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브라운의 정통과 이단 요약 및 정리
이 책의 저자인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은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샤롯(Charlotte)에 있는 리폼드(Reformed)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고, 이단 연구에 관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입니다. 이 책은 이단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가장 학문적으로, 포괄적으로, 복음적으로 살핀 명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영어 “heresy”라는 용어는 “음흉한 당파”라는 의미를 가진다. 한동안 하이레시스(hairesis)는 “당파” 또는 “분파”(라틴 동사 “자르다”)라는 뜻이었지만 어떤 경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이단은 기독교인이 관계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였다. 중세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이단은 신론과 기독론과 관련을 가졌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이단은 단순히 교리적 불일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기독교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근저를 도려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갖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말한다. 그러나 이단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긍정적”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이단의 좋은 점이 아니라 이단이 정통의 존재를 기능케 했기 때문이다. 이단이 먼저고 그 다음이 정통이라는 뜻이 아니다. 정통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절) 일 뿐만 아니라 이단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교회에서 “정통”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이단은 초기 역사 기록에 등장했다. 정통은 “기원체”이며, 이단은 “반영체”가 되는 것이다. 이단이 먼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 지만 사실은 정통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바른 복음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다. 이단에 대한 싸움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교회역사에서 처음부터 바른 복음, 곧 이후에 “정통”이라고 지칭되는 것이 있었다면, 이 사실이 오늘날 사상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바른 복음에 대한 인식을 심도있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신앙을 갓 출발한 사람들이나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알려고 하는 “그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위조지폐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짜 지폐를 많이 만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바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이 기원체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바른 복음을 배우고 경험해 간다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올라와 활동하는 이단의 악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이단은 왜 일어나는가? 초대교회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아주 간단한 어구로 요약된다. 단순한 슬로건이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중요했다. 기독교 교리는 이와 같은 복음의 중요한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려 했다. 기독교 교리 문서 중 가장 정통한 진술은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단지 정의할 뿐이다. “니케아 신조”(325)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일하신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칼케돈 신조”(451)의 정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측면에서 우리와 같은 분이시며 우리와 통일한 본질로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시다.” 이 칼케돈의 신조와 일치하지 않고 그 범위를 넘어가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기독론의 이단이 없었을 것이다. 칼케돈 신조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후기 기독교인들이 칼케돈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것을 설명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칼케돈 이후 어떠한 기독론 이단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칼케돈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의 단일성을 1,OO0년 동안 유지하게끔 만들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성공적이라 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나타낸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이슬람교로 전락하고 말거나 카톨릭교회의 영역에서 교리를 강요했던 로마 황제들로부터 격리되고 없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보다 바른 교리를 유지할 필요성과 믿음을 강조하지 않았다.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보다 교리적 논쟁과 이단적 견해를 산출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인의 구원은 정통에 의존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통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지속성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의 지속성에 의존하지만, 교회사를 잠깐이라도 살펴보면 지속성보다 혼란과 논쟁이 많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관심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다. 성경적으로 두 종교에 있는 윤리적 오리엔테이션은 일반적으로 창조론에 근거하며,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이성적 존재로서 사람들이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일치하려 한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당위성은 그의 계명이 공정하다는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역사 속에 행하셨던 그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임무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을 출애굽시키신 일에서부터 기인되었고, 바로의 손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은 십계명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출 20:2).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당위성은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에 근거한다. 부활 사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한다.
많은 종교들을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올바른 행동이나 규율이다. 기독교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모든 교리를 대동소이하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교리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명시되었지만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 안에 내재해 있었다고 본다. 기독교 이단의 가치 중 하나는 가끔 정통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통 교리가 비록 형식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음은 기독교인을 만들지만 교리는 교회를 만든다. 명백한 교리적 바탕이 없어도 교회는 오랫동안 견딜 수 있고 초기 교리적 바탕에 반응할 수 있어도 명백하고 중요한 교리가 없이 교회는 어떤 변에서도 일어나지 못한다. 교리적 복수주의로 유명한 근대 영국 국교회주의는 복수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초기 감독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사수했던 명백한 교리적 확신으로부터 일어났다 근대의 많은 교단들 은 매우 중요한 교리들을 타협한 결과로 제정하였다
미국 PCUSA(미국 연합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A.])는 논쟁점을 무시하고 교리적 타협을 일삼았던 좋은 예이다. 광범위한 기독교 협회 내에서도 교리가 본질적이고 믿어져야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간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와 모순되지 않는 차이점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더 이상 믿음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는 공동체도 있다. 교의적 논쟁이 너무 중요하여 공동체를 분해시키는 경우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을 이단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정통이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자가 된다.
Reflection: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상한 교리에 맞서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는데, 칼케돈을 열매로 맺는다. 비록 켈케돈이 기독교의 세계를 좁힌 부분은 있지만 기독교의 단일성을 유지시켜 준 것처럼 기독교회는 이러한 공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역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에 그 신앙을 두고 있다. 믿음은 기독교인을 만들지만 교리는 교회를 만든다 라는 말처럼,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은 늘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동시에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리”에서 신앙고백이 벗어나지 않도록 점검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