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살인명령(殺人命令)
그리고 다시 이 개월.
천양이 벽파문에 머문 지 어느새 이 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무림은 전례 없이 고요한 평온함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천양은 이미 읽고 있었다.
이 고요함이 결코 정상적인 평온이 아니요, 머지않아 무림에 곧 예측을 불허할 만큼 엄청난 혈사(血事)가 빚어지리라는 것을!
그 한 단면으로 벽파문의 움직임만 봐도 이들은 한시가 멀다 하고 거의 실전에 가까운 문인 간의 교련을 쌓아올리고 있었는데, 여기에서조차 피 냄새가 물씬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 눈에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벽파문의 내막을 전혀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귀우(鬼雨)! 그러했다.
자량은 무려 이 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일거일동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음영(陰影)처럼 어디를 가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천양에게 갖은 정성을 다해 시시로 그를 초청해 술자리를 같이했고 하나에서 열, 불필요한 것까지 세세히 다 신경을 써 주고 있었으니….
천양으로서는 이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고충은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이 개월 내 함께 기거하고 있는 모용한비로 인한 것이었다.
분명 감시의 일환으로 은향소축에 보내져 온 시녀 아닌 시녀인 그녀의 눈빛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뭇 애틋하게 자신에게 연정을 드리우는 눈치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뿐 아니라 옆 별원에 거처하고 있는 사문향조차 시시때때로 찾아와 더러는 냉소 치기도, 더러는 상냥하게도 하며 내내 종잡지 못할 태도를 보이곤 하였는데….
그러나 천양은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싫거나 좋은 눈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특유의 완강한 자세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 뿐.
그러한 사이에 이 개월이 흐르고 어느새 겨울. 은향소축에는 첫눈이 내렸다.
* * *
삼경(三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먹물처럼 짙게 어둠 속에 휩싸인 밤이었다.
귓전을 스치는 서북풍(西北風)이 칼로 저미는 듯 차가웠다.
입동(立冬).
겨울이 마침내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는지….
은향소축(銀香小築).
천양은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읽고 있는 것은 제자백가(諸子百家).
지난 이 개월 내내 그의 무료함을 달래 준 것은 서고(書庫)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들뿐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휘이이잉-!
천양은 칼날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문득 책을 덮었다.
'벌써 겨울이 깊었는가?'
이어 그는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모용한비의 침실이었다.
실내의 공기는 몹시 건조했고, 모용한비는 이미 잠든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버릇이 나쁜 듯 덮고 있던 요가 반이나 미끄러져 있었다.
반투명한 나삼 속으로 뽀얀 우윳빛 동그스름한 어깨와 수밀도처럼 부푼, 한 손에 잡힐 듯 부푼 가슴이 은은히 엿보였다.
"음."
하나 천양은 아무 생각 없이 흘러내린 요를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 준 후 침실을 나왔다.
분명 찬바람을 우려해 그저 한 번 살펴보러 들어간 행동일 뿐이었다.
그러나 막 그가 문을 닫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무정한 분!'
전혀 상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던지 모용한비의 양 볼이 빨갛게 붉어지며, 홀연 눈꼬리에 한 방울의 이슬이 맺힌 것이다.
눈물에는 분명 어떤 원망스러움이 녹아 있었다.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것을 알 리 없는 천양은 다시 바깥으로 나와 심히 바람이 부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부군사!"
홀연 별원 밖으로부터 급촉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오는가 싶더니 별로 오래지 않아 수하 하나가 허겁지겁 별원 안으로 들어왔다.
"부군사를 뵈옵니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던지 칼바람이 부는데도 땀이 비오듯 흐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더냐?"
이에 천양이 의아해 묻자, 그는 급급히 땀을 닦으며 말했다.
"대군사께서 청하셨습니다! 어서 정전(正殿)으로 납시어 달라는 분부셨습니다!"
"알겠다."
이에 천양은 즉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서둘러 별원을 나섰다.
벽파문에 들어온 지 두 달, 지금껏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처음 천양이 예상했듯 부군사란 명색이 좋아 직위일 뿐이지 실제로 천양이 할 일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 여하한 일이 있었다 치더라도 자량은 지금껏 철저히 천양을 배제하고 있는 상태라 해야 더욱 옳았다.
한데 그러했던 그가 마침내 천양을 찾은 것이니….
아니나 다를까.
천양이 얼음장 같은 바람을 뚫고 정전으로 들어서자 과연 자량은 굳은 표정으로 그곳에서 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마치 활(弓)의 시위를 팽팽히 당겨 놓은 듯 터질 듯한 긴박감이었다.
정전 내에는 절독천공을 제외한 나머지 벽파오당주와 삼천왕각주를 위시한 모든 주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고, 자량은 그들의 중앙에서 상처 입은 맹수같이 만면에 처절하리만큼 무시무시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관(棺)이 있었다.
뚜껑이 닫힌 채 나란히 놓여진 세 개의 관!
'이건…?'
이에 서둘러 둘러선 인물들을 비집고 들어간 천양 역시 크게 심상찮음을 느끼며 서둘러 자량에게 포권을 취했다.
"대군사를 뵙습니다. 부르셨는지?"
자량은 비로소 백랍 같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오시오, 부군사. 야심한 시각에… 미안하오."
나직하나마 무시무시한 분노가 어린 음성!
동시에 그는 다시 둘러선 오당주에게 명령했다.
"관을 열어라!"
그러자 굳은 듯 서 있던 오당주 중 패검당주(覇劍堂主) 선우척(鮮于尺)이 경직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해 보인 뒤 차례로 관을 열었다.
'아니?'
순간 천양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짤막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관 속에서 나타난 세 구의 시체!
대관절 이들이 누군가!
벽혈무정검 진충, 공래마령신 탁비, 패천신륜 황보간!
놀랍게도 그들은 천양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인물들로서, 그가 처음 벽파문에 진입하던 날 흑백음양쌍괴와 함께 길을 막아섰던 오대집형사자(五大執刑使者) 중의 세 사람이었다.
더욱이 주검은 사뭇 참혹하여 가슴 복판에 하나같이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시커멓게 핏덩어리와 함께 뒤엉켜져 있었다.
결국 이는 세 사람이 한꺼번에 어느 인물의 한 수법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이럴 수가? 이들의 무예가 노화순청을 넘었는데, 천하에 대체 누가 이런 가공할 절예를 지녔단 말인가?'
천양은 일순 으스스한 한기가 가슴속에서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감히 어떤 자가 이런 짓을…?"
자량의 백랍 같은 안색이 씰룩 경련을 일으켰다.
"설명하자면 다소 길어지오! 사건의 발단은 벌써 사 개월이나 지난 것인데, 넉 달 전 범보천 산하의 무역선 하나가 무산삼협을 지나던 도중 갑자기 실종을 한 사건이 벌어졌었소."
무산삼협!
"하나 그쪽은 워낙 물길이 드세 전부터 번번이 침몰사고가 잦았던 터이라, 우린 또 그런 일이 벌어졌으려니 하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지. 한데 달포 전 마침 물길에 휩쓸려 내려온 시체가 발견되어 보니, 어이없게도 등에는 만붕방의 화전(火箭)이 꽂힌 채였소!"
만붕방의 화전!
순간 천양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그렇소! 뒷조사를 해 보니 그것은 단순 침몰사고가 아니라 만붕방의 수로당주(水路堂主) 섭천마비(攝天魔匕) 여상락(呂尙樂)이란 놈이 급습을 해 배를 침몰시킨 것이었소.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수하들이 무려 육십여 명!"
자량은 백랍 같은 표정으로 눈에서 소름끼치는 살광을 뿜어냈다.
"하나 그들은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해명조차 한마디 없었고, 더욱이 진상이 드러나자 혹여 여상락에게 보복을 감행할까 봐 그를 중앙으로 소환하여 보호까지 시작한 터이니, 이는 명백한 본문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소! 그로 인해 문주께서는 크게 노하셨고, 당장 여상락의 수급을 취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천양은 비로소 진상을 알 것 같았다.
"하면 이들은 여상락을 치기 위해 갔다가…?"
그러나 자량의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보내기는 했으나 흉수(凶手)는 그들이 아니오! 놈은 대담무쌍하게도 사람을 죽인 후 보란 듯이 이렇게 관 속에 넣어 보내 오기까지 했는데…. 이들을 살해한 것은 동일인(同一人)! 그것도 한 수에 끝을 냈소! 본좌가 알기로 만붕방의 수하들 중 이만큼 악랄하고 깔끔한 손속을 지닌 자는 별로 없소. 만붕방주 직하의 사대수라(四大修羅), 팔대흉신(八大兇神)이라 해도 이렇게는 못하오!"
"하면 혹시 대영웅맹에서…?"
자량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도 아니오. 그쪽의 수하들이라면 오히려 만붕방에도 못 미치거니와, 대영웅성에는 우리 쪽 사람이 높이 잠입해 있소. 역시 그들은 아니오."
순간 천양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 대영웅성에 벽파문의 첩자가 잠입해 있다!
무심코 나온 이 말!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높이… 라고 하면 그 자의 신분이 대영웅성의 사정을 거의 알 만큼 높은 자리에 있다는 뜻과도 같다.
이에 천양은 크게 놀랐으나 내색치 않고 다시 물었다.
"하면 군사의 생각으로는 이들을 해친 자가…?"
자량은 백랍 같은 표정으로 역시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필시 본문을 노리는 또 다른 어떤 강적이 생긴 것 같지만! 하나 보다 중요한 것은, 문주께서 여상락의 목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오! 육십여라는 우리 수하들의 목숨을 앗아간 놈! 여하한 이 놈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오!"
천양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첫째, 여기에는 문파의 명예가 걸려 있을 뿐더러 이를 방치했다가는 또한 아래 수하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을 터인즉!"
자량의 눈에 악에 받친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그렇소. 해서 부군사를 청했소! 일렀듯 여상락은 만붕방의 깊숙이에 몸을 감추고 있고, 이들이 살해될 정도의 흉수가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 하면 오로지 부군사만이 이 일을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살인명령(殺人命令)!
급기야 핵심이 대두된 것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군.'
천양은 냉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속하가 여상락을 만나 보기로 하지요."
그러자 자량의 백랍 같았던 안색에 비로소 조금 화기가 돌아왔다.
"고맙소! 더불어 일이 끝나면 강소(江蘇) 소주성(蘇州城)에도 잠시 들러 봐 주시기 바라오. 근자 들어 그곳 천궁산(天穹山) 기슭의 봉황탄(鳳凰灘)에 거성(巨城)이 세워지고 있다는 풍문이 천하를 긴장시키고 있더구려."
순간이었다.
'무엇이?'
천양은 그야말로 둔기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기실 봉황탄에 세워지고 있는 거성이라면 그것은 분명 흑탑, 헌원숭 등이 세우고 있는 자신의 성(城)이 아닌가!
'바보 같은! 대체 무슨 일을 어찌하고 있기에 벌써부터 여기까지 소문이….'
이에 천양은 크게 긴장하여 질문했다.
"거성이라면 어떤 부류의 것입니까?"
자량은 다시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 모르오! 하나 일설로는 청해성의 한 상인(商人)이 무역을 위해 세우는 것이라고 했소. 그러나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공사가 계속되는 주변에는 알 수 없는 괴진(怪陣)이 둘러쳐져 뭇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고 하오! 소문을 듣고 영웅맹과 만붕방에서도 사람을 보냈으나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하니, 일개 상인의 무역거점이라 보기에는 심히 수상쩍은 데가 많은 것 같소."
천양의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그러나 그는 내색치 않고 곧 다시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들러보겠습니다."
자량은 창백한 표정으로 치하했다.
"고맙소.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제육 귀문관의 사 문주와 함께 동행하도록 하시오. 필시 도움이 되리라 믿소."
'사문향과 동행?'
그러나 천양으로서는 그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실로 여상락을 제거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천궁산에까지 다녀오려면 그녀의 존재가 많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천양은 다시 힘있게 말했다.
"혼자 가도록 하지요! 사 문주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오히려 번거로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때였다.
"흥! 설마 부군사께서는 소녀가 짐이 될까 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홀연 정전의 입구로부터 싸늘하기 그지없는 코웃음 소리와 함께 하나의 녹의인영이 어른거리며 나타났다.
사문향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천양으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끔벅 않고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그런 점이 있소!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남녀가 유별하니, 함께 동행하면 필시 주위의 이목을 끌 것이오. 불초야 무림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터이라 괜찮다 치더라도, 사 문주와 함께라면 분명 만붕방도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기가 쉽소."
그러나 사문향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그런 점이라면 심려치 않으셔도 좋을 것이에요. 소녀는 남장(男裝)을 하고 갈 생각이오니…."
남장!
천양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바에야 더 이상 발뺌을 하다가는 의심이나 받기 십상인 것이다.
"같이 움직여 봅시다.”
그러자 사문향은 돌연 냉랭하던 표정을 풀더니 금시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교소를 터뜨렸는데….
"호호호…, 고마워요. 소녀, 여하한 방해는 되지 않을 터이오니."
오뉴월 날씨 같은 변덕!
자량이 힘있게 천양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럼 부탁하겠소, 부군사! 더불어 이 일을 마치고 나면 문주님을 만날 수 있으실 것이오. 문주님께서 그렇게 약조를 하셨으니…."
벽파문주!
'마지막 시험인 셈이군! 이 일을 수행하면 마침내 믿을 수 있다?'
천양은 한 번 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이행될 것이니."
이어 천양은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홱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일이라면 말보다 실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이었기 때문이다.
"부군사의 무운(武運)을 비옵니다!"
그러한 천양의 완강한 뒷모습을 향해 오당주를 비롯한 모두는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부복지례를 취했다.
그리고 약 이각 가량 후.
천양은 이윽고 바람 속을 뚫고 다시 은향소축으로 돌아왔다.
별원에는 어느새 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들어서자 모용한비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은 듯한 모습으로 황급히 그를 맞았다.
"왜 자지 않고 일어나 있는 거요?"
순간 모용한비는 작약꽃 같은 청순한 만면에 한 가득 수심의 빛을 떠올렸다.
"소녀, 한발 앞서 온 사람에게 이미 이야기 들었사옵지요! 소식 듣자니 광 대협께서…."
천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상락을 치기 위해 채비를 마치는 즉시 강호로 나가야 하오. 첫 번째 임무요."
그러자 순간 모용한비의 표정이 먹구름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얼굴이 푹 떨구어졌다.
뿐 아니라 느닷없이 두 눈에 수정 같은 이슬이 맺히지 않는가.
천양은 일순 흠칫했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동시에 모용한비의 볼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진 않사옵지만…, 광 대협께서는… 이제 여기를 떠나시면 돌아오시지 않으시겠지요?"
천양은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소리요? 설마 당신은 내 역량을 죽은 집형사자 등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모용한비는 촉촉이 젖은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소녀는 광 대협의 신 같은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잘 알고 있사옵지만…, 보다는 님의 마음이 더 두려운 것!"
"마음이 두렵다?"
천양은 일순 가슴이 한 번 더 섬칫해졌다.
그것은 마치 모용한비가 자신의 내심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처럼 들려지기까지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다! 기실 나는 지난 이 개월 간 아무런 의심받을 만한 실수도 한 적이 없거니와!'
그러나 여기에서 천양은 미처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바로 여자들의 특이한 직감력과 감수성!
그러했다!
본시 여인들의 직감이라는 것은 모성애와 더불어 하늘로부터 타고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또한 실로 기묘한 것이라서 뭔가 상대가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스스로를 은폐하고 완벽한 행동으로 접근을 해도 어느새 몸을 도사리게 하고 마는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관심을 둔 이성이나,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 한해 더욱 예민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어쩌면 약한 여인에게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섭리가 내린 세 번째 눈(眼)이라고나 할지!
하나 천양은 여기까지는 전혀 생각할 바가 없었고, 여전히 평소대로 힘있게 말을 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하나 소저는 전혀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소.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테니."
사실이었다.
기실 천양이 벽파문에 잠입해 있는 이유는, 본시 이곳의 여러 가지 감추어진 비밀들을 파헤치고 장차 이들에 대비할 취약점을 찾기 위함이라 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무려 두 달이 지나기까지 아직 벽파문주조차 만나보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뿐 아니라 벽파문 속을 내 집같이 다닐 수 있었으나 아직도 여전히 한 곳만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 곳도 있었는데….
일러 의당과 형당이 위치해 있다는 지옥곡(地獄谷)이었다.
그간 눈여겨본 바 이곳은 자량의 허가패가 없는 한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신비한 곳이었고, 또한 내부의 인물들조차 허가 없이는 단 한 명도 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뿐 아니라 혹여 같은 벽파문인이라도 이유 없이 접근하는 날이면 여지없이 추살령이 떨어지기까지 하는,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神秘)한 곳이었는데….
이에 천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에 대해 커다란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다.
뭔가 비릿한 음모(陰謀)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주위에는 자량이 보내 온 귀우(鬼雨)가 맴돌고 있었고, 시기상조라 때만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과연 그 속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그것만큼은 반드시 밝혀 내고서야 물러서도 물러선다! 이번 일을 수행하고 오면 자량의 의심도 줄어들 것이고, 벽파문주의 정체까지 확인할 수 있는 만큼 기회는 매우 좋다.'
천양은 한 번 더 힘주어 약속했다.
"염려 마시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올 것이니."
비로소 모용한비의 안색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소녀, 광 대협의 약속을 믿겠어요. 한데…."
반면 조그마한 어깨가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그녀는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푹 떨구며 차마 나오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온데, 소녀의 미인계는… 조금이라도 성공을 했나요?"
- 미인계가 성공했느냐?
순간 천양은 한 번 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했다.
기실 그녀는 본래 귀우와 더불어 감시의 임무도 지니고 있었지만, 보다 천양의 마음을 끌기 위해 보내 온 처녀가 아니었던가!
한데 그러한 그녀가 이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과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더불어 역으로 살피자면, 자신이 천양을 사랑한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는 것!
담대하기 이를 데 없는 천양으로서도 크게 당황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천양은 서둘러 말꼬리를 돌렸다.
"오늘따라 모용 소저답지 않소. 서둘러야겠으니 어서 여장부터 챙겨 주시오."
순간 모용한비의 가냘픈 어깨가 다시 파르르 가녀린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시 떨구었던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그와 함께 천양은 크게 멈칫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는데….
기실 그녀의 눈에서는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큼은 천양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어서 피해야겠다!'
이에 천양은 급히 생각한 후 홱 등을 돌렸다.
"더 지체할 수 없소! 떠날 채비를 하겠소."
하지만 한 걸음도 옮기기 전에 모용한비의 떨리는 음성이 우뚝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나쁜 분이군요! 마음이 없었다면…, 광 대협께서는 어떻게 소녀의 침실을 그렇게 쉽게 들어오실 수 있었지요?"
침실!
"설마 그것까지 부군사의 지고한 권한이라고 하시지는 못하실 터이온데…. 혹시 소녀가 워낙 비천한 몸이오라 그렇게 하셔도 된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천양은 계속 가슴이 철렁했다.
이는 필시 정전으로 가기 전, 잠시 그녀의 침실을 둘러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렸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기에 염려스러워서…."
모용한비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하긴! 소녀가 괜히 떼를 쓰고 있는 것이로군요. 어차피 미천한 몸. 광 대협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어서 여장을 준비하세요."
하지만 정작 이 말에 천양은 굳어진 듯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 만난 날이 언제였던가?'
표정이 차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뒤따라 뭔가 망설이기를 잠시, 그러나 천양은 곧 뭔가를 결심한 듯 특유의 선이 큰 동작으로 홱 다시 등을 돌려 모용한비를 보며 커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길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다니, 몹시 화가 나오!"
음성은 워낙 커서 흡사 호통과 같았다.
"특히 나는 화가 나면 여자를 안는 버릇이 있소! 어떻게 책임을 질 거요?"
실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내 여자가 되겠소?"
순간 모용한비의 만면에 크게 어리벙벙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천양이 이렇게 나오자 처음에는 크게 당황스러웠으나, 그녀는 곧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네…, 모쪼록…."
천양은 화난 사람처럼 계속 커다랗게 소리쳤다.
"당신은 몸만 버리고 채일지도 모르오! 그래도 좋소?"
그래도 모용한비의 대답은 같았다.
"네! 좋으니, 모쪼록…."
실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일들의 연속!
하지만 천양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덥석, 그녀의 몸을 들쳐 안았다.
"하늘에 맡기겠소!"
이어 천양은 곧 그녀를 들쳐 안은 채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가 발뒤꿈치로 꽝 하니 세차게 침실 문을 닫았다.
"악!"
그리고 침실 문을 통해 모용한비의 찢어지는 듯한 아픔의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일 각도 걸리기 전이었다.
침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직한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열흘 후.
하북(河北)으로부터 산동(山東)의 제남성(濟南城)으로 곧게 뚫려 있는 관도(關道).
"하!"
두두두두두-!
내린 폭설(暴雪)로 사방이 하얗게 뒤덮여 있는 가운데 두 필의 준마가 나는 듯 설로를 치달리고 있었다.
말굽이 땅을 박찰 때마다 하얗게 눈가루가 흩어졌고, 마상에는 둘 다 삐죽이 허리춤에 장검을 찬 약관쯤으로 보이는 백의유생들이 타고 있었다.
천양과 사문향이었다. 여상락의 수급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고 마침내 벽파문을 떠나온 그들이었다.
천양은 벽파문을 나서며 비로소 처음으로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꿰어 찬 상태였고, 사문향은 처음 스스로가 언급했듯 남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록 검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유생 차림을 했으므로 누가 보더라도 쉽게 무림인이라 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는데….
먼길을 떠날 때에는 일반인들이라도 병기를 소지하므로 단순히 검을 지녔다 해서 다 무림인이라 할 수는 없는 터였다.
문득, 한동안 쉴새없이 질주하던 사문향이 속도를 줄이며 소리쳤다.
"제발 이젠 좀 천천히 가요! 연 열흘 동안 숨조차 제대로 돌릴 틈도 없이…."
천양도 비로소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서둘러야 하오! 지도를 보면 그래야만 해지기 전에 간신히 제남성에 도착할 수 있소."
사문향의 볼이 즉시 퉁퉁 부어올랐다.
"정말 괴물이 따로 없어! 그렇다고 제남이 목적지도 아닌 터에!"
홱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흥! 어쨌건 가려면 혼자 가요! 난 지쳐서 더 달릴 수 없으니!"
'또 시작이로군!'
천양은 일순 골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바로 사문향의 묘한 성격에 있었는데, 이 개월여 간 보아 온 결과 당최 그녀는 희로애락이 불분명했던 것이다.
조금만 마음에 언짢다 싶으면 앵돌아지고, 또 조금만 좋다 싶으면 방실거리는 묘한 성격!
그러다가도 정말 한 번 화가 나면 몇 날 며칠 동안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본 척도 않았다.
이 성격이 천양으로서는 실로 두통거리라 아니할 수 없었는데….
하지만 장부가 아녀자와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는 일.
이에 천양은 결국 마지못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구려. 하다면 잠시만 천천히 가도록 합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즉시 사문향의 만면에 눈이 어찔해질 듯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록 남장을 했을지언정 타고난 미모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호호…, 진작 그러실 것이지! 아무튼 이렇게 번번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리와요, 부군사."
기분에 따라 이렇게 말투마저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에 천양은 그저 씁쓸한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어째 무림에 나와 세 사람의 여자를 알았관데, 하나같이 성격이 다르군! 한비는 마냥 속을 감춘 채 생각만 깊고, 백철군은 독 오른 암탉 같으며, 사 문주는 변화막측하기가 오뉴월의 날씨 같으니! 그래도 그중 역시 한비가 제일 낫군!'
그러자 사문향은 마치 이러한 그의 속셈을 눈치라도 챈 듯 상큼 초생달 같은 아미를 치켜올렸다.
"흥! 또 모용 소저를 생각하시는군요? 그렇게도 좋던가요?"
- 그렇게 좋다?
뭔가 애매 야릇한 내용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천양은 흠칫 사문향을 향했다.
"사 문주는 꼭 불초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소! 어찌 그렇게도 남의 속을 잘 아시오?"
분명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사문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히려 남자처럼 크게 웃음을 지었는데….
"하하하…, 어찌 소녀가 모를 리 있겠어요! 부군사께서는 떠나오시던 날 밤에 모용 소저와 마침내 만리장성을…. 아, 정말 좋다! 하하하하…."
헉, 이었다.
찰나 천양은 그만 화끈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사 문주가 어떻게 알았소?"
여자가 부끄러움도 없는지, 사문향은 계속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하, 실은 여장을 챙겨 나오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시지 않기에 소녀, 은향소축에를 들렸더랬어요. 그랬더니만 하하…."
실로 어이없는 일.
"그래도 아주 조금만 훔쳐봤으니 별로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대체 이에 뭐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천양은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문향은 천양의 기분이야 어떻게 되건 개의치 않고 계속 웃으며 조잘댔다.
"하오나 어쨌건 모용 소저라면야 뭐! 워낙 본문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에다가, 금기서화(琴棋書畵)까지 겸비한 소저라서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어요. 아니, 오히려 부군사의 경우가 좀 늦은 것이지요."
천양은 기어코 부아가 터졌다.
"그만하시오! 사실 남자가 여자 하나를 안았다 해서 별로 욕될 건 없소! 보다는 여자의 몸으로 태연자약하게 이런 말을 하는 사 문주가 내 보기에는 더 이상하오!"
"호호…, 별로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러자 사문향도 비로소 그의 기분을 깨달은 듯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하온데 뜻밖으로 검을 소지하신 모습이 부군사께서는 검예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으신 듯하온데, 과연 그러신가요?"
그러나 부아가 치민 천양의 대답이 좋을 리가 없다.
"형식으로 지닌 것일 뿐, 불초 같은 하찮은 사람이 무슨 검예를 알겠소? 보다 소저는 지금 남장을 했을 뿐더러 우리는 유생의 신분이니, 호칭 같은 것은 좀 조심했으면 좋겠소."
질책! 그러나 사문향은 아랑곳없이 샐쭉 입술을 삐죽였다.
"하오나 지금은 주위에 인적이 없지 않은가요?"
천양은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장담할 수 없소! 사 문주는 오대집형사자의 일을 잊었소? 그들 세 사람이 일격에 죽음을 당한 것을 보면 흉수의 재간이 입신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소! 이만한 자가 우리를 뒤쫓고 있다면 결코 그 기척을 알아내기란 수월치 않을 것이오."
사문향의 서늘한 눈에 다시 담뿍 웃음이 맺혔다.
"하오나 부군사 역시 입신(入神)에 달한 무력을 소지하신 분이 아니시온가요? 분명 그 자를 뿌리치실 자신이 있으시올 텐데, 무얼 그리…?”
천양은 홱 고개를 저었다.
"절대 장담할 수 없소! 고하는 겨뤄 봐야 알겠지만, 그만한 고수라면 불초 역시 속수무책이기 쉽소!"
"소녀의 운문광악까지 꺾으신 분이…."
그러나 사문향은 어떤 믿음을 지녔는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더욱이 대군사께서 이렇게 보내셨을 때는 분명 그만한 힘이 있다고 판단하셨을 터인데,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천양은 다시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대군사는 아마 불초의 얼굴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점을 생각해서 보내셨을 것이오. 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보다 피하기 바라는 심정으로."
동시에 천양은 비로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사문향을 향해 질문했다.
"참, 그러고 보니 불초 역시 사 문주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구려. 사 문주는 약관에도 못 미치는 연세로 벌써 무위가 반박귀진에 이르렀소. 더욱이 지니신 운문광악은 가히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것이던데, 사존(師尊)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 기인이시오?"
일순 사문향은 다시 청아한 교소를 지었다.
"부군사와 같은 달인께서 소녀의 미흡한 무공을 칭찬하실 줄은! 하오나 알고 나면 실망하실 것이에요."
그녀는 계속 뽀얗게 웃음 짓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 소녀의 조그마한 내공은 일찍이 보잘것없는 가학(家學)을 이어받은 것이지요. 또한 운문광악은 대군사의 배려로 한 권의 비급을 얻음으로써 전수받게 된 것이온데, 대군사께서는 그것을 광음왕(廣音王)의 절기라고 하시더군요."
"광음왕?"
쿵-!
순간 천양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광음왕!
실로 그도 그럴 것이, 진정 이 무슨 경악해 마지못할 이름이란 말인가!
십이절대천의 십만마종주(十萬魔宗主) 무극삼왕(無極三王)!
그러했다.
광음왕이라면 곧 당대 최강의 기인으로 일컬어지는 십이절대천의 하나로, 오히려 조부 광천사보다도 한 배분이나 더 위인 십만마교(十萬魔敎) 최극강의 대웅주 무극삼왕 중의 한 사람임에 분명했던 것이다.
곧 전륜왕(轉輪王), 지국왕(支局王)과 더불어 천년마도(千年魔道)의 대지존(大至尊)으로 불리는 한 사람!
한데 운문광악이 그의 독문절기라면, 자량은 대체 어디에서 그 비급을 얻은 것인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는 분명 무당의 속가일진데, 마교와 무슨 관련이?'
따라서 천양의 놀라움은 사뭇 더욱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혹시 신비에 가려진 벽파문주 운중신비 무명이 광음왕?'
확실히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실로 천하를 모조리 뒤져야 그 누가 자량 같은 인물을 수하로 거느릴 것이며, 그렇듯 철저히 정체를 숨긴 채 한 문파를 키워 낼 만한 인물이란 한 손으로 꼽을려야 꼽을 수도 없을 것이므로!
이때 사문향이 다시 짤랑짤랑 하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군요. 설마 부군사께서 그처럼 놀라시는 모습이라니? 그토록 무극삼왕의 이름이 무서우셨던 것인가요?"
천양은 숨기지 않았다.
"그렇소! 무극삼왕이라면 무림 최강의 마종주(魔宗主)! 그들과 대군사가 무예를 건넬 정도로 교분이 있다니,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오."
사문향도 그 점은 동감했다.
"그래요. 실은 소녀 역시 처음에는 무척 놀랐어요. 하지만 부군사께서는 이미 운문광악을 보기 좋게 격파하셨을 뿐 아니라, 보다 더 가공할 환사문의 전인이 아니신가요?"
천양은 홱 고개를 저었다.
"해 봤자요. 환사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십만마교에도 수라멸겁강(修羅滅劫 )에 비하겠소! 따라서 운문광악은 광음왕의 잔 수법 중 하나에 불과할 뿐, 그것으로 십만마교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언제 피를 토하게 될는지 모르오!"
천양은 사문향을 똑바로 보며 다시 질문했다.
"한데 군사께서 사 문주에게 비급을 건네준 게 분명하다면, 무슨 말인가가 있었을 게 아니오? 도무지 무극삼왕과 무슨 관계인지를 모르겠구려?"
그러나 사문향도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어요. 믿지 않으셔도 그만이지만, 대군사는 그저 비급을 건네주셨을 뿐, 소녀도 물었지만 정작 무극삼왕과 광음왕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치 않으셨어요. 덕분에 소녀 역시도 의혹만 지니고 있을 뿐이온즉!"
'짜증스럽군! 대체 벽파문이란 곳은 어째서 이렇게 온통 수수께끼뿐인가? 외부인은 고사하고 내부 요직의 인물들까지 모르는 일 투성이니!'
천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 다부진 어조로 다시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오! 한데 사 문주께서는 혹시 지옥곡(地獄谷)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소?"
"지옥곡?"
순간 사문향의 안색이 핼쑥하게 돌변했다.
미루어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
천양은 즉시 이 점을 간파하고 재차 질문했다.
"왜? 형벌(刑罰)이 그리도 혹독하오?"
그러자 사문향은 계속 주저하는 표정을 보이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형당 때문이 아니에요! 형당은 분명 의당과 함께 지옥곡에 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게 아니고, 그저 의당을 호위하기 위한 형식적인 곳이라고 하더군요."
이야기 투가 가 보지는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한데 형당이 의당을 호위하기 위해 존재한다니?
이에 천양은 커다란 의혹을 금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구려. 천하의 어느 방파를 보나 형당은 분명 의당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곳인데, 어찌 그런? 하다면 명색이 형당이지, 한갓 호위대가 아니오?"
그러나 사문향은 또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듣기에 형당의 수옥(囚獄)은 지옥곡의 무저공포갱(無低恐怖坑)에 자리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아비(阿鼻), 등활(等活), 중합지옥(衆合地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설(說)이 있어요. 불가(佛家)의 십팔층 지옥을 인용한 것이온데, 주로 본문에 죄를 범한 외부의 중죄인을 감금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마침내 지옥곡의 일각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면 내부의 죄인들은?"
사문향의 안색이 원인 모를 두려움으로 더욱 파리하게 변했다.
"그것이 지옥곡의 의문 중 하나! 아무리 엄격한 체제가 있다 해도 죄를 범하는 이는 있으니, 분명 더러더러 지옥곡으로 잡혀 들어가고는 있어요."
- 들어가고는 있다!
역시 기이한 말이었다. 천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이 나오지는 않는다, 라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정답이었다.
사문향은 파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에요! 죄의 고하를 막론하고 지옥곡으로 들어간 본문의 죄인들은 지금껏 단 한 명도 돌아 나온 인물이 없어요. 더욱이 그들은 수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의당으로 들어간다는 풍문이온데…."
천양은 크게 흠칫했다.
"죄인이 의당으로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사문향은 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녀 역시 본 적이 없으니, 근거 있는 소문은 아니에요. 하나 암중에 들리는 말로는, 그들은 의당에서 모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행되는 어떤 계획에 시험용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소문이…."
"무엇이라고?"
순간 천양은 모발이 쭈뼛 곤두서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산 사람을 시험용으로 희생시키고 있다니!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천인공노할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말이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살인보다 더한….'
순간적으로 확 피가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 듯한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솟았다.
더불어 불쑥, 뇌리에는 정의당주(正醫堂主) 절독천공(絶毒天公)이 떠올랐다. 대체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모를 그의 주름 투성이 얼굴이 훤하게….
'그 노독물(老毒物)!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기분 나쁘더라니! 사실이 아니기를 빈다!'
천양의 완강한 전신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문향이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되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온데 오래 전부터 소녀, 부군사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었사옵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시겠는지요?"
"말씀해 보시오!"
이에 사문향은 처음 그를 만난 날 그랬듯이 서늘한 눈동자 속에 가득히 신중함을 담고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부군사께서는 대관절 무엇 때문에 본문에 입문을 하셨던가요? 그만한 능력이라면 굳이 본문이 아니라도 일문을 세우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셨을 터이온데…."
이 개월 전 자량이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천양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미 대군사께서도 물었던 질문이오. 어쨌건 간략히 답변 드리자면 나는 환사의 제자요! 따라서 일파를 창건하자면 엄청난 고초가 필요할 뿐더러, 대영웅맹을 비롯한 삼패가 결코 가만 있을 리가 없어 자칫하면 혼자 전 무림을 상대로 싸워야 할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소!"
사문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웠던 것이군요?"
"물론. 하지만 보다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자는 의도가 컸소. 와중에 군사께서 삼 개 성(省)을 약속했으니, 주저앉게 된 거요.”
사문향의 표정이 다소 우울해졌다.
"하지만 무려 이백 년이나 전에 벌어진 혈마(血魔)의 난을 오늘까지 사람들이 들추리라고는 믿기지 않는군요. 더욱이 그곳의 진전을 가졌다는 것 하나로 죄 없는 사람을 무림 공적으로 여기리란 것도 조금…, 너무 시도를 해 보지 않았다는 생각은 아니 드시는지?"
천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점도 없지는 않소. 하나 중원 삼 개의 성이라면 실로 적은 바탕이 아닌 것! 더 큰 것은 그 후에 노려볼 수도 있는 것이오! 실제 현재로서는 성(省)이 아니라 성(城) 조차도 휘어잡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으니…."
딴은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법한 생각이지만 어찌 들어보면, 듣기에 따라 실로 그 내용의 차이가 컸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시류(時流)에 편승해 힘들이지 않고 기반을 잡은 후, 다시 그 기반을 이용해 천하 장악을 시도하겠다는 기회주의적인 효웅(梟雄)들의 지론과 같은 것이었는데….
또한 사실이 그렇다면, 천하는 연거푸 몇 차례나 엄청난 살겁(殺劫)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었다.
사문향의 얼굴에 더욱 우울한 빛이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는 그릇의 한계이겠다만, 전혀 상상 밖에도….'
이어 사문향은 홀연 무엇을 생각했던지 표정을 굳히고 우울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힘있게 말의 박차를 다시 가했다.
"해가 떨어지고 있어요! 어서 제남으로 가요!"
아닌 게 아니라 초동(初冬)의 짧은 해가 어느새 서산(西山)으로 기울고 있었다.
* * *
주루(酒樓).
그리고 그들이 제남성에 도착해 객잔(客棧)을 정하고 여장을 푼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진 후였다.
날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사방에는 혹독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객잔을 겸한 주루 안은 몹시 붐비고 있었다.
"숙박을 할 참이니, 깨끗한 객실 둘을 마련하고 백화주(白花酒) 서 근과 요기할 것을 가져오너라."
천양은 자리를 정하자 주위를 훑어보며 우선 주문부터 했다.
그러자 아직도 우울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줄곧 무거운 표정으로 일관해 온 사문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식사는 한 사람 것만 가져오너라."
기운 없는 음성이었다.
천양은 가볍게 흠칫, 그녀를 향했다.
"아우, 어째서 요기를? 종일 오느라 몹시 시장할 터인데…."
그러나 사문향은 여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제는 몸이 불편해 먼저 좀 쉬고 싶군요. 형님, 식사하십시오."
천양은 그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함을 깨달았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객실로 가서 쉬도록 하게. 무리를 했던 모양일세."
그러자 사문향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로 갔고, 천양은 다시 앉은 곳에서 두 칸 가량 떨어진 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무림인인 듯한 사십 세 가량의 장한 세 명이 둘러앉아 주거니받거니 대작(對酌)을 하고 있었는데, 신태가 쉽게 찾아볼 인물들이 아니었다.
천양은 곧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그중 다소 마른 듯한 체구에 눈에서 예리한 정광을 뿜어내는 회의장한이 말을 하고 있었다.
"허허…, 단순히 상업(商業)을 하기 위해 세우는 성(城)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 크다고 전해지네. 그래서 이번에는 진법(陣法)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칠파(七派)의 인물들이 천궁산(天穹山)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더군."
'봉황탄!'
순간 천양은 즉시 그들이 다름 아닌 헌원숭이 맡은 봉황탄의 성(城)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회의장한의 앞쪽에 앉은 흑의경장 차림의 인물이 차갑게 냉소쳤다.
"흥! 그래서? 가서 그게 또 여느 무림인이 세우고 있는 방파라면 또 어쩌겠다는 소리던가? 주변에 진법이 펼쳐져 있다 하면 벌써 단순한 상업을 하는 자의 거점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설혹 그게 삼패에 이은 또 하나의 효웅의 출현이라고 해도 어쩔 방도가 있다는 소리던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던 회의장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옳네. 대책이 없는 일이지. 대영웅맹의 태도를 보면 성(城)이 조금만 수상해도 일차에 사마외도(邪魔外道)로 치부할 기세 같지만, 대체 그리한들? 당장 목전에서 설치는 양패조차 수습 못하는 상태에 우습기만 한 노릇이지."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세 번째 장한이 쨍 하니 쇳소리를 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난세(亂世)의 조짐일세! 대영웅맹은 이미 오래 전에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져 한갓 이빨 빠진 호랑이의 위엄만 과시하고 있고…. 반대로 만붕, 벽파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지! 아직은 격돌할 실마리가 없어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 이런 상태라면 머지않아 곧 대대적인 접전이 시작될 거야!"
회의장한이 무겁게 동감을 표했다.
"싫은 일이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대영웅맹이 크게 각성해 주기를 바라네. 기실 이번에 삼패가 격돌하면 구주(九洲)가 피 연못에 잠길 것은 뻔하지 않나? 일반 군소방파 간의 시비 정도가 아니라 이건 천하를 셋으로 쪼개어 장악한 초대세력들인 만큼 최소한 한꺼번에 삼백여 방파가 불시에 접전을 벌이는 꼴이 되네. 중원이 끝도 없이 넓은데, 수년 간 지속될 혈투에 희생자는 또 얼마나 많겠나?"
흑의장한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이미 멈추기에도 늦었어. 넉 달 전, 삼협의 사건이 분명 불씨가 될 걸세. 전 같으면 자잘못을 가려 화해라도 청할 일이지만, 만붕방도 벽파문도 해 볼 테면 해 보자는 식으로 우격다짐을 하고 있으니 분명 이게 접전의 시발점이 될 거야. 때문에 휘말리기 싫은 인물들은 벌써 가산을 정리하고 초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하네."
"갈수록 태산이로군. 하기사 그게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만 일어나세. 우리야 방파에 몸담지 않았으니 풍파가 일어나건 말건!"
이어 세 사람은 곧 자리를 떨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번 일이 혈겁의 시발점!'
동시에 천양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일이 급하게 됐군! 자량의 말에 이미 경각심은 가졌지만, 봉황탄의 일이 이렇게 빨리 드러날 줄이야?'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 이 시점에 혈겁이 기정사실화 된다면…?'
이때 음식이 왔으므로 천양은 하던 상념을 끊고 서둘러 요기를 한 후 사문향이 먼저 올라간 예약한 객실로 향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