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습격(襲擊)
보름 후.
호남성(湖南省)의 최북단에 위치한 무림호(武林湖).
천양과 하문향은 얼음 같은 바람 속에 스산하게 떨어지는 낙조를 받으며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곧 군림삼패의 일사(一邪), 사천 만붕방(萬鵬幇)이 있는 바로 그곳에!
본시 만붕방은 이 무림호(武林湖)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림호란 호남 무강성(武岡城)의 최북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湖水)였는데, 호수의 중심부에는 비취도(翡翠島)라 불리는 거대한 섬(島)이 있었다.
얼핏 듣기는 매우 아름다운 섬으로 연상되지만 실상은 최악에 가까울 만큼 무서운 지세(地勢)를 이룬 암벽 섬이었다.
살펴보자면 비취도의 삼면(三面)은 모두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뿐 아니라 섬 주위에는 거무칙칙하고 온통 칼날 같은 암초들의 군(群)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러나 호수 밖에서 볼 것 같으면 천 길 벼랑과 그 암초들에 낀 미끄러운 녹색의 이끼가 비취처럼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 흉악한 지세의 섬을 비취도라 불렀다. 그러나 또한 뱃길을 아는 사람들은 이 암초 투성이의 섬을 공포도(恐怖島)라고도 불렀다.
자칫 섣부르게 섬 가까이 접근하다가는 여지없이 이 암초들에 걸려 배가 좌초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뱃길에 여간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이 비취도에 가까이 접근할 생각조차 말아야 했고, 그나마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이라 섬으로 진입하는 길은 오직 서쪽의 작은 갈대밭뿐이었는데….
그 갈대밭을 지나 가파른 비취도의 암벽 사잇길을 따라 숨이 턱에 받칠 만큼 올라가면 사방이 섬의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지가 나왔고, 결국 이 공지 안에 만붕방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득히 호수 바깥에서 보아도 소름끼치게 치솟은 천 길 벼랑과 그 위로 까마득히 치솟아 오른 철혈공포의 성(城). 한마디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형상이었다.
휘이이잉!
눈가루를 휘말아 올리며 불어닥치는 서북풍은 그야말로 칼날처럼 연신 살을 저몄다.
'철벽(鐵壁)이 따로 없군!'
그러한 속에 급기야 무려 달포나 걸려 이곳에 도착한 천양과 하문향은 말을 탄 채 무림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나그네처럼 유유히 호수 주위의 길을 따라 무강성 쪽으로 길을 재촉하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전히 유생 차림으로 하문향은 남장을 한 상태였다.
침입자를 방비하기 위함인지 바다 같은 호수 가운데에는 수십 척의 감시선이 유유히 떠다니며 연신 빙결(氷結)되는 호수의 얼음을 깨뜨리고 있었다.
'결국 만붕왕 사도천악은 저 비취도의 천험한 지세와 주위의 물, 그리고 암초로 둘러쳐진 괴석군(怪石群)을 방패로 용담호혈의 근거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천양은 계속 아득한 호수 가운데의 성채를 보는 듯 마는 듯 살피며 생각했다.
'기세 면으로 보면 결코 벽파문에 뒤지지 않는다! 결국 어느 쪽이건 근거지를 함락시키자면 하늘의 별 따기나 같은 터인즉! 대관절 저들이 이렇게 클 동안 대영웅맹은 무얼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역시 주위의 이목을 피해 보는 듯 마는 듯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다시 오겠다!'
그저 묵묵히 생각하며 무강성으로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 * *
그리고 밤, 삼경(三更).
무림호에 칠흑 같은 밤이 왔다.
또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저녁 나절부터 짙게 드리워진 암운(暗雲)으로 인해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위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러한 가운데 아득히 비취도와 만붕방의 성곽만 유독 별빛 같은 몇 점의 빛을 발하고 있었고, 호수 가운데는 여전히 쩡쩡 소리를 내며 빙결되는 얼음을 깨뜨리는 순시선이 떠다녔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밀리는 무림호의 물결 소리.
군림삼패, 만붕방의 밤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괴괴하여 귀기스러울 만큼 공포스러운 정적이 떠도는 만붕방의 동쪽 성곽,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이곳에 수각 전부터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칼날처럼 깎아지른 암벽을 타고 언제부터인가 한 시커먼 인영이 등을 바싹 암벽에 밀착시키고 거대한 거미인 양 한 발 한 발 성벽 위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벽호공(壁虎功)!
결국 인영은 등을 절벽 쪽에 밀착시키고 두 손끝과 발끝만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사방을 경계하며 올라가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곧 경지에 이른 벽호공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벽을 타고 올라가므로 이 경우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게 마련인데, 인영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보기에는 느릿한 것 같은데도 손발의 움직임은 실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라, 눈 깜박할 사이에 천 길 벼랑을 올라 순식간에 성벽 위까지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림에 이만큼 대단한 공력과 기교를 지닌 인물이 누구인가. 오 척 반의 다부진 키에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은 야행복을 입은 모습, 보기 드물게 완강한 어깨와 뚫린 두건 사이의 눈으로부터 번지는 정열적인 눈빛!
천양(天陽)!
그러했다. 인영은 분명 천양, 그였다.
마침내 여상락의 목을 노린 그가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한데 벽호공은 그렇다 치고, 천양은 대체 호수의 삼엄한 감시선들을 어떻게 피해 이 비취도까지 접근해 왔다는 말인가.
그가 올라온 가파른 벼랑 아래는 나뭇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배를 타고 온 기색은 아닌 것 같은데….
이때였다.
문득 급기야 성벽 윗부분까지 모두 올라간 천양의 귀에 몹시 불쾌한 듯 누군가가 투덜대는 음성이 들려왔다.
"젠장, 정말 미치겠구먼. 대체 여상락, 그 빌어먹을 놈의 후레자식은 무엇 때문에 벽파문의 범선을 함부로 건드려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 고생을 시킨단 말인가?"
움찔, 천양은 잠시 놀리던 손발을 멈추고 위의 기척을 살폈다.
"덕분에 죄 없는 우리들만 벌써 한 달이 넘게 이 칼바람을 맞아 가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시피 하고 있으니! 게다가 금주령(禁酒令)까지 떨어져 마음놓고 술 한 잔을 할 수가 있나?"
분명 성벽을 지키는 자의 불평임에 틀림없었다.
이때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사람도. 그렇기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설마 화풀이를 나에게 하려는 건가?"
처음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젠장, 그럴 리야 있겠나? 다만 한 달 내내 이 짓을 하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서! 사실 자네도 알겠지만 대체 이게 무슨 한심한 꼬락서니란 말인가? 단순한 소문! 벽파문에서 보냈다는 확실치도 않은 일개 살수(殺手)를 경계하여 자그마치 천하에서 두 번째 간다 하면 서러워할 우리 만붕방이 이렇게까지 초비상 사태에 들어갔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여야 말이지!"
벽파문에서 보내 온 일개 살수!
다른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허허! 글쎄, 그건 사실 좀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 듣자니, 벽파문에서 보냈다는 자가 실로 보통이 아닌가 봐. 소문으로는 벽파문 유사 이래 처음으로 육대 귀문관 중 다섯을 돌파해 낸 장본인이라고도 하던데! 부군사급 대우를 받는 자라 하니, 실로 엄청난 거물(巨物)인 셈이지."
'빠른 게 소문이라고 하더니! 역시 만붕방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 곳이군.'
이에 천양은 내심 해연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의 음성이 다시 냉랭하게 들려왔다.
"흥! 난 그 자의 이름까지 알고 있네! 광천양이라고 하던가? 그 놈이 바로 넉 달 전 임안에서 우리 순찰 일 개조를 거꾸러뜨린 놈이야! 하지만 아무리 재간이 뛰어난 놈이라고 해도 우린 벽파문과 전면전까지 각오하고 있는 터인데, 그까짓 애송이 하나로 구중첩(九重疊)의 경계를 펴고 있으니! 대체 위의 놈들 하는 속을 모르겠네!"
순간 또 다른 음성이 당황하여 들려왔다.
"이 사람아! 대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하지만 처음의 음성은 여전했다.
"흥! 듣기는 감히 웬 놈이 엿듣는단 말인가? 여긴 귀신도 피해 갈 만큼 가파른 절벽 위일세! 등에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어느 놈이건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인데, 이런 곳까지 경계를 서라 하는 자체가 우스운 거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로 천양은 곧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우선 첫째는 만붕방이 이미 자신이 여상락을 치러 옴을 알아내고 도처의 경계를 강화시켰다는 점과, 두 음성이 상당히 큰 것으로 미루어 현재 위에는 그들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낸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인물 중 하나는 불만으로 말미암아 살신(殺神)을 만나게 되고 만 것인데….
'장소가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눈치챈 천양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이 점을 눈치채자 천양은 즉시 눈에서 칼날 같은 섬광을 내뿜으며 지금껏 성벽 쪽에 붙이고 있던 등을 홱하니 바로 비틀며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음성이 들려온 성벽 위로 쉭 하니 솟구쳐 올라간 것이다.
"실로 자신이 대단한 놈이로군! 하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음을 모른단 말이더냐?"
"헉! 뭐라고?"
"누구냐?"
찰나지간 지금껏 성벽 위에서 투덜거리던 음성의 주인공, 즉 미리 예상했듯 경비를 서던 만붕방의 두 위사는 크게 경악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말마따나 아래는 칼날처럼 가파른 천 길 낭떠러지였고, 이에 이런 곳을 통해 누군가가 침습해 올라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었던 것.
이에 그들은 일단 천양의 다부진 음성이 들리자 혼비백산해 급급히 손에 들고 있던 장창을 바로잡아 경계 태세를 갖추었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퍼퍽!
"헉!"
바로 그 순간 홀연 머리 위로부터 쉬익 하는 칼날 같은 바람 소리가 일며 수십 줄기의 비수와 같은 지풍이 날아와 미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자신들의 마혈(痲穴)과 아혈(亞穴) 등을 격타해 몸이 돌같이 굳어짐을 깨달은 것이다.
더불어 허공 중으로 솟구쳐 올랐던 천양이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소리조차도 없이 사뿐히 성벽 위로 내려선 것은 바로 그 직후!
내려선 천양은 우선 빠르게 주위부터 살폈다. 그러자 예상대로 그곳은 역시 만붕방의 동편에 자리잡은 보루를 둘러싼 성벽 위 경계초소의 하나였는데, 워낙 주위가 가파른 벼랑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그중 경계가 느슨해 보이는 상태였다.
가장 가까운 경계초소라 해야 좌우로 십오 장이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천양은 비로소 마음을 조금 놓으며 자신에게 혈도를 제압당해 뻣뻣이 굳어져 있는 두 경계위사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라!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를 하면 그대로 벼랑 아래로 집어던져 버리겠다!"
쇠를 끊듯 냉엄한 음성, 이에 두 위사는 와락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극심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면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전신이 걸레처럼 찢어져 버리는 분신쇄골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게다가 술 취한 위사들이 소피라도 볼랍시고 성벽 끝으로 다가섰다가 번번이 실족사하는 일이 잦다 보니, 집어던져져도 어느 귀신에게 죽었는지조차 모를 노릇이었다.
이런 그들의 공포심을 읽으며 천양은 즉시 둘러메고 있던 시퍼런 장검을 썩 뽑아 그중 눈빛이 더 크게 흔들리는 위사 하나의 목에다 썩 들이대었다.
"어찌하겠느냐? 순응할 것 같으면 눈을 두 번 끔벅거려라! 이 일은 너희 둘밖에 모르는 터이니, 제대로 대답만 하면 살려 주겠다! 너희가 입을 다물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퍼렇게 번뜩이는 위협적인 눈빛, 이에 위사는 아혈을 제압당해 말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급급히 시키는 대로 눈을 두 번 끔벅거렸다.
"똑똑한 자로군. 좋다! 그러나 행여 혈(穴)이 풀리는 순간, 소리칠 생각이라면 그 전에 먼저 목이 날아감을 잊지 마라!"
천양은 비로소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주먹으로 그의 아혈을 쳐서 풀어 줬다.
"자, 그럼 첫 번째 질문을 하겠다! 우선 방주(幇主) 사도천악(司道川嶽)의 거처를 알아야겠다! 어디에 위치해 있더냐?"
이에 위사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퍼렇게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천양의 눈과, 목에 바짝 들이붙은 칼날, 그리고 옆의 동료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주저주저 말했다.
"바, 방주님의 거처는 성(城)의 중심부에 위치한 칠층 금붕전(金鵬展)의 서편에 붙은 거실이오. 집무실 겸 침소로도 사용하고…."
천양은 더욱 바싹 시퍼런 칼을 그의 목에다 들이댔다.
"좋다! 하다면 조금 전에 말한 벽파문의 범선을 친 섭천마비 여상락이란 자의 거처는?"
"그, 그는 현재 성 서쪽에 위치한 망혼대(望昏臺)의 장원 속에….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닌 곳이오."
천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좋다! 하다면 끝으로 이 자리 비번이 바뀌는 시각은?"
"한 시진 후 축시(丑時에)! 한데 당신은…?"
하지만 그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 시간이 너희들을 살렸다!"
그 즉시 천양이 주먹으로 사정없이 둘의 목덜미 옆 혼혈(混穴)을 후려쳐 기절시켜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어 천양은 다시 지체없이 휘익 몸을 날려 서슴없이 성안으로 침습해 들어갔다.
어디나 그렇듯 외곽보다 내부에는 그다지 경계가 심하지 않고, 다행히 날이 흐린데다 밤이 깊어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결코 쉽게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기를 수각, 이윽고 천양은 곳곳의 순시망을 피해 가며 위사가 말한 방주 사도천악이 거처한다는 칠층 금붕전을 찾아냈다.
금붕전의 주위는 넓은 대리석 뜨락과 돌계단이 겹겹이 늘어서 있었고, 전각에 오르기까지 층층이 있는 뜨락에는 밝게 불을 지핀 채 각 층마다 많은 위사들이 둘러가며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역시 당연히….'
금붕전을 찾아낸 천양이 지금 서 있는 한 전각의 지붕 위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삼십여 장.
여기까지 도착하자 천양은 더 가까이 다가갈 생각을 않고 즉시 품속에서 뭔지 내용을 알 수 없는, 긴 금빛 실에 묶인 호화스런 붉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어 그는 여기에 잔뜩 진력을 주입시켜 천천히 그것을 금붕전의 입구에 위치한 문 쪽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두루마리는 소리조차 없이 극히 서서히 움직여 삼십여 장의 거리를 이동해 간 후 금붕전의 입구 문 바로 처마 밑에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상태, 하지만 그것이 입구에 걸리기까지 눈치챈 인물은 아무도 없었고, 발견이 되려면 필경 날이 밝아야 할 것이었다.
'됐군!'
동시에 천양은 지체없이 다시 몸을 날려 성의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각여 후 그가 재차 모습을 나타낸 곳은 위사가 말한 망혼대, 즉 여상락이 기거하고 있다는 장원 쪽이었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움직임이었다.
천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는 만붕방의 내부를 천양은 흡사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헤집고 다니고 있었던 것인데….
직접 보지 않고는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사실.
그러나 천양은 이런 일들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담대히 혼자서 해치우고 있었다.
어쨌건 망혼대로 오자 천양이 여상락의 거처를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수십 채의 별원들이 들어선 상당한 규모의 장원이었으나 그중 유독 중심부 쪽에 위치한 한 별원이 사방에 휘황한 화등을 밝힌 채 겹겹이 창칼을 든 경비무사들의 삼엄히 경계에 휩싸여 있었던 때문이다.
결국 성벽 위사의 말처럼 이것은 행여나 기습해 올 공격에 대비해 여상락을 지키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던 것!
'사방이 너무 밝다! 더욱이 지키는 자들도 너무 많다!'
천양은 도착하자 곧 난색이 되었다.
덕분에 거처를 찾기는 쉬웠으나 반대로 이렇게 되면 그를 어찌하기란 이만저만 어려운 셈이 아닌 것이다.
'소리 없이 여상락을 만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정공밖에 없는 터인데….'
이에 천양은 빠르게 염두를 굴리며 다시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숨은 별원의 지붕과 여상락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별원과의 거리는 약 이십여 장. 도중에 지키는 경비무사들의 수효는 대충 백여!
'습격한다!'
하지만 천양은 곧 결심을 굳혔고, 순간 그의 눈에서는 살인적으로 번뜩이는 시퍼런 비수 같은 섬광이 뿜어졌다.
"하아아아앗!"
그리고 순간이었다.
일단 결심을 굳히자 천양은 그 즉시 온 전신을 바싹 긴장시키며 용틀임하듯한 외침과 함께 그대로 칼을 뽑아들고는 벼락같이 지붕을 박차고 건너편의 별원 쪽으로 신형을 솟구쳤는데….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철담간장을 지니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할 만한 일이었다.
"헛!"
"뭐, 뭐냐?"
그러자 즉시 주위에는 지키던 경비무사들의 경악에 찬 외침이 터졌고….
와장창-!
그러나 순간 천양의 몸은 실로 믿을 수 없게도 번갯불처럼 이십여 장의 허공을 날아 단숨에 건너편 별원의 거실 쪽 창문을 산산이 박살내며 그대로 안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흡! 웬 놈이냐?"
동시에 거실 안에서 또 한 차례의 반사적인 외침이 터졌다.
거실의 중앙에는 술이라도 마시고 있었던 듯 어지럽게 술병이 널린 팔선탁이 놓여 있었고, 또한 약 사십여 세 가량의 날카로운 매부리코를 지닌 중년인이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크게 놀란 듯 일어서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무림의 양대(兩大) 공포지(恐怖地)인 이곳에 이렇듯 담대히 홀몸으로 들이닥칠 만큼 간담이 큰 위인이 있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
"너는 누구냐? 창을 부수고 들어서다니, 무슨 일이지?"
이에 사내는 천양이 두건을 쓰고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있었음에도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당황스런 질문부터 퍼부었다.
'시간이 없다!'
하나 천양으로서도 이게 결코 쉬운 모험이 아닌 셈!
"네가 바로 섭천마비 여상락이지?"
뛰어들자 즉시 온 전신에 무지한 공력을 끌어올리며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그, 그렇긴 하다만…?"
이에 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며 대답을 했다.
워낙 천양의 기세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곧 죽음을 불렀다.
"광천양! 너를 죽이러 왔다!"
와장창-!
이름을 듣자 천양은 번개같이 몸을 번뜩여 그에게로 다가서며 그대로 실내 중앙의 팔선탁을 걷어차 그의 면전으로 날렸다.
"광천양이라고?"
이에 장한, 즉 여상락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해 급급히 우선 시야를 가리며 날아오는 팔선탁을 향해 쌍장을 날렸는데….
쾅-!
"죽어라!"
"크아아아악…!"
순간 팔선탁은 그가 날린 장력에 의해 산산이 박살났고, 또한 천양의 외마디 폭갈과 더불어 그의 목이 시뻘건 핏줄기를 뿌리며 허공으로 튀어오른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장을 날리는 순간, 동시에 천양 역시 섬전 같은 일 검을 휘둘러 제낀 것!
그야말로 눈 깜박할 순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촌각의 찰나에 여상락은 영문조차 제대로 모른 채 목 잃은 시체로 변해 바닥에 뒹굴었고, 거실 바닥은 온통 핏물로 질퍽하게 깔리기 시작했는데….
일격필살(一擊必殺)!
둥- 둥- 둥-!
"침입자다! 웬 녀석이 장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장원 밖에서 귀청을 진동시키는 북소리와 함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탈출한다! 여기에서 더 머뭇거리는 것은 자살행위다!'
순간 천양은 홱 몸을 돌려 급급히 장원 밖을 살폈다.
그러자 장원의 마당 쪽에는 우왕좌왕하는 경비무사들의 모습들과 함께 어느새 겹겹이 포위망이 둘러쳐지며 안쪽으로 좁혀들기 시작하는 광경이 보였는데….
다행히 아직 수뇌급의 인물들은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하아아아앗!"
순간 천양은 더 머뭇거릴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생각 그대로 즉각 다시 들어온 창을 통해 바깥으로 신형을 날렸다.
"나왔다!"
"헉! 저 놈이다!!
찰나지간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인물들의 안색이 홱 돌변하는가 싶더니 즉시 그들의 벌떼 같은 집중 공세가 시작되었다.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득달같이 퍼부어지기 시작한 백여 경비무사들의 공세!
그러나 순간 장원의 앞에는 실로 사뭇 통천경악(通天驚愕)이라 할 만한 정경이 펼쳐졌으니….
"환사파벽력(環沙破霹靂)-! 참혼류(斬魂流)-! 멸혼류(滅魂流)-! 절혼류(絶魂流)-! 섭혼류(攝魂流)-!"
이에 맞서 즉각 천양이 천지가 울릴 듯한 포효를 터뜨리며 한꺼번에 환사소수의 일 식과 패왕필살이천검법의 전사식을 벼락같이 떨쳐 날린 것!
콰아아앗-!
쾅-!
"크아아아악…!"
"키아아…!"
그러자 즉시 우선 정면을 덮쳐 오던 십여 명의 무사들이 환사소수의 푸른 광망에 휩싸이며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고, 곧 다시 천양의 전신에서 한꺼번에 일천이백 변(變)의 천지를 뒤덮을 듯한 진저리쳐지는 검기(劍氣)가 폭출해 나와 그대로 또다시 측면 좌우를 덮쳐 오던 이십여 무사들을 휘감아 버렸는데….
피(血)!
그로 인해 장원 앞은 삽시간에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어 버렸다.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끊어진 팔다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구르는 무참한 상황!
지옥도(地獄圖)였다.
그러나 천양으로서는 촌각이라도 고삐를 늦출 수가 없었다.
"패왕(覇王)의 제검(帝劍)은 태산도 쪼개노라!"
그는 일차의 격돌로 인해 주춤해하는 만붕방의 무사들을 향해 또 한 차례 천지가 뒤집어질 듯한 호통을 터뜨리며 그대로 이번에는 필살이천검법의 후삼식을 펼쳐낸 것!
"광백참(光魄斬)-! 광폭참(光爆斬)-! 광겁구주진천하(光劫九州震天下)-!"
콰아아아앗-!
"크아아아아아…!"
검광만장(劍光萬丈).
찰나지간 그의 장검이 허공에서 맹회전하더니 또다시 어마어마한 살(殺) 바람이 일어났다.
후삼식이 전개되자 그 즉시 장내에는 벼락 같은 시퍼런 검의 기운이 밤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그것은 곧 다시 칼날의 폭우(暴雨)로 화하여 그대로 방원 삼 장 주위의 만붕방 무사들의 머리 위를 뒤덮어 버렸다.
더불어 그 즉시 귀청을 뒤흔드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수십 명의 무사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피바다 속에 나뒹굴었으니….
정녕 모발이 곤두설 만한 참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만붕방인들은 사색이 되어 감히 더 이상 천양의 곁으로 쉽게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야아아아아…!"
순간 천양은 촌각을 지체하지 않고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다시 이십여 장의 허공을 날아 건너편 별원의 지붕 위로 내려섰다.
"핫하하하…, 그럼 다시 보자!"
이어 천양은 계속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장소를 토하며 전광같이 몇 번인가 몸을 솟구쳐 삽시간에 다시 만붕방의 서편 성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벽호공을 전개해 바람같이 절벽 아래로 내려간 후에는 능공답파(凌空踏派)!
그대로 바람같이 몸을 솟구쳐, 순시선이 깨뜨려 호면에 둥둥 떠다니는 얼음 조각을 차고 몇 번인가 몸을 솟구쳐 마침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엄청난 웅자(雄姿)!
이 광경을 본 만붕방인들은 모골이 송연해 감히 추적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넋을 잃고 멍하니 굳어져 빈 허공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저자가 대체 사람이냐, 귀신이냐?"
"믿을 수 없다. 한데 대관절 적붕검대(赤鵬劍隊), 이 얼간이 같은 자들은 뭘 하느라고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적붕검대!
이는 적검비붕검대(赤劍飛鵬劍隊)라고 하는 만붕방의 최정예 검수들로 이루어진 정예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양이 모습을 드러낸 후 여상락을 제거하고 탈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일각여.
사경에 가까운 이 깊은 밤중에 곤히 잠자고 있을 그들이 그 안에 자리를 차고 나와 천양과 맞설 만한 여가가 있었을 리 없다.
반면 여상락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하던 중 천양을 덮쳤다가 눈 깜박할 사이에 격살된 인물은 적게 잡아도 무려 오륙십!
그야말로 장원의 앞뜰은 혈해(血海)를 이루고 말았던 것이니!
결국 만붕방은 벽파문이 보내 온 이 한 사람의 습격을 받고 치욕스럽도록 철저히 유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으…."
이에 직접 상황을 겪은 만붕방인들은 모발이 곤두선 채 한결같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 * *
한편 만붕방에서 약 오십여 리 가량 떨어진 무강성(武岡城) 안의 열래객잔(悅來客棧).
'벌써 한 시진!'
비운녀 하문향은 만면에 내리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객실에서 계속 서성대고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잠시 만붕방의 경계태세를 살펴보고 오겠노라 가신 광 대가께서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계시는 것인지?'
그러했다.
본시 천양과 하문향은 해질녘에 일차 무림호를 스친 뒤 곧 무강성으로 와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었다.
이후 천양은 그녀에게 잠시 만붕방의 경계를 살피고 오겠노라 말하고 혼자 객잔을 나섰던 것이었는데….
한데 곧 오겠노라 했던 천양이 나간 지 무려 두 시진이 가깝도록 오지 않아 하문향이 극히 초조해진 것이다.
물론 그녀로서는 만붕방에서 벌어진 일을 알 리가 없었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찾아가 보는 수밖에. 마냥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다가 가가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이에 그녀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하문향은 결국 천양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허리띠를 조이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덜컹-!
홀연 객실의 바깥으로 난 큰 창이 열리며 귀에 익은 다부진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다녀왔소!"
뒤따라 창을 통해 불쑥 천양이 들어섰다.
"광 대가!"
순간 하문향의 초조하던 얼굴에 크게 기쁜 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하문향의 두 눈에는 다시 보다 커다란 경악의 빛이 떠올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막 창을 통해 들어선 천양의 모습!
그것은 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섬칫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온 전신이 피투성이!
그러했다.
당연히 만붕방을 휘저으며 불과 잠깐이었나마 엄청난 접전을 치른 관계로 입고 있던 야행복은 흠뻑 피에 젖어 있고, 눈에서는 아직도 시퍼런 광기(光氣)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뿐 아니라 손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장검을 움켜잡고 있었는데….
"싸웠군요?"
순간 하문향의 안색이 핼쑥하게 돌변했다.
"술이 있소?"
천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서자 먼저 술부터 찾았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천양이 이만한 살육을 전개한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일!
수월히 그가 진정될 리 없다.
"술이라면 저기…."
그러자 하문향은 곧 객실 가운데 있는 팔선탁을 가리켰는데, 마침 팔선탁에는 객실에 들어서며 시켜 둔 술이 한 근쯤 남아 있었다.
이에 천양은 곧 팔선탁으로 다가가 그것을 벌컥벌컥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그 모습을 보며 하문향은 계속 아연하여 질문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천양은 비로소 탁자 위에 들고 있던 피 묻은 칼을 거꾸로 꽂으며 빙긋 웃었다.
"별일 아니오. 그냥 놈들의 경계망을 살피러 갔다가 조금 시비가 있었을 뿐이오."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
하문향은 즉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실로 광 대가 같은 달인이 단순히 경계망만을 살피러 갔다면 누구에게 발각될 리가 없고, 또 전신에 이처럼 낭자히 피를 묻힐 리가 없어요! 이것은 광 대가께서 작은 싸움이 아닌 엄청난 혈전을 치렀다는 뜻이에요."
뾰족하게 말했다.
"허구한 날, 문향을 속일 궁리만 하시고. 어서 말해 보세요.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
거의 추궁하는 듯한 태도!
그러나 천양은 이러한 하문향의 모습이 오히려 속으로만 끙끙대는 일반의 여자보다 마음에 좋았다.
이에 그는 피 묻은 겉옷을 벗으며 빙그레 웃었다.
"속일 궁리만 한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지 문향이 한 번 추측해 보시오! 맞으면 맞다고 하겠소."
"그런 모습으로 농담을 하다니?"
하문향은 이에 살짝 아미를 찌푸렸으나 곧 다시 말했다.
"혹시 만붕방 내부까지 들어가셨던 것인가요?"
"그렇소!"
이에 천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문향은 날카롭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계속 천양을 힐책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뻔하겠군요! 광 대가께서는 분명 정탐을 빙자하고 여상락을 습격하신 거예요! 마침 날이 흐려 기회가 좋다고 여기신 것이겠죠? 그러다가 대접전을 치른 것임이 분명해요!"
'귀신 같다!'
천양은 크게 얼떨떨함을 금치 못했다.
기실 하문향은 단번에 자신의 행동을 지적해 낸 게 아닌가.
이에 천양은 내심 크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다면, 만약 말처럼 내가 정말 야습해 여상락을 쳤다면 결과가 어떠했을 것 같소? 성공했을 것 같소? 실패했을 것 같소?"
하문향은 자신 있게 미소지었다.
"흥! 당연히 성공했으리라고 믿어요! 지금 광 대가의 표정은 극히 자신감에 차 있고, 또한 광 대가는 뭐건 한 번 계획을 세우면 죽어도 해내시고 마는 고집쟁이죠! 하셨다면 여상락은 죽었어요!"
'기가 찬다!'
천양은 순간 더욱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해 자신도 모르게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하…, 실로 기가 막히는 추리력이오! 옛말에 문일지십(問一知十)이라 하더니만, 문향이 바로 그런 사람이오!"
긍정!
'뭐라고?'
그러나 순간 하문향은 이 말에 가슴이 덜컥, 하는 충격을 받았다.
기실 추리란 역시 어디까지나 단순한 추리일 뿐, 설마 천양이 정말 만붕방을 습격해 여상락을 제거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급급히 되질문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다면 광 대가께서는 정말 여상락을 제거하신 것인가요?"
천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지금쯤 만붕방은 벌집이 되어 있을 거요."
"그럴 수가…?"
하문향의 얼굴이 더더욱 핼쑥해졌다.
기실 호랑이의 간을 가져도 유분수지, 단신으로 천하전역을 얼어붙게 하는 만붕방으로 침입해 접전을 벌일 만한 인물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
더욱이 그러고서도 이렇게 털올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히 돌아올 수 있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욱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람도 아니다!'
하문향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나 천양은 여전히 태연자약, 눈 하나 깜박 않고 말을 꺼냈다.
"아무튼 그것으로 일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셈! 그러나 내게는 날 밝은 후가 더 큰 문제요. 한 번 더 그곳에 가야 할 터이니…."
- 한 번 더?
"미쳤어요?"
하문향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싹 가셨다.
기실 만붕방을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 놓다시피 한 그가 날이 밝으면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하다니?
도저히 맨정신이라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천양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제정신이니, 간다는 것이오. 서찰(書札)을 전했소. 만붕왕을 한 번 만나야 하오."
"만붕왕에게 서찰?"
하문향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오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라고…?"
천양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하고 없는 자(者)의 이름을 빌렸소. 붕괴된 옛 궁(宮)을 재건립하고자 하니, 금(金) 일만(一萬)을 빌리자는 내용이오. 서명은 무적궁주(無敵宮主)요."
"무적궁!"
하문향은 더 놀랄 기력조차 없어졌다.
"무적궁이라면 이십 년 전, 공공연히 현 무림 최강의 기인 천기달관의 집안을 건드렸다가 괴멸 당한 당시 최대의 사도가 아닌가요?"
그러했다.
곧 천양의 조부 광천사를 맞아 하룻밤 사이에 피바다를 이루고 만 최악의 세력!
"그렇소. 알고 있었구려?”
천양은 재차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이름을 빌린 것은 만붕왕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오. 그래야만 지난날 무적궁이 그러했듯이, 만붕방 역시 하루 아침에 괴멸시킬 수 있을 것 같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말.
하문향은 현기증이 일었다.
기실 지난날 무적궁은 강했으나 만붕방은 그보다 열 배는 더 강했다.
따라서 설혹 광천사가 다시 한 번 무림에 나와 칼을 잡는다고 해도 만붕방을 괴멸시킬 수는 없는 터인데, 그런 엄청난 방파를 천양이 하루 아침에 괴멸시키려 한다 하니?
이에 하문향은 도저히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천양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대체 그건 어째서 그렇게 된다는 건가요? 만붕왕을 만나면 비취도가 가라앉기라도 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지만 나는 그에게 하나의 천하진서(天下陣書)를 주려고 하오!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이라고 불리는 것이오."
"팔문금쇄진?"
찰나 하문향은 다시 한 번 경이의 눈을 치켜떴다.
기실 팔문금쇄진이란 후한(後漢) 말, 승상 조조가 생각해 낸 천하에서 가장 살기중중한 방어진을 옛 무림 기인 신기자(神機子)가 응용한 것으로, 성(城)이나 보루(堡壘)의 외곽에는 여덟 문을 만들어 유사시 접전이 벌어질 때 진퇴(進退)를 태풍처럼 빨리 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내부에는 미혼진(迷魂陣)을 깔아 치고 들어온 적으로 하여금 길을 잃고 헤매게 하는 엄청난 군락진(群落陣)이었다.
물론 하문향으로서도 어렴풋이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한데 그것을 만붕방에 준다니?
"도대체… 그것을 광 대가께서 아신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리 되면 만붕방은 붕괴되기는커녕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천양은 여전히 눈 하나 깜박 않고 말했다.
"물론 그렇소. 하나 내게도 다 생각이 있기에 하는 일인즉! 문향은 나를 믿소?"
힘있는 음성!
하문향은 순간 가슴속에 별안간 어떤 무한한 의문과 함께 커다란 두려움이 왈칵 치밀었다.
기실 천하인들이 모두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무림 최악의 양대 귀문에 들어가 한쪽에서는 모종의 목적을 이루고자 암약(暗躍)하고, 또 한쪽에는 단신으로 급습을 하고 치고 들어가 원하는 자의 목을 마음대로 잘라 낼 정도의 가공할 무공을 소지한 만큼, 게다가 이번에는 그곳을 하루 아침에 몰락시키겠다는 농담 아닌 소리를 하는 이 젊은이가 누군들 두렵지 않을 이가 있을까.
"믿어요. 하지만 무서워요. 광 대가는 정말… 깊이 알수록 신비하고 무서운 분이세요! 속에 무슨 생각을 품으셨는지, 또는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상상조차 못할 만큼!"
천양은 가볍게 팔을 뻗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믿는다면 됐소! 앞일이나 심중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더라도, 어차피 나는 나일 뿐이오. 흉신악살이 되더라도 당신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 염려 마시오."
믿음!
하문향은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긴 그래. 나는 이이의 사람이야. 최소한 악당이 돼도 천하제일의 악당이 될 사람이다! 버림받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해!'
여자들의 심리라는 게 대개가 같은 것인지….
하문향은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곧 천양의 품속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석문교의 일이 있은 날 밤, 생각 그대로 이미 천양의 사람이 된 터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무림호의 하늘에 타는 듯 붉은 조양(朝陽)이 마저 떠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간밤에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이곳에 준마(駿馬)를 탄 한 흑의복면인이 흡사 유람이라도 하듯 유유히 비취도로 곧게 뻗은 대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준마 역시 흑색.
그래서인지 복면인의 기개는 더욱 당당해 보였고, 허리춤에 금빛 수실로 엮어 찬 한 자루 장검으로 인해 더욱 위풍이 넘쳐 보였다.
본시 만붕방은 교통을 편히 하기 위해 무림호의 주변 사방에다 넓고 탄탄한 대로(大路)를 만들어 두었고, 그중 가까운 무강성에서 그 대로를 따라 무림호로 가게 되면 곧 비취도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해 있는 선착장을 만나게 해 두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왕래하는 각처의 인물 및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배에 실어 비취도까지 인솔해 가곤 했던 것이다.
한데 이날 아침따라 웬일인지….
만붕방 측은 평소와 달리 보급물품을 싣고 줄곧 비취도를 왕래하던 사람들의 발길을 선착장에서부터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뿐 아니라 무슨 일인지 새벽부터 선착장 앞에는 본성으로부터 나온 듯한 십여 명의 인물들이 초조하게 서성대며 대로(大路)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흑의복면인은 이윽고 그들이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말에서 내렸다.
이어 말고삐를 손에 잡고 천천히 걸어 그들에게로 다가갔는데….
필경 그들에 대한 예의로 말에서 내렸음이 틀림없었다.
뒤따라 그가 마침내 선착장 가까이 오자 초조해 하던 인물들도 몇 걸음 다가서며 그중 인솔자인 듯 보이는 오십여 세 가량의 호인풍의 중년인을 중심으로 흑의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결례가 아니라면 존성대명을 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소?"
흑의인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불초는 무적궁(無敵宮)의 수석사자 일검위지(一劍威志) 광천(廣天)이라고 하오."
무적궁!
"오…."
"드디어…."
순간 마주 나왔던 중년인을 비롯한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경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중년인이 급급히 흑의인에게 다시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주군(主君)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소인들을 따르시지요."
태도를 보아 필시 흑의인을 영접차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어 그들은 급히 흑의인을 에워싸듯 둥글게 호위하며 미리 대기시킨 것으로 보이는 선착장의 깨끗한 소선에 오른 후, 노를 저어 미끄러지듯 비취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약 반 시진 후.
만붕방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웅장하기 그지없는 대전각(大殿閣) 금붕전(金鵬殿).
이윽고 영접하러 나온 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흑의인이 들어선 곳은 바로 이곳의 일층이었다.
들어서자 금붕전의 일층은 족히 수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대청(大廳)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청 내에는 층층의 둥근 회랑(回廊)이 반원을 그리며 겹겹이 둘러져 있었고, 또한 여기에는 현재 맞은편의 태사의를 중심으로 약 오십여 명의 제각각 가히 통천할 만한 기도를 지닌 인물들이 둘러앉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불과 오십여 명에 불과하나 그 웅자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들만으로도 흡사 대청이 터져나갈 듯 꽉 들어차 보이는 상황!
특히 그중에서도 태사의에 앉은 금빛 구룡포를 걸친 오십 초로(初老)의 인물은 더욱 그러했다.
칠 척이 넘어갈 듯한 어마어마한 체격에 떡 벌어진 어깨, 네모꼴의 강인한 얼굴에 쭈욱 길게 찢어진 한 쌍의 봉황(鳳凰)의 눈(眼)과 산봉우리를 무색케 하리만큼 꽉 다물어진 커다란 입술, 턱 아래로 여덟 갈래로 땋아 내린 삼단 같은 수염!
실로 구룡포인의 이러한 신위는 옛 진(秦)의 패자(覇者) 시황(始皇)과 같아 범인(凡人)들은 그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용을 지니고 있었다.
만붕왕(萬鵬王) 사도천악(司道川嶽)!
이에 흑의인은 들어서자 곧 그가 강남삼십육주(江南三十六州)의 대(大) 천하무림을 한 손에 휘어잡은 만붕왕 사도천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처절하리만치 음산한 기운이 풍겨지는 네 명의 칠십여 세 가량으로 보이는 흑의노인들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부채꼴 모양으로 서서 조용히 그를 호위하는 듯 서 있었고, 또한 좌우에 각각 네 명의 사오십대로 보이는 무시무시한 위용의 중년인들이 자리를 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본즉 구룡포의 인물이 사도천악임에 분명하다면, 이들은 곧 그의 휘하 최강의 인물들인 사대수라(四大修羅)와 팔대흉신(八大兇神)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사대수라!
패천수라(覇天修羅),
잔혼수라(殘魂修羅),
색혼수라(索魂修羅),
적안수라(赤眼修羅).
팔대흉신!
사랑신(邪郞神),
자오요신(子午妖神),
혈면신(血面神),
미축신(米畜神),
마공신(摩空神),
인왕신(仁王神),
괴묘신(怪苗神),
마색신(魔色神).
각기 이렇게 불리는, 이로 인해 흑의인은 그들 쪽으로 다가설수록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지독한 압박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기세!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보다 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인 역시 예사의 인물이 아닌 듯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산같이 걸음을 옮겨 이윽고 구룡포의 인물 앞까지 다가갔다.
도착하자 그는 곧 늠연히 포권부터 취해 보였다.
"신(臣), 무적궁의 수석사자 광천이 지존하신 분을 뵙습니다."
순간 구룡포인의 쭈욱 찢어진 눈에서 벼락치듯한 한 줄기 섬광이 번쩍 일어났다.
그리고 천하를 내리누를 듯 우렁우렁한 위엄 있는 음성이 울려 퍼진 것은 그 직후.
"너는 대단한 사내로군. 이 대전에서 이런 망설임 없는 움직임을 하는 자는 실로 드물거늘, 무적궁이 좋은 수하를 가졌구나."
음성도, 기도도 한 점 천하 효웅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잘 왔다. 본 바대로 본좌가 만붕왕이다."
역시 그는 사도천악이었다.
"영광입니다."
이에 흑의인이 포권을 취하자, 사도천악은 계속 섬뜩히 웃었다.
"흐흐! 아무튼 보내 온 서찰은 잘 받았거니와, 실로 뜻밖이더구나. 이미 멸하여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무적궁(無敵宮)이 이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재부흥을 꾀하고자 본좌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음성은 압박감 가득하게 느릿느릿 울려퍼졌다.
"처음 소식을 받았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거니와, 그러나 무적궁이라면 우리와 동맥(同脈). 전혀 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
여기에서 사도천악의 찢어진 눈에 다시 진저리를 금치 못할 정도로 가공할 불줄기가 쭉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 너희 주인은 어째서 대낮에 떳떳이 사자(使者)를 보내지 않고 모두가 잠든 야밤에 사람을 침입시켜 두루마리 하나를 던져 놓게 했더냐?"
그러나 흑의인은 당당히 버티고 서서 그러한 사도천악의 모습을 빠짐없이 바라본 후, 말이 끝나자 다시 포권를 취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 드립니다! 하나 연유를 말씀드리자면 본궁은 이십 년 전에 잠시 부흥했다가 이젠 사라지고 없는 방파로 알려진 바, 당장 사람을 보냈다가는 외면당할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지존께서는 그 점을 주지해 주십시오."
이에 사도천악은 흑의인을 잠시 유심히 살펴본 후 긍정했다.
"딴은 그렇기도 하군! 기실 본좌도 지난 무극궁이 다시 기치를 일으킴이 쉽게 믿어지지 않거니와! 너희 주인은 아직도 만겁무황(萬劫武皇) 냉극(冷極), 냉(冷) 궁주(宮主)이시던가?"
흑의인은 재차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이십 년 전 본궁은 광천사를 맞아 초토화되고 말았사오나, 천우신조로 주군만은 화를 피해 후사(後事)를 도모코자 잠시 중원을 떠나 계셨던 터이었습니다. 하여 오늘날 다시 때가 이름을 깨달으시고 다시 기략을 펼치고자 하심이니, 지존께서는 널리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망했다고 알려졌던 냉 궁주께서 아직도 건재해 계시다니, 실로 놀랍군."
사도천악은 천천히 말했다.
"아무튼 그러하다니, 이해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냉 방주가 전성가도(全盛街道)를 달릴 당시, 본좌는 고작 혈혈단신으로 무림을 방황하던 한 마리 미명의 늑대에 불과했지. 한데 세월이 우스워 냉 궁주는 몰락했고 본좌가 득세한 지금, 그때의 한갓 이름 없던 후배에 불과했던 본좌에게 오늘 도움을 청하는 그의 심정이야!"
지난 일을 생각하는 듯 눈에 아련한 감회가 어리는 것 같았다.
흑의인은 다시 포권을 취했다.
"지존의 높으신 도량에 감사드립니다!"
사도천악은 묵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튼 서찰을 본즉 냉 궁주는 다시금 무극궁의 지난 모습을 되찾겠노라고 같은 사도(邪道)로서 본좌에게 양해를 청하셨다. 그 분은 현재 어디에 계시더냐?"
흑의인은 침착히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지금껏 등격리(騰格里)의 하란산(賀蘭山)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계셨습니다만, 조만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하실 것입니다. 감숙(甘肅)을 시초로 산서(山西) 쪽으로 위지를 펼치시려 하고 계십니다."
"음."
순간 사도천악의 눈에 한 줄기 섬칫한 기광이 언뜻 스쳐 갔다.
기실 산서라면 곧 벽파문의 중심 영역권!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무적궁과 벽파문은 즉시 엄청난 영역 다툼에 휩쓸리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렇게 되면 벽파문과 세불양립(世不兩立)으로 힘겨룸을 해 온 자신들로서는 커다란 득(得)을 보게 되는 셈이었는데….
"멀리도 계실 뿐 아니라 재시발점에 너무 큰 표적을 잡았군. 산서가 결코 만만치 않을 터인데도…."
그러나 흑의인은 홀연 눈에서 지금껏 보여 주지 않았던 시퍼런 섬광을 쭉 뿜어내며 힘있게 말했다.
"물론 수월치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주군의 속을 헤아리자면 하란으로부터 중원으로 진출할 경우 감숙과 산서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라 치고 가야 할 것이 부득이한 일이옵고, 더욱이 그곳에 위치해 어쩌다 호랑이가 빠진 벌판에서 우리뿐입네, 하며 마도(魔道)를 운운하는 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역시 천하는 우리 사도(邪道)가 으뜸이오라…."
"옳다!"
이에 사도천악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냉 궁주의 의견이 지당하다. 산서의 자들이 멋대로 마(魔)를 자처하나, 실제 천하에는 전통적인 십만마교가 건재하거늘!"
동류(同流)를 주장하는 흑의인의 말이 크게 흡족했던 것이다.
"하나 아무리 하잘것없는 자들이라고 해도 냉 궁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그들의 위세는 막강해졌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던가?"
흑의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주군께서는 이미 그들의 세를 한눈에 꿰뚫고 계십니다. 더불어 주군께서 그렇게 생각하신 데는 지금 와서 다시 한갓 후배 된 사람들과 힘겨룸을 하실 생각이 아니라, 다만 무적궁의 전날을 생각해서 중원에 하나의 작은 보루를 세우고 사도(邪道)의 한 선배로서 후진 양성에 보탬이 되시고자 하시는 데에 뜻을 세우신 것으로 판명이 되옵니다. 속하가 알기에는 분명히 그렇게 여겨지더군요."
"음, 역시 냉 선배님다우신 생각이다."
사도천악은 크게 감복한 표정으로 섬광을 번뜩였다.
"사실 춘추가 근 팔십에 접어드신 분이 한갓 후진들의 세 다툼에 끼여든다는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을 뿐더러, 훗날 이름을 남김에 있어 욕된 점이 있지! 본 사도의 후진을 심려하시는 그 분의 마음이 여러 모로 이해가 간다!"
음성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본좌 역시 훗날 천하를 장악하고는 그 분을 닮으리라! 본좌 역시 뜻이 동일한즉! 하다면 현재 냉 선배님께서 지니신 세는 어찌 되느냐?"
흑의인은 계속 힘있게 대답했다.
"세라고 할 만한 것은 못 되옵니다. 주군께서는 하란으로 칩거하신 후 소신을 비롯, 오직 백 명의 수하들만 키우셨습니다. 해서 실세는 여전히 백이며, 허드렛일을 맡은 자들을 포함해야 도합 백오십여 인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간 사도천악의 눈에 커다란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백? 하다면 너만한 형제가 백이 있더란 말이더냐?"
흑의인은 다시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소인은 그중 이십 위 서열. 특별히 주군의 은혜를 입은 몸이옵니다."
"음."
사도천악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알겠다. 역시 냉 선배님이시다. 천하에 그 어떤 보배와도 바꿀 수 없는 게 사람이건데, 그 분이 지난 이십 년 간 실로 놀랍게도 사람을 키우셨구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다! 하다면 그 밖에 그 분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은 없으시더냐?"
그러자 여기에서 흑의인은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별로…. 그저 뜻이 그러하니 지존께 안부만 전하시라는 말씀을…."
찰나 사도천악은 크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리석다! 그래도 너에게는 대선배인 본좌에게 네가 갑자기 말을 돌리다니? 이야기해 보거라. 본좌가 냉 선배님의 뜻을 헤아리거늘, 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에 흑의인은 좀더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포권과 함께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옵시다면 소인, 지존의 커다란 헤아리심을 믿고…. 실은 주군께서 선물을 한 가지 보내셨습니다. 하나 이르시기를, 지존께서 당신을 예우하실 경우에만 전하라 이르신 터이오라!"
"음."
사도천악의 눈에 순간 언뜻 다시금 크게 기이한 광채가 스쳤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심정 역시 사뭇 이해가 가는 터이다. 기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후배에게 무언가를 해 줄 이유란 전혀 없는 터이니…."
"이것입니다."
동시에 흑의인은 품속에서 하나의 붉은 두루마리를 꺼내 조심스럽게 사도천악에게 전했다.
"이것은…?"
"오…."
그러자 그것을 펼쳐 본 사도천악과 비로소 등뒤에서 시립해 있던 중 눈을 뜬 사대수라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놀랍게도 펼쳐진 두루마리 속에는 하나의 극히 복잡하고도 기기묘묘한 진도(陣圖)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흑의인이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석년 무림 최대의 석학(碩學)으로 일컬어졌던 신기자(神機子)의 팔문금쇄진도(八門金鎖陣圖)입니다. 주군께서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소지, 알고 계셨사오나 힘을 중시해 방비에 소홀하셨던 관계로 일시 고배를 마셨던 터이오라 혹시라도 지존께서 같은 고배를 마실까 보아 그것을 보내신다 하셨사옵니다. 본 사도가 또 한 번 고배를 마실 수는 없는 일이므로!"
사도천악의 만면에 크게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역시! 하나 이런 진귀한 물건을 내주시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거늘! 실로 냉 선배님의 헤아리심에 몸둘 바를 모르겠구나."
이어 그는 힘있게 시립해 섰던 사대수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준비해 둔 것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자 사대수라의 만면에 얼핏 기광이 스쳤으나,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곧 적안수라가 총총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얼핏 보기에도 극히 진귀해 보이는, 검은 비단천에 곱게 싸인 어떤 서류뭉치 같은 것을 받쳐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사도천악이 다시 흑의인에게 건네줬다.
"보잘것없는 성의다만 냉 선배님께 전하거라. 더불어 본좌의 말을 함께 전하거라. 후진을 심려하시는 그 분의 마음이 이같이 하해와 같으신데, 본좌인들 어찌 후배 중 하나로서 감복치 않겠느냐? 훗날 내 뜻을 이루고 난 후에는 내 기필코 이러한 선배의 마음을 기려 그 분을 본 사도 최대의 기인으로서 무림에 영원한 족적을 남길 수 있도록 은공탑(恩功塔)을 세우리라! 냉 선배님의 불굴의 정신과 업적이 세세토록 후세에 전해지도록!"
"전하겠습니다!"
흑의인은 한 번 더 커다랗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 * *
"알 수 없소이다, 주군! 대관절 어째서…."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사대수라, 팔대흉신 등은 딱딱히 긴장된 표정으로 사도천악과 함께 금붕전의 그의 집무실에서 둘러앉았다.
사도천악을 찾아왔던 흑의인은 이미 용무를 마치고 돌아간 듯 보이지 않았다.
적안수라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도저히 주군답지 않은 일이었소이다. 밝히기는 무적궁의 사자라고 했으나 실제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자의 말을 믿고 하신 일처리치고는 소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오라…."
분명 흑의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사도천악은 여전히 엄청난 위엄을 풍기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으려야 그럴 수 없었던 게, 우선 광천이란 자의 기도는 너무도 당당했다. 그 정도 기도라면 실로 천하를 다 뒤져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는 터인데, 그러한 자가 한갓 허언을 하고 다니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더욱이 추후에라도 거짓이라는 것이 탄로나면 천하에 발붙일 곳이 없어질 일을 감히 누가 할 수 있겠던가?"
그러자 사대수라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패천수라가 침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말씀대로 보통의 인간이 아니더이다. 솔직히 그만한 자라면 속하들조차 부담스러울 상대! 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냉극에 관한 것! 그는 석년 분명 무적궁을 잃고 천기달관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거늘, 그런 자가 여전히 살아 있다 함은!"
사도천악은 무겁게 턱을 주억거렸다.
"사실 그 점은 본좌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소문으로는 죽었다 하나, 실제 그의 죽은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으니 역시 살아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본다."
적안수라가 다시 말을 받았다.
"하긴 무림의 소문이라는 게 워낙 와전되는 것이 많으니…. 하나 그가 살아 있다고 해도 문제 아니오니까? 한창 절정에 오를 때 고배를 마신 그가 오늘날 다시 야심을 품지 말라는 법도 없거니와!"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사도천악도 간단히 일축했다.
"그것은 틀린다. 냉 선배의 나이가 여든! 그 나이로 다시 천하를 잡겠다고 후진들과 싸운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우스갯거리일 뿐이니만치 역시 그가 바라는 것은 명예회복뿐일 게 틀림없지. 본좌가 그 입장이라고 해도 같을 터이니!"
사도천악은 묵직하게 모두를 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같은 사도의 한 사람인 본좌를 택한 것이다. 일차에 사람을 보낸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그는 다만 자신에 대한 이쪽의 호의을 떠보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아."
잠자코 있던 색혼수라가 눈에 기이하다는 듯한 섬광을 떠올렸다.
"그 말씀은…?"
"간단히 이쪽의 성의를 보고자 한 것이라 본다. 기실 한 번 기략을 펼쳤다가 실패한 몸으로 다시 무림에 나와 지난 명예를 회복하기란 누구건 실로 쉽지가 않지. 더더욱이 대의명분 없는 살겁을 일으킬 수는 더욱 없는 법이고! 따라서 그는 분명 사도의 양성과 후진을 위한다는 것에 명분을 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또한 자신을 무시하는 자를 도울 수는 없는 것이야. 이 점을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아무리 지난 터전을 잃었다고 하나, 그만한 인물이 보루 하나
를 짓기 위해 누구에게 손을 벌릴 리는 없는 것! 미루어 그는 필시 내가 자신의 존재를 선배로 보느냐가 궁금했던 것이다."
"과연…."
패천수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주군께서도 두말 않고!"
사도천악은 힘있게 말했다.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 만약 내가 의문을 품거나 머뭇댄다면 그도 분명 본좌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었지. 액수가 많건 적건 금자란 하찮은 것이다. 한데 그런 따위로 사람을 의심해 이리 재고, 저리 재고한다 함은 그것은 이쪽의 그릇이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다."
가장 말이 없었던 잔혼수라가 운을 떼었다.
"속하 역시 궁주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경우는 아주 현명히 판단하신 것! 하나 그가 과연 산서를 겨냥한 만치 힘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사도천악의 찢어진 눈에 다시 위엄 가득한 섬광이 떠올랐다.
"냉극 선배는 실로 만만치가 않아. 석년, 내 떠돌이로 천하를 주유할 때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이미 화경을 넘어선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니, 지금에야 오죽하려고! 최소한 본좌의 아래는 아닐 것이며, 더욱이 보내 온 자 같은 수하가 백이라면 그것은 실로 예삿일이 아니다. 본즉 그는 스스로를 많이 낮췄으나 설령 냉 선배 휘하의 제이인자라 해도 삼사 인자가 계속 그 뒤에 버틸 터인데,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벽파문의 화는 무한한 것이다. 하란을 떨치고
다시 중원으로 나오는 날, 벽파문은 실로 엄청난 재앙을 만날 것이다."
적안수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주군께서 정말 현명하신 결단을 내리신 것 같군요! 하다면 우리 쪽에서 취할 자세는?"
사도천악이 섬뜩히 웃었다.
"흐흐…, 우선 진도(陣圖) 분석에 해박한 자를 찾아라! 분명히 진짜이리라고 믿는다만, 냉 선배가 보내 온 금쇄진의 내용을 봐야지! 그 다음에 그가 등장하기를 잠시 기다린다!"
적안수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지난밤 벌어진 여상락의 일은?"
사도천악의 눈빛이 더욱 섬뜩해졌다.
"흐흐흐…, 결단코 용납할 수야 없지! 놈들이 사람을 보내 본방을 쑥대밭으로 만든 만큼 우리 역시 백 배의 보복조치를! 하나, 지금은 참는다! 냉 선배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놈들은 곧 이 땅에서 사라질 운명이므로!"
계속 섬뜩히 우렁우렁하게 명령을 내렸다.
"두 걸음을 나가기 위해 잠시 웅크리도록 하라! 언제건 임전할 모든 태세를 갖추되, 본좌 길어야 일 년! 기필코 놈들의 피를 마시고 뼈까지 씹어 내고 말리라!"
"명(命)!"
순간 사대수라, 팔대흉신은 일제히 힘있게 부복지례를 취했다.
- 일 년 내에 뼈까지 씹겠다!
미루어 천하살겁(天下殺劫)이 급기야 한 발 성큼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는데….
장내에는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