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오회장님께서 보내주신 좋은 말씀들입니다
🎖金메달!!
🇬🇧 영국의 군인, 찰스 조지 고든 장군은 영국人은
물론 당시 적군에게 까지 존경받는 대단한 인물 이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여, 청나라 황제의 치하를 받기도 했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와 수단의 총독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무슬림 사이의 우호 증진에 힘쓰고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하던 고든장군을, 당시 식민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존경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고든 장군을 높이기 위해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지만 장군 본인은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위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도 사양했지만, 결국 금으로 만든 작은 메달 하나만 받았습니다.
1885년 고든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데, 국가로부터 받은 금메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달의 행방을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10년 전 영국에 대흉년이 들었던 해에 장군은 그 메달을 녹여 팔아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발견된 고든 장군의 일기장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던 마지막 물건을 오늘 가장 소중한 국민에게 바쳤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이제는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힘과 권력을 갖게 된 사람이 초심을 잊고 변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관용과 배려 그리고 이해와 용서를 항상 품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나은 힘이 있다면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않습니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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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은 하나도 없다!]
포브스에 아시아 최고의 기부왕으로
선정된 분이 있다.
"평생 거지 같이 벌어서
천사처럼 쓰겠다."고
악착같이 10개의 계열사를 만들어서
평생 모은돈 1조7,000억원을
기부하신 분이다
1958년부터 프라스틱을 주워서
양동이를 만들기 시작하신 분
2002년에는
관정 장학 재단을 만들어서
매년 2,000명이상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신 분 .
그 선생이 관정 이종환 회장님이다.
평생 모은 재산 1조7000억원을
장학 재단에 기부한 관정(冠廷)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이
13일 오전 1시 48분, 100세의 나이로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그는 일찍이 장학재단을 만들어 매년
국내외 명문대 재학생 1,000명
안팎으로 150억원 정도를 지급했다.
이렇게 지급한 장학생이
23년간 1만2000여 명,
금액으로 2700억원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장학생만
750여 명이다.
2012년엔 600억원을 기부해
서울대 전자도서관을 지어줬다.
서울대 사상 최다액 기부자이기도 하다.
말년에 ‘한국의 노벨상’을 만들고 싶어했고,
생전에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보는 것이 꿈이었다.
관정 이종환 회장님 아니 선생님
그의 교육재단은 13일 아침
이종환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불과 3주 전까지도
김해·밀양·구미에 있는 공장을 다니던
현역 CEO였다.
재단 측은 이 명예회장을
‘세계 최고령 100세 CEO’로
등재하기 위해 기네스북 본사와
협의하던 중이었다.
1923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마산고를 졸업한 뒤,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1945년 일본 측
학도병으로 끌려가 소련·만주 국경과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선을
넘나 들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해방 후 “두 번째 인생을 산다”며
부국강병에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1958년 플라스틱이 신문물로 인기를 끌던 당시,
플라스틱 사출기로 컵·바가지 등을 만들어 팔면서
큰돈을 벌었다.
이후 포장용 필름과 콘덴서용 필름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해 수출에 기여했다.
1970년대 국내 유일 애자
(전봇대 등에 설치하던 절연용 지지물)
생산업체인 고려애자공업을 키웠다.
이후 삼영중공업 등 16 개의 회사를 거느리는
삼영그룹까지 만들었다.
그는 2000년 설립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에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쏟아 부었다.
목적은 ‘일류 인재 육성’이었다.
1980년대 미국 유학을 보냈던
둘째 아들이 난치병으로 꿈을 피우지 못하자,
‘일류 인재 육성’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우리가 가진 건 사람밖에 없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키워내자”는 말을 자주 했다.
2015년엔 국내 최초 ‘1조원 장학재단’이 됐다.
이 명예회장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던
자투리 재산인 부동산·현금 등
300억여원을 정리해 재단에 넣었다고 한다.
그가 기부한 금액은 그사이
부동산 가치 등이 오르면서
총 1조7000억원이 됐다.
개인이 설립한 재단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다.
그는 평소 “돈을 벌 때는 천사처럼 벌 순 없지만,
쓸 때는 천사처럼 쓰련다”는 말을 했다.
‘공수래(空手來), 만수유(滿手有),
공수거(空手去)’라는 말도 스스로 만들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 채운 뒤에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의미다.
평소 자장면이나 된장찌개를 주로 먹으면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 ‘자장면 할아버지’로도 불렸다.
그의 건강 비결은 절주와 규칙적인 생활이다.
60~70대부터는 모든 식사에
드레싱이 없는 야채를 먼저 먹었고,
술은 하루에 와인 한 잔을 넘기지 않았다.
90대 중반까지 골프를 즐겼던
‘에이지슈터’(age shooter·한 라운드를
자신의 나이 이하 타수로 마치는 사람)였다.
그는 눈을 감기 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정도(正道)를 지켜라.
결국 정도가 이긴다.
재단을 영속되게 잘 운영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또 그는 “용서할 줄 아는 삶을 살라”는
말을 남겼다.
장남 이석준 삼영화학 회장은
“아버지 뜻을 잘 받들겠다”고 말했다고
재단 관계자는 전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었을 웅켜쥐려 하는가.
모두를 남겨두고 가야 하는데.
우리는 모든것이 내것인냥 착각하며 산다.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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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꽃)(꽃)
2023년11월18일
아침편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 정호승의 시《첫눈 오는 날 만나자》중에서 -
* 첫눈!
그냥 눈이 아닙니다.
첫눈은 추억입니다.
낭만입니다.
그리움과 사랑,
보고픔과 고독,
기쁨과 슬픔,
꿈과 희망이 겨울의 벗은 나무 위에, 땅 위에,
내 머리와 어깨 위에, 그리고 내 빈 가슴 속에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눈은 차갑지가
않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토요일인 오늘은 전국에 아침 영하권 추위가 이어지고 곳곳에 비나 눈이 예보됩니다.
따뜻한 주말 계획하시며....오늘도 좋은하루 되시길 ...^^
https://m.blog.naver.com/sby5600/22326730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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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湖와 企業家 정주영’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한국인의 조상이 몽골 4촌들과 갈라졌다는 곳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앙가라 강으로 떨어진다.
호수의 출구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츠크츠 시가 조성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에게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 하는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장교(데카브리스트) 들이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고 와서 건설한 도시다. 그 부인들이 허허벌판의 유형지로 남편을 따라왔던 순애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 였다.
현대에 들어와 유명한 것은 호수 출구를 가로 막아 건설한 4㎞ 길이의 사력(砂礫)댐이다. 스탈린 시대 10년을 걸려 완공한 거대한 댐이다.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은 이 사력댐을 모델로 삼아 소양강 댐을 건설하였다.
본래 한일 국교정상화 후 일본의 경협자금으로 세운 큰 사업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서울 지하철 1호선이다. 여기에 소양강 댐을 추가할 수 있다. 소양강 댐 완성 전에는 장마철마다 한강이 범람하여 서울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러한 만성적인 한강 홍수에 마침표를 찍는 토목공사였다. 1973년에 완공한 이 댐은 길이530m, 높이 123m, 저수량이 29억 톤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다목적댐이다. 본래 소양강 댐은 일본 경협자금을 쓰기 때문에 일본의 도요엔지니어링에서 맡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대건설의 전갑원 과장이 댐 건설 사례들을 조사하다가 바이칼호의 사력댐을 공부하게 되었다. 사력댐이란 흙으로 짓는 것이다. 한가운데 찰흙을 메워 넣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그 양옆으로 돌, 모래와 흙을 쌓아서 댐을 완성하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1Km당 1억 원의 저가로 완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정주영 회장은 전갑원 과장의 의견을 듣고, 바로 박 대통령에게 사력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일본 도요엔지니어링 측과 현대건설 양자가 논쟁해보라고 자리를 마련하였다.
일본의 도요 엔지니어링 회장은 엔지니어 중역들을 대동하여 참석하였고, 정주영 회장은 전 과장만 데리고 참석하였다. 먼저 일본 측 회장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정 회장의 학력이 어떤지를 물었다. 정 회장은 고향 통천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고 답하였다.
그랬더니 일본 회장은 여기 참석한 중역들은 모두 도쿄 제국대학 공학박사들로 수풍댐을 설계한 전문가도 있다고 말하고, 세계적인 추세는 수풍댐과
같이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튼튼하게 짓는 것이라며 소양감 댐도 그래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을 수행한 전 과장이 바이칼호 사력댐의 예를 들어 재원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국내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력댐이 옳다고 주장 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시멘트와 철근도 충분하지 않은 시기였다.
덧붙여서 소양강 댐은 휴전선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포격으로 콘크리트 댐이 붕괴하면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한강수계의 하류에 있는
서울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서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사력댐의 경우 포탄을 맞아도 댐 자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포병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무릎을 치면서 사력댐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경위로 사력댐 건설을 위한 입찰 경쟁이 1967년 소양강 현장에서 시행되었다. 이명박 사장 일행이 입찰금액을 써내는데 매달려 있는 동안, 정주영 회장은 본사 비서실에 전화하였다.
“지금 당장 전 직원을 풀어서 서울시의 상습 침수지역에 버려진 땅들을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즉각 압구정동, 잠실, 풍납동 지역의 저지대 땅들을 사들였다. 지금도 그 지역에 아산병원을 비롯하여 현대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연유다.
88올림픽을 대비하여 한강 변의 잡초 무성한 둔치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강변 고속도로를 만든 것도 정주영의 아이디어 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한국은 경제난국을 벗어나야 했다.
정주영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중동진출에 앞장섰다. 1976년 2월 에는 사우디 주베일 신항만 건설공사를 9억3천만 달러로 낙찰하였다.
20세기 최대의 건설공사로 불렸던 이 사업은 그해 우리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정주영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안 된다고 하는 직원들에게 “이봐 해봤어?”야 말로 도전정신의 압축표현이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비상하였다. 현대 조선소 건설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경제수석의 분석 보고로 중공업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조선산업 추진 필요성을 확인한 다음, 정주영 회장을
불러서 조선업을 시작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수십만 톤의 대규모 유조선을 짓는 것은 마치 맨땅에 박치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무엇이라도 도전하는 천하의 정주영도 경험이나 자금조달이 막연하여 난색을 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일을 맡지 않으면 감옥
갈 각오하라고 윽박질렀다. 정 회장이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혼비백산하여 청와대를 나와서 다음날 바로 런던으로 출국하였다.
’A&P 애플도어’라는 금융회사의 롱바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벌써 4백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라고 설득하여 자금 보증을 받아냈다.
그리스 선박 왕 이바노스와 극적으로 판매계약을 체결하여 드라이독(dry dock) 건설과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의 건조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 팔아먹는 것과도 흡사한 사업이었다.
드디어 드라이독을 완성해서 물을 채우는 동시에 최초의 유조선이 바다로 진수하였다. 한국에서 만든 유조선이 바다에 뜨겠느냐고 견제 하던 일본
쪽의 소리도 쏙 들어갔다. 기업인 정주영은 주도면밀하였다.
수만 명의 용접공을 단시간에 육성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심지어 1971년 시작한 반포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도 많은 용접공을 길러냈다. 이 아파트 난방시스템은 옛날의 스팀 식이 아니고 온수 식이었다. 방열 라디에이터에 온수를 순환시켜서 난방하는 것이다.
틈이 있으면 물이 새기 때문에 완벽한 용접이 중요했다. 용접공 교육장이 되었다. 현대뿐만 아니라, 대우, 삼성 중공업의 용접공은 이제 기술과 경험이 쌓여 특A급의 완벽한 기능인도 수천 명을 넘는다. 한국인의 손재주가 만개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이 1995년 건설한 방사광 가속기의 700미터 길이의 두꺼운 강철관의 용접도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급격한 기압변화에도 강철관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난도 용접 기술이 필요했다. 먼저 시작했던 인도보다도 한국이 앞서 완공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전 세계 6대 강국으로 진입하는데 초기 경제인들의 이러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물론 전 국민의 피와 땀이 합쳐진 종합적 결과이지만,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의 기업가정신이야 말로 정말로 값진 것이다.
그들의 기업가정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능가하지도 못했고, 동남아국가들 조차도 앞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동남아의 화상(華商)들이 회임기간이 긴 장치산업에 투자를 기피하고 주로 서비스 산업에서 부를 축적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의 기업가들이 목숨을 걸듯이 도전 하여 성공함으로써 엄청나게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 덕분에 그 혜택을 5천만 한국인이 지금 나누고 있다.
한국인의 소비수준을 받쳐주는 주요 원천이 기업들이 만들어낸 높은 부가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정치지도자의 안목과 지도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정신,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라는 주인의식이 국민을 통합하여 이끌었다. 그러한 지도력 없이는 국민이 깨어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전후 독립한 140여 개 다른 신생국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념 갈등으로 사회분열이 격화되고 젊은이의 도전정신이 위축되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이 시기에 비전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 이민우 著, “정주영 이 누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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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마당」
幸福 !
어떤 것이 생애의 행복일까요?
100% 만족되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요?
억만장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향년 69세)는
무대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반해서
마리아 칼라스와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하다가 칼라스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8년이 되기 전에 주부로서 너무 모자라고 권태가 나서
이혼하고 재클린에게 다시 장가를갔습니다.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과 함께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재클린과 결혼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오나시스는
"내가 실수를 했다." 하며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파혼할 길이 없을까'하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재클린이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니 이혼도 못합니다.
재클린이 한 달 24억 원이나 되는 돈을 펑펑 쓰니,
오나시스는 화가 나서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의 아들마저 비행기 사고로 죽습니다.
충격으로 그도 얼마 못 살고 죽었습니다.
끝까지 이혼에 합의 않던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엄청난 유산을 거의 차지했지요.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쓰레기로 던지고 간다." 하며ᆢ
오나시스는 가슴을 치고 후회하다 죽습니다.
천사처럼 노래를 잘부르는 칼라스와 살아도,
최고의 여자 재클린과 살아도, 후회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나시스의 체험을 반면 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세기적인 미녀 양귀비나, 클레오 파트라와 살면 행복할까요?
평생 '갑(甲)'으로 살아온 사람들 일수록 퇴직하면,
더 외롭게 지내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항상 대우만 받고, 남들이 만나자고 하는 약속도 골라서 만났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뇌기능중 70%는 놀고,
한평생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들인 재벌이라 해도 죽은 뒤ᆢ70%의 재산은 남이 갖게 된답니다.
살아있을 때 인생을 멎지게 사십시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건강한 모습으로ᆢ
뜨거운 가슴으로ᆢ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십시요.
#오늘의 명언
작은 행복이 모여서 큰 행복이 됩니다.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알면서 살아 가는게 제일 중요합니다.
인생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까지가 인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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