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회생(回生)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군웅들의 분노에 찬 협공을 맞고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진 천양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정말 우문개로의 음모에 휘말려 죽고 말았는가.
무산삼협(巫山三峽).
콰아아아-!
중원천지를 통틀어 가장 물살이 거칠고 드세다 알려진 곳.
콰아아아- 콰아!
증명이라도 하듯 삼협(三峽)의 가파른 벼랑 사이로 빠져나가는 짙푸른 물결은 사나운 용(龍)의 포효 같은 굉음을 토하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무서운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삼협 중에서도 가장 거친 물살이 일어나는 중협(中峽) 구당협(瞿塘峽) 속의 칼날 같은 기암괴석이 돌출한 한 가장자리였다.
바로 여기에 실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이 하나 벌어지고 있었는데….
설마 이 어마어마하게 거친, 깊이조차 측정할 수 없는 물살 속에 웬 낚시꾼이란 말인가.
언제부터인지 한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앉아 한가롭게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고 있었다. 햇빛을 피하고자 깊숙이 눌러 쓴 챙이 넓은 삿갓으로 인해 진면목은 알 수 없었다.
콰르르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백 길이 넘는 수심(水深)에 연신 천지를 부셔 버릴 듯한 굉음을 토하며 격하게 흘러내리는 구당협의 이런 엄청난 물 앞에서 낚시라니.
실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한데 더욱이 놀라운 것은 지금 마의노인이 던져 놓고 있는 낚싯대였다.
만년묵철간(萬年墨鐵竿)!
틀림없었다. 보기에도 고귀한 먹광이 자르르 흐르는 노인의 낚싯대는 분명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탄력 있는 강금(强金)이라 전해지는 만년묵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뿐 아니라 비로소 보니, 낚싯대의 끝에 묶여진 줄 역시도 극히 심상치가 않은 것이었는데….
떨어지는 낙조(落照) 속에 눈부신 은빛을 뿌리는 그 줄은 경악스럽게도 분명 천하에서 가장 질기고 끊기 어렵다는 만년은잠사(萬年銀蠶絲)!
이쯤 되면 실로 예사로운 일이라 할 수가 없었다. 설마 노인은 용(龍)이라도 낚을 셈인가?
뉘엿뉘엿, 해는 어느새 휘황한 낙조를 뿌리며 삼협의 계곡 속으로 잠겨 가고 있었다.
"…!"
한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마의노인의 등이 활처럼 굽혀지며 전신이 바싹 긴장으로 가득 찼다. 드세게 굽이치는 물결 속에 던져진 팽이 같은 찌가 크게 요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물 흐름으로 인한 것이 아닌 뭔가의 입질이었다.
마의노인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치 빠른 속도로 낚싯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입질은 순식간이었다.
"…!"
노인은 곧 다시 커다란 실망을 금치 못하며 낚싯대를 놓고 말았는데, 분명 입질이 시작되었던가 싶었던 찌가 물 흐름을 따라 흔들릴 뿐 다시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 하여간 지독히 약았다! 낚싯대를 담근 지 평생이 흘렀거늘, 번번이 애간장만 태우고 마니!'
노인의 가슴속에서 즉시 욕설이 터졌다.
'하지만 까짓 세월이야! 제발 좀 물어라! 너 하나에 수만 사람의 인명이 걸려 있거늘, 급기야 놈이 피구름이 몰고 다시 나타났다! 너 하나로 이를 막을 수 있다면, 이 또한 네가 대붕(大鵬)이 될 기회가 아니더냐?'
분명 그의 마음은 타는 듯 초조한 상태였다.
한데 또한 바로 순간이었다.
촤아앗-!
홀연 장내에 또 한 번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잠시 입질을 보이다가 꼼짝 않고 제자리를 지키던 낚시의 찌가 느닷없이 급류 속으로 확 잠겨져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앗!"
마의노인은 이 예기치 못한 급변에 대경실색하여 홱, 만년묵철간을 잡아채었다.
부우우웅-!
찰나지간 장내에는 실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광경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탄력 있다는 만년묵철로 만들어진 낚싯대가 용틀임하듯한 울음을 토하며 당장 펑, 하고 꺾어져 버릴 듯 둥글게 휘어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손아귀가 터져나갈 듯 대뜸 노인에게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인력(引力)!
"드, 드디어 걸렸다!"
순간 마의노인의 눈이 믿기어지지 않는다는 듯 휘둥그래지더니 그는 곧 퉁기듯 신형을 곧추세우며 낚싯대를 끌기 시작했다.
"그래, 평생이다! 네놈이 평생 동안 노부들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오늘 기필코 걸려들고 만 것이야!"
하지만 온 전신이 긴장으로 가득 차고, 마의노인은 득의하기 앞서 추호도 방심 없이 낚싯대를 끌고 늦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콰아아아-!
그러나 대체 낚시에는 무엇이 걸렸는지 용틀임하듯 흐르는 급류 속에 한 번 처박혀 들어간 찌는 보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만년묵철간만 부러질 듯 더욱 휘어져 갔다.
뿐 아니라 그 엄청난 인력에 마의노인마저 휘청, 몸의 중심을 잃고 점차 물 앞으로 끌려가고 있었으니….
"대, 대단해!"
순간 마의노인은 혼비백산하여 온몸과 두 발에 혼신지력을 집중시켰다.
파악-!
찰나 마의노인의 발이 그대로 밟고 있던 바위를 뚫고 발목까지 푹, 처박혀 들어갔다.
"흐아!"
동시에 노인은 계곡이 쩡쩡 울리는 호통과 함께 다시 한 번 이를 악물며 잡고 있던 만년묵철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는데….
촤촤촤촤촤-!
그러자 비로소 물 속에 처박혀 들어갔던 팽이 같은 찌가 서서히 위로 당겨져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노수(怒水)가 마구 요동을 치며 물살 위로 뭔가 거대한 은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오너라!"
노인은 전신에서 비 오듯한 땀을 쏟으며 낚싯대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폭갈을 터뜨리며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뭔가를 잡아끌 듯 홱 낚아채었는데….
쏴아아악-!
콰드드드-!
신이(神異).
그와 함께 장내에는 또한 신이(神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엄청난 광경이 일어났는데….
홀연 노인이 오른손을 뻗었다 끌어당기자, 격하게 요동을 일으키며 떠올랐던 은빛 물체가 허공으로 홱 솟구쳤다가 급기야 털썩 그가 선 암벽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인데, 보니 그것은 무려 길이 일 장에 가까운 거대한 은빛 잉어가 아닌가.
사람 키의 세 배에 가까운 거대한 괴물(怪物)!
콰드드드-!
놈은 물 밖으로 끌려 나오자 마구 요동질을 쳤다. 자칫 꼬리지느러미에 채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여지없이 수 장 밖으로 내팽개쳐질 판이었다.
이를 본 마의노인의 입에서 벼락 같은 대소가 터져나왔다.
"크하하하하…. 그래, 마침내 만년화리(萬年火鯉)여!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영물(靈物)이라 불리는 네가 급기야는 노부 평생의 심혈에 패(敗)하고 말았구나!"
만년화리(萬年火鯉), 곤(鯤)!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신이(神異).
본시 이 희대의 영물은 거의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세간에는 만 년 간을 물 속에서 살아간다는 잉어였다.
백 년이 지나면서 몸 속에 내단(內丹)이 형성되고, 천 년이 지나면서 그 내단이 성숙되며, 마침내 만 년이 되면 그것이 여의주(如意珠)로 화해 대붕(大鵬)이 되어 승천(昇天)한다고만 막연히 전해지는….
또한 그 내단을 사람이 취하면 벌근세수(伐筋洗髓)하여 이랑(異郞), 즉 신에 도전하는 신력(神力)을 얻게 된다고도 전해지는 천고(千古)의 영물!
일컬어 이를 곤(鯤)이라고도 한다.
한데 이 막연히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던 영물을 노인이 잡아 올린 것이었으니….
"으하하하하…, 그러하다! 결코 하늘이 무심한 게 아니야! 이는 필경 너로 하여금 무수한 인명을 살리라는 천의(天意)이니!"
마의노인은 계속 미친 듯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다시금 한 손을 칼날같이 세워 퍼드득거리는 만년화리에게로 뻗어냈다.
순간 놀랍게도 만년화리의 배가 길게 갈라지고 속에서 계란만한 금빛 화리의 내단(內丹)이 그 자태를 드러내었는데….
푹-!
그것을 꺼내 드는 순간 노인의 눈에서 봇물 같은 눈물이 터져나왔다.
"이것을 키우느라 천 년을 살아온 네게는 참으로 미안하구나! 하나 이로 인해 수만의 인명을 살릴 것이고, 이 또한 네게는 살신공양(殺身供養)이 될 터이니!"
그는 내단을 곱게 곱게 천으로 싸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응?"
막 내단을 취해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려던 노인의 눈에 얼핏 놀라움에 찬 기색이 어렸다.
홀연 저만치 거친 물결에 휩쓸려 누군가 사람의 시체가 하나 떠내려온 것.
'싸움이 있었던가?'
이에 마의노인은 서둘러 낚싯대를 휘둘러 시체를 건져내었다.
"지독하군!"
동시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찡그리고 말았는데….
그만치 건져 올린 시체가 처참했던 것이다.
대체 나이가 얼마인지, 용모가 어찌 생겼는지….
시체의 온몸은 무참하게도 사지가 으스러져 있었는데, 팔다리가 꺾여져 있음은 물론 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한데 그런 와중에도 시체는 손에 하나의 커다란, 기광이 흐르는 검은 우산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ㅎ! 이건…?"
찰나 이것을 본 마의노인의 눈이 커다랗게 경악으로 휩뜨여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없다! 이 병기는 분명…."
이어 안색이 흑빛이 된 마의노인은 급급히 시체의 으스러진 손목을 잡았는데….
미약하나마 아직 맥박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
슈아아악-!
동시에 마의노인은 지체할 겨를도 없이 벼락같이 떠내려온 인물을 들쳐 안고 신형을 날렸다.
대체 떠내려온 인물과 마의노인은 대체 누구인지?
* * *
초옥(草屋).
그것은 분명히 초옥이었다. 무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무애봉(無涯峯) 위에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앉은 듯한 조그마한 초옥.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어찌 이렇듯 거칠고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위에 이런 초옥이 있을 수 있는지….
그러나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떠내려온 인물을 들쳐 안은 마의노인이 급박히 들이닥친 곳도 바로 이곳.
* * *
쾅-!
마의노인은 도착하는 즉시 문을 박살낼 듯 어깨로 밀어붙이며 초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삼제(三弟)! 무슨 일이냐?"
하나의 마루턱에 방 세 개가 덩그러니 붙은 구조. 동시에 각 방마다에서 세 명의 노인이 서둘러 뛰어나왔다.
마의노인은 급박히 입을 열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대사형! 이 녀석을 자세히 보십시오!"
"웬 으스러진 시체를…."
일순 세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혹시 이 병기, 기억하십니까?"
마의노인은 급급히 건져 온 인물과 더불어 떠내려온 기이한 우산을 내밀었다.
순간이었다.
"그것은…?"
세 노인의 안색이 홱 하니 대변했다.
동시에 셋 중 뒤켠에서 모습이 확실치 않던 자그마한 체구의 한 흑의노인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흥! 틀림없군! 그것은 분명 광천양이라는 그 애송이가 지녔던 괴병(怪兵)이군."
한데 이 흑의노인, 모습이 결코 낯설지가 않다.
대체 나이가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모를 만큼의 주름 투성이 얼굴에 보기조차 섬뜩한 녹색 안광이 이글거리는 세모꼴의 사안을 지닌 괴노!
절독천공(絶毒天公)!
그러했다. 그는 분명 지난 벽파문의 정의당주(正醫堂主)로 천양이 무저공포갱을 급습하여 지옥곡이 궤멸될 당시, 그에 의해 풀려난 천년마종주(千年魔宗主) 무극삼왕(無極三王)과 함께 실종되었던 그 섬뜩한 귀노(鬼老)가 아닌가?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노릇, 그렇게 실종된 그가 대체 어떻게 이번에는 이 삭막한 봉우리 위의 초옥에 버티고 있는 것인지….
덜컥-!
그러고 보니 천양을 안고 온 마의노인과 또한 절독천공과 더불어 내실에서 나온 두 노인!
그러고 보니 그들의 모습 역시 낯설지가 않다.
천년마종주(千年魔宗主) 무극삼왕(無極三王)!
- 녀석!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했다. 비록 천양과 처음 만났을 당시, 공포갱에 갇혔을 때의 귀신 같은 몰골은 말끔히 씻고 있었으나 벼락같이 쏟아지는 눈의 신광과 강퍅해 보이는 모습 등등은 분명 대종사 무극삼왕이 아닌가.
이것은 정녕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절독천공과 십만마교의 대종사로 불리는 무극삼왕이 어째서 이런 초옥에서 함께?
괴사(怪事)!
이때였다. 절독천공이 으스러진 인물의 이모저모를 세세히 뜯어보더니 다시 푸스스 눈에서 시퍼런 녹광을 쏟아 냈다.
"역시 틀림없어! 비록 몰골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이 녀석은 틀림없는 광천양이야. 골격, 모습이 똑같다."
"맞다고?"
찰나 무극삼왕의 얼굴이 즉시 휴지쪽같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아니해도 곧 찾아 무림으로 나가려던 판국에 놈이 왜 이런 몰골로 노부들의 앞에…?"
절독천공의 안면 역시 무참히 찡그려졌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최악! 진맥을 보니 이 놈은 기경팔맥이 터져 내공을 잃은 상태에서 또 누군가의 장력을 맞고 오장육부와 백팔 경락이 모조리 으스러진 채 어딘가에서 떨어져 내린 것 같소. 아직은 맥박이 뛰고 있지만 곧 숨을 거둘 모양!"
"말도 안 된다! 살릴 도리는 없는가?"
순간, 무극삼왕은 안색이 흑빛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절독천공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틀렸소. 사형들도 알다시피 내 의술은 사흘 만큼의 생기만 남아 있어도 어떤 죽어 가는 사람이건 살릴 수가 있소."
- 사형(師兄)!
이 또한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발언.
"하지만 이 경우는 어렵지! 맥이 뛰고 있다 해도 녀석은 이미 숨을 거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더욱이 보다시피 오장육부와 사지가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이라,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해도 놈을 살리기란 불가능하오."
"죽는다?"
무극삼왕의 낯빛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그중 물 속에서, 즉 천양을 안고 온 마의노인이 나무토막 같은 표정으로 급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하다면 곤(鯤)의 내단(內丹)은? 영물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단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인가?"
순간이었다.
"만년화리?"
절독천공의 만면에 일순 커다란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그렇다면 삼사형, 그 놈을 잡으셨다는 말씀이오?"
마의노인은 급급히 품속에 싸 넣어 두었던 곤의 내단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 천우신조였지. 우리의 평생 심혈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저녁 나절에…."
씰룩, 찰나 절독천공의 안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그러나 그는 곧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마의노인의 손에서 곤의 내단을 빼앗듯 낚아챘다.
"흥! 그렇다면 하늘의 뜻이군. 평생을 두고 별의별 염병을 다 떨어도 안 잡히던 놈이 이렇게 공교롭게 잡혔다니!"
마의노인의 만면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쳤다.
"무슨 뜻…?"
"흥! 그래도 모르시겠소? 본시 이 만년화리란 놈은 천지간의 정기(精氣)를 타고나는 영물이지!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고, 죽은 것 같아도 살아 있으며, 이천 년 성상을 우둔하게 곤(鯤)으로 물 속에서 웅크리다가 마침내 일만 년 만에 대붕(大鵬)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따라서 인연이 없으면 정성이 하늘에 닿아도 잡히지 않고, 인연이 있으면 하루 아침에도 잡히기도 하는 영물! 한데 이 희대의 영물이 우리 평생에 잡히지 않더니만, 오늘 이 얄미운 애송이와
함께 나타났으니! 결국 이는 이 녀석의 인연으로 잡힌 것이외다. 그러니 하늘의 뜻이지."
천의(天意).
"그렇다면…?"
절독천공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라신선은 못 살려도 이것이면 살릴 수 있지. 녀석을 살리라고 하늘이 보내 준 물건인데, 이것으로 어쩔 수 없다면 그것은 천의가 아니지 않소."
- 살릴 수 있다!
순간 무극삼왕의 만면에 비로소 다시 화색이 돌아왔다.
"하다면 어서 해라! 늦기 전에 어서!"
절독천공은 마의노인의 손에서 천양을 받아 안으며 다시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긴장했구먼. 정말이지 이가 갈릴 정도로 복연(福緣)도 두터운 놈!"
이어 절독천공은 급기야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실내로 들어갔다.
"곤(鯤)의 인연을 가진 게 녀석이라?"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며 무극삼왕은 크게 긴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의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 옳기도 한 것 같군요. 녀석은 벽파문의 공포갱에서 우릴 구했고, 이번에는 우리가 녀석을 구해 냈으며, 넷째의 말마따나 평생을 가도 잡지 못했던 놈이 오늘 제멋대로 잡혀 왔으니! 우연도 필연이라 할 것 같으면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재미난 인연!"
대사형이라 불리운 첫 번째 노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헛헛…, 딴은 정말 탄복해 마지않을 일이로군! 하늘의 섭리(燮理)라는 게 어쩌면 이렇게 오묘한 것인지?"
두 번째 노인이 입을 열었다.
"하다면 이는 아직도 우리 십만마교(十萬魔敎)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되는 것입니까?"
"모를 일!"
대사형으로 불리는 노인이 무겁게 미소지었다.
"하나 최선은 다해 봐야겠지. 어쨌건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은 셈 같으니까."
마의노인이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있다는 말씀이 좋군요. 그럼 처음의 계획대로! 어차피 우리야 살 만큼 산 몸이니, 더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기이한 대화였다.
마의노인과 만년화리와 무극삼왕과 절독천공!
이쯤 되면 이날, 그가 구당협의 드센 물길 속에서 곤(鯤)을 잡고 천양을 물에서 건져내면서부터 지금까지 벌어지고 이 일련의 일들은 분명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괴사(怪事)의 연속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더욱이 대화 내용들을 보면, 벽파문의 정의당주로 크게 행세하던 절독천공과 반대로 그 지옥 같은 공포갱 속에서 산 귀신 꼴을 하고 있었던 무극삼왕이 사형제지간 같다는 너무 기이한 의문 등….
속에 대체 어떤 내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 * *
지옥과 같은 어둠.
휘류류류류!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새 울음소리.
'여기가 대체 어딘가?'
그것은 아주 희미한 지각(知覺)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속에서 천양은 급기야 그 음습한 오랜 잠 속에서 희미하나마 천천히 의식을 뒤찾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우문개로의 그 더러운 음모로 인해 파동(巴東)의 벼랑에서 군웅들의 합공을 받고 벼랑으로 떨어졌었어.'
더불어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은 역시 악몽 같았던 그날의 일!
또한 몸이 마치 구름 속에 떠 있는 듯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인가? 아니면 또 누군가의 구원을 받은 것인가?'
비몽사몽(非夢似夢)처럼 온갖 상념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히면서 무수한 혼돈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눈을 떴다.
"아…."
순간 아리도록 부서지며 동공으로 파고드는 빛!
눈이 부셨다.
낮!
그러했다. 그 시각은 한창 눈부신 햇살이 난반사를 일으키는 정오였고, 천양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포근한 침상 위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코로 스며드는 후각을 자극하는 탕약 냄새.
그는 급급히 좌우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우선 썰렁할 만치 아무 장식도 가구도 없는 실내의 정경이 먼저 눈에 보였고, 또한 그 실내의 한쪽 벽면에서 조그마한 화로(火爐)를 놓고 열심히 무엇인가 약을 달이는 한 흑의괴노(黑衣怪老)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찰나 천양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악성을 토하며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벽면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흑의노인, 그는 분명 벽파문에서 본 그 소름끼치는 절독천공이 아닌가.
"흥! 얄미운 녀석, 마침내 되살아났군."
하나 절독천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기사 오늘 내일로 정신을 차리리라 예상했었다만!"
그러나 음성 속에는 뿌듯한 기쁨 같은 것도 다소나마 어려 있었다.
'무슨? 하다면 설마 내가 이 귀신 같은 늙은이의 구원을 받았단 말인가?'
이에 놀라기는 천양이 더 놀랐다.
실로 지옥곡에서 극약을 제조할 때의 모습 등, 그라면 상상한 해도 만정이 떨어지는 판국인데, 이런 귀노에게 자신이 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절로 소름이 쭉 끼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말을 꺼낼 겨를도 없이 바로 이때였다.
와당탕-!
"분명히 애송이의 음성이 들렸다! 넷째! 녀석이 의식을 뒤찾은 것이냐?"
돌연 쩌르릉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커다란 음성이 터지며 실내의 문이 부서질 듯 급하게 열리더니, 실 밖에서 다시 세 명의 괴노가 부랴부랴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극삼왕, 그들이었다.
"오…."
동시에 그들은 상체를 일으키고 앉은 천양을 보고는 만면에 그야말로 터질 듯 엄청난 희열을 떠올렸고, 계속 실내가 허물어져 내릴 듯 광열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맞았어! 역시 네녀석이 되살아난 것이로군!"
"핫하하… 이 녀석! 먼저 축하부터 해 주마!"
마치 자신들이 되살아난 것인 양 기뻐하는 모습들.
하나 천양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노선배님들은…?"
동시에 무극삼왕 중 대사형으로 불리우던 강퍅한 인상의 괴노가 썩 앞으로 나섰다.
"헛헛헛…. 녀석, 아직도 어리벙벙한 모양이로군! 너는 벌써 노부들을 잊었단 말이더냐?"
그러나 천양은 여전히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
"벽파문의 공포갱을 기억해 보거라!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말해 줬었지?”
"ㅎ!"
순간 천양의 부리부리한 눈이 커다랗게 휩뜨였다. 비로소 흐릿하나마 그들의 모습에서 지난날 공포갱 속에 갇혀 있던 세 괴인의 모습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 분 노선배님들은…?"
대사형이라 불리는 노인이 다시 통렬한 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하…, 그러하다! 우리가 바로 그 지옥 같았던 뇌옥 속에서 네놈의 도움을 받았던 세 괴물들이지!"
이어 그들은 다투어 스스로를 밝혔다.
"노부가 바로 첫째 전륜왕(轉輪王)!"
"광음왕(廣音王)!"
"지국왕(支局王)이다!"
그 가공할 성명들!
천양은 난데없이 벌어지는 이 느닷없는 일들에 혼이 달아나는 듯한 기분.
끝으로 절독천공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난 천독왕(天毒王)이야."
천독왕!
순간, 천양의 가슴속에 급기야 엄청난 의문들이 마구 치솟았다.
"대체 뭐가 뭔지? 하오면 우선 후배를 구하신 분들이 세 분 노선배님?"
절독천공이 계속 시큰둥하게 말했다.
"흥! 세 분 선배님이 아니라 네 분 선배님이지! 숨이 이미 끊어져 다 죽어 가는 너를 건져 온 것은 삼사형(三師兄)이었지만, 하늘로 통하는 내 의술이 없었다면 어디 네가 살아날 성 부르기나 할 거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놈을 되살려 놓은 것이니, 고마운 줄이나 알거라!"
"숨이 이미 끊어진 채?"
천양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다면 설마 불초가 죽었었다는 말씀?"
그러자 천양을 건져 온 마의노인, 즉 무극삼왕의 셋째인 지국왕이 커다랗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헛헛…, 그랬지! 노부가 너를 건져 올렸을 때만 해도 네녀석은 분명 전신이 모조리 으스러진 채 끊어질 듯 맥박만 뛰고 있던 송장이었어! 한데 이렇게 되살아난 게야!"
정녕 상상치도 못한 괴사!
"그럴 수가…?"
천양은 일순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다시 불쑥 떠오르는 커다란 의문!
"한데 대관절…, 진정코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날 세 분 노선배님들께서는 지옥곡을 붕괴시키고 사라지셨는데, 이미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절독당주님과 이렇게 함께 계시다니? 더욱이 눈치를 보면 네 분은 동문사형제 같으신데…."
그러자 대사형으로 불리는 무극삼왕의 첫째인 전륜왕(轉輪王)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헛헛…, 의문스럽기도 하겠지!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진다!"
이어 그는 나머지 세 노인과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헛헛…, 하지만 귀담아들어 주면 고맙겠구나. 사실 아직 천하인(天下人)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우리 네 사람은 본시 동문사형제지간이다!"
"역시…!"
천양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실로 십만마교의 대종사 무극삼왕과 벽파문의 의당주 절독천공이 동문사형제였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하다면 어째서 절독 선배님은 벽파문의 당주 생활을 하시는데, 세 분은 공포갱에 감금되어 계셨던 것입니까?"
그러했다. 이는 확실히 기괴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일!
전륜왕은 이에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헛헛…, 그 속에는 차마 웃지 못할 기막힌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지! 너는 혹시 벽파문이 석년 존마성의 후신(後身)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냐?"
천양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면 혹시 일백 년 전의 그 존마성이 우리 십만마교에서 갈라져 나간 반도(叛徒)들이었다는 사실도?”
덜컥, 순간 천양은 가슴이 떨어져 내렸다.
"존마성이 십만마교의 반도?"
실로 상상치도 못했던 사실!
전륜왕은 무거우나마 웃음을 보였다.
"헛헛…, 그러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석년 존마(尊魔)의 난(亂)을 일으켰던 운중독비(雲中獨臂) 상군악(尙群嶽)이 본 십만마교의 제자였다는 것이지. 곧 우리에게는 사숙(師叔)뻘이 되는 인물!"
"그럴 수가…?"
천양은 이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존마성주(尊魔城主) 운중독비(雲中獨臂) 상군악(尙群嶽)!
기실 천하에서 그의 출신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년 그는 천하무림을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몰고 갔으나 천하인들은 일천아수라군이나 그의 가공할 무예, 야심 등 부수적인 것들만 알았을 뿐 종내 그의 사문이나 출신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로 인해 그의 신분은 아직까지도 신비 속에 가려져 있었던 터이었다. 한데 설마 그가 십만마교의 반도(叛徒)였다니.
"헛헛…, 사실이다!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천하가 발칵 뒤집어질 일이지!"
전륜왕은 계속 무겁게 말을 이었다.
"더불어 그에 대한 내막을 말하자면, 세간에는 우리 십만마교에 천하삼대절기(天下三大絶技) 중의 하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곧 우리 십만마교의 무공을 총 집대성시킨 자오수라멸겁강(子午修羅滅劫 )이 그것!"
환사소수, 패왕산법과 더불어 천하삼대절기 중의 하나로 불리는 수라멸겁강(修羅滅劫 )!
"들은 바 있습니다. 전개하면 온몸에서 핏빛 혈강(血 )이 뿜어져 나와 닿는 대로 무엇이건 파괴해 버린다는 공전(空前)의 강기공!"
전륜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고, 그 밖에 본문에는 또 하나의 가공할 기예가 더 있지! 역시 본 십만마교의 무예를 총 집대성시켜 만들어 낸 천마벽라와선기(天魔碧羅渦旋氣)가 바로 그것이다."
천마벽라와선기(天魔碧羅渦旋氣)!
생소한 이야기였다.
"헛헛…, 또한 이 두 가지의 무공을 집대성시키신 분은 본 십만마교의 이십사대(二十四代) 조사(祖師)이신 천마대공(天魔大公)으로, 곧 노부들의 사조부(師祖父)가 되는 분이시지. 결국 노부들의 선사님과 함께 사숙조가 된 운중독비 상군악의 스승이신 어르신이야."
"천마대공!"
전륜왕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헛헛…, 그러하다. 하나 실상 이 두 가지의 무예를 만들어 내게 된 시기는 보다 훨씬 더 오래인 이백 년 전부터였는데, 까닭은 환사(環沙)의 난(亂) 때문이었지. 당시 출현한 환사에 의해 우리 십만마교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역대 조사님들이 그를 깨뜨릴 더욱 강한 무예를 창안해 내자는 일념을 지닌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즉, 환사가 또 나타났을 때 다시는 그런 참패를 보지 않으려 한 일념이었던 것이다."
광음왕이 말을 받았다.
"다시 말하자면, 사조부님께서는 진행되어 왔던 무예를 완성시키신 분이지. 한데 완성시키고 난 후에는 오히려 크게 후회를 하고 마셨는데…, 이는 도저히 세상에 있어서는 아니 될 역천마공(逆天魔功)이 탄생되고 만 때문이었어! 내용이 사뭇 무서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흑심을 품고 이것을 사용할 때는 무림을 멸망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지국왕이 말했다.
"사실이다! 이에 사조부께서는 곧 완성된 그 두 가지 무예를 없애 버리려고 마음먹으셨다. 만들기는 십만마교의 자위(自衛)를 위해 만들었지만, 자칫하면 이것은 오히려 우리를 망치게 할 수도 있는 무예였으므로!"
'대체 위력이 얼마만한 것이기에…?'
천양은 크게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씰룩, 그와 함께 지국왕의 안면 근육이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허허…, 한데 그런 사실을 상군악이 알고 말았어! 직후 놈은 인륜을 저버리고 사부인 천마조사를 암습, 두 가지의 역천마공 중 수라멸겁강의 비급을 탈취하여 달아나고 만 것이야."
"…!"
순간 천양은 크게 놀랐다.
- 사부를 급습하고 비급을 탈취해 갔다!
진정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광음왕이 섬뜩하게 안광을 폭출시키며 말을 이었다.
"이후 놈은 스스로를 마존(魔尊)이라 자처하며 존마성을 세우고 천하를 휩쓸어 낸 것이다! 마령불복(魔令不服) 시천하(屍天下)…. 결국 천마조사께서 우려하신 대로 놈은 그것으로 천하를 피바다로 만들고 만 것이지."
천양은 이에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 그가 수라멸겁강을 전개한 것을 본 인물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전륜왕이 섬뜩한 신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다행한 일이지! 만에 하나라도 그가 멸겁강을 당시 전개했다면 출신이 밝혀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 십만마교는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되고 말았을 테니까! 하나 불행 중 천만다행인 것은, 당시 그는 탈취해 간 무공을 고작 오 성밖에 수련치 못했다는 것이다. 수라멸겁강은 십 성이 넘어서야 혈무(血霧)가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상군악이 수련한 수라멸겁강이 고작 오 성!
순간 천양은 한 번 더 가슴이 철렁했다.
기실 오 성의 무예만으로 무림을 거의 멸망지경으로 몰고 갈 정도였다면 그것을 십이 성까지 수련했을 때는…?
"다시 말해 그만치 수라멸겁강은 위력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지만, 수련하기도 어렵다는 것이지!"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에 설마 그런 엄청난 무공이…?'
이에 천양은 크게 표정을 굳히며 다시 질문했다.
"하다면 천마벽라와선기(天魔碧羅渦旋氣)는? 천마조사께서는 왜 그것으로 상군악에 맞서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광음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헛허…, 거기에는 또 하나의 기막힌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지. 천마조사께서 완성시킨 이 두 가지 무공은 천하를 멸겁의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가공할 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연공하기까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난제(難題)가 함께 있었던 것이야."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곧 상군악이 탈취해 간 수라멸겁강은, 십이 성까지 대성(大成)하려면 최소한 백이십 년 공력, 즉 최소한 이 갑자 이상의 공력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난제가 있다! 그로 인해 상군악은 대성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또 하나, 천마벽라와선기는 하늘의 복연(福緣)이 있어야만 수련이 가능한 것이다."
"하늘의 복연이라면?"
"간략히 벽라와선기는 자체의 기운이 너무 극강(極强)하다는 것이 난제였다. 그로 인해 일반적인 사람이 자칫 이것을 연성했다가는 백팔 경락이 모조리 타 버린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무공이지."
실로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기본적으로 최소한 이 갑자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만 간신히 수련 가능한 무공과, 복연이 하늘에 닿지 않으면 전신이 모조리 타 들어가 버리는 극강의 힘을 지닌 무공!
"헛헛…, 때문에 당시 상군악은 급한 성격 탓으로 미처 이 갑자의 내공을 다 갖추기 전에 그것을 수련하여 무림에 나섰기에 패망(敗亡)한 것이고, 또한 우리는 복연이 하늘에 닿지 못했기에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고작 오 성의 수라멸겁강만으로도 그는 무림을 거의 몰락지경까지 이끌어 나가고 말았던 것이니!"
천양은 이 기막힐 고사(古事)에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하다면 천마벽라와선기는 있어도 수련할 수 없는 무예라는 것인데, 대체 하늘의 도움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광음왕이 피식 실소 지었다.
"따지고 보면 바랄 수도 없는 어이없는 것들이지. 두 가지로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긴 한데, 우선 그중 첫째가 천지정화의 기운을 타고난 천 년을 사는 영학(靈鶴) 천년자로(千年紫鷺)의 생혈(生血)을 복용해 백팔 경락을 강철처럼 만들거나, 또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곤(鯤)의 내단(內丹)을 복용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어."
"하하…."
순간 천양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코 웃음이 헤픈 그가 아니었으나 광음왕의 말이 그를 웃게 만든 것이다.
기실 광음왕이 말한 이 두 가지 영물은 전설 속에서나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희귀한 영물(靈物)들로, 말 그대로 간혹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
이에 천양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그것은 익히지 말라는 소리와 같군요."
"그런 셈이지!"
광음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문제는 그런 따위가 아니다. 너는 이미 현 무림에 자오수라멸겁강을 십이 성까지 수련한 인물이 나타났음을 아느냐?"
쿵-!
순간 천양은 둔기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슨? 그 말씀은 설마…?"
전륜왕이 나섰다.
"그래, 바로 우문개로다. 상군악의 외손(外孫)이 되는 놈! 석년 상군악은 수라멸겁강의 비급을 혼자 안고 죽었던 것이 아니라, 남 모르던 딸아이에게 남겨 두었던 것이야! 놈이 그것을 얻어 급기야 십이 성까지 성취한 후 존마성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 것이지."
실로 엄청난 사실!
"우문개로가…?"
전륜왕의 눈에서 더욱 섬뜩한 신광이 뿜어졌다.
"사실이다! 그로 인해 우리 네 늙은이는 그를 맞아 불과 십합도 견디지 못하고 엄청난 내상을 입은 채 지옥곡의 감옥에 감금되고 만 것이지. 살려 둔 이유는, 천마벽라와선기의 행방을 알고자 한 것이었어."
또한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지옥곡을 눈 깜박할 사이에 초토화시켜 버릴 정도의 신력(神力)을 지닌 마도지존 무극삼왕이 우문개로의 십합을 견뎌 내지 못했을 정도라니.
천양은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가? 하다면 절독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의당주 생활을?"
전륜왕은 섬뜩한 시선을 절독천공, 즉 스스로를 천독왕(天毒王)이라 밝힌 막내 사제에게로 돌렸다.
"이 어리석은 녀석은 대가 좀 약했던 터라 적절히 현실과 타협을 했었던 것이지! 즉 우리는 그에게 이미 천마벽라와선기의 비급을 태워 버리고 없다고 했는데, 이 놈은 우리가 그것을 암기하고 있다고 우문개로에게 이야기한 것이야! 그리고 우문개로에게 동조를 한 것이지."
순간 천독왕의 볼이 퉁퉁 부었다.
"흥! 그나마 다행인 게지! 만약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다면 세 사형이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기나 했다고 보오? 특히 난 끝내 그 놈에게 맞설 수 있을 유일한 인간이 철담백면 자량, 그 녀석뿐이라고 판단해 마도(魔道)의 사활을 녀석에게 걸려고 했었던 터인데! 힘이 안 되면 머리라도 있어야 그 놈에게 맞서지!"
천양은 비로소 모든 내막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천독왕은 우문개로에게 승복하는 척 철담백면 자량과 더불어 우문개로에게 맞벽을 치려고 했었던 것이다.
"흥! 그리고 뭐 솔직히 말하자면 우문개로 그 놈도 인물이야 되지! 어차피 같은 십만마교의 출신인데, 본 마도가 한 번쯤 천하를 휘어잡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는 터이라!"
순간 전륜왕이 노성을 터뜨렸다.
"입 닥쳐라, 이 놈! 아무리 그렇다 손치더라도 키워 준 스승까지 해치고 무공을 겁탈해 간 반도 놈의 후손에게! 더군다나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야심을 취하려는 놈에게 동조한다는 것이 어디 될 성 부른 법이기나 한 일이더냐?"
찍, 천독왕은 즉시 입을 닥쳤다.
광음왕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허허…, 뭐 그래도 본성은 착한 녀석이지. 본래 이 놈은 절맥(絶脈)을 지니고 있었던 관계로,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어. 때문에 그다지 큰 무예도 익힐 수 없었고, 배운 것이 의술(醫術)과 독술(毒術). 사부님께서 속가에서 키운 사형제지. 해서 십만마교에서도 이 녀석이 같은 사형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뿐이다."
'설마 상군악과 십만마교에 이런 엄청난 비밀들이 얽혀져 있을 줄이야?'
천양은 비로소 모든 의문들이 후련하게 풀어짐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전에 없던 불안감이 서서히 가슴속에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는데….
"하면 근래 우문개로의 동태는?"
지국왕이 무겁게 웃었다.
"헛헛…, 우리가 너를 구해 온 것이 벌써 달포가 되었다. 그 사이 이미 천하무림에는 일천아수라가 출현했어! 놈은 일천아수라군과 세외세력들을 이끌고 이미 아미파를 비롯해 칠대문파를 모조리 피로 씻어 내린 상태다."
쿵-!
순간 천양은 다시 한 번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하다면 놈의 손에 이미 칠대문파가 괴멸을?"
실로 모발이 곤두설 만큼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지국왕은 계속 침통히 웃었다.
"헛헛…. 그래, 모조리 불타 버렸지. 더불어 만붕방까지 이에 대응해 맹위를 뻗치기 시작해, 중원사세가(中原四勢家) 등이 이미 그들에게 피로 씻기었다. 현 무림은 완전히 시산혈해(屍山血海)인 셈이다."
엉망진창!
"그럴 수가…?"
천양은 순간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실로 의식을 잃은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져 있을 줄은 꿈에서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다면 대영웅성은…?"
전륜왕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백 년 전처럼 마지막 보루가 되어 있다. 듣자니 백의적족검선을 주축으로 살아남은 칠대문파의 속가들과 흑백양도의 인물이 뭉쳐지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만! 하지만 그곳으로서는 이젠 안 된다. 세력 면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우문개로가 수라멸겁강을 십이 성 극성까지 수련한 이상 맞선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야."
천양의 눈이 더욱 붉게 충혈됐다.
"만약 백의적족검선과 천기달관 광천사가 맞붙으면? 그래도 수라멸겁강에 맞설 수 없다는 것입니까?"
광음왕이 웃었다.
"헛헛, 천기달관은 분명 강하지만, 거기에 우리 셋이 더 가세해도 어렵다고 본다. 놈의 몸이 일단 혈강에 휩싸이면 창검이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지. 따라서 강해도 천기달관의 검은 접근할 수 없고, 결국 이에 맞서자면 누군가가 버금가는 지상의 힘인 천마벽라와선기를 수련해 놈과 맞서는 수밖에 없다."
천마벽라와선기!
"하오나 그것은 수련하기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기실 천년자로나 만년화리인 곤의 내단을 취한다는 것은 전설일 뿐이오라!"
피식, 지국왕이 웃었다.
"물론 그렇지. 한데 만약 네가 그런 하늘의 복연이 있어 그것을 얻었다 친다면 어찌할 셈이냐? 너는 우리 십만마교의 제자가 되어 수라멸겁강에 맞설 용기가 있느냐?"
천양은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용기를 떠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아니라도 후배는 서둘러 놈과 맞설 채비를 해야 할 터이온데!"
"배짱 한 번 죽이는군."
피식, 지국왕의 입가에 다시 한 줄기 실소가 떠올랐다.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모두를 향했다.
"사형들, 어떻습니까? 이 녀석이 기꺼이 하겠다는군요?"
전륜왕이 웃었다.
"응, 그렇다는군. 그럼 하라고 해야지.”
코웃음과 더불어 천독왕도 한마디 던졌다.
"흥! 내가 아끼던 자량을 죽였으니, 패하기만 해 봐라! 아주 다리 몽둥이를 부셔 줄 테다!"
동시에 네 사람은 초옥이 떠나갈 듯 광열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하지만 천양은 그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뜻이신지?"
순간 천독왕이 다시 녹색 신광이 흐르는 눈을 돌려 말했다.
"흥! 정말 정신 나간 놈이군! 아무리 세상에 다시없는 의술이 있다 해도 죽은 놈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네놈은 기경팔맥이 모조리 터지고 사지가 으스러진 상태였는데! 이 놈아! 네놈은 지금 네 몸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느냐?"
"ㅎ!"
천양은 그제서야 비로소 한 가지 커다란 의문을 느꼈다.
기실 그는 분명 군웅들의 협공을 받고 떨어질 무렵, 기경팔맥이 터져 내공을 잃은 상태가 되어 간신히 걸음이나 옮길 상황이었다. 더욱이 군웅들의 협공을 몸으로 맞받았을 뿐 아니라, 그 엄청난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졌으니 지금쯤 분신쇄골이 되어 있어야 당연할 것! 한데도 현재의 자신은 전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히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이야기를 할 정도가 아닌가.
이에 그는 크게 의아함을 느끼고 급급히 슬쩍 단전에 공력을 조금 끌어모아 보았다.
강하게 기경팔맥이 터진 관계로 강하게 끌어올렸다가는 또다시 지옥 같은 고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와악-!
"앗! 아니?"
공력을 끌어올림과 동시, 천양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대경실색의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자신은 조심해서 한 모금 정도의 공력을 끌어올렸을 뿐인데도 홀연 단전으로부터 전에 미처 상상해 보지도 않았던 불기둥 같은 어마어마한 기운이 곧장 기경팔맥을 타고 사지백해를 일주천(一周天), 단숨에 임독양맥(任督兩脈)까지 치솟아 올라갔으니….
그 무시무시한 기의 움직임!
천양은 순간 이 엄청난 경이(驚異)에 놀라 눈을 찢어질 듯 휩뜨며 모두를 주시했다.
"도대체 이건…?"
"흥! 얄미운 녀석! 시험해 보고도 모르겠느냐?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된 것이다! 네놈은 이미 곤의 내단을 복용한 것이야!"
"무엇이라고?"
거듭되는 경이!
천양은 이에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실로 자신이 이미 전설 속의 영물 곤의 내단을 복용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무한(無限)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었다니!
이 무슨 대경실색할 일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말씀을? 그것이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천독왕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흥!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에 어떤 의술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는 없다고! 우습지도 않지만 네놈은 복연이 깊어 구당협에서 이미 산송장이 된 채 떠내려오던 날, 삼사형께서 만년화리를 잡아 올리셨던 것이지! 무려 반평생을 바친 일이었는데…. 아무튼 그것을 의식조차 없는 네녀석이 고스란히 짭짭한 것이야!"
정녕 상상치도 못한 일!
이에 천양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전설 속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놀랍지만, 더욱이 설령 그것을 잡았다 치더라도 그 엄청난 광세기연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극삼왕이 자신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실로 이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
지국왕이 웃었다.
"헛헛…, 자고로 남아란 되(斗)로 신세를 입으면 말로 신세를 갚으라 했지! 어쨌건 다 네녀석의 복연이다."
순간 천양은 그만 컥 하니 목이 막혔다. 실로 이런 정도의 광세기연은 고금(古今) 무림사(武林史)를 통틀어도 있을 수 없는 것!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올지?"
하나 전륜왕은 화등 같은 신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은혜라 할 것도 없다! 만년화리는커녕 네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산귀신 꼴로 공포갱에 갇혀 있었을 터이니까! 다만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니까, 너는 이제 싫어도 천마벽라와선기를 익혀 우문개로와 맞붙어야 해! 곤이 그날 잡힌 것은 아마도 그렇게 하라는 천의(天意)였을 것이다!"
천양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그는 약한 마음을 치우고 그 특유의 대범한 성격 그대로 성큼, 급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극삼왕과 천독왕에게 크게 삼배를 올렸다.
"제자 광천양이 네 분 사부님을 배알하나이다! 이 인연은 삼생을 지나도 끊을 수 없을 터이온즉, 부디 못났다 마시고 거두어 주시옵기를!"
천년마종주에 사제지례(師弟之禮)!
그것은 분명 하늘이 점한 필연(必緣)이었다.
- 녀석아! 우리는 분명히 다시 만날 것이다!
벽파(碧琶) 지옥(地獄)의 공포갱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만남이 급기야 이렇게 종국(終局)지어진 것이었으니….
찰나 무극삼왕과 천독왕의 만면에도 터질 듯 커다란 격정의 빛이 떠올랐다.
전륜왕이 산천초목이 떠나갈 듯한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사제들, 들었느냐? 이 녀석이 우리를 사부로까지 섬기겠다는군?"
광음왕도 웃었다.
"핫핫하…, 근 이십 년을 공포갱에서 고생한다 했더니만, 우리가 만년(晩年)에 복연(福緣)이 텄군요! 이런 걸작을 제자로 얻게 되었으니!"
"히히히…, 이제야 마음이 좀 풀린다. 사실 자량 놈이 그래도 제법 인간이라 우리 십만마교를 맡길 만하다고 여기던 중이었는데! 뭐 아쉬운 대로 네놈이라도 부려먹어야지!"
웃음!
그 속에는 어느새 사제간의 굵은 정(情)이 듬뿍 배어들고 있었다.
더불어 여기에 숨겨진 또 하나의 커다란 사실!
"히히…, 어쨌거나 이로서 우리 십만마교가 또 한 인물 배출해 냈군. 새 주인 탄생이다!"
그러했다. 상황이 이리 되면 천양은 결국 무극삼왕을 이어 십만마교의 차기 대종사(大宗師)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십만마교(十萬魔敎)!
태초(太初)에 천하에 무림이 시작될 당시, 처음 천하에는 흑도 백도 없었다. 오로지 치내법권(治內法權)과 치외법권(治外法權)이 존재했을 뿐.
중원이란 땅이 너무도 막막하여 조정(朝廷)의 치안(治安)이 미치는 곳을 치내법권이라 했으며, 그렇지 못한 곳을 치외법권이라 했다.
치외법권의 사람들은 그로 인해 늘 화적(火賊)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에 항상 불안한 생활을 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급기야 자위의 한 수단으로 힘이 강한 무인들에게 채 이르지 못하는 법 대신 곳곳에서 자신들을 지키게 했으며, 대가로 일 년에 한 번 곡물이나 금전을 거두어 지역을 지켜 주는 무인들에게 바쳤다.
이것이 무림(武林)의 시초였다.
그러나 수효가 많아지고 지역을 지키는 무리(幇派)가 도처에 많아지자, 곧 치외법권의 수호를 위해 모였던 무리들의 본래의 뜻이 변질되었다.
보다 큰 이(利)를 위해 영역 다툼이 시작되어 무리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천하는 다시 이를 막고 각 파에서 일어나는 시비를 중재하기 위해 무림맹(武林盟)을 원했다.
그 후로 칠대문파를 선두로 무림맹이 결성되었고, 다시 하나의 통치가 자칫 폭정이 될 수 있으므로 천하에는 노론과 소론을 요구해 무림은 흑백양도(黑白兩道)로 갈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무림맹이 통제를 해도 칼을 든 무림인들의 이권 다툼과 싸움은 끊이지를 않아, 천하인들은 무고히 영역 확장을 꾀해 남을 덮치는 세력을 사도(邪道)라 했고, 이를 중재해 나서거나 살육을 막는 쪽을 또한 정도(正道)라고 일컬었다.
그 서로를 죽고 죽이는 빈번한 싸움 속에 혐오를 느낀 인물들이 생겼다. 이에 그들은 흑(黑)도 백(百)도, 정(正)도, 사(邪)도 싫어 자유롭기를 갈망했고…. 그로 인해 이들이 무림맹을 떠나자 천하인들은 그들을 반도(叛徒)시해 마도(魔道)라 일컬었고, 흑백양도의 보호에서 벗어나자 도처에서 그들의 영역은 공격받았다.
이에 그들 또한 자위의 수단을 강구해 서로 자유롭게 지내긴 하되 유사시에 누군가가 공격해 오면 힘을 합쳐 막자는 의도에서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으니, 이를 곧 십만마교(十萬魔敎)라 일컬었다!
또한 소수(小數)로서 늘 흑백과 정사로부터 마도(魔道)라 멸시받으며 수시로 공격을 받아 온 만큼 이들은 보다 더 강력한 무예를 원해 소수이나 개개인의 무공은 언제나 흑백정사를 능가했고, 소수로서 안위를 지키려 한 만큼 강력한 방위군(防衛軍)을 두었으니…, 일컬어 곧 이들을 마도인 중에서 가장 극강한 인물들 십만을 엄선해 조직한 십만마군(十萬魔軍)이라 칭했다.
그 엄청난 힘!
멸시는 계속되었으나 이후부터 흑백정사도 더는 그들을 가볍게 상대할 수 없었고, 급기야 그들도 떳떳이 무림의 한 커다란 지류(支流)가 되어 이렇게 천 년을 이어 왔다.
십만마교의 인물들은 분명 누구보다 강하나 자유분방하다.
각자가 서로의 일을 참견치 않으며, 천하사에 쉽게 휘말리지도 않으며, 종주(宗主)가 있으되 마도(魔道)에 커다란 변(變)이 생기지 않는 한 나서지 않았다.
하나 만약 뭔가 일이 발생해 십만마군이 일어서면…? 그것은 곧 그때마다 천하무림, 흑백정사의 역사를 바꾸는 엄청난 공포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한데 오늘 이렇게 천양이 그 모두가 두려워하는 천년마종주(千年魔宗主)가 되었으니…. 결국 이는 또다시 한 차례 무림의 역사(歷史)가 바뀔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과연 그가 다시 무림으로 나가면 이제 어떤 풍운(風雲)이 일어날는지….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