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과 봉은사를 찾았다.
'선정릉'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능이며,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선정릉을 달리 '삼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현 선정릉 지역은 과거 능이 조성되었던 1494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저자도리'였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세조의 손자로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38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1473년 성종의 후궁이 되었고, 1479년 당시 왕비였던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 때 왕대비의 권한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친아들 '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69세의 나이로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1488~1544, 재위 1506~1544)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1494년에 '진성대군'에 봉해졌고, 1506년 반정으로 이복형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연산군 시절의 잘못된 정치와 제도를 바로 잡았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유교적 향촌질서를 자리 잡게 하였으며, 서적편찬 사업도 활발히 진행하여 인쇄술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57세의 나이로 창경국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릉
'선릉'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각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서쪽 언덕이 성종의 능, 동쪽 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이다.(이렇게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석을 조성한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선릉은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만들어졌는데, 원래 이곳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묘역이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선릉을 조성하였다.
선정릉 안내 팜플렛을 사진 찍어 실었다. 탐방순서는 선릉(왕릉과 정현왕후릉 순으로)을 거쳐 정릉을 보았다.
*** 정기해설 : 연중(화요일~일요일) 1차 10:00 / 2차 14:00, 재실앞 ***
*** 상설해설 : 3월~12월(토요일) 1차 10:00 / 2차 14:00, 표받는 곳 ***
선릉 재실
선정릉 입구 매표소(입장료 1,000원, 65세이상 무료)에서 출발하여 선릉에 이르기 전 '선릉 재실'이 있었다. 재실은 제례를 지내기 전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종9품 참봉 등의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과 그 주변을 돌보았다. 주요 시설로는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으며,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제관이 된 듯한 마음으로 인증샷을 남겨 본다.
재실 옆 은행나무
50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의 자태가 늠름하다. 서울의 대표적 나무라 할 수 있으며, 능의 수호수(守護樹)이다. 이곳 선정릉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한마디 없이 비밀을 잘 지키고 있다.
선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건물이 보인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이다.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참도)은 '향로'와 '어로'로 구분되는데, 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로 한 단을 높게 조성하였으며, 어로는 왕이 제향을 올리러 갈 때 다니는 길이다. 홍살문 우측에 있는 '판위'는 왕이 능이 있는 구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공간이며, '수라간'은 제향을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이다.
'정자각'을 가까이서 본 모습이다.
능의 앞쪽에 있는 사초지
'사초지'는 상당히 높은 언덕으로 기의 저장탱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초지'를 조성하고 그 위 정상에 능이 위치한다.
조선 9대 성종의 능
관람객들이 옛 임금의 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관람로를 조성했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성이다. 사진을 확대하여 보시면 왕릉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관람객들이 정현왕후의 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관람로를 조성해 두었다.
선릉 탐방을 마치고 정릉으로 이동하는 중간지점의 멋있는 소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정릉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현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위치한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의 이름을 '정릉'으로 바꿨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뜻으로 중종의 능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는 문정왕후 본인이 사후 중종과 같이 묻히고자 했기 때문이었으나, 정릉을 옮겨 온 현재의 자리가 비가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잦자 문정왕후는 현재 노원구에 위치한 '태릉'에 묻히게 된다. 이로 인해 중종과 세 왕비(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능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정릉(중종의 능)의 홍살문과 정자각
정자각과 왕릉
정릉은 선릉과 달리 중종의 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접근로가 없다. 그래서 사초지 사진 윗쪽에 왕릉 사진을 올려 놓았다.
봉은사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의 '원찰'이다. 조선왕릉 근처에는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수호 사찰을 두었다. 이 사찰을 원찰 또는 능사라 부르는데, 고려시대 원찰은 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명복을 빌며 49재나 천도재와 같이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의식 등을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했기에 왕릉 근처의 사찰을 원찰로 이용하기는 했으나 불교 의식은 점차 줄이고, 능 관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만을 맡게 했다.
대웅전
'매화당' 앞 매화나무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봉은사 측면 전경
거대한 부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