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현대건설에서 주관해서 했던 금강산 관광은 나중에 관광객이 실수로 금지구역 까지 들어 갔다가 총격을 받아 숨진 사건으로 중단이 되었었지요.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엘에이 한국일보가 주관했던 단체관광 으로 다녀 왔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행운 이였다면 행운이였습니다.
개성공단 사업도 그렇고 남과 북이 평화공존 하며 서로 왕래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 여행기를 다시 올리는 것은 좀 거시기 하기도 하지만 혹시 읽을거리 가 없고 시간이 있으시다면 심심풀이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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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여행 이야기 (2005.3.14.-3.20.)
금강산, 그것이 단순한 산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여행 설명회에
나온 사람들 표정을 봐도 금방 느낄수 있었다.
기대와 흥분의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3월 14일 (2005년) L.A. 공항에
모인 사람들 무척 들떠 보였다.
약간의 난기류를 뚫고 비행기는 태평양을 훌쩍 넘어 중간 기착지 일본
도쿄 나리타 공항에 안착, 저녁노을이 비치는 말끔한 시가지를 통과
저녁 식사장으로 두 대의 버스가 달린다.
식당에 도착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딸랑 딸랑 방울 달린 열쇠를
받아들고 닭장 같이 비좁은 다다미방의 식탁에 앉아 본고장 스시를
맛본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차 때문에 금방 취침.
이튼날 아침은 약간 쌀쌀, 아침 출근에 바쁜 일본사람들 틈에 끼여
아침산책 하면서 맘속으로 “독도는 우리땅!” 하고 외쳐본다.
식사후에는 일본 천황의 황거 관광, 60년전 국민학교 다닐때 매일
아침 조회에서 “황송하게도” 황거 쪽을 향하여 사이케이레이 (90도 각도
경례) 하던 그곳에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찰칵찰칵 할줄이야 그 때는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긴자, 신쥬쿠, 우에노, 아사쿠사, 귀에 익은 이름의
시가지를 돌아 돌아 점심을 먹고 산책해 보는 골목은 서울의 명동거리와
너무 닮았다. 도청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도쿄 시내전경, 그많은 빌딩들
그많은 지진에도 끄덕 없다니,
온천장에서 입은 유카다 입은 어색한모습들은 야쿠자, 게이샤와 너무
비슷하기도 하다.
다음날은 ‘센쇼지’ 관광후 나리다 공항으로, 부슬비 내리는 일본을 떠나
활짝 개인 김해공항에 내렸을 때의 포근한 느낌, 어쩔수 없는 태여난 땅에의
애착, 활기찬 얼굴로 걸어 다니는 아이들 모두가 내 손자 손녀 같아 다가
가서 안아주고 싶어진다.
자갈치에서 저녁 먹고 일로 청풍 리조트로, 다시 새우잠 자고 일어나
북어국 먹고 북쪽을 향해 버스는 달린다.
아니나 다를까 요란하게 흘러 나오는 뽕짝 멜로디에 절로 장단을 맞춘다.
영동 고속도로를 따라 넘어가는 대관령의 울창한 숲에 덮인 눈, 눈, 그리고
눈꽃 그것은 한폭의 그림이고 장관 이였다. 금강산의 예고편인 셈인가.
동해안 7번 도로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고 가끔 지나가는
군용차량들은 휴전선이 가까워 옴을 예고 하는듯, 본고장 순두부로 점심을
먹고 설악산에 잠깐 들린후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금강산 콘도에서 장시간 기다려 ‘passport' 를 받고 버스를 갈아타고
드디어 군사분계선을 향해 떠난다.
이때부터 안내를 맡은 예쁜 아가씨에게 일행 모두 홀딱, 그러나 그 워엄과
약간은 긴장되는 분위기에 모두들 얌전해 진다.
드디어 비무장 지대를 지나 군사 분계선을 월경, 남쪽의 헌병 그리고 북쪽의
거총자세 병사들, 저들이 “어-이 동생,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놀러와,
2차는 니네들이 쏘던가“ 하고 주고 받는다면 어떨까? 그렇다고 들고있는
기관총 쏘지는 않겠지?
안내양의 똑소리 나는 설명과 약간은 설교 비슷한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차창 바깥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갑자기 21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간
느낌이 들고 이래저래 이번 여행은 시간과 공간의 ‘대장정’ 인 셈이다.
외국여행과 똑같은 통관절차를 마치고 해금강 호탤에 체크인, 뷔페식사를
마치고 온정각의 금강산 온천에서 피로를 풀어 본다.
온천물이 퍽 좋은 느낌이다. 일찍 취침.
모든 것은 잘 짜여진 계획표 대로 안내양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 하게
진행된다.
다음날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구룡폭포 등정, 지팡이와 자이르
준비하고 각개약진으로 떠난다, 목적지까지 880미터 (약 2,700 피트) 의
가파른 산길은 그냥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눈과 얼음
으로 덮인 좁은 길을 배낭을 메고 올라가는 것은 젊은 사람들 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듯, 중간 중간의 빼어난 절경을 쉬엄쉬엄 감상 하면서
올라간다.
계곡의 눈과 얼음 사이로 흘러 내려오는 맑디 맑은 물,
군데 군데 고이는 옥색의 연못, 울창한 상록수 숲, 완전히 얼어붙은
비봉 폭포는 알라스카의 글레이시어를 연상하게 한다.
개천을 건너는 돌다리, 흔들다리, 그런것을 일곱 개 지나야 목적지에 도달
한다니 하나하나 세어가면서 올라간다.사진이 잘 나와야 할텐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도 반갑기만 하다.
등산 도중 중간 중간 서있는 안내 아가씨들 추위에 양볼이 빨개졌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은 없다. 그중 어떤 아가씨는 우리 손녀 아이와 너무나
닮아서 신기함을 넘어 숙연해 지기 까지 한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말을 붙이기 위해 같이 사진 찍을수 없느냐고 물으니
근무 중에는 사진을 못찍게 돼있습니다 라고 정중히 거절한다.
한숨 돌리고 또 오르고 오른다. 자연 훼손을 철저히 막겠다는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바위에 새긴 글들은 자연 훼손이
아닌지 좀 헷갈린다.
오전 11시 정각 드이어 목적지 구룡폭포에 도착, 스스로 등을 두드리고
장하다 말해본다. 이름과 날짜를 새긴 금메달 까지 받고보니 (사실은
돈주고 산 것이지만) 마치 에베레스트 정복이라도 한듯이 뿌듯해진다.
흘러내려 가는 개천에서 물병에 담아온 얼음 같이 찬 물을 마시면서
이렿게 행복해도 되나 자문해 본다.
얼음과 암벽 사이로 가늘게 흘러 떨어지는 폭포, 흰 눈에 덮인 산들
그리고 오묘하게 솟은 봉우리, 그위로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
상상했던 것보다도 완벽한 그림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복쪽 아가씨들이 불에 구워주는
‘밥조개’ 의 맛은 또 어떻고, ‘옥류관’ 의 자연산 미인들이 써브하는
평양냉면, 녹두지짐의 맛도 일품 이고 가슴에 달고 있는 빨간색 뱃지는
차라리 애교스러워 보인다.
저녁에는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 관람,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내가 왜 이러지? 그것은 감탄도 조금, 연민의 정도
조금씩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다 찌그러진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왜 갈라져 살야야 하고 저렇게 기막한 재주를
가진 우리 아이들이 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만 되는가 그
안타까움이 더 컸던것 같다.
다음날 해금강, 삼일포 관광도 감동의 연속, 가파른 산행길도 연속,
내 다리가 과연 무사할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입국수속 할때는 짧은 일정이 못내
아쉬워서 였을까 줄서기에서 이탈하고 입국카드를 떨어뜨리는
실수도 했다. 그런 실수를 조금도 탓하지 않고 끝까지 침착하게
인솔하는 안내 아가씨의 직업의식과 인간미 에는 또 한번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본다.
한국측 세관원들의 친절한 인사말과 신속한 통관절차에는 모두들
감명을 받은듯, 다시 ‘통일로’ 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는
무사히 돌아 왔다는 안도감이 흐른다.
개인적으로는 천금같이 귀한 체험의 순간순간을 일일이 다 기억 못하는
아쉬움, 그리고 저 경계선을 넘어 원산, 성진, 청진을 거쳐 칠보산 백두산
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진부령 고개를 넘어 휴게소에서 사먹는 칼국수의 맛은 시장끼도
양념이 되어 맛이 일품이다.
벌써 어두워진 서울 시내의 찬란한 불빛을 보면서 해산 장소에 도착,
아쉬운 작별 인사들은 나눈다. ---끝---
첫댓글 금강산!
가슴 벅찬 상징적인 우리들의 산!
금강산 이라는 단어하나 때문에 희한하게 글을 읽는 내내 김구름님과 동행하듯이 긴장과 기대로 읽었습니다.
벅참과 감동, 그리고 말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눈물에 저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냉장고에 가서 직접 먹을꺼리 꺼내 먹어야 하는데 이렇게 손수 냉장고에서 맛있는 글을 옮겨주셔서 진심 감사합니다.
두번째 읽는데도 감동, 감동입니다.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아니 관광이라도 다시 재개되어 금강산을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뉴욕에서 살던 8년전쯤 썼던 마음의 글 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지금 우리 모두는 통일을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후세들은 분단이 무엇지인, 통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왜 총뿌리를 서로 겨누고 있는 것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있다.
얼마전 젊은이들의 통일 여론조사에서 사상에 함몰된 그들을 보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 아닌가?
일제의 압박속 세월 36년과
남북으로 나누어져 서로가 그리워 하는 60여년 세월, 이 얼마이던가?
우리 모두는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의식도, 행함도, 간절함도, 염원도, 전해야 함도,
통일이여 어서오라. 우리는 한 핏줄 형제들인 것을...
허리가 동강나 피흘리고 있는 내 조국의 아픔을....
슬픔과 안타까움의 절규 소리를... 듣고있다. 피흘리고 있음을 보고있다.
내 조국의 통일이어 어서오라. 어서.... 목놓아 부르짖고 있노라.
타국 땅에서....
내가 돌아갈 땅, 그리운 내 조국이여. 형제들이여....
사랑한다는 그 말한마디....
내 가슴에 안고 나 오늘도 조국 하늘 그리워하노라.
절절한 마음으로 ...
육로로 다녀오셨군요.
저는 2018년에 연변쪽에서 장백산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를 구경했었어요.
너무도 멋지고 숙였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나 그 곳을 서로의 이념없이 왕래할 수 있게 될지...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런 날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아니 더 발전되고 더 개방되길 바랬는데
3월에도 아직 빙벽이 있는
금강산을 다녀오셨다니
부럽습니다
다시 그럴 날 오리라 믿어요 꼭!
금강산 묘향산 북녘 땅으로 산행하게 될 날을
꿈꾸며 체력단련 잘 해야겠습니다 ^^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에 있으면서도 왕래하지 못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니요. 우리 세대에는 힘들겠지만 후손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오히려 담장이 높아지고 있는 듯 합니다.
사진이 없는 여행기지만 마치 제가 함께 금강산을 오른 듯한 느낌입니다.
서쪽 마니산, 남쪽 한라산, 동쪽 설악산, 이제 한개 남은 북쪽 백두산을 언제나 밟아볼 수 있을까요. 미국에 있을 때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혹여 역이민에 좋지않은 영향을 줄까봐 생각만으로 그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여행기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분단의 고통이 무엇인지 왜 통일이 간절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책을 통해서만 배웠습니다.
탈북민들의 대안학교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어도 느낌은 변하지 않네요.
김구름님의 글을 통해서 느껴보려고 노력합니다.
당장에 통일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서로 왕래도 하고 하다못해 이산가족 상봉 이라도 하면서 지내면 좋으련만 어렵게 성사 되었던 금강산 관광 이나 개성공단, 그리고 이제는 군사합의(?) 까지 다 깨어 지고 세상이 꺼꾸로 가는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