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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02]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12,44-50
그때에 44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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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빛과 그림자 < 독서 : 사도 12,24-13,5ㄱ,1요한 5,1-5 / 복음 : 요한 12,44-50 또는 10,22-25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이 아닌 어둠으로 대하여 결국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시는 절규를 듣게 됩니다.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으로 대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의 어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말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당신을 보내신 분,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라는 말씀뿐만 아니라 빛이신 당신에 대해 깨달으라는 외침도 담겨 입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빛이라고 하셨으니, 저는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려 합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분이 비추어 주시는 빛에 따라 우리도 그림자로 우리 모습을 드러내게 됨을 묵상합니다.
저는 사진 찍는 것을 단순히 취미라기보다는 묵상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제 사진의 한결같은 주제는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모든 물체는 빛을 받아 그림자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진을 통해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지는 조화와 그 조화가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려고 애씁니다.
빛이신 그분을 제 사진 안에 담기를 바랍니다.............◆
[말씀자료 : 유해욱 신부(예수회)] |
[나해]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2012-05-02)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희망의 주님, 마리아의 기다림은 사랑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끝까지 기다림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마리아의 인내와 희망을 저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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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청소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인터넷과 매스컴의 위력이 커가는 이 시대 안에 놓인 청소년들이 건전하고 올바른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선한 가치관과 사고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부활 제4주간 수요일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12,44-50 또는 10,22-25ㄱ
그때에 44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영적독서 : 기다림의 여인 마리아
마리아는 기다리는 처녀다. 저녁 무렵 요셉이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자기를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요셉은 나무 냄새를 풍기며 돌아와 지난밤 꿈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성서가 마리아를 언급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리아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곳,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서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기다렸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기다리는 동정녀였으며, 또 끝까지 기다린 어머니였다.
기다림의 여인 성모마리아님, 저희에게 당신 기름을 나누어주소서. 등불은 꺼져가는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희를 다른 상인에게 보내지 마소서. 멀리 떠난 친구가 돌아올 때, 폭풍이 지나간 저녁 하늘에 노을이 번질 때, 타오르는 촛불에서 향내가 퍼져 나올 때와 같이 아주 작은 일로 기뻐하며 가슴 뛰었던 그 옛 열정을 저희 마음에 다시 불러일으켜 주소서.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동정녀여, 어머니의 확신으로 등불을 들고 주님 오시길 기다리는 저희를 놀라게 하소서............[안토니오 벨로, '성모님과 함께하는 31일 기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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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4주간 수요일(2012-05-02) I 복음묵상방 |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가 전례를 거행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희랍 세계를 복음화하고자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신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단식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키프로스 섬에 있는 살라미스에서 첫 선교 여행을 시작한다(제1독서). 요한 복음서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간추리고 있는 예언적인 선포로 끝난다. 예수님께서는 빛이시며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시고 아버지를 세상에 계시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를 믿는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어 있다(복음). |
<복음묵상-1> : † 제1부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
오늘 복음의 요한복음 안에서의 위치를 잘 살펴보면 이는 예수께서 오직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의 틀 안에서 행하신 장구(長久)한 고별사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공적인 말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를 내용상의 특성에 따라 제1부(1-12장)와 제2부(13-21장)로 구분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제1부에 담겨있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 자기계시(2-12장)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제1부 예수님의 공생활을 마감하는 결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에 기초하기보다는 통상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오늘 복음이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되면서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앞서간 구절들에 이미 밝혀져 있다. 요한 12장을 처음부터 살펴보자.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기적 때문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예수께 대한 대대적인 수배명령이 이미 내려진 가운데(11,57)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소생한 라자로가 살던 베다니아 동네 사람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하셨고,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예수의 장례를 예고한다.(12,1-8)
그 다음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공생활 중 마지막 과월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큰 군중의 무리가 환영하였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12,12-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정적인 환영을 받으셨으나, 이제 곧 더 큰 영광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암시하셨다. 바로 수난과 죽음의 예고이다. 이 죽음의 예고는 서로 상반되는 놀라운 대조적 원리(原理) 안에서 시사된다.
그것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 아들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원리,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빛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원리이다.(12,20-36a)
이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일단 몸을 피하셨다(36b절)는 구절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이것으로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자기계시적 공적 생활을 마무리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2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보도(12,37-50)는 자연적으로 저자의 독자적 편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첫째로(37-43절) 예수께서 행하신 그 동안의 표징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不信)을 지적하고 있으며, 둘째로(44-50절) 예수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파견사명을 요약하고 불신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큰소리로(44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어조는 자기계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구사하는 것으로서 말씀의 내용이 선언문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암시한다. 오직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버지까지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따로 있으면서 일치(一致)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둘이 철저하게 하나라는 원리에 있다는 것,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共存)할 수 없다는 것, 불신하는 자체가 불신자 스스로를 심판하리라는 것, 아들이 아버지의 명(命)을 따르는 것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원(願)을 따르는 것이 복음사가가 보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요약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시면서 예수를 파견한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곧 진리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구원이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인 기원과 파견의 목적을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적 결단이며 관계 속에 실존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意味)인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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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유다인들은 왜 빛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빛에 대하여 묵상을 하면서 저절로 빛을 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태워서 빛을 내다가 자신을 모두 소진하면 사그러지고 맙니다. 또 손전등 같은 경우는 건전지를 모두 사용하고 나면 꺼져버립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등들도 전기라는 공급원이 차단되면 빛을 낼수 없습니다. 태양 역시 계속 자기 폭발을 통하여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세상의 모든 빛은 빛을 내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무엇을 근원으로 빛을 내고 계실까요? 근원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이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머무르기를 바라시지 않기에 빛으로 환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 보다는 어두움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던 최초의 사람이 그러했지요.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고는 즉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죄를 행하고는 빛이신 하느님 앞에 자시늘 드러내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 몸을 숨깁니다. 또 이세상에서 무슨 나쁜 계획을 꾸미는 사람들은 밀폐된 공간에 숨어서 무언가를 준비합니다.
밝은 세상에 자신들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합니다. 빛이신 하느님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에 숨기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왜 빛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우리는 빛을 받아들고, 빛 속에 살고 있고, 참으로 예수님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밝은가?
우리는 매일 매일 또 순간 순간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선택을 하고 선과 악사이에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순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즉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해야 하는가? 즉 내 마음대로 예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가? 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선택을 통하여 빛이나 어두움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이 자기를 빠져 나와 예수님을 선택할 때 빛 속에 살게 됩니다. 천국이나 지옥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기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다른 빛으로 자신을 태우고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숙한 사람 , 성숙한 사람]
미숙한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도 좋아한다.
미숙한 사람은 인연도 악연으로 만들고, 성숙한 사람은 악연이야말로 인연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산다.
미숙한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바람과 물결이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에 선다고 믿으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미숙한 사람은 좋고 싫고를 따지지만, 성숙한 사람은 옳고 그르고를 선택한다.
미숙한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큰 불행도 망원경으로 들여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미래를 내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특별한 일들에만 관심이 있지만, 성숙한 사람은 평범하고 작은 일에서 더 많이 배운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까지를 살필 줄 안다.
미숙한 사람은 구름만 쳐다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바라본다.
미숙한 사람은 세상이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데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
미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웃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성숙한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의 성장도 늙는 법이 없다. 그는 안다. 만일 절망을 두려워하면 절망을 받아들이게 되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를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만족에 머무는 일이다. 그는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여 스스로 존엄성을 지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투자함으로 스스로 현명한 사람이 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헌신을 한번의 선택이 아니라 매일의 도전으로 본다.
『땅은 꽃으로 웃는다』(송길원 지음).................◆
[말씀자료 : 박희중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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