난 원래 성격이 좀 급해서 말일세! 뭐 정히 내키지 않는다면 괜찮네만…."
천양은 그러한 그를 주시하며 특유의 끊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궁금해 하시니! 하다면 먼저 말씀 올리기로 하지요."
"옳거니!"
순간 딱, 하니 잠안의 입이 벌어졌다.
"헛헛헛…, 역시 훌륭해! 처음부터 자네가 사람 중의 용(龍)이라는 것은 알아봤지만 이렇게 공경심까지 갖추다니! 믿건데, 장차 장도가 창창할 걸세!"
격찬.
하지만 천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속 그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황송한 말씀! 아무튼 불초가 가지고 온 무림 풍운에 관련된 소식은 바로 제가 오늘부터 영웅맹의 사람으로 입문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엉?"
황당한 소리.
이에 잠안은 흠칫, 일순 표정이 크게 어리둥절해졌으나 곧 다시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헛헛…, 거 농담 역시 제법 즐길 줄 아는구먼! 설마 그런 따위로 영웅맹의 흥망이나 무림 풍운을 들먹거릴 일은 없을 터인데!"
그러나 있었다. 천양은 계속 특유의 정열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잠안을 바라보며 절대 농담으로 볼 수 없게 말을 이은 것이다.
"괜한 말이 아닙니다! 실로 무림의 정세를 볼 때 도처에 사마(邪魔)의 패거리와 삼패가 득세하고 있는 이때, 불초만한 인재가 영웅맹에 입문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뭐가 어쩌고 어째?"
잠안의 눈이 더욱 커다랗게 휘둥그래졌다.
비로소 그는 천양의 말이 농담이 아닌 것 같다, 라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나 역시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설마…. 자네, 그 말이 지금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진심…, 이라고?"
맙소사! 찰나간 잠안의 안색이 홱 대변했다. 동시에 그는 크게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외침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아니해도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인가 싶긴 했더라만, 고작 그런 따위의 일로 맹의 흥망을 운운하며 맹주님을…."
창졸간에 사람 중의 용에서 뼈다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야 어쨌거나 잠안은 계속 크게 운진이 달아 펄펄 뛰기 시작했는데….
"아, 이거 큰일났다! 곧 맹주께서 오실 텐데! 이런 정신 나간 놈의 말을 믿고서 알아보지도 않고 청원을 올렸으니…."
울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질렀다.
"네놈은 무림맹주를 농락한 죄가 얼마나 큰 것인 줄이나 아느냐?"
하지만 천양은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표정으로 완고히 대답했다.
"당연히 압니다! 영웅성 내 인물일 경우는 일 년 구금(拘禁)! 외부인 경우는 태형(笞刑) 장(杖) 삼십 대더군요!"
한마디로 웃음조차 나올 수 없는 기막힐 노릇,
"아, 이 놈이 그러고 보니 아예 작정을 하고 왔군! 대체 네가 누굴 죽이려고…."
이에 잠안은 그만 더욱 울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을 금치 못했는데….
한데 바로 이때였다.
"맹주님 납시었습니다!"
밖으로부터 홀연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더니, 덜컥 문이 열리며 금빛 구룡포의 오십 초로의 한 중년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그는 무려 칠 척 반이나 되는 훌쩍 큰 키와 화등처럼 정광이 이글거리는 호랑이 눈, 그리고 메기처럼 커다란 입을 하고 있었는데…. 천양은 그가 다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일신에서 무형 중에 뿜어지는 불구름 같은 엄청난 잠력을 먼저 느껴야만 했다.
실로 엄청난 웅자!
도저히 일반의 사람들이라면 맞대면하기조차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풍도라고나 할까?
'대단하군! 이 인물이 현 무림맹주(武林盟主)이자 지난 일대 맹주 신도 북궁진천의 후손인 도위평천(刀威平天) 북궁기(北宮起)?'
천양은 이에 더 볼 것도 없이 한눈에 그가 현 무림맹주이자 곧 이 영웅성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했다. 도위평천 북궁기!
본시 그는 백 년 전, 천하군웅들을 이끌고 존마의 난을 진압한 제일대 영웅맹주인 신도(神刀) 북궁진천의 손자이자 단명한 제이대 영웅맹주 북궁서(北宮西)의 아들로서, 무려 삼대에 거쳐 계속 무림맹주로 군림해 올 만치 엄청난 무력과 위엄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인 만큼 누군들 그의 위모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예상을 증명이나 하듯 잠안이 즉시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신(臣)… 신 잠안이 맹주님을 알현하나이다!"
그러자 무림맹주 북궁기는 여전히 화등 같은 정광이 이글거리는 호랑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껄껄 호방한 웃음을 흘려냈다.
"헛헛…, 잠 총관! 뭘 그리 당황하고 있소?"
일부러 하지 않아도 무형 중에 절로 진력이 섞여져 나오는, 듣는 이의 가슴이 진동할 만큼 위엄 서린 음성.
잠안은 더욱 당황해 급급히 그와 천양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구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아, 저… 그게 다름이 아니오라…."
그러나 이미 흘러나오던 그의 외침을 듣고 모든 상황을 짐작한 듯 북궁기는 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화등 같은 시선을 천양에게로 돌렸다.
"네가 나를 보자 한 광천양이라는 청년이더냐?"
하나 이러한 위엄에도 천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보이며 특유의 큰 움직임으로 먼저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맹주님의 웅자를 뵙습니다."
변함없이 완강한 모습.
북궁기는 천양의 모습을 하나하나 천천히 뜯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 총관의 호통 소리로 내막은 모두 들었다. 본맹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천양은 다시 포권했다.
"그렇습니다. 해서 먼저 맹주님을 뵙고 싶었던 것입니다."
북궁기는 턱을 주억거렸다.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출신 문파는 어디더냐?"
천양은 또 포권을 취했다.
"아직 특별히 사문을 섬긴 적은 없고, 변변치 않으나 가학(家學)을 좀 계승했을 정돕니다."
"가학이라…."
북궁기는 한 번 더 유심히 천양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하다면 집안은? 어느 가문(家門)이던가?"
천양은 대답마다 포권을 취하며 꿋꿋하게 대답했다.
"숭양(嵩梁) 광가(廣家)입니다."
"숭양 광? 생소한 가문인데…."
이에 북궁기는 혼잣말을 하듯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계속 누를 듯한 어조로 천양에게 일렀다.
"잘 알겠다. 아무튼 젊은 혈기에 네가 허언까지 하면서 본좌를 보고자 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방치하면 이런 사례가 장차에도 비일비재해질 것! 가상하다고만 할 수는 없구나."
북궁기는 계속 화등 같은 안광이 번지는 눈으로 잠안을 향했다.
"잠 총관은 규정대로 집행하게. 이런 일이 거듭되면 자칫 기강이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까!"
이에 잠안은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였고, 더불어 북궁기는 더 이상 말할 게 없다는 듯 예의 불구름같이 퍼지는 잠력을 동반한 채 훌쩍 객실 밖으로 나갔다.
'혈기는 이해를 한다만 기강을 바로해야겠다, 라는 것인가?'
천양은 그러한 북궁기의 말을 곱씹으며 이해를 구해 봤다.
하지만 그다지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놈! 이젠 됐다! 네가 감히 이 늙은이를 놀렸겠다?"
왈칵, 잠안이 사정없이 천양의 귓불을 움켜잡았다.
"너, 오늘 참 잘 걸렸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날씨 탓에 불쾌지수가 높은 판국이거늘, 이리 오너라! 너만큼은 특별히 이 늙은이 손수 힘껏 곤장을 쳐주겠다!"
손수!
이쯤 되면 천양으로서는 잘못 걸린 것이 분명한 것인데….
그리고 과연 일여 각 후, 잠안은 천양을 집형부의 태형틀에 묶어 놓고 직접 장(杖)을 거머쥔 채 여우같이 웃었다.
"워헛헛…,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감히 늙은이에게 망신을 사게 하다니!"
뒤따라 잠안은 곧 말마따나 곤장을 어깨 높이 번쩍 쳐들어 있는 힘껏 부우웅! 무지하게 천양의 볼기를 내리치기 시작했는데….
철썩!
"와이고!"
그 즉시 형당에서는 멱을 따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약 반 시진 후.
이윽고 집형을 마친 잠안은 다시 영웅성 내, 최중심부에 위치한 북궁기의 집무실을 찾아가 조심스레 사죄를 하고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맹주. 소신 그만 젊은 아이의 잔꾀에 속아 자세한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주군의 심기를 번거롭게 해 드렸사온즉!"
이 무렵 북궁기는 각종 무림의 사안들이 기재된 서류를 뒤적이다가 그를 맞았는데, 변함없이 무림맹주다운 중압감이 감도는 호랑이 눈으로 잠안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괜찮소.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그래, 그 아이는? 좀 후회하는 기색이 있었소?"
잠안은 당황스레 웃었다.
"아, 예. 후회하고 말고요! 소신이 직접 버릇을 가르쳤기로 엉덩이가 부르터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순 북궁기의 커다란 입가에 한 줄기 묘한 웃음이 번졌다.
"기어서 나갔다고?"
한데 묘한 것은 바로 보고를 하러 온 잠안의 손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두 손이 온통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지 않는가?
이에 문득 북궁기의 화등 같은 눈이 잠안의 손에 가서 머물었다.
"한데 갑자기 잠 총관의 손은 왜 또 그 모양이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순간 잠안의 얼굴에 더욱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 이건… 별것 아니올시다. 소신, 실수로 형당의 화로를 잘못 건드려서 그만…."
"화로?"
잠안은 계속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 하…, 하옵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옵니다. 곧 아물 것 같사오라…."
북궁기는 다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지 않고서… 알겠으니 그만 가 보도록 하시오."
"그럼 속하는 이만…."
이에 잠안은 곧 깊숙이 포권을 취한 후 북궁기의 집무실에서 물러나와 회랑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심정은 그야말로 울화가 치밀어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흥! 화로에 데었다고? 차라리 그랬다면 속이나 편하지! 그 괴물 같은 놈!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기가 싫다! 대체 엉덩이가 뭘로 만들어진 놈인지 오히려 장을 친 내 손이 다 터져 버렸으니….'
기막힐 심색(心色)!
하다면 화로에 손을 데었다는 것은 멀쩡한 허언이었다는 것?
하지만 이 순간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보다 오히려 그렇게 잠안을 내보낸 후 묵묵히 집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긴 북궁기의 심색이었는데….
'흐음, 광천양이라고 했었던가?'
그는 여전히 화등 같은 안광이 번들거리는 눈에 전신에서 불구름 같은 잠력을 뻗어내며 생각했다.
'분명히 천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비범한 녀석이었다! 보아하니 무림에 처음 나온 녀석 같은데, 그만한 놈이라면 수하로 맞아도 천금이 아깝지 않을 터이지! 여하한 내 사람으로 할 것이다!'
진정코 기이한 심색 아닌가!
태형을 쳐서 내쫓은 후에 다시 그를 수하로 두고 싶어하는 북궁기의 마음은 실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이러한 심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엉덩이가 부르터 엉금엉금 기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했었던가.
잠안의 말과는 전혀 다르게 이 즈음 천양은 무슨 일이 있기나 했느냐는 듯 특유의 커다란 몸짓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항주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그저 영웅맹의 얼굴을 보고자 했음일 뿐이다! 도처에 양패와 군마들이 난립하는 이때, 과연 그들이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고집스런 입술이 더욱 굳게 다물어지고 있었다.
'하나 느껴지는 것은 그저 오로지 해이해져 있음! 그리고 지닌 자의 호사스러움뿐. 그쯤 되면 양패의 득세도 공연한 일은 아니지.'
실망을 느낀 것이었을까?
'곧 배부른 늙은 호랑이가 젊고 굶주린 늑대떼의 밥이 될 것은 당연지사다!'
그는 계속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이윽고 소항 방면으로 멀찍이 모습을 감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