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마지막 관문(關門)
①
무도육겁문의 첫번째 관문은 공관(功關)이었다.
단목천상의 전면에는 검은 철벽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겨져 있었다.
- 단단하기가 으뜸이라는 한철묵오금(寒鐵墨烏金)으로 된 벽에 순수한 내력으로 삼 푼 이상의 장인(掌印)을 찍어라.
단목천상은 그것이 내공(內攻)을 시험하는 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손을 뻗어 한철묵오금으로 이루어진 철벽을 만져 보았다. 철벽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데 철벽에는 여러 개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이십여 개에 달했는데 손 모양과 깊이가 모두 제각각 이었다.
문득 단목천상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삼 푼 깊이가 넘게 찍혀있는 장인을 헤아려 보았는데 무려 열두 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의 장인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단목천상은 내심 경악성을 흘렀다.
정확히 열번째에 찍힌 장인의 깊이가 무려 오 푼(五分)에 달했던 것이다. 단목천상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순서로 보아 이것은 을주신풍가의 십대 인물이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을주신목의 장인이 아닐까?'
단목천상은 그만 침중해지고 말았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광명회주 을주신목은 바보가 아니라 절세의 고수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안으로 감추고 바보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한철묵오금으로 이루어진 철벽에 삼 푼 깊이의 장인을 찍으려면 최소한 이 갑자 이상의 내공수위가 필요했다. 하물며 오 푼 깊이의 장인을 찍기 위해선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내공수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을주신목은 필시 무서운 음모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꼬리를 감춘 한 마리 잠룡(潛龍)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단목천상은 다른 장인들을 살펴보았다.
열한번째 찍힌 장인은 삼 푼 삼 리의 깊이였다. 그리고 열 다섯번째는 삼 푼 오 리였으며 다른 장인들은 가까스로 삼 푼을 넘기고 있었다.
단목천상은 염두를 굴렸다.
'이곳에 들어온 순서로 보아... 열한번째와 열다섯번째는 백초와 철사자가 남긴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북궁양의 내공은 백초를 능가한다.'
단목천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에서 신비한 광채가 솟아올랐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오른손 장심을 철벽 앞으로 일직선으로 뻗었다.
우웅!
그의 손바닥이 핏빛을 띠었다.
단목천상은 혈장을 철벽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붙였다가 떼었다. 그 순간 철벽에는 정확히 사 푼 정도의 장인이 뚜렷하게 새겨졌다.
우르릉!
장인이 찍히자 철벽이 굉음과 함께 아래로 가라앉으며 하나의 공간이 드러났다. 단목천상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무도육겁관의 제일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이관은 검관(劍關)이었다.
그곳은 넓은 석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석실 안에는 서른여섯 개의 목각인형이 삽십육방위를 포진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목천상은 목각인형을 둘러본 뒤 중얼거렸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그는 번뜩 신형을 날려 목각인형 사이로 뛰어 들었다.
번쩍... 파파파파... 팟!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섬전같은 도광(刀光)이 춤을 추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인형 사이를 통과했다. 목인형들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목인형의 양미간에 머리카락같이 가는 도흔(刀痕)이 똑같은 깊이와 위치로 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단목천상은 잔심혈도(殘心血刀)로 검관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었다.
세번째 관문인 경관(輕關)은 신법(身法)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석실 바닥에는 일곱 개의 발자국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
- 칠 보 이내에서만 운신(運身)할 수 있음.
벽에는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단목천상이 그 중 두 개의 발자국을 딛고 섰을 때였다.
슈슈슈슈슉!
돌연 전후좌우의 벽면에서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더니 그곳으로부터 주먹만한 철추가 질풍처럼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헛!"
단목천상은 헛바람을 토하며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을 구사해 바닥에 등이 닿도록 신형을 눕혔다. 그로인해 무시무시한 철추의 공세는 그의 코끝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쐐애애액... 파파팟!
이번에는 양쪽 벽의 무릎 높이에서 대각선으로 날카로운 창이 창졸지간에 뻗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공격이었다.
"차앗!"
단목천상은 발로 바닥을 차며 답공현허비행술(踏空眩虛飛行術)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수평으로 허공을 밟으며 앞으로 이동했다.
휘리릭... 철컹! 철컹!
그러나 공격은 숨쉴 사이도 없이 속개되었다. 세번째 공격은 사방으로부터 쇠사슬이 뻗어나와 좌우로, 상하로 그의 몸을 향해 휘감아 왔다.
휘휙... 휙!
단목천상은 지닌 바 보법과 신법을 총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들어있는 경관은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숨쉴 틈도 주지않는 기관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침착을 잃지 않고 단지 일곱 개의 발자국 만을 번갈아 밟아가며 환상적인 보법을 구사해 공격을 피해냈다.
공격은 일각동안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단목천상은 눈썹이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를 느끼면서 마침내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그그긍!
일각이 지나자 진동음과 함께 한 쪽 벽이 열리며 통로가 나타났다.
"......!"
단목천상은 전신이 흠뻑 땀으로 젖은 채 통로를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공격이로군. 하마터면 뼈도 못추릴 뻔했다."
사관과 오관은 지관(指關)과 장관(掌關)으로 지력과 장법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그 두 관문은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목천상이 수많은 절학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공격에도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 관문들은 하나같이 가공하구나.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다. 이로 미루어 을주신풍가의 내력이야말로 범상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을주신목은 신풍십팔겁관을 모두 통과했으니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하기가 힘들구나.'
단목천상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무도육겁관의 마지막 관문인 색관(色關)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②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단목천상은 코끝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향기를 맡고 흠칫했다.
'미약(媚藥)!'
그는 즉시 향기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강열한 춘성(春性)을 일으키게 하는 미향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호흡을 멈춘 후에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
석실 안의 풍경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제까지의 관문과는 달리 호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바닥에는 최고급의 천축산 양탄자가 깔려 있어 걸을 때마다 발등까지 파묻힐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곤혹케 한 것은 천장과 사방 벽이 온갖 낯 뜨거운 춘화도(春畵圖)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의 남녀들이 기기묘묘한 자태로 정사를 치르고 있는 춘화도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음탕했다.
"......!"
벽화를 스쳐가던 단목천상의 눈은 문득 한 곳에 이르러 고정되었다. 그의 눈은 한껏 커지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된 것이었다.
"흐흑... 흐윽!"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붉은 색의 양탄자 위에서 온몸을 꿈틀대고 있었는데 옷은 거의 벗겨져나가 전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지금 그녀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유방을 한손으로 틀어잡은 채 신음을 내며 전신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이 경악한 것은 여인 때문이 아니었다. 여인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신궁무적 동무가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단목천상은 의혹을 느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 여인은?'
놀라운 일이었다. 반라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애무하며 몸을 비틀고 있는 여인은 바로 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방옥진이었다.
지금 그녀는 두 눈이 충혈된 채 타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얼마 남지 않은 옷자락을 북북 찢어버리고 있었다.
사정없이 옷자락을 찢어낼 때마다 눈보다 흰 살결이 드러났다. 이제 그녀는 두 개의 젖가슴이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흐으윽......!"
방옥진의 모습은 가히 놀랄 지경이었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풍성하게 퍼진 둔부, 그 아래로 뻗어 있는 기름진 허벅지를 연신 비비 꼬며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실로 뇌쇄적이었다.
'저 여인이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단목천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의 눈에 바닥에 찢겨진 채 널려있는 옷가지가 들어왔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여인의 옷이 아니었다. 문사가 입는 문사의였다.
단목천상은 비로소 머릿 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천면기환 옥수랑이 입고 있던 문사의! 그렇다면 방옥진이 바로......?'
단목천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로소 그는 사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방옥진이야말로 천(千)의 얼굴을 지녔다는 천면기환 옥수랑의 본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녀는 본래 여인이었으나 역용으로 남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약에 중독된 나머지 역용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는 뭉클한 여체가 안겨드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흐윽! 안아줘요!"
뒤늦게 단목천상을 발견한 방옥진이 그에게 육탄(肉彈)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나신을 마구 문질러대며 그의 목을 껴안은 채 헐떡이는 여체! 그녀의 입으로부터 후끈거리는 입김이 토해져 나왔다.
단목천상은 그만 한 모금의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 순간 달콤한 최음향이 느껴졌다.
"......!"
최음향의 독성은 강했다. 비록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그는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방옥진이 목을 껴안은 채 온몸을 마구 비벼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아아... 나 좀.... 흐으윽!"
방옥진은 뜨거운 입김을 뿜어대며 단목천상의 얼굴에 입맞춤의 공세를 퍼부었다.
단목천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가슴을 압박하고, 대리석처럼 매끈한 두 다리가 그의 몸을 뱀처럼 옭아매는 데야 천하장사인들 당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향까지 한 몫 거드는 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엇!"
단목천상은 그만 양탄자 위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몸 위로 방옥진이 덮쳐 눌렀다.
"방... 방소저! 정신 차리시오!"
단목천상은 미향을 맡는 것을 각오하며 입을 열어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방옥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전신을 더듬어 대며 옷을 찢어내려 들었다.
'안되겠다!'
단목천상은 점차 욕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손을 움직여 방옥진의 혈도를 제압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
문득 한쪽에 쓰러져 있던 신궁무적 동무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더니 방옥진을 향해 야수처럼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단목천상은 급히 방옥진을 밀치고 벗어났다.
그러자 동무는 방옥진과 한 덩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단목천상은 겨우 한 숨 돌린 후 급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정말 지독한 최음제로구나. 빨리 몰아내지 않으면 양기(陽氣)가 고갈되어 죽을 것이다.'
단목천상은 운공을 통해 음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로소 백초와 십전우사, 창궁검룡 등이 운공하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아아...!"
한편, 방옥진과 동무는 이미 한 덩어리가 된 채 숨가쁘게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장면이었다. 신궁무적 동무는 비록 완전한 성인이었으나 외견상으로는 십여 세에 불과한 어린아이의 체형이었다.
그런 그가 이성을 잃은 채 방옥진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이미 그도 옷을 찢어버려 알몸이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방옥진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없이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방옥진은 그를 세차게 끌어안으며 몸부림쳤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마지막 자세로 들어갔다. 바야흐로 결합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펑!
"크윽!"
돌연 한 줄기 웅후한 장력이 두 남녀를 강타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피를 토하며 떨어져 나갔다.
마침 운공을 끝낸 단목천상이 장력으로 그들을 떼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두 사람을 내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서 야합하게 되면 그대들은 다시는 강호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먼저 방옥진의 알몸을 감싸 주었다.
잠시 후 그는 두 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신형을 날렸다.
③
단목천상은 방옥진과 신궁무적 동무를 무도육겁관 밖에 내려놓은 후 마지막 남은 조화육겁문(造化六劫門)으로 들어갔다.
첫번째 관문은 암기력(暗記力)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그곳은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서가(書架)가 즐비한 방이었다. 그곳에 한 명의 노선비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말없이 읽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기회는 한 번 뿐이네. 읽은 후 거꾸로 암송해 보게."
"......!"
단목천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후후, 이거야말로 재밌구나. 만상집현각에서 일만서관을 통과할 때 간혹 거꾸로 암송하기를 즐겨했었는데 이런 문제가 나올 줄은 몰랐구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책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그는 책을 덮어놓고 거꾸로 암송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관문은 진법(陣法)을 통과하는 관문이었다.
거대한 지하광장에 종유석(鐘乳石)이 어지럽게 매달려 있었다. 때로는 바닥으로부터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유석이 솟아나 있기도 한 그곳에는 오묘한 진식이 펼쳐져 있었다.
"......"
단목천상은 대략 향 한 자루 탈 시간 동안 진식의 허(虛)를 살펴 본 후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진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종유석진을 통과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쉽게 진법을 통과한 것 같았으나 진법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곳에는 도합 팔십이 개의 각종 기문진법(奇門陣法)이 총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단목천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문진학을 총동원해야 했다.
세번째 관문도 역시 진법(陣法)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유석진과는 크게 달랐다. 이번의 진법은 바둑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석실 바닥에는 금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에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바둑돌인 양 앉아 있었다.
- 병법(兵法)을 동원하여 칠십이지살(七十二地殺)을 물리쳐라.
바닥에 그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
단목천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이번의 진법은 살아 있는 인간진법이었다. 비록 바둑판 위에 앉아있었으나 그가 생로(生路)가 아닌 사로(死路)로 들어서면 사정없이 칠십이 명의 복면인들이 공격할 것이 뻔했다.
단목천상은 근 한 식경에 걸쳐 장고(長考)한 끝에 마침내 유일한 생로(生路)를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자, 들어 가겠소."
그는 서슴없이 바둑판 위로 뛰어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휘휘휙!
칠십이 명의 복면인들이 반상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단목천상이 생로를 찾은 것을 눈치채고 길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의 신법이 더 빨랐다.
그는 복면인들 사이를 누비며 그들보다 한 걸음 빨리 생로를 밟아 나갔다.
어떨 때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속임수로 상대로 하여금 엉뚱한 곳을 점하게 했으며, 어떨 때는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여 장계취계의 수법으로 상대를 속였다.
마침내 그는 반상에서 빠져 나왔다.
비록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기는 했으나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아! 정말 두렵구나. 을주신목이 이 관문을 모두 통과했다니 점점 더 그가 두려워지는구나.'
단목천상은 네번째 관문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가공할 기관지학(機關之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미로(迷路)가 펼쳐져 있었다. 통로는 일곱 걸음마다 두 갈래 길로 갈라졌다. 게다가 어떤 길을 택해도 무수한 함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열여덟 번 우측으로만 돌았고, 다시 열여덟 번을 좌측으로 돌았다. 그 동안 그가 만난 기관장치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자칫하면 독침이 쏟아지기 일수였고, 바닥이 떨어지거나 천장에서 창이 꽂혀 내리기는 다반사였다.
기관장치를 파악하고 파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는 물론 놀라운 집중력과 안력(眼力)이 필요했다.
만일 그가 만상집현각에서 우내백현 중 한 명인 철수진인(鐵手眞人)이란 기관학의 대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관문을 통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목천상은 다섯번째 관문으로 들어섰다.
"......?"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하나의 방(房)이었다. 그런데 몹시 괴이한 방이었다.
전체가 온통 검은색으로만 되어 있었다.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 심지어는 서가나 서가에 꽂혀 있는 책과 가구 등속들도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던 것이다.
방 한가운데 역시 검은색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의자에는 한 명의 면사를 쓴 흑의여인이 앉아 있었다.
단목천상은 방 안의 괴이한 분위기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오?"
흑의여인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놀랍군요. 십육관을 이렇게 빨리 통과하다니...."
단목천상은 흠칫했다. 여인의 음성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을주우향!'
그렇다. 여인의 음성은 바로 을주신목의 누이동생인 십전일미 을주우향이었다. 단목천상은 여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이오. 소저."
"절 아시나요?"
여인은 다시 매혹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의 음성은 한 번 들으면 좀체로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독특하오. 더구나 이 하늘 아래 십전일미가 당신밖에 더 있겠소?"
을주우향의 음성이 문득 냉랭하게 변했다.
"결국 소협도 마찬가지로군요."
"뭐가 말이오?"
"소협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저의 미모에만 관심이 있느냐는 뜻이에요."
단목천상은 피식 웃었다.
"소생은 아직 소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소. 따라서 소저가 절세미인이던 혹은 추녀이던간에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오."
"그 말씀 진정인가요?"
"물론이오."
단목천상은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소? 소저께서 이 방의 주인이오?"
을주우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반문했다.
"그건 왜 묻죠?"
"만일 소저가 이 방의 주인이라면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불행... 하다고요?"
을주우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단목천상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본 뒤 담담히 말했다.
"소생이라면 이 방을 검은색으로 꾸미지 않았을 거요. 도리어 백색으로 꾸몄을 것이오."
"......."
"아마도 이 방의 주인은 자존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일 것이오. 그는 항상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독할 것이오. 그의 주위에는 친구도 없을 뿐더러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오. 또한 그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성품일 것이오. 방을 검은색으로 꾸미고 지하에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오."
단목천상의 말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을주우향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해 이런 방을 꾸몄을 것이오. 그래서 불행하다는 것이오. 다만 그의 초인적인 능력과 자질만은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오."
그러나 을주우향은 기이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건 무엇 때문이죠?"
"이 방을 꾸미고 있는 물건들과 벽에 걸린 서화, 그리고 서가의 책들이 그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오."
을주우향은 고개를 들어 단목천상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면사가 드리워져 있어 표정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면사를 통해 그녀가 경이로운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분이군요."
단목천상은 빙긋 웃었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오."
"어쩌면......."
을주우향은 말꼬리를 흐렸다.
"......?"
"이 서재의 주인과 당신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되거나......"
단목천상은 눈빛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아니면?"
"가장 무서운 적수(敵手)가 될 거예요!"
④
친구가 아니면 적이 된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며 말했다.
"전자이기를 바라오."
"저도 그래요."
"자, 그럼 이제 말해 주시오. 이곳의 주인은 누구요?"
"그럴만한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그 분은 을주신목, 바로 저의 오빠세요."
"으음!"
단목천상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록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듣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그럴 줄 알았소."
단목천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처음 볼 때부터 그가 꼬리를 감춘 잠룡(潛龍)이라는 것을 느꼈었소."
그 말에 을주우향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 잠룡은 오히려 당신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어요."
"뭐가 말이오?"
"천추혈제같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소협같은 분이 나왔는지 말이에요."
단목천상은 눈썹을 성큼 곤두세웠다.
"말 삼가시오. 그 분을 모욕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소!"
"호호... 미안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단목천상은 화제를 돌렸다.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곳의 관문은 어떤 것이오?"
을주우향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간단해요. 보물찾기예요."
"보물찾기?"
"이곳 어딘가에는 한 가지 보물이 비장(秘藏)되어 있어요. 당신은 그걸 찾아내야 해요. 단, 향 한 자루 탈 시간 내에 찾아야만 해요."
"......?"
단목천상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보물이란 어떤 물건을 말하는 것이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한 가지 부언하자면 그 물건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이 소유하게 될 거예요."
"음!"
단목천상은 신음을 흘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번 관문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할수록 더욱 어렵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방 안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만일 그가 뒤진다면 먼지 하나 놓치지 않고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보물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었다. 사실 보물의 정체도 모르고 찾는다는 건 애당초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였다. 일단 관문을 돌파하려면 을주우향이 낸 문제의 해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것도 향 한 자루가 탈 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관문은 통과하기가 결코 쉽지 않겠구나.'
단목천상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을주우향은 품 속에서 향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향 한 자루를 꺼냈다. 그녀는 향에 불을 붙인 후 촛대에 꽂았다. 그러자 한 가닥 향연이 피어오르며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
"......"
단목천상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방 안을 뒤질 생각은 포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물건을 일일이 뒤지며 찾는다면 승산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 관문에는 분명 상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단목천상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향 한 자루가 타는 시각은 일각도 채 되지 않는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향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방 안은 자욱한 향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단목천상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화육겁관은 지력(智力)을 겨루는 관문이다. 지금 나는 조화육겁관 중 오관에 있다. 지금까지의 관문 중에서 최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보물...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을까?'
단목천상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방 안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먼저 검은색의 서가를 훑어가던 그의 눈은 책상에 잠시 멎었다가 다시 벽으로 향했다. 산수화(山水畵)가 한 점 걸려 있었다. 고대의 화가가 그린 듯 고색이 감도는 그림이었다.
그의 눈길은 다시 바닥을 훑다가 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 사이에 향은 이미 밑둥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틀렸다.'
단목천상은 고개를 저으며 을주우향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쩌면......!'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향불은 꺼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을주우향을 가리켰다.
"바로 소저요!"
을주우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이... 말인가요?"
단목천상은 그녀의 음성이 떨리는 것을 보고 확신을 가졌다.
"보물은 바로 당신 몸 속에 있소."
그러자 을주우향은 싸늘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죠?"
단목천상은 흠칫하며 더듬거렸다.
"그야... 소저가 더 잘 알 것......"
그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사 그녀가 보물을 품 속에 지니고 있다 해도 부인해 버리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확인을 위해 그녀의 옷을 벗길 수야 없지 않은가?
마침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물은 분명 소저의 몸 속에 있소. 그러나 소저가 부인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을주우향은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당신의 기지에는 정말 탄복했어요. 그러나 당신의 대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반만 맞았다고?"
단목천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을주우향은 기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물은 바로 절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므로 제 몸 속에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예요.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단목천상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물이 소저 자신이라고......?"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가나요?"
을주우향은 문득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단목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가 어찌 자신의 누이를 이 관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통과자는 보물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니......"
그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을주우향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단목천상은 대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⑤
"오라버니는 절 이 관문의 상으로 내걸었어요. 당신은 상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을주우향의 말에 단목천상은 뭐라 대답하기 곤란한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문제가 아니오. 소저는 엄연한 인격체인데 어찌 한낱 시험의 상으로 주어질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을주우향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 말씀 진정인가요?"
"진정이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십전일미를 얻는다면 결코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단목천상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은 결코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오. 설사 그 대상이 절세미녀이건 추녀이건 관계가 없는 것이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오."
"......"
을주우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을주우향은 서글픈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라버니는 절 위해 이런 관문을 만든 거예요."
"소저를 위해서라고...?"
단목천상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을주우향은 손을 들어 면사를 만지며 말했다.
"제 얼굴을 보면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거예요."
면사가 제거되었다.
"......!"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을주우향의 얼굴! 십전일미란 미명을 떨치며 무림제일의 미인으로 알려졌던 그녀의 얼굴......
그 얼굴은 뜻밖에도 추악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피부는 온통 거무튀튀한데다 울룩불룩 혹 투성이였다. 코는 하늘을 향해 구멍만 뚫려 있었고, 입술은 뭉개져 있어 간신히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이었다.
다만 한 쌍의 눈빛만이 예외였다. 추악하고 괴기스런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단목천상은 한동안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것이 진정... 소저의 얼굴이오?"
"그래요. 이것이 세인들이 말하는 십전일미 을주우향의 본모습이랍니다. 이제야 알았나요? 오라버니의 뜻을?"
을주우향은 추악한 얼굴을 묘하게 씰룩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음성에는 자탄(自歎)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십전일미란 별호가 붙은 것이오?"
"후후... 그건 오빠가 만든 거예요. 십전일미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아요. 그건 다만 속임수에 불과했던 거예요."
단목천상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랬었군. 을주신목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끔찍이 사랑하여 이런 식으로나마 누이를 시집보내려 한 것이었구나. 하지만... 그의 방법은 틀렸다.'
단목천상은 탄식하며 말했다.
"소저의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구려.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했소. 혼인이란 결코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 말에 을주우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의 말씀은 맞아요. 오라버니의 생각은 틀렸어요."
그녀는 다시 면사를 쓴 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이 제의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단목천상은 그녀의 단정적인 말에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거절할 수 없단 말이오?"
"후후, 오라버니의 꿈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꿈?"
"야망 말이에요."
"글쎄."
"천하(天下)를 얻는 것이랍니다."
"......!"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반문했다.
"정녕 그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단 말이오?"
"이미 오라버니의 야망은 성사 직전에 이르러 있어요."
단목천상은 가슴에 찬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을주우향은 계속 말했다.
"이 세상에서 오라버니를 능가할 사람은 없어요. 따라서 당신은 오라버니의 명을 어길 수 없어요."
단목천상은 불끈 치미는 반감을 느꼈다.
"하하! 어찌 그리 자신한단 말이오? 세상은 넓고 영웅호걸은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소. 그는 너무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 같소."
을주우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협은 의아해 할 거예요. 광명회의 회주인 오라버니가 왜 그런 야망을 갖게 되었는지 말이에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소."
"오라버니는 오래 전부터 야망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나 오라니가 몸담고 있는 광명회는 이미 썩었어요. 그래서 그 분은 새로운 조직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당금 무림을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무림계를 열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단목천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래서... 신주십성을 끌어들인 것이오?"
"그래요."
단목천상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렇다면... 무림천자성(武林天子城)은 그가 만든 조직이오?"
을주우향은 몸을 부르르 떨며 되물었다.
"당신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군요?"
"광명십존도 그의 야망을 알고 있소?"
을주우향은 잠시 침묵하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얼마 전 죽은 살존을 제외한 나머지 구존은 이미 변절했어요. 그들은 오래 전부터 마도삼상천과 손을 잡았어요."
"뭣이?"
단목천상은 그야말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도무림의 존경받는 구대존사가 마도삼상천과 손을 잡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오?"
"아아! 석 자 물 속은 들여다 볼 수 있어도 한 치 인간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에요. 구대존사가 반심(返心)을 품은 것은 이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이십 년 전......?"
"제구대 광명회주이신 아버님께서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하셨을 때 후계자를 놓고 한창 내분이 일어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광명십존의 마음 속에는 욕망이 싹트게 되었어요. 그분들은 이백 년 동안이나 대를 이어가며 광명회의 신하 노릇을 하는데 불만을 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오라버니께서 십대 광명회주가 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은 광명회를 떠나고 말았어요. 그러던 중 마도삼상천이 그들에게 파고 들었죠. 그들은 십존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각자 십존을 자기편으로 암암리에 포섭한 거예요. 물론 광명회주의 자리를 미끼로 해서죠."
단목천상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소. 백도인인 그들이 아무리 그렇다고 어찌 마도삼상천과 손을 잡는단 말이오?"
"소협은 너무 순진하시군요."
"......?"
"인간은 유혹에 약하답니다. 마도삼상천은 그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무리들이에요. 그들은 색(色)과 독약(毒藥), 황금(黃金)으로 유혹하지 못할 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목천상은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구존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갔단 말이오?"
"유혹과 협박, 끈질긴 회유에 결국 모두 변절하고 말았지요."
"으음......."
단목천상은 신음을 발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