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0
1월14일[연중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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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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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1u-cx0Pr3o (김지수 루치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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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죄인’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죄인은 의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 거룩한 유다 전통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은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일반 사람들과의 접촉도 불가능했을뿐더러,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노예와 동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랍비들은 죄인들을 ‘회개 불가능한 존재’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이런 죄인이란 빨간 딱지를 가슴에 달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는’(마르코 복음 2장 14절) 이란 표현을 참고했을 때, 보통 세리가 아니라 대단한 세리, 카파르나움에서 힘 꽤나 쓰던 세관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던 카파르나움에서 통행세 징수를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꽤나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레위,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던 레위였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도 없었고, 회개의 가능성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제거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분께서는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스스로를 세상과 하느님의 민폐로 여겼는데, 그분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뿐 아니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켜주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시 한번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그분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 세리들, 죄인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어째서 저 큰 죄인들, 부당한 죄인들을 제자로 부르시냐고 따지는 이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코 복음 2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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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씀의 칼은 영과 영혼을 구분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 속에 묻혀 지내기를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평가도 받지 못하면서 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있으려고 해도 조용히 있지 못합니다. 마음 안에 꿈틀대는 뜨거움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런 이들이 이끌어갑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물소(버팔로)는 인디언들의 전부였습니다. 식량이자 도구였으며 신발이었고 옷이었고 집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디언들의 생명과도 같은 버팔로들이 쓰러져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재미로 혹은 인디언들의 주식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 버팔로들을 무작정 죽인 것입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2년 동안 370만 마리의 물소가 죽었는데 그중 355만 마리가 백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한 백인 사냥꾼 윌리엄 코디(William Cody)는 인디언들의 주식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며 자그마치 4,280마리의 버팔로를 혼자 죽였습니다.
현재 미국 네브라스카 인근에는 버팔로 빌을 기념하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반항하면 백인들은 무력으로 인디언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가장 악랄했던 미국의 제7기병대가 운디드니(Wounded Knee) 강 부근의 계곡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우족 2백여 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래 어떤 인디언도 백인들의 총과 대포 앞에 반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서 만성적인 실업, 알코올중독, 범죄 등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때 미국의 영웅이었던 존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제7기병대를 대파했던 인디언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성난 말)라 불렸던 ‘타슈가 위트코’였습니다.
땅을 팔라는 백인들의 강요에 “자기가 걸어 다니는 땅을 팔아먹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며 그 무시무시한 제7기병대에 맞서 승리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먹을 것이 사라져버린 땅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백인에게 항복하고 처형당하여
운디드니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얼굴이 미국 땅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러시모어산에 미국의 영웅들을 조각했던 크자크 지올코브스키는 크레이지 호스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 러시모어산과 불과 27km떨어진 돌산에 거의 50년 동안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작업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크자크는 말합니다.
“나는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하는 돌 속의 이야기꾼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참조: EBS 지식채널 19, Crazy Horse]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돼 있다며 세상에 순응하며 살라고 사람들은 충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 안에 어떤 뜨거운 불이 있어 그냥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불입니다. 성령을 받고 사도들은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조용히 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하고 싶어서 하는 선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미지근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는 내 안의 가장 깊숙한 ‘영’의 자리입니다. 이 영이 평소에는 영혼과 큰 구별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이 무엇이고 영혼이 무엇인지 구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께서 그 영 안에 자리를 잡으면 그 영 때문에 영혼이 골치가 아파집니다.
자신은 편하고 싶은데 더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밖으로 솟아나오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입니다. 영은 뛰쳐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데 영혼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대치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뚜렷이 구분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말씀을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 덕분으로 자신의 영혼이 지금까지 영의 작용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혼은 마치 지구 핵의 그 뜨거운 기운이 지구의 맨틀에 막혀 있어서 지각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영이고 영은 영혼을 설득하고 영혼은 육체를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피려고 하는데 그 반대되는 뜻을 지닌 영혼과 육체의 성향이 뚜렷이 구분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친구를 다른 친구들이 사창가로 끌고 갔습니다. 자신들의 친구라 여겼던 그 사람은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몸부림을 치다가 옷도 찢어지고 상처도 났습니다.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면 반드시 세상과 구별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별이 쉽지 않습니까? 말씀의 칼은 성령인데 성령은 모든 이를 명확히 구분되게 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은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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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매일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합니다. 최근에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약속장소로 가는데 제가 자꾸만 다른 길로 가는 거였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전혀 생소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이라도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마치 꽉 막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에 대한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꾼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나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2023년 저의 새로운 목표는 ‘성지순례’입니다. 1월에는 과달루페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와 터키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는 한국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2년 동안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가 많이 예정되어 있어서 걱정도 되었나 봅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웠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버릴 것은 다 버렸고, 벽지도 새로 붙였습니다. 넓고 깨끗해진 방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마음이 편했고, 가족이 모이니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말끔히 해결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꿈이니 모든 문제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회계사와 변호사님께서 회사의 문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퀸즈의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신부님들은 언제나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었고,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북부 ME 대표 신부를 맡으면서 엠이 부부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녹화해주기도 했고, 편집도 해 주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차량 봉사도 해 주었습니다. 엠이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따뜻했고, 먼 타향에서 사는 저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3년 째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신부라서 어색했는데 지금은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23년 새해에는 저 역시 누군가의 어려움에 함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꿈을 꾸게 됩니다. 어떤 꿈은 걱정과 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꿈은 선택과 결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꿈은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잡아가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약하게 숨어 지내던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평범하게 가축을 키우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으뜸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는 지금가지는 세상의 재물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재물을 모으면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레위는 이제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를 통해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던 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면 우리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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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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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생활이나 음식이나 모든 일에서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였던 이들입니다. 유다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여러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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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회적 하층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분임을 알게 됩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착취 앞잡이로 조세저항의 표적이 되었고 인정과세의 원성을 샀습니다. 카이사르 얼굴이 새겨진 화폐로 우상을 섬겼고 협박했고 재물을 탐냈고, 십계명을 줄줄이 어겼으므로 유다 사회에서 단죄되고 배척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세리 무리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있으니 빈축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입니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그들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죄값을 보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윤락여성이나 ‘조폭’들은 떳떳치 못한 생활임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법적 처벌에도 손가락질에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의로운 척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들은 뇌물을 챙기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처하고 대통령도 해먹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예수님 시대에 우리가 유다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세리가 되어서도 창녀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되 타인의 생명과 행복을 존중하는 직업이라야 그리스도교 윤리에 합당합니다.
정신을 마취시키는 술·마약, 무기제조 판매업, 고리대금업, 부동산 투기, 소비조장, 유흥업소…. 그리스도인은 공동의 행복을 해치는 이런 일에 종사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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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마르 2,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원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2,14),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2,16)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소명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음”(2,17)을 분명히 선포하신다.
당시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였는데 관리를 두어 직접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계약을 체결하여 일정 기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다. 그렇게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람은 사람을 고용하여 보통세와 관세(지방세)를 거둬들였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경우에는 통행세도 거둬들였을 것이다.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세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매겨 부당이득을 취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여겨졌다.(마태 11,19)
그들은 영적 감각이 무딜 대로 무뎌 있었다. 따라서 그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죄를 선(善) 안으로 받아들이시어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한 폭력의 함정에 빠져 헤매는가! 선과 악을 가르고, 자연과 초자연을 가르며, 성과 속을 쪼개고, 좋고 나쁨을 가르면서 얼마나 많은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가!
이런 면들은 한 인격체인 ‘나’의 두 얼굴이며 좋지 않고 싫은 부분을 잘라내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소통을 통해 영성적 통합, 곧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본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을 가르면서 ‘영혼의 아픔’인 죄를 늘 ‘선(善)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죄란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소유이며, 스스로를 사랑이신 하느님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덩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리를 제자로 삼으심으로써 죄를 선으로 바꾸는 복음화를 실행하신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선과 본성을 받아들여 거듭 나도록 초대해주신 것이다.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서로의 죄스런 모습에 분개하지 말자.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못마땅한 말과 행동, 죄와 불의 앞에서 단죄의 울타리를 치지 말고 오히려 울타리를 치우고 헤아리는 마음과 사랑으로 포용하도록 하자.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버리고 ‘사랑의 기다림’ 속에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죄와 소통해보았으면 한다.
어찌 폭력과 분열을 부르는 선과 악의 가름만이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재물의 소유 정도나 사회적 지위, 학연, 지연 등에 따라 얼마나 견고한 ‘끼리끼리의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는가?
교회 신앙공동체 안에서조차도 이런 인간의 차별의식과 이분법적 사고가 만든 분리장벽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를 거스르고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암덩어리와도 같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적인 모든 조건과 처지를 뛰어넘어 오직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소중한 형제자매임을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행동방식으로 삼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제발 남보다는 낫다는 하찮은 우월감이나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버리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근본 소명은 홀로 의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죄인마저도 품으며 함께 선으로 나아가는데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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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동선을 따라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곳에 편히 안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정말 부지런히 그리고 자리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찾아가는 분이시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 오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는데 왜 뜬금없이 호수로 나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같으면 머리를 식힐 겸 바람을 쐬러 나가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이유로 호숫가를 산책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르침의 장소, 복음 선포의 장소로 호숫가를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호숫가가 복음 선포의 장소로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왜 호숫가를 선포의 장소로 택했을까 묻게 됩니다.
이에 대해 호수는 주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무대이기에 그런 연유로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대상을 가리지 않으셨고, 그래서 장소도 가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역에 가면 개신교에서 나와 예배를 보는데 노숙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교회에서 나와 서울역으로 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셨던 복음 선포 방식을 오늘날은 개신교 신자들이 하고 있다고 반성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지금 교황 프란치스코도 자주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시죠.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세관의 레위를 지나쳐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시고 레위는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주님의 부르심이나 레위의 따름이 아주 즉흥적입니다.
그런 것인가요? 제 생각에 결코 즉흥적인 것일 리가 없고,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면 묘사를 그렇게 한 것일 겁니다.
첫 제자들의 부르심 때도 그렇고 레위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인데 마르코복음은 주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응답을 묘사할 때 거두절미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의 절대성과 제자들의 응답의 즉각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겁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부르심에 즉각 응답치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들려주는 말일 겁니다.
요즘 갈수록 교회 내 직책 선출이나 수도회 인사이동 시 갖가지 이유로 수락을 거부하거나 수락하더라도 즉각 수락치 않습니다. 선출이나 인사명령을 주님의 부르심으로 생각지 않거나 아무리 주님의 부르심이라도 싫은 것은 수락할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다음은 주님께서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신 것인데 여기서 죄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나도 죄인인데’라는 생각과 더불어 모두 죄인인데 누군 죄인이고 누군 죄인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할 때 주님께서 죄 없는 사람부터 치라고 하니 모두 떠나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죄인으로 차별하며 자신이 죄인이 아닌 듯 착각하는 죄인과 자신도 죄인임을 아는 죄인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성인이 아닌 이상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사람을 <더 죄인>으로 몰면서 자기는 <덜 죄인>이 되려고 합니다. 오직 주님만 죄인을 가리지 않고 식사하실 뿐 아니라 외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분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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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먹는 까닭>
마르코 2,13-17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함께 먹는 까닭>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이들이
홀로 참으로
의로우신
그분께
거들먹거리며
따지듯이
물었답니다
당신은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이들에게
홀로 참으로
의로우신
그분께서
부드럽지만
따끔하게
대답하셨답니다
그대들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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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신임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추기경이라는 직위는 승진이나 명예의 상징이 아니라 넓은 시야와 광활한 가슴을 요구하는 봉사의 자리”라며 “멀리 보고 보편적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은 겸손의 길을 걸은 예수의 길을 따라야만 갖출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추기경이라는 자리를 기쁘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달라”며 “금욕과 청빈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 축하연을 열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저 대신 바티칸의 작은 아파트에서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지내고 방탄 리무진 대신 포드 승용차를 타는 교황은 자선단체를 돕기 위해 선물로 받았던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경매에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 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고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결국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용서로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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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면, 종종 가이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 찍을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 제 설명 좀 들어주세요.”
비싼 돈 내고 해외 성지순례 왔는데, 사진만 찍어서 가면 얼마나 아깝냐는 말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설명을 잘 들으면 분명히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억의 한계 때문에 3일만 지나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해외 성지순례 중에 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기억하지 못할 테니, 열심히 사진 찍으세요. 남는 건 사진뿐입니다.”
설명도 중요하지만, 사진도 중요합니다. 특히 자신이 찍은 사진에는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기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추억이 없으면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지나간 일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것이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으로 추억을 떠올리고, 지금을 더 잘 살게 해 줍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역시 이 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과거에 그러했음을 떠올리면서 지금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무시하고 경멸했던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마르 2,1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셔서 그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과 함께하며 먹고 마십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 장면을 여러분의 사진기로 찍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에 기울어져서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맞아.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지.”라면서 힘을 다시 내지 않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새로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처럼 살게끔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 마음의 사진기로 분명하게 찍어 놔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바로 잡아주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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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귀히 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유심히 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점이 오늘 주님의 행보에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숫가로 나가셨는데 산책하러 가신 것은 아니겠지요? 군중이 몰려온 것을 보면 회당이 바리사이들의 주 무대인 것과 달리 호숫가는 주님이 즐겨 가르침을 주시던 장소인가 봅니다.
회당이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공식적인 정통 모임 장소라면 호숫가는 우리의 서울역 광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곳인데,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도 가르치셨지만 아무 때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가 가르치시던 비공식적이고 비정통의 모임 장소였을 겁니다.
아무튼 호숫가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제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서 그러니까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뽑지 않으시고 찾아오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별 관심이 없던 레위를 뽑으신 걸까요?
그리고 레위는 당시 죄인으로 지탄을 받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인데 주님께서는 왜 이 죄인을 당신 제자로 뽑으신 걸까요?
이것을 저희 수도원 성소계발과 관련시키면 대단히 파격적인 거지요. 저희는 아무나 성소자로 받지 않기 위해 믿을만한 분의 추천을 받고 여러모로 검증한 뒤 여러 성소 위원들의 합의를 거쳐 받아들이는데 이것에 비하면 주님께서는 매우 즉흥적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시고 아무나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아무나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과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아무나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과 우리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나인데 주님께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레위가 우리 눈에는 아무나이고 죄인인데 주님 눈에는 귀한 집 자식이요 또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의 제자감입니다.
사실 아무나를 아무나로 보지 않고 귀히 보시는 주님의 눈, 곧 사랑의 눈 때문에 저도 주님의 귀한 제자가 될 수 있었고 또 된 거지요.
어쩌면 주님의 기준은 당신의 부르심을 귀히 여기고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 하나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이시고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시는 주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하고 대단한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니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다 찾아가시고 다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오늘이고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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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자의 길>
- 갈망, 따름, 배움 -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이 시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문득 떠오른 성규 머리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만일 네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네 혀는 악을 삼가고 네 입술은 간교한 말을 하지 말라. 사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 가라”(성규,머리17)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이어 토마스 머튼의 사제서품 상본시 성구가 생각납니다. 구약에서 승천한 인물 셋은 에녹, 모세, 엘리야가 있는데, 에녹의 삶에 대한 영어 묘사로 제가 참 좋아하는 성구(창세5,2)입니다.
“Then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주목되는바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걷다’인데 의역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다’입니다. 새삼 ‘걷는 것’은 ‘사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2014년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걷는 것이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1시간 4km 정도, 적게는 하루 20km, 많이는 32km 거리를 33일 정도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걸어야 삽니다. 걷지 못하면 죽습니다. 저는 하루 6시간 정도의 택시 운전이 끝나면 오후 매일 3시간 정도 걷습니다. 장단지와 종아리의 근육도 탄탄합니다.”
어제 잠시 병원에 택시로 가다가 들은 기사의 힘찬 설명입니다. 올때는 40분 정도 걸어서 귀원했습니다. 그러니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걷는다 생각하고 평생 도반인 주님과 함께 매일 일정시간 걸으시기 바랍니다. 걷는 것이 사는 것이자 기도하는 것이며 걷는 운동보다 더 좋은 운동도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평생 도반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걸어야 삽니다. 저도 평생 매일 강론 쓰기가 끝나면 4:00-4:30분까지 주님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수도원 경내를 묵주기도하며 걷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었습니다.
오늘은 ‘제자의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는 복음 장면이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잘 보여줍니다. 제자의 길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세요소입니다.
첫째, 갈망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가시다 세관에 앉아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먼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마음 깊이 갈망하며 기다렸던 레위요 누구보다 우리의 속마음을 잘아시는 주님은 레위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승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어디 수도승뿐이겠는지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우선적 자질이 주님을 찾는 갈망이자 열정이자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열정과 더불어 함께 가는 순수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주님을 찾는 갈망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둘째, 따름입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따라나선 레위입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됩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라 나선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 제자들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무의미한 일상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우리 역시 주님께 부름받지 않았다면? 새삼 은총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인지 깨닫습니다.
무엇인가 찾고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의 찾고 따라야 할 우리 주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이런 삶의 궁극의 목표와 방향, 중심과 의미를 잃고, 말그대로 길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중에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의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키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구원의 문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대한 소개도 참 은혜롭고 힘이 되어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며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하느님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대사제 예수님 친히 당신 사제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흡사 은총의 어좌에서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는 미사전례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배움입니다.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할 분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은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주님께 평생 배움뿐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공부해야 삽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께 배워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의 기본적 덕목이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호학好學을 주장한 공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참으로 평생 스승이신 주님께 배워야 할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자 희망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한결같이 온유와 겸손, 섬김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의 학교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다음 복음의 주님 말씀도 우리가 깊이 새겨할 가르침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세상에 병자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께 치유받아야 할 우리들이요 부단한 회개를 통해 용서받아야 할 회개한 죄인들,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는 바로 말씀 공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니 사람의 본질은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 공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이 참으로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이요, 이런 말씀 수행이 늘 주님 앞에서 살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온통 말씀 예찬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십니다’의 화답송 후렴에 이어지는 다음 시편 고백도 참 좋습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 19,8-9)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주님 제자의 길은 평생입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께 대한 갈망을, 배움에 대한 사랑을 북돋아 주시고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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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나는 어떤 부류의 죄인인가?>
오늘 복음(마르 2,13-17)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2,1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을 멀리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못 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우리는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완덕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완덕에 이르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면서 완덕에 이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완덕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세리처럼, 돌아온 탕자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죄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우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죄인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그런 죄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던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다가온 죄인들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다가가셨던 죄인들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으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복된 죄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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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4c7Zp0_X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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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깨어나게 하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가장 뜨거운
만남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받아들임의
가장 강력한
사랑입니다.
찾을 수 없었던
소중함을
찾게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며
찾던 분이
우리때문에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죄인의 꿈과
잘못된 갈망을
바로잡아
주시며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같이 사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인과 의인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죄인과 의인을
가르지 않으시며
죄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시작하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죄인들의 길
구원입니다.
길을 완성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잃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길의
시작은
사랑의
부르심이며
사랑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
사람냄새 나는
사람의 구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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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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