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3.火. 맑음
더하기와 빼기.
글 쓰는 직업이라는 게 그렇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한 대목처럼 작가란 백수도 아니요, 그렇다고 성실한 직업인도 아닌 어정쩡한 생활인이다. 몇 권의 책을 내어 호평을 받고,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 이름이 좀 알려지면 몇 가지 자유스러운 권리랄까 혜택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 또한 어김없이 지불해야한다. 즉, 무언가를 끊임없이 써야하는 것이다.
주마가 꼭 그런 경우였다. 지난 해 발간한 책이 제법 호평을 받아 독자들로부터 반응도 좋았고 출판사 측도 은근히 만족한 눈치였다. 지난 연말 출판사 송년잔치에 참석했을 때 박 실장이 주마에게 봉투를 하나 쥐어주더니 책 인세이외의 보너스 겸 차기 작품에 대한 예약금조이니 받아두라고 하면서 내년 연말까지 차기 작품원고를 꼭 넘겨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주마는 차기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상해둔 것은 없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상당한 금액의 수표가 들어있었다. 그러던 것이 봄이 다 지나가도록 새 작품에 대한 진척이 시원치 않은데다 개인적으로도 이러저런 일에 시간과 신경을 많이 써야했다. 웬만큼 주변도 정리가 되어 이제는 차분하게 글을 써야지 마음먹었지만 글쓰기에 집중이 좀처럼 되지 않았다. 그런데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출판사 용무로 주마 작업실에 한 달이면 두어 번씩 들리는 박 실장의 무언의 압박도 조금씩 심적 부담이 되었다. 결국 주마는 글쓰기도 글쓰기이지만 먼저 주변 분위기와 기분을 한바탕 바꾸어보고 싶었다. 남해안이나 강원도로 여행을 한 차례 다녀올까 생각도 했지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한 장소에서 고적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 사람이 친구인 우드였다.
“우드? 나야, 주마.”
“응? 주마.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하고. 그래 그동안 잘 있었니?”
“항상 그저 그렇지, 뭐. 그동안 별 일 없었지?”
“그동안 꽤 바빴는데 이제 한숨 돌릴만하구나. 아참, 작년에 네가 낸 책 말이야 인기가 꽤 있나보더라. 얼마 전 어쩌다 몇몇 사람들과 서점에를 갔는데 아니 네 책이 베스트셀러 칸에 놓여있질 않았겠니. 그래서 이 책 쓴 작가가 내 친구라고 자랑을 한바탕했는데 결국 그날 저녁 술값은 그 사람들 등쌀에 시달리다 내 지갑을 홀랑 털렸단다. 그래도 기분이 좋더라. 요즘도 책 쓰느라고 바쁘겠구나.”
“응, 바로 그 일 때문에 네게 전화를 했구나. 너 K군에 주말주택이 있다고 했었지. 재작년엔가 집들이를 한다고 나를 초대해주었는데 그때 마침 원고수정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참석을 못했던 기억이 있거든.”
“그래, 인마. 가까운 친구 중에 너만 아직 안다녀갔어. 주말이면 웬만하면 내가 내려가 있으니까 아무 때 건 K군에 내려와라.”
“그게 말이야. 내가 잠시 네 주말주택에 머무르고 싶은데 괜찮겠니?”
“왜? 잠시 서울을 떠나있으려구?”
“응, 그게 말이지 이제부터는 집중을 해서 글을 써야하는데 분위기를 한번 바꾸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여기는 그동안 어수선한 일들이 얽혀있던 곳이라 정신을 모으기가 쉽지 않구나. 그래서 잠시 동안 나를 고적한 곳에 떨어뜨려 놓으려고. 괜찮겠니?”
“그럼, 괜찮다마다. 야, 베스트셀러 작가께서 내 집에서 글을 쓰시겠다니 나야 영광이지. 나야 한 달이면 두세 차례 주말에만 다녀오기 때문에 네가 얼마든지 머무르든 상관이 없다. 그래 언제부터 필요한 거냐?”
“그게 너만 괜찮다면 바로 내일부터라도 짐을 꾸려 내려가고 싶은데. 뭐 짐이래야 노트북하고 책 몇 권, 옷가지와 세면도구가 전부이긴 하다만.”
“그래? 네가 당장 가더라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은 거의 있을 테니 따로 무얼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냉장고 안에 반찬도 얼마간 있을 거야. 그럼 말이야. 가는 길을 잠깐 설명을 해줄게. 우리 집이 마을 맨 위쪽 산기슭에 있는데 초록담장에 초록대문이거든. 그리고 대문 열쇠는 동네 이웃집에 맡겨놓았고, 현관 자동문 비밀번호는...”
작업실을 아무리 둘러봐도 더 이상 차에 실을 게 없어보였다. 우드에게 말한 것처럼 노트북과 책 몇 권, 갈아입을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차 트렁크에 넣고 나서 작업실 문을 잠그고 차 시동을 걸었다. 평일 아침 시간인데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6월이 절반도 더 지난 하지였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가 자신이 머리를 식히고 글이나 좀 써볼까 하는 요량으로 K군에 있는 친구의 주말주택으로 내려가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동지를 지나고 춘분을 거쳐 오는 동안 낮이 길어질 만큼 길어졌으니 내일부터는 낮이 조금씩 짧아질 거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밤과 낮의 길이가 일정한 주기를 갖고 변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만큼씩 더해가다 얼마만큼씩 빼내서 항상 평형을 맞추어가는 것은 다만 밤과 낮의 길이만이 아니라 자연현상에서는 당연한 평형찾기의 순환이었다. 동물과 식물로 이루어진 먹이사슬에서도 서로의 천적을 만들어 모든 종의 증가와 감소를 조절해가며 가장 안정된 평형상태를 이루어갔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고속도로를 두세 번 바꿔 탄 뒤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려가다 연풍IC에서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우드의 설명대로 그리 어렵지 않게 연풍면소재지로 들어서서 천주교 연풍성지와 연풍초등학교 사이로 난 중앙로를 타고 차를 달리던 주마는 진촌 마을 앞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는 우드의 말을 듣고 상상을 해보았던 우람한 느티나무 몇 그루가 모래판에 선 씨름꾼 자세로 서있었고, 그 아래에는 수목정水木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 주마는 차를 수목정 옆에 대고 차에서 내렸다. 주말주택까지는 저 위쪽으로 더 올라가야했으나 작은 마을을 걸어서 돌아보며 우드가 가르쳐준 집에서 초록대문을 굳게 닫혀놓고 있는 자물쇠를 열어줄 열쇠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수목정 앞을 흐르는 농수로 건너편으로 파랗게 펼쳐져있는 논들이 마치 푸른 바다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밭에 나가있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집집마다 검게 윤이 나는, 잎이 무성한 감나무들이 많이 서있었다. 마을 중심부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마을 주변에는 두세 채씩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가끔 빈집도 보였고 새로 전원주택으로 말끔하게 신축을 해놓은 집도 보였다. 오래된 돌담이 예쁘게 허리를 틀고 있고, 그 돌담을 밀어내듯 담장 가에서 큰 몸집을 부풀리고 서있는 돌배나무가 있는 집을 보며 주마는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몇 번 대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초록대문 열쇠는 나중에 받기로 하고 발길을 돌려 마을 위쪽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폭이 조금씩 좁아드는 개천이 주마를 안내하듯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기슭에 가까워 갈수록 밤꽃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고개를 들어 산기슭 쪽을 쳐다보았더니 하얀 밤나무 숲이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첫댓글 ㅋㅋㅋ~~~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