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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족의 유명 인물로 태공망으로도 알려진 곧은 낚시바늘을 위수에 드리웠다는 강상(姜尙)이 있으니
그는 무왕을 도와 상(은)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건국하는데 1등 공신이었으니 산동성에
봉지를 받아 제나라 시조가 되었는데 제나라는 훗날 한족(漢族)인 전(田)씨들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강(羌)족 수령 낭막(狼莫) 은 118년에 임상과 마현의 공격을 받아 북지에서 60여일을
버티다 패해 참수당한 자가 5천명이었고 기오(飢五)는 120년에 금성을 침입했다가
마현의 군사에게 패해 수천명이 죽었으며..... 나리(那離) 는 140년에 봉기했다가
마현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으며 이때 죽거나 사로잡힌 자가 1200여명이었습니다
4. 후진(後秦)
후진 (後秦) 은 오호십육국(304년~ 439년) 시기 티베트계 강(羌)족이 세운 나라로 북진(北秦), 호진
(胡秦), 강진(姜秦), 요진(姚秦)이라고도 불리는데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강(羌)족의 추장
요양(姚襄)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옛 근거지 관중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중국 지역을 정복하여 후진 (後秦) 을 건국하였으니 강족은 이민족의 기마 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중국 지역을 정복하였고 지배층은 강족, 피지배층은 한족(漢族)
이었는데 요양의 강족 세력은 역시 관중으로 돌아가려던 저(低)족의 포홍(蒲洪) 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다시 회하 방면으로 이동해 동진(東晋)의 관작을 받고 제휴합니다.
383년, 저(低)족 전진(前秦)의 부견이 비수대전으로 몰락한 뒤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
하였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강족의 요장(姚萇)이 부견을 배반하고, 384년
왕을 자칭하면서 후진 (後秦)이 세워지니, 385년에 요장(姚萇)은 부견을 죽이고는
386년 장안에서 천왕(天王)을 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칭하여 후진을 건국합니다.
394년 제2대 왕으로 등극한 아들 요흥(姚興)은 잔존한 저족 부씨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400년에는 선비족 걸복씨가 건국한 서진(西秦)을 멸하고, 403년에 하서 회랑지대
에 저족이 세운 후량(後涼)마저 무너뜨려 화북 서부 관중의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그 결과 유명한 고승 구마라습(鳩摩羅什, 쿠마라지바) 이 들어와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서쪽 감숙성 부근의 한족(漢族) 서량(西涼) 과 선비족 남량(南涼) 그리고 409년에 다시
독립한 선비족의 서진(西秦), 토욕혼, 흉노족의 북하(北夏) 까지 가세하여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416년에 요흥이 죽은 후 요홍(姚泓)이 황제로 등극했으나 강족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이를 기회로 여긴 주변 나라가 공격해 왔으니..... 마침내 417년 한족(漢族) 국가인
동진(東晉)의 유유(劉裕) 가 북벌 중에 침공을 받아 수도 장안이 함락당해 멸망하였습니다.
5. 토번(土蕃) 제국
서남이는 사천성과 운남성에 가주하는 소수민족들이었으니 티베트는 그 보다도 더 서남쪽
에 거주한 민족이었는데..... 그 중에 걸출한 인물이 나왔으니 7세기 초에 손챈감포
(송찬간포) 가 토번 부족을 통일해서는 근 300년 가까이 이어갈 “토번 제국" 을 세웁니다.
서기 4세기에 토번의 선조라고 할만한 티베트 정치 집단이 등장하여 중앙 티베트 부근
에서 영향력을 키웠는데... 티베트의 동부지역에서는 오래 전에 강족과 저족 등이
동쪽 중국으로 침투하여 왕조를 세웠으니 늦은 편으로...... 티베트 서부 일대에는
샹슝국도 있고 탕구라산맥 동부에는 숨파와 같은 부족연맹 형태의 국가가 있었습니다.
토번의 원류가 되는 집단은 티베트 중부인 라싸 남동쪽의 얄룽(톨기 지방)을 기점으로 근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불려나갔는데.... 서기 570년경에 남리룬첸이 즉위하게 되면서 토번은 역사에 기록
되기 시작했으니 주변 경쟁 세력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 집권화에 대한 준비에도
들어갔으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에 남리송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해 나갑니다.
그의 아들 손챈감포(재위 617~649년 추정) 는 불과 13세의 나이로 왕에 올라 예상을 깨고 주변 모든
세력들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의 서막을 열었으니 633년, 손챈감포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
을 평정하는 한편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에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합니다.
당나라 이정이 630년 동돌권을 멸망시키고 토욕혼을 공격해 속국으로 삼자 634년 손챈감포는 20만으로
당나라를 공격해서 수도 장안을 유린했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636년에는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손챈감포는 638년에 25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당나라 속국인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킨
후에 백란 등의 강족 마을도 공략한후, 장안에 육박해 송주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하니
후군집이 간신히 막아내는데... 그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을 보내, 금 5천령을 납폐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냅니다.
문성공주는 사서오경과 유가사지론, 예림삼백육십법보감, 공예 육십법등 서적과 석가모니 불상에다
토번의 풍토에서도 견딜수 있는 순무 종자를 챙기는데 또한 토번에 없는 곡물, 과일, 채소 종자와
누에 종자도 포함되었으며 의약품과 공구도 있었으니 유모와 당나라 여인들까지 공녀로 보내지니
641년 문성공주는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과 가르통첸의 호위를 받으며 토번으로 향합니다.
공주 일행은 강의 물살이 완만해지는 한겨울에 길을 떠나 청해에 다다른
문성 공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천하의 강물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건만, 나만 홀로 서쪽으로 가는구나. ”
문성공주 이전인 기원전 105년 한나라 무제는 공주 세군(細君)을 “天馬(천마)” 를 바친 “오손 (烏孫)”
왕 곤막에게 시집보내니 “물에 비친 고운 꽃,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버들” 같았다는 공주 세군은
악기 비파를 만든 여인 답게 悲愁歌(비수가), 일명 황곡가 (또는 백조가) 라고 불리는 시를 짓습니다.
우리집이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모서리요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니 오손왕이로다.
궁려는 방이 되고, 전은 담이 되었으니,
고기는 음식이요 낙은 장이로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함이여 마음이 슬프니
黃鵠(황곡, 백조) 이 되기를 원함이여 고향으로 돌아감이로다.
그 72년 후인 기원전 33년 한나라 왕소군은 한나라 선제때 후궁으로 흉노 선우인 호한사 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60년간 두나라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여인이니 “침어낙안(浸魚落雁)” 에
“폐월수화(閉月羞花)” 중에 낙안(落雁) 은 바로 왕소군(王昭君) 을 지칭하는데....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 왕소군을 보고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 추락한다” 라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공주 일행이 토번의 변경인 하원에 도착하자 손챈감포는 라싸 근방까지 마중나가 영접을 했으니
그는 문성공주에게 토번의 옷을 입히고 토번의 머리를 하게 하였으며 손챈감포에 의해
문성공주는 백해(칭하이성 찰릉호)에서 첩이 되었고 이도종은 당나라로 돌아갔는데 토번의
백성들은 명절에 입는 옷차림을 하고 춤과 노래로 공주를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손챈감포는 당나라를 굴복시켰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포탈라궁을 지었습니다.
원래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아들인 궁송궁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와 재혼했는데, 사실 문성공주 자체의
혼인은 당시 당나라에 큰 사건이 아니었으니 공주는 안시성에서 토산을 쌓은 것
으로 유명한, 당태종의 6촌인 강하왕 이도종의 종녀(宗女) 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 입니다.
문성공주와 손챈감포의 결혼을 두고 누가 숙이고 들어갔느냐는 설론이 있는데 손챈감포
는 문성공주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문성공주가 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티베트인
들의 '자면의 풍습 '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 등 정성으로 대했으며..... 또한 친당
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당이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챈감포 사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으니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정점에 달한
시기였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
이니 669년 토번은 실크로드 안서 4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양국은 적대관계로 돌아서며,
신라는 이 기회를 틈타 백제땅의 웅진도독부를 차지하기 위해 2만의 군대를 압록강 너머로 보냅니다.
당나라는 최고의 명장 평양 안동도호부의 설인귀를 불러서 10만 군대를 주어 반격 했지만....
토번 왕조는 대외 제도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대비천전투" 에서 전멸
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으며.... 이후 토번이 당나라 본토를 침공하는지라 신라는 이 기회
를 틈타서 머나먼 동쪽 한반도에 전력을 다하기 어려운 당군을 황해도 이북으로 몰아냅니다.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고 그후 710년에 금성 공주가 토번에 시집
오면서 일시적으로 당나라와 화친했지만, 715년경 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줄였고, 당의 명장이었던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최고 정점에 달합니다.
고선지 역시 서쪽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의 이슬람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안사의난
이후 하서 및 농우, 안서 및 북정 지역의 군사들이 반란 진압에 소모되면서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하니.... 이에 당나라는 자자세가 되어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토번 제국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에 더욱 확장되었으니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벵골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과
쓰촨성(四川省) 서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장악해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763년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
을 몰아 당군과의 수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해서는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 했고... 자신들이 당나라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습니다.
토번제국의 당나라 수도 장안 점령과 약탈은 토번이 동북아시아 최강국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으며 781년에는 상치싱얼이 월아천 전투 대승 후에
서역의 돈황을 점령했고 790년에는 줘치수가 북정을 점령해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791년 서역의 전역에서 위구르제국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더니 800년대 초반
부터는 운남 지방의 남조 왕국에서 까지 견제를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아랍의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너무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 화친을 합니다.
토번과 당나라는 820년에 협정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서로 무력 충돌을 피하기로 했는데 이때
확정조약은 티베트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 앞에 당번회맹비라는 내용으로 새겨져 지금까지 내려 옵니다.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인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였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 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는데, 라싸 지방의 당번회맹비
는 아직 무사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모택동의 중국군이 침입해 티베트를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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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당나라는 최고의 명장 평양 안동도호부의 설인귀를 불러서 10만 군대를 주어 반격 했지만....
토번 왕조는 대외 제도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대비천전투" 에서 전멸
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으며.... 이후 토번이 당나라 본토를 침공하는지라 신라는 이 기회
를 틈타서 머나먼 동쪽 한반도에 전력을 다하기 어려운 당군을 황해도 이북으로 몰아냅니다.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千步) 밖의 것을 맞힐 수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당나라의 고종은 669년(문무왕 9)겨울에 사신을 보내어 구진천을 데려다가 그 만드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한반도를 온통 지배하려는 야심을 나타내었다. 이에 대하여 신라는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한 고구려부흥운동을 돕거나 백제점령지의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내는 등 당나라의 침략의도에 맞서 항거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나라는 신라가 가지고 있는 유력한 무기인 목노(木弩)에 주목하게 되어 그 제작자인 구진천을 데려갔다. 그러나 구진천은 여러가지를 빙자하여 그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당나라의 고종이 무거운 죄를 지우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그 비법을 드러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