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돌아온 영웅
한편 대영웅성.
이곳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이었다.
실로 지난 이 개월 사이 칠대문파(七大門派)와 사대세가(四大勢家)가 불길에 휩쓸리고 천하가 혈해로 화해 버린 지금, 어찌 천하를 이끌어 나가는 이곳이 암운(暗雲)에 잠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정전(大正殿).
"끝장이다!"
신임맹주 서문수련, 칠대장문인 등 수많은 인물들이 회랑(回廊)마다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흡사 무덤 속 같은 정적이 감도는 속에서 백의적족검선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 위세 높던 천하무림이 이곳과 군소방파, 그리고 개방을 제외하고는 파죽지세로 괴멸되었다!"
짧은 수개월 사이에 흡사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한 모습.
"볼 것도 없이 개방은 너무도 규모가 방대하기에 최후로 휩쓸어 버리고자 남긴 것일 테고, 다음 차례는 분명히 이곳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으로 놈들과 맞선단 말인가?"
음성이 떨렸다.
"이 꼴을 볼 것 같았으면 차라리 나오지나 말았을 것을!"
한결같이 빗줄기를 쏟아 낼 것 같은 어두운 모습들.
여전히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청성장문 능천학이 먹구름이 낀 듯 초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입이 열이라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지만, 하오나 노대인!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어떻게든 서둘러 힘을 재조정해서 놈들과 맞설 준비를 해야만…."
그러나 백의적족검선은 변함없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림없는 말! 자네는 설마 지금의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만붕방은 고사하고 벽파문만 보더라도 존마성의 패망 이후, 우문개로 놈은 장장 백 년에 거쳐 오늘에 대비할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휘하의 일천아수라군만 해도 역부족에 가까운 터인데, 여기에 수만에 이르는 세외의 검귀들까지 가세해 있는 터이니!"
안면 근육이 무겁게 씰룩였다.
"도저히 역부족! 세외는 고사하고 일천아수라군도 못 막는다. 맞설 힘이 있다면 군마성(軍馬城) 정도일 뿐이겠지."
천양의 성(城)!
모두의 안색이 더더욱 먹구름처럼 흐려졌다. 들어 그들도 이젠 봉황탄의 괴성(怪城)이 누구의 성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지 알았다.
혜공대사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면? 그래도 천기 대인과 노대인께서는 막역지우이신데…."
일순 백의적족검선의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헛헛…, 어림없는 말! 나는 누구보다 더 천사(天士)에 대해 잘 안다. 놈은 지난날 아들 내외가 죽었음을 알자, 그날로 제 한몸조차 돌보지 않고 무적궁에 뛰어들었을 만큼 무모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정(情)이 깊은 늙은이지. 그랬던 그가 젖을 얻어 먹이다시피 하면서 직접 업어 키운 하나 남은 피붙이 천양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입술을 깨물었다.
"따라서 본래는 천양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칠대문파와 이곳을 피로 씻어 내렸어야 했었다. 그나마 아직 손을 쓰지 않고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막역지우인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인 게지!"
"기다린다면?"
"허허…, 그 녀석은 무림이 벽파문에 절단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야. 그래서 모조리 끝장이 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최후로 자신이 나서서 놈들과 생사를 겨루려는 것이지. 한데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녀석에게 무슨 도움을 바랄 수 있겠는가?"
무서운 말!
혜공대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우리들이 죽음으로 실수를 사죄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서문 맹주를 종용한 것은 우리 어리석은 칠대장문인들이온즉!"
칠대장문인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사죄!
"헛헛헛헛…."
백의적족검선은 커다랗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다 해서 죽은 천양이 다시 살아올 리도 없고! 노부가 믿는 것은 그저 그 늙은이의 우정(友情)과 착한 마음 하나뿐이지. 비록 지금은 슬픔 때문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있지만, 곧 눈을 뜨리라 믿으니!"
"하오면 그때는?"
백의적족검선은 비로소 다소나마 생기를 되찾으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즉 군마성의 조직력과 천양의 네 아우라는 아이들은 실로 대단했어! 그들이라면 능히 일천수라군과 맞설 만하지! 하면 칠대문파와 흑백양도의 천하 군소방파가 세외세력과 맞붙을 수 있겠고, 기타 이곳과 개방의 인물들이 만붕방과 겨룰 만하다. 승부는 점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능히 백중지세는 되지."
희망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우문개로의 무위를 모르는 상태였을 뿐더러, 더구나 광천사의 분노가 언제 가실 줄 알고?
한데 이때였다.
"맹주! 지금 막 서첩(書帖)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쾅-!
돌연 정전의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며 또다시 총관 잠안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서첩?"
순간 백의적족검선을 위시한 모두는 안색이 확 일변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안은 급급히 백의적족검선의 앞에 도착해 피처럼 붉은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자칭 벽파문에서 왔다는 인물이 이것을 전하라 하더군요!"
"혈첩(血帖)!"
백의적족검선은 안색이 무섭게 굳어 급급히 그것을 펼쳐 들었다.
"뭐라고?"
또한 찰나, 그는 안색이 완전히 물 먹인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눈썹을 올올이 곤두세웠는데….
그도 그럴 것이 피칠을 한 듯 붉은 혈첩에는 이러한 글월이 휘갈겨 있지 않는가.
<고(告).
영웅성주(英雄城主)는 보라.
본 존마성이 몰락한 지 일백 년. 마침내 지루했던 상호간의 혈채(血債)를 종결지을 때가 온 것 같다.
달포 후, 십일월(十一月) 초이레(七日).
너희들의 정예를 이끌고 안숙(安肅) 낙안대평원(落雁大平原)으로 나오라!
그곳에서 최후를 결하도록 하자.
- 우문개로(宇文開路).>
쿵-!
순간 이를 본 중인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어찔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마침내 올 것이 온 셈인가?"
안색이 파리하게 핏기를 잃었다.
급기야 지난 존마성의 망령들이 무림맹에 결전을 통고해 온 것이다. 막다른 궁지였다. 응하지 않더라도 혈첩을 던져 온 이상, 필시 정면공격을 감행해 올 것이었다.
칠대장문인들의 입에서 치떨리는 비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냐, 좋다! 어차피 죽음은 이미 각오한 바. 만나 주겠다! 모조리 함께 죽기로 하자!"
번쩍-!
백의적족검선의 눈도 시퍼렇게 불을 뿜었다.
"기왕 피할 수는 없는 혈겁(血劫)! 차라리 이렇다면 잘된 것이다! 흩어져 하나하나 당하느니, 하나로 뭉쳐 들이치면 승수가 있을 수도!"
벽력같이 냉성을 토했다.
"속히 사실을 천하 각 군소방파에 알려 최정예를 선발해 낙안대평원으로 집결시키라고 하라! 결사(決死)의 채비를 한다!"
- 결사의 채비!
"봉명(封命)!"
군웅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일언지하에 무릎을 꿇었다.
일견하기에는 마침내 이렇게 최소한 대영웅성, 즉 천하무림의 흑백양도와 벽파문 간의 자웅(雌雄)이 겨뤄지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 * *
바로 그날, 대명(大明) 건문(建文) 오년 십일월 초이레, 낙안대평원(落雁大平原)!
"아니, 이건…?"
어느새 늦가을이라 황진을 말아 올리며 코끝을 말리는 삭풍(朔風)이 불어 오는 가운데 급기야 대영웅성을 비롯, 천하 흑백양도의 인물들을 운집시켜 이곳으로 출진(出陣)한 그들은 크게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놈, 우문개로!"
"속았다!"
바로 그러했다. 최후를 결하기 위해 동원해 나온 무림맹의 협군(俠軍)들이 총 십만(十萬)!
하지만 없었다.
온즉, 최후를 결해야 할 대적(大敵), 우문개로나 벽파문의 일천아수라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휘이이이이-!
장포 자락을 찢을 듯이 휘몰아치는 황토바람 속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약 삼만 가량의 적의호구(赤衣護具)를 걸친 흉흉한 무인들!
전혀 뜻하지 않게도 그들은 만붕방주 만붕왕 사도천악(司道川嶽)을 위시한 사대수라(四大修羅), 팔대흉신(八大凶神), 적검비붕검대(赤劍飛鵬劍隊) 등 만붕방 최강의 정예들이 아닌가.
"오오…, 이 놈 우문개로!"
칠대장문인을 위시한 군웅들의 눈에 즉시 비분의 핏발이 어렸다.
어차피 만붕방이 나왔다 한들 별 다름이야 없지만, 최후를 결하자고 한 우문개로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 이는 천하에 커다란 기만(欺瞞)이었다.
백의적족검선이 올올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진저리쳐지는 살음을 토했다.
"흐흐흐…, 이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치 않을 놈이 이렇듯 엄청난 기만을…!"
꽈르릉-!
천지가 뒤흔들리는 대갈을 터뜨렸다.
"사도천악! 받은 혈첩에는 분명 우문개로의 서명이 있었거늘, 대체 무슨 수작이더냐?"
폐부를 쓸어 내릴 듯 엄청난 분노가 뒤섞인 호통.
하나 사도천악의 입에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적족! 가소로운 것! 벽파문이나 우리나 다른 점이 무엇이 있단 말이더냐? 너희는 우문개로 하나만을 보고 있다만, 본좌는 너희와 우문개로 둘 다를 보고 있다! 다만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백여 장을 두고 말하는데도 흡사 옆에서 말하듯 똑똑히 들리는 천리전성술(千里傳聲術)!
"흐흐흐…, 간략히 말하자면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잠시 본좌와 우문개로가 합작을 한 것이다! 그의 서명을 보면 필시 눈이 뒤집힌 너희가 이렇게 오합지졸을 몰아 나올 것임이 틀림없고, 본좌가 잠시 네놈들과 놀아 주는 시각에 그는 도처의 빈집에다 불(火)을 놓자는 것이지! 그리고 일차에 너희들을 완전히 밟은 후 양패(兩覇)가 부담 없이 천하의 패권(覇權)을 놓고 최후를 결하자는 의도였다!"
"부저추신(釜底抽薪)!"
쿵-!
순간 백의적족검선을 비롯한 모두의 안색이 흑빛이 되어 버렸는데….
부저추신!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 가마솥에서 장작을 빼내는 것과 같은 삼십육괘계(三十六卦計)의 하나로, 일단 상대를 성 안에서 빼돌린 뒤 돌아갈 본거지를 없애 무리를 흐트린다는 책략(策略)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지금 영웅성은…?"
사도천악은 천지가 쩡쩡 울리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하…, 일천아수라군에 의해 잿더미로 화하고 있을 것이지! 뿐 아니라 여타의 방파들 역시 지금쯤 세외 놈들 손에 절단이 나고 있을 것! 이제 너희 놈들은 살아야 돌아갈 곳조차 없다!"
거듭되는 충격! 그러했다.
바로 같은 무렵….
* * *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
"크아아아악…!"
"와아악…!"
백의적족검선과 영웅맹의 정예가 자리를 비운 대웅영성!
말마따나 이곳은 일천아수라군을 맞아 하늘을 찌를 듯한 불기둥 속에 완전히 잿더미로 화하고 있었는데….
"모조리 태워라!"
"와아아악…!"
뿐 아니라 이는 정예들이 자리를 비운 흑백양도의 각 군소방파들도 매한가지였다.
신강의 신도문을 비롯한 국경을 범람해 온 세외 각 방파들!
그들의 손에 의해 남기고 온 모든 사람들과 물적자산(物的資産)들이 처절하게 도륙되고 불타오르고 있었으니….
* * *
"그럴 수가…?"
순간 군웅들의 눈이 하나같이 금세라도 핏물이 떨어질 듯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와 함께 삽시간에 사기가 저하되고, 두고 온 가족들 등의 걱정으로 마음이 타오르는 듯 급해졌다.
"흐흐흐…, 실로 그럴 듯한 책략이었군!"
백의적족검선의 눈은 그야말로 불덩어리였다.
"한들 불탄 집은 네놈들의 성(城)을 대신 차지하면 그만인 것이다! 또한 남기고 온 가족들의 보복은 지금 네놈들의 목을 치고 갚아 주면 그만인 것!"
이어 백의적족검선은 군웅들을 향해 천지가 허물어지는 듯한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렸다.
"서둘러 놈들을 치고 돌아가기로 한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력을 다해 단숨에 으깨 버려라!"
찰나간 광활하기 그지없는 대평원에 하늘로 충천하는 어마어마한 살기(殺氣)가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으와아아아아아…!"
콰두두두두-!
뒤따라 일어나기 시작한 지축을 뒤흔드는 대함성과 말굽성!
급기야 백의적족검선을 비롯한 대군웅들이 그들을 짓쳐 감으로써 지금껏 천하를 떨어 울리며 맹위(猛威)를 떨쳐 온 양패 만붕방과 대영웅성의 접전이 그 서막(序幕)을 연 것이다.
"흐흐흐…, 가소롭군! 그러한들 이미 실체인 칠대문파가 붕괴되고 우문개로의 수작으로 기둥 뿌리까지 비틀린 오합지졸들이!"
하지만 보다 만붕방은 여유가 있었는데….
"쓸어 버려라!"
"와아아아아…!"
콰두두두-!
뒤따라 백의적족검선의 호통에 이어 사도천악의 폭갈이 터지면서 마침내 만붕방의 무리들 역시 치달려오는 군웅들을 짓쳐 갔다. 이에 미친 듯 불어 오는 광풍은 급기야 비릿한 피 내음을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쌍방간의 그 가공할 살기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완전히 얼어붙게 하는 찰나였다.
콰콰콰콰콰콰쾅-!
"크아아아악…!"
"와아아악…!"
언제 싸움이 시작되었는가 싶게 서로를 향해 치달리던 쌍방간이 평원의 중앙에서 대격돌을 일으키고, 그 즉시 선혈이 폭우(暴雨)처럼 거꾸로 하늘로 치솟고, 오장육부를 뜯어 발기는 듯한 처절한 비명들이 산하(山河)를 진저리치게 했으니….
그 무참하고도 무참한 광경!
"와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낙안대평원은 죽음의 도살장(屠殺場)이 되어 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네 이 놈, 사도천악!"
"크하하하… 오너라, 적족!"
콰아아앗-!
투쾅-!
백의적족검선과 사도천악은 그야말로 천번지복할 살기를 내쏟으며 처절하게 뒤엉켜졌다.
"흐아아아…!"
"천하를 위해 죽는다!"
콰쾅-!
또한 칠대장문인들과 서문수련 등은 사대수라, 팔대흉신 등과 폭풍처럼 뒤엉켜졌으니….
연신 터져 오르는 굉음(轟音)!
"크아아악…!"
"으아아악…!”
그리고 비명, 피보라….
처음에는 대영웅성의 압도적 수적 우월로 최소한 백중지세(伯仲之勢)의 사투(死鬪)를 이루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이후 두 시진. 접전이 거듭되자 사태는 급기야 천천히 양상이 달라져 가기 시작했다.
천하인들은 단언적으로 대영웅성을 오합지졸, 혹은 늙은 호랑이라고 하였던가. 그러했다. 말 그대로 시작했을 때는 그래도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었던가 싶던 백의적족검선을 비롯한 십만의 협군(俠軍)들. 그러나 어이없게도 두 시진이 지나자 그들은 불과 삼만(三萬) 남짓한 만붕방의 조직력에 의해 패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아아아악…!"
터지느니 나오는 것은 그들의 비명이고, 쏟아지느니 그들의 피였다. 그렇듯 만붕방의 힘은 강했다.
더욱이 설상가상 어느 한순간,
"흐하하하… 가거라, 적족!"
쾅-!
"아아아악…!"
그나마 천하군웅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는 일이 벌어졌다.
천하이인(天下異人) 백의적족검선!
그러했다. 피의 혼돈 속에 휩싸인 전장의 한편에서 무려 두 시진이나 처절히 사도천악과 뒤엉켜 사투를 전개해 왔던 그가 어느 일순간 피비를 토하며 사도천악의 수법에 휘말려 퉁겨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앗!"
"사부님!"
순간 사방에서 처참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협군들의 안색이 사색으로 물들어 갔다.
아니해도 가뜩이나 악전고투가 되어 가는 싸움터에서 영웅맹의 기둥이 무너진 것이니!
"크핫하하하…, 적족! 그래도 참으로 대단하구나! 본좌에 맞서 팔십 노구(老軀)를 이끌고도 장장 두 시진, 일만 초를 받아 내다니! 과연 십이절대천의 대가(大家)에 부끄럽지 않았다!"
사도천악의 입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광폭한 대소가 터졌다.
"하나 본좌에 항기(抗旗)를 든 이상은 살려 둘 수가 없다! 가거라!"
콰르르릉-!
"크으으윽…!"
동시에 그는 한 번 더 폭갈을 터뜨리며 퉁겨져 미처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백의적족검선을 향해 폭풍 같은 쌍장을 후려쳐 냈다.
백의적족검선의 최후!
"아아악…, 사부님!"
"안 된다, 이 놈!"
찰나지간 사대수라 등과 대혼전을 벌이던 서문수련과 칠대장문인 등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백의적족검선을 죽음으로부터 지키고자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보다 한 발 앞서…, 순간이었다.
대관절 누구인가.
"멈추어라!"
꽈르르릉-!
그야말로 지축이 통째로 쪼개져 나갈 듯한 광열한 외침!
수만 군중들이 뒤엉킨 낙안대평원 전체를 한순간에 휘말아 버릴 듯한 어마어마하게 광열한 폭갈이 터지며 사도천악의 장력 속으로 뛰어든 하나의 인영이 있었으니….
투쾅-!
"크악!"
찰나 사도천악의 장력은 그대로 백의적족검선을 가로막은 인물의 일신을 후려쳤고, 또한 당연히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한데 여기에 실로 그 누구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기변(奇變)이 있었다.
분명 비명이 터지긴 터졌으나 그것은 정작 살장(殺掌)을 맞은 인물이 토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장을 날렸던 사도천악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었으니….
"흐으윽…!"
뿐 아니라 장력이 인영의 몸에 격중되는 순간, 사도천악은 당장 두 팔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충격을 받고 주춤주춤 술 취한 사람처럼 신형을 비틀거리며 연거푸 뒷걸음질치고 말았는데….
"저것!"
"저, 저럴 수가…?"
혼비백산(魂飛魄散)!
찰나지간 이를 본 서문수련 및 칠대장문인 등 군웅들의 눈이 불신의 빛으로 가득 찼다.
실로 이것은 거의 완벽한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번 눈을 씻고 봐도 그것은 분명한 현실이었고, 급기야 날렸던 장력으로 인한 흙가루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나타난 인영의 모습이 확연히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는데….
"으아아앗…!"
"저 인물은?"
순간이었다. 군웅들은 다시 한 번 심장의 고동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고 외마디 부르짖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실로 벼락이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
특히 백의적족검선과 사도천악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허어억…, 이럴 수가? 혹시 네녀석은…?"
순식간에 눈이 찢어질 듯 휩뜨이고 모발이 하늘로 곤두섰다.
실로 그도 그럴 것이….
보라! 막 나타나 백의적족검선을 가로막고 눈을 부릅뜬 채 사도천악을 노려보며 선 백의인영!
대체 그가 누군가.
작달막한 키에 떡 벌어진 완강한 어깨와 엄청난 정열이 이글거리는 대담한 눈빛에 전신에서 천하웅주(天下雄主)의 산악 같은 무서운 위엄을 가진 그!
"청해청년(淸海靑年)… 광천양(廣天陽)…!"
그러했다.
천양!
출현한 인물은 분명 천양, 바로 그가 아닌가. 곤(鯤)의 인연으로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 십만마교의 대종사가 된 그!
마침내 그가 긴 침묵을 깨뜨리고 이렇게 다시 무림에 재삼 그 모습을 드리우고 만 것이다.
또한 흑백양도, 정사! 천하무림에서 이미 그의 이름과 모습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단신으로 만붕방과 벽파문을 휘저은 무명(武名)도 그러했지만,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서 천하전역에 척살령의 방이 붙었던 얼굴이었으므로!
더욱이 실체의 얼굴은 이 시대 최극의 기인 천기달관의 일점혈육, 하나뿐인 손자(孫子)! 이로 인해 사위는 순식간에 엄청난 경악의 도가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윽고 경악을 깨고 천양의 입에서 엄청난 분노에 찬 특유의 다부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도천악! 역시 훌륭한 짓을 하고 있었군. 혹시 네가 나를 알아보느냐?"
"이럴 수가? 분명 죽은 것으로 알려진 네가 어떻게 아직?"
사도천악의 만면이 아연함으로 허옇게 죽어 갔다.
"더구나 노부의 장력까지 퉁겨 낸 지금의 그 반탄력은?"
천양의 눈이 어마어마한 정열로 타올랐다.
"별것 아니다! 죽은 자가 지옥에서 다시 살아 나왔으니, 그 정도야 지녔음 직하지!"
무형 중에 뻗쳐 나오는 사위를 장악하는 초극의 무서운 기도(氣道)!
"보다 네가 지난 수개월 사이 실로 지독한 혈사를 전개했더군! 사대세가 등을 피로 씻어 내고 도처의 군소방파들을 함몰시키는 등, 그렇게까지 천하를 잡아 보고 싶었더냐?"
사도천악은 부지불식간에 살갗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공포감을 느꼈다. 지금껏 두려울 것 없이 설쳐 왔던 삼패의 패주 중 하나인 그가 공포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천양은 천천히 한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무려 수천의 인명이 죽었다! 따라서 너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
후우우우웅-!
순간이었다. 천양의 쳐들려진 손에서 홀연 뭔가 용틀임하듯 한 기이한 파동음(波動音)이 울리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손이 푸른색 벽광(碧光)의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을 폭출시키며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돌변했다.
"환사소수(環沙素手)!"
찰나 사도천악의 안색이 다시 한 번 홱 돌변했다.
그러했다. 그것은 분명 천하삼대절기의 하나인 파괴의 손 환사소수를 전개할 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사도천악, 그가 누구인가. 최소한 지금껏 천하의 삼대 봉우리인 군림삼패의 한 패주로 군림해 온 만붕왕이 아닌가.
"크흐흐흐…, 오냐! 좋다, 애송이! 대체 죽었다고 알려진 네가 어떻게 이렇게 다시 나타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다면 이번엔 본좌가 네녀석의 그 질기디 질긴 목숨을 끊어 주지!"
이어 그는 온몸의 젖 먹던 힘까지 다한 혼신지력을 쌍장을 끌어올렸다.
청강수(靑剛手)!
사도 최강이라고 불리는 무공. 이것이 사도천악의 무예였다.
그러자 그 즉시 사도천악의 두 손도 푸른 벽록색으로 변해 가며 불타오르듯 한 어마어마한 정기(精氣)가 그의 일신에 뭉쳐지기 시작했는데….
"과, 과연 누가…?"
이를 보는 양쪽의 군웅들은 일제히 손에 땀을 쥐었다.
그리고 휘불어 오던 황토바람이 잠시 숨을 죽였다 싶은 순간,
"가라, 애송이 놈!"
"환사파벽력!"
두 사람의 몸이 번쩍 군웅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앞으로 쏘아 간다 싶은 찰나, 장내에는 즉시 쩡 하는 호통이 터졌다.
콰앙-!
"크와아아악…!"
또한 도저히 육안으로는 분간조차 못할 전광석화지각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녹광이 쫘악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지축을 들썩이게 하는 폭음과 더불어 산지사방으로 피보라가 튀어올랐다.
"으아악…, 저것은…?"
동시에 만붕방인이나 영웅성이나 상호를 가릴 필요조차 없이 공포에 찬 엄청난 경악성이 한순간 사위를 뒤흔들었다.
사도천악!
그러했다. 까닭인즉 지금껏 사도 최강의 웅주로서 만붕을 이끌고 한 시대를 구가했던 천하의 절대효웅이었던 그!
바로 그가 어처구니없게도 지금까지의 그 엄청났던 악명(惡名)조차 무색하게 천양의 단 일합에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터져 핏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도, 도, 도, 도저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모두의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천양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시선을 돌려, 이 광경을 멀리에서 지켜보면서 몸이 뻣뻣이 굳어진 사대수라와 팔대흉신 등을 향해 커다랗게 말했다.
"자, 이렇게 사도천악은 죽었다! 이치에 따르면 다음은 그대들의 차례! 하나, 나는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다! 살리기 위해서 죽였다! 한즉 그대들은 이제 속히 검을 거두고 돌아가라! 그대들은 비록 무수한 협의지사들을 죽게 했지만, 여기에서 칼을 거둔다면 맹세코 내가 전의 일들은 없는 것으로 하여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게 하리라! 이것은 모두가 사도천악의 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므로!"
순간 사대수라, 팔대흉신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악은 잠시 그들은 곧 흉흉한 눈빛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흥! 큰소리! 그래, 분명히 주군은 네놈의 손에 죽었다! 하나 그렇다 한들 너 하나로 이미 승전에 가까운 이 싸움의 판도가 뒤바뀌지는 않을 터! 주군의 복수를 하겠다!"
이어 사대수라의 수장 패천수라가 섬뜩하게 사위를 휘둘러보며 대폭갈을 터뜨렸다.
"겁먹을 것 없다! 주군의 죽음은 비극이나, 목전에 우리 만붕방의 영광이 다가왔다! 놈들을 남김없이 척살하여 주군의 복수를 하는 한편 천하를 잡는다!"
"우우우…!"
찰나 낙안대평원에는 잠시 멈췄나 싶었던 살기가 다시 하늘로 등천(騰天)해 오르며 곧 무시무시한 원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피비를 쏟으며 대접전이 재개될 형상!
한데 또한 바로 이때였다.
"크하하하…, 가소로운 놈들! 그러한들 너희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끼놈들!"
번쩍-!
쾅-!
"크아아악…!"
"와아아아악…!"
돌연 장내에는 사도천악의 죽음에 이어 또 한 번 실로 상상치도 못했던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잠시 멈췄던 귀성이 다시 울려 퍼지며 막 멈춰졌던 정전(停戰)이 다시 재개되려나 싶은 순간, 느닷없이 어디선가 천지가 쩡쩡 울리는 엄청난 광소성이 터지는가 싶더니, 홀연 허공 중으로부터 몇몇의 인영이 벼락같이 내려꽂히며 그대로 접전을 종용했던 패천수라 등 사대수라가 한꺼번에 피벼락을 쏟으며 박살나 날아가 버리지 않는가.
"크아앗… 아니?"
이에 금세라도 다시 살검을 뿌리려 했던 팔대흉신 등 만붕방의 인물들은 또 한 번 가슴이 쿵 천야만야한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그만 화석처럼 몸을 굳히고 말았으니….
사대수라(四大修羅)!
기실 그들을 일컫자면 사도천악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자들로서 명실공히 만붕방의 이인자(二人者)들이었다.
더욱이 배분으로 보면 오히려 사도천악보다 한 배분이 더 위이며, 사도무림(邪道武林)에서도 공포적인 존재로 일컬어지던 귀노(鬼老)들이었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정도지, 결코 사도천악에 비해 그리 떨어지는 무위를 지닌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데 아무리 급습이었다 하나, 이러한 그들이 출현한 인물들의 형상조차 확인치 못하고 한꺼번에 피곤죽이 되고 말았으니….
"대, 대체 당금 무림에 누가 이런…!"
이에 만붕방인들은 물론 군웅들은 다시 한 번 모발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받고 출현한 인물들을 살폈는데….
그러자 사대수라가 처참한 시체로 구르는 곳에는 살수를 쓴 듯이 보이는 여섯 명의, 실로 상상치도 못할 어마어마한 살인적인 기도를 지닌 노인들이 서 있었는데….
전륜왕(轉輪王),
광음왕(廣音王),
지국왕(支局王),
천독왕(天毒王),
흑백음양쌍괴(黑白陰陽雙怪)!
그러했다. 그들은 분명 십만마교의 대종사들이자 십이절대천의 삼 인인 무극삼왕과 천양을 죽음으로 끌어낸 천독왕, 그리고 십만마교의 절대고수인 흑백음양쌍괴가 아닌가.
"흑, 흑백음양쌍괴다!"
찰나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폐부를 후벼파는 듯한 흑백음양쌍괴의 이름이 터져나왔다.
실제 벽파문의 공포갱에 근 이십여 년 간을 갇혀 지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무극삼왕이나 천독왕의 실체를 알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흑괴의 입에서 나직하나마 전 대평원이 모두 들을 만한 천리전성술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눈 먼 하룻강아지 같은 가소로운 것들이 하찮은 노부들은 알아봐도 본 십만마교의 대종사이신 무극삼지존(無極三至尊)의 존체는 보지 못하는 모양이군!"
"허어억! 뭐라고? 무극삼왕?"
찰나 장내는 다시 한 번 엄청난 경악의 소용돌이가 되어 버렸고, 그와 함께 또다시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대경실색의 외침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저, 저것! 뭔가? 대체 언제…?"
"십만마군(十萬魔軍)이닷!"
쿵-!
그 엄청난 충격!
그러했다. 그러고 나서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자, 대체 언제 저 많은 인물들이 나타난 것인지. 경악스럽기 그지없게도 낙안대평원의 사방에는 어느 틈엔가 무려 십만에 가까운 누런 마의경장(麻衣輕裝)에 검은 호구(護具)를 입은, 하나같이 손에 칼집조차 없는 시퍼런 천도(仟刀)를 움켜쥔 노인들이 평원 전체를 포위한 채 번쩍번쩍 눈에서 끔찍스런 살광(殺光)을 흩뿌리며 모두를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중 몇몇 인물이 손에 잡은 황토바람에 휘날리는 삼베로 만들어진 커다란 깃발에는….
<마도출진(魔道出陣)! 정천하평정(正天下平定)!>
용봉이 날아오르듯 핏빛 섬뜩한 글자로 분명 그러한 글이 쓰여져 있었다.
이는 무극삼왕이 급기야 전 마도에 운집령을 내려 십만마군(十萬魔軍)을 일으켜 세운 것이었는데….
십만마군의 출진!
"으흐!"
이것은 곧바로 모든 인물의 공포가 되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며 천양은 다시 한 번 눈에서 엄청난 정열적인 신광을 번뜩이며 천둥치듯 우렁우렁한 어조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이렇게 사대수라도 죽었다! 만붕방인들은 칼을 버리고 돌아가라! 맹세코 이전에 대한 보복은 없다! 하나 불응할 시에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헉! 이, 이건 도저히…."
찰나지간 팔대흉신을 위시한 만붕방인들의 안색은 급기야 완전히 기가 꺾여 사색이 되고 말았다.
기실 이미 수뇌 사도천악과 사대수라가 죽은 아래, 비록 영웅성에 비해서는 다소 세(勢)가 강하다고 하나 여기에 천하 최강의 기인들인 십만마종주(十萬魔宗主) 무극삼왕이 무림공포의 십만마군을 대동하고 가세했으니 눈꼽만큼이라도 딴 짓을 했다가는 어떻게 목숨이라도 부지하겠는가.
"가, 가세! 만붕방은 이제 끝난 것이야!"
이에 만붕방인들은 급기야 백짓장 같은 안색이 되어 하나하나 칼을 버리고 급급히 몸을 날려 대평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대영웅성의 인물도, 십만마군들도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으로 저 엄청난 악명을 떨쳤던 만붕방은 급기야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또한 영웅성 측에서는 잠시 사이에 연거푸 벌어진 이 엄청난 사태에 완전히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청해청년(淸海靑年) 광천양의 재출현!
만붕왕 사도천악과 사대수라의 죽음!
십만마종주 무극삼왕과 십만마군의 출진(出陣)!
하나같이 엄청나기 그지없는 이 사실들이 군웅들의 혼(魂)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것이다.
휘이이잉-!
일진의 바람이 얼어붙은 군웅들의 피에 젖은 옷자락을 휘감았다.
"광, 광 대협!"
"크흐흐흑…, 부디 못난 우리를 용서하오!"
이윽고 목이 미어지는 듯 격정에 찬 음성과 오열 등이 터져나오며 천양의 주위로 몇몇의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두 시진에 걸친 그 엄청났던 접전으로 전신에 흠뻑 완전히 핏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 된 신임맹주 서문수련과 칠대장문인, 그리고 간신히 생존한 사대세가주 두엇, 또한 서문수련에 부축된 백의적족검선 등이었다.
"허… 허… 녀석, 역시 살아 있었구나! 처음 본대로 결코 요절할 상이 아니었던 것을!"
한결같이 피에 젖은 뺨에 흥건히 더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빙긋!
천양의 입가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는 곧 특유의 커다란 몸짓으로 백의적족검선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했다.
"백의 조부님! 오랜만에 존안을 뵙습니다! 일곱 장문지존들께서도 평강하셨습니까?"
무림공적이 되어 죽음 직전까지 몰려갔었던 그였지만,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한 대범한 태도!
"이, 이 녀석아!"
순간이었다. 미쳐 버릴 듯한 격정이 치밀어오르는 것인지 백의적족검선은 목메인 외침을 토하며 천양의 완강한 어깨를 으스러져라 얼싸안았다.
"그래! 끝내 네가 돌아와 주었구나, 몹쓸 놈. 너는 너로 인해 하마터면 육십 년 막역지우였던 나와 천사 간의 우정이 금이 갈 뻔한 것을 아느냐?"
떨리는 음성.
"죄송합니다, 백의 조부님!"
선이 굵고 잔정이 거의 없는 천양이었지만 그 역시도 가슴에 더운 그 무엇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용서하세요, 대공자! 미천한 소녀가 신심이 부족해 대인(大人)을 무림공적으로 몰아세운 죄(罪)를!"
목메인 음성과 함께 서문수련이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털썩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오이다, 광 대협! 이 모두는 우리가 어리석어…. 죄를 받겠소이다!"
그 뒤를 이어 칠대장문인들이 회한(悔恨) 어린 음성을 토하며 함께 무릎을 꿇었다.
천양의 부리부리한 눈가에 담대한 웃음이 떠올랐다.
"소저께서 바로 백의 조부님의 여제(女弟)셨구려? 하면 불초와는 형매지간(兄妹之間)이 되는즉, 그만 일어나시오! 여러 장문지존들께서도!"
능공섭물(凌功攝物)! 흡자결(吸字結)!
이어 천양은 가볍게 손을 뻗어 무형의 진력을 일으켜 그들을 세웠다.
"용서라 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이는 모두 우문개로, 그가 획책한 장난이었는데…. 만약 제가 그 입장에 처했더라도 같은 용단을 내렸을 터입니다!"
"양 오라버니…!"
"고맙소, 광 대협!"
순간 모두의 눈에서 더욱 격정에 찬 눈물이 흘러내렸다.
담대하고 대범하고, 그리고 컸다!
동시에 소림장문 혜공대사가 눈물로 얼룩진 표정으로 핏물에 젖은 커다란 깃발 하나를 조심스레 천양에게 내밀며 컥 하니 메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광 대협, 비록 이젠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이오나…, 받아 주시겠소?"
아홉 마리의 용(龍)이 서로 꼬리를 물고 뒤엉켜 있는 무늬가 생생히 수놓아진 깃발!
그것은 대영웅기(大英雄旗)였다.
곧 천하영웅맹(天下英雄盟)의 상징이자 흑백양도의 대웅주(大雄主)를 상징하는 표기.
따라서 이 깃발을 한 특정인에게 이렇게 준다 함은, 바로 그에게 정도무림의 대종사(大宗師)의 직분을 위임함과 함께 천하무림을 맡긴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이미 대영웅성은 깨어져 불타고, 천하가 온통 뒤집혀지다시피 한 마당에 이 깃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갓 쓸모 없는 천 조각이며 실로 커다란 짐밖에는!
그러나… 천양은 힘있게 그것을 받았다!
"삼생(三生)의 영광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모두에게 영웅기의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
낙안대평원에는 그야말로 하늘이 뒤집힐 듯한 대함성이 터졌다.
"경사다! 새로운 맹주께서 탄생하셨다!"
그러했다. 이렇게 천하무림에는 또다시 새로운 주인이 등극한 것이었다. 비록 젊지만 천하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담대하고도 강인한 주군(主君)!
그러나 군웅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천양은 이렇게 흑백양도의 대종주직을 일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곧 십만마교의 차기 대웅주(大雄主)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흑(黑), 백(白), 마(魔)!
또한 이것이 곧 무림사(武林史)에 유례가 없었던 삼도대종사(三道大宗師)의 소리 없는 탄생임을!
"와아아아아아…!"
함성은 끊임없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분명 아직은 커다란 짐! 웃기는 이르다.
"가시지요! 더 이상 찬바람을 맞아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천양은 이윽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가.
"대영웅성은 이미 우문개로의 계책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사온데…."
칠대장문인은 목이 막히는 어조로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천양은 눈빛을 번뜩이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쉬실 곳이 있습니다! 군마성(軍馬城)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군마성(軍馬城)!
일 년 만에 세워져 마침내 삼도대종사의 성역(聖域)이 되어 버린 곳!
이어 천양은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백의적족검선, 서문수련이 따랐고…, 또 천하(天下)가 따랐다.
벽파문과 군마성!
이렇게 천하대풍운(天下大風雲)은 급기야 거대한 두 개의 핵(核)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