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드러나는 비밀(秘密)
①
항주(抗州).
절강성(浙江省)의 성도인 항주는 예로부터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끊임없이 선인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다.
-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처럼 항주의 풍치는 가히 인세의 절경이었다.
수나라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이후로 항주는 중원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열보객점(悅寶客店).
항주의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전당강(錢塘江) 변에 위치한 열보객점은 항주에서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주루와 객점을 겸하고 있는 열보객점의 서쪽 창으로는 막간산(幕干山)의 연봉(連峯)이 한눈에 들어왔다.
객점의 창가 자리에는 한 명의 흑의청년이 앉아 아까부터 연신 독한 백주(白酒)를 물마시듯 비우고 있었다.
그는 병색이 도는 청년이었는데 벌써 열두 근째의 백주를 비워내고 있었다.
"......"
그는 이따금 공허한 눈을 들어 창 밖의 막간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단목천상이었다.
때는 오월(五月).
강남의 날씨는 여름에 가까웠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는 막간산은 벌써 녹음이 짙게 스며져 있었다.
단목천상은 막간산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꽤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얼마 전 개봉부의 청류하변에 있던 사당의 사건 때문이었다.
'아아! 유령마혼대법으로 인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될 줄이야! 아아! 모든 게 내 불찰이다. 아무리 마공 탓이라고는 하나 씻을 수 없는 죄(罪)을 짓고 말았다.'
사당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룬 적이 없었다. 아니, 잠을 자다가도 악몽(惡夢)에 놀라 소스라쳐 깨어나곤 했다.
'애유란이라고 했었나......?'
단목천상은 그녀만 생각하면 스스로 천령개를 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책감이 치밀었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사당 안의 정경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특히 머리가 거의 뽑힌 채 처참하게 죽은 애유란의 시신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짓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아아!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내 다시는... 마공(魔功)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단목천상은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비록 애유란의 시신을 정성껏 묻어주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그녀의 죽음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옥진.... 그녀는 그런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단목천상은 이미 방옥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무림천자성을 떠날 때부터 줄곧 자신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특히, 사당 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그녀만의 은은한 난향냄새가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사당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끄럽구나. 천상아! 너는 평생 그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목천상은 괴로운 심정으로 다시 술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탁자에는 술병이 그득하게 쌓여 더 이상 술병을 놓을 자리가 없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옥차맹의 총단은 마애곡에 있다고 했지. 금소현(琴素弦)... 어쩌면 그녀가 말한 여인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자.'
그는 비틀거리며 객점을 나서고 있었다.
②
마애곡(魔涯谷).
마애곡의 지형은 몹시 특이했다. 이 곡은 호리병 모양으로 양쪽 절벽이 깎여있어 하늘을 보면 고작 손바닥만하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곡의 출입로는 극히 좁아 한 명의 장수로도 천군만마(千軍萬馬)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곡구에서부터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매복을 해두면 침입자를 물리치기가 용이하게 되어 있었다.
단목천상은 마침내 마애곡에 당도했다.
그는 마애곡을 찾는데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이틀이나 헤맨 끝에 사냥꾼들에게 물어 간신히 찾게 된 것이었다.
"......"
단목천상은 어둠이 스며들고 있는 마애곡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옥차문주 소수마염을 만날 수 있을까? 그녀만이 어머니에 대한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단목천상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것은 소수마염에 대해 그다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려 칠십 년 전 중원을 횡행했던 전대의 여마(女魔)가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무공은 혈세오마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설사 마애곡에서 뼈를 묻을지라도 그녀를 통해 자신의 신상을 알아내야만 했다.
'세상에 뿌리없는 인간은 없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번 기회에 어머니에 대한 것을 알아내고 말리라.'
그는 어둠을 틈타 마애곡으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옥차맹은 방외오문 중에서 가장 신비한 문파다. 무공 또한 사이하고 악랄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곳에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단목천상은 한 바위 그늘 아래 자리잡은 후 운공(運功)하기 시작했다. 혈전을 치를지도 모르기에 진력을 보충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밤이 되었다. 칠흑같은 암흑이 마애곡을 뒤덮고 있었다. 마침내 단목천상은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당신 혹시 돌은 거 아녜요? 단신으로 옥차맹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딨어요?)
문득 모기소리와도 같은 한 가닥 전음지성이 그의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단목천상은 흠칫 놀라 부르짖었다.
(방소저!)
그러자 예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그녀는 바로 천면기환 옥수랑, 아니 이제는 천면기환녀라고 해야 할 방옥진이었다.
"흥! 옥차맹을 너무 얕보는 거 아녜요? 옥차궁(玉叉宮)까지 접근하는 데만도 최소한 서른여섯 군데의 매복이 있다는 걸 아나요?"
단목천상은 빙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지금 날 염려하는 것이오?)
(흥! 누가 당신같은 파렴치한 색마를 염려한댔어요? 이건 오직 성주의 부탁 때문이라구요.)
단목천상은 탄식했다. 그는 토지묘에서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건 오해요. 난 결코......"
그러나 방옥진은 쌀쌀하게 말했다.
"변명은 듣기 싫어요."
"알겠소."
단목천상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기야 변명해야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렇다고 과거가 덮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소저는 지금 어디 있소?"
"호호...!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이에요."
"......?"
단목천상은 의아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답답해 죽겠어요. 팔꿈치 좀 치울 수 없나요?"
단목천상은 흠칫 놀라며 바위에 기대고 있던 팔꿈치를 뗐다.
스스...!
순간 바위의 한 부분이 벗겨지면서 하나의 해맑은 얼굴이 쓱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놀랍군!"
단목천상은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는 그녀가 바위로 환신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탄할 것 없어요. 이건 기환방(奇幻幇)의 극히 초보적인 은신술일 뿐이에요."
모습을 드러낸 방옥진은 짐짓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단목천상은 감탄한 듯 말했다.
"대단하오. 오늘 안계(眼界)를 크게 넓혔소."
방옥진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세상은 넓어요. 당신은 그 색마대법(色魔大法)으로 옥차맹의 여인들을 모두 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단목천상은 안색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방소저! 이제 그 말은 제발..."
"흥!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당신의 그 반반한 얼굴을 문지르고 싶지만... 잘 들어요."
"......?"
단목천상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방옥진이 구결(口訣)을 읊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기환술의 요체(要諦)였다. 그는 의아하여 물었다.
"내게 기환술(奇幻術)을 가르쳐 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방옥진은 입술을 뾰죽 내밀며 톡 쏘아부쳤다.
"개죽음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새겨 듣기나 해요."
그 말에 단목천상은 그만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방옥진의 입에서는 계속 기환술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기환술은 본래 초목이나, 바위, 각종 지형기물을 이용한 은신술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천축에서 건너온 유가술(瑜伽術)과 접목되면서 독특한 술법인 기환체비술(奇幻體秘術)로 발전한 것이었다.
단목천상은 짧은 시간 동안에 기환술의 구결과 그 시전방법을 머리에 새겼다. 그것은 하나같이 괴이무쌍한 것들이었다.
"기환술을 사용하면 옥차궁까지는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방옥진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단목천상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모험을 하려는 거죠? 이곳이 마도삼상천과 무슨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요?"
그 말에 단목천상은 그저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둡시다. 어쨌든 고맙소, 방소저."
스스...!
순간 단목천상의 모습이 꺼져 버렸다. 그가 감쪽같이 사라지자 방옥진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구결을 단 한 번 들었을 뿐인데 바로 기환둔비술을 펼치다니......!"
그녀는 단목천상의 초인적인 자질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단목천상이 사라진 곳을 향해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③
단목천상은 기환지둔술(奇幻地遁術)을 펼쳐 기척도 없이 기암괴석이 난립해 있는 계곡 안으로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곳곳에 옥차녀들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만일 기환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옥차궁에 접근하기도 전에 혈전을 벌일 뻔했구나.'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매복해 있는 여인들의 무공이 모두 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이 포진하고 있는 형세로 미루어 천강혈성위(天 血星位)란 악랄한 진세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수비에 강한 절진으로 아무리 무공이 강한 인물이라도 고전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난석진을 지나 계곡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눈 앞에 하나의 궁(宮)이 나타났다. 궁은 주변에 죽림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다.
사실 옥차궁의 규모는 작았다. 그것은 옥차궁이 금남지궁(禁男之宮)으로 마음이 독랄한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저곳이 옥차궁인 것 같구나.'
단목천상은 죽림 사이로 보이는 궁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러던 중 그는 죽림 속에 또 하나의 작은 건물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옥차대전(玉叉大殿)>
건물의 처마에는 그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판을 본 단목천상은 기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하구나. 현판으로 보면 상당히 중요한 곳인 것 같은데 어째서 궁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일까?'
그는 건물을 바라보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는 옆에 있는 대나무잎을 한 줌 뜯어내 입에 대고 훅 불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대나무잎이 회오리치며 날아갔다. 그와 함께 그는 옥차대전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것은 기환술의 교묘한 신법이었다. 실상 그는 나뭇잎으로 눈을 현혹시키며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그것은 기환대나이술(奇幻大儺移術)로, 만일 방옥진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까무러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직접 펼친다 해도 그보다 완벽하게 펼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
대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번쩍 일어났다.
단목천상은 그 부신 광채에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차! 문이 닫쳤구나!'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자각했다.
눈을 떠보자 대전 안이 대낮처럼 밝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수십, 아니 수백 명이 그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피식 실소하고 말았다. 수백 개의 인영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방의 동경(銅鏡)으로부터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정말 기이한 곳이군.'
그러나 그는 대낮처럼 밝은데다 동경이 사방에 세워져 있어 더 이상 기환술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무공밖에는 믿을 것이 없게 됐군.'
그가 내심 이렇게 뇌까리는 순간이었다.
"호호호호......!"
"깔깔깔......!"
돌연 사방으로부터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수백 명의 여인들이 동경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인들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그를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미인이었는데 속이 은은히 비치는 나삼만을 입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풍만한 유방이 출렁거렸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뿌연 허벅지가 어른거려 몹시 육감적이었다.
"......"
단목천상은 긴장했다.
문득 수백 명의 여인들이 일시에 그를 공격했다. 단목천상은 그만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여인들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쌍장을 어지럽게 뿌렸다.
위이잉!
혈공쇄강인(血恐碎 印)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여인들을 강타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혈공쇄강인은 하릴없이 허공을 치고만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그의 등과 허리로 날카로운 경기가 쇄도해 왔다.
펑!
"욱!"
그는 기혈이 뒤집히는 것을 느끼며 쌍장을 뒤로 날렸다.
우우웅!
시뻘건 장강(掌 )이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을 덧없이 후려쳤을 뿐이었다.
쩡! 쩌엉!
들리는 것은 괴이하게도 금속성이었다. 동시에 그는 손목이 시큰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오호호.....홋!"
문득 요사스런 교소와 함께 수백 개의 인영이 다시 그를 공격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노릇이었다. 단목천상은 그만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금리도천파(金鯉倒天波)의 신법을 전개해 여인들의 공세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수백 명의 공격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깔깔깔......!"
요사스런 교소와 함께 그는 다시 오른쪽 어깨에 장력을 맞고 바닥에 뒹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것은?'
바닥에 뒹굴던 그는 방금 전 날린 혈공쇄강인에 맞아 금이 간 동경(銅鏡)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동경에 반사된 여인들의 모습도 갈라져 있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수백 명의 여인들은 알고 보니 동경에 비친 허상(虛像)이었던 것이다.
단목천상은 신형을 일으키며 사방의 동경을 노려보았다. 그는 침착하게 인영들을 살핀 결과 모두 다섯 가지 자세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여인은 다섯 명에 불과하다. 다만 어느 것이 실체(實體)인지만 찾으면 된다.'
단목천상은 날카롭게 사방의 인영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당 있어야 할 여인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사방 벽에 설치되어 있는 수백 개의 동경이 대전의 바닥보다 조금 높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침내 그는 수백 명의 여인들 중 오직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만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저 여인들이다.'
단목천상은 신형을 날렸다. 전광석화처럼 다섯 여인들을 덮쳐가며 장력을 날렸다.
"사천굉천류(死天轟天流)!"
꽈르릉!
"아악!"
비명과 함께 여인들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그러자 사방을 에워쌌던 수백 개의 허상도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
단목천상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섯 여인의 시신을 내려보며 탄식했다.
"어쩔 수 없었소. 당신들이 다짜고짜 날 공격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단목천상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가 옥차맹에 온 것은 모친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지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금 간 동경을 노려보던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동경 속에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내 모습에 놀라다니......'
그런데 이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아름다운 옥음(玉音)이 울렸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단목천상은 공명을 울리며 들려온 그 음성에 안색이 변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자신의 모습 외에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무거운 어조로 반문했다.
"그런 당신은 누구요?"
"건방진 아이구나."
예의 음성은 비록 아름다운 옥음이었으나 말투는 늙은 여인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단목천상은 음성의 출처를 찾기 위해 청력을 최대한으로 집중하며 말했다.
"진면목을 보이시오. 숨어 있는 자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소."
"......."
잠시 응답이 없다가 한참만에야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다. 나도 궁금한 점이 많으니 널 만나 보겠다."
그르르.......
괴이한 음향과 함께 한쪽 벽의 동경이 돌아가면서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저런 곳에 입구가 있으니 발견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단목천상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와 세번째 기둥을 일곱 번 쳐라."
"......?"
단목천상은 의혹을 느꼈으나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또 하나의 작은 대전이었다. 대전 중앙으로는 기둥이 나란히 서 있었다. 모두 열두 개였다.
단목천상은 그 중 세번째 기둥 앞으로 가서 기둥을 두드렸다.
탕! 탕! 탕.......
단목천상이 정확히 일곱 번 두드렸을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바닥이 아래로 꺼져 버렸다. 단목천상은 급속도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떨어지는 속도를 감속했다.
잠시 후 그는 낙지매화(落地梅花)의 신법으로 바닥에 소리없이 떨어져 내렸다.
"......."
그가 떨어진 곳은 아늑한 정청(政廳)으로,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는데 바닥에는 화려한 융단이 깔려있었다.
정청의 정면에 태사의가 있었는데 그곳에 궁장차림의 미부인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기이한 것은 미부의 머리카락은 비록 서리를 맞은 듯 하얗게 세었으나,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희었으며 용모 또한 절색이었다.
단목천상은 미부인을 보는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만일 머리칼만 세지 않았다면 천하의 우물로 뭇남성들을 잠 못이루게 했을 것이다.'
궁장부인의 좌우에는 홍의와 청의를 입은 두 명의 미소녀가 공손히 시립한 채 서 있었다. 그녀들 역시 절색이었으나 궁장부인에 비한다면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를 느끼게 했다. 그만큼 궁장부인의 미모는 절륜했다.
궁장부인의 무릎에는 털이 눈처럼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전설의 백양혈묘(白陽血猫)로구나.'
단목천상은 단번에 그 고양이를 알아보았다.
백양혈묘는 영성을 지닌 고양이로 비록 체구는 작았으나 그 용맹스러움은 가히 대호(大虎)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어떤 맹수라도 백양혈묘와 맞닥뜨리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또한 백양혈묘는 선천적으로 독(毒)에 대해서는 극성으로 어떤 독물도 잡아먹으며, 해독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목천상은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백양혈묘가 앉아 있는 궁장부인의 무릎 아래가 긴 치마로 덮힌 채 다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단목천상은 궁장부인을 향해 포권하며 물었다.
"소생 단목천상이라 합니다. 부인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네 성(姓)이 단목씨라고? 아아! 그럼 현아(弦兒)의 핏붙이가 틀림없구나......!"
궁장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단목천상이었다. 그는 의혹을 금치 못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날 안단 말인가?'
이때 궁장부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얘야, 노신은 소수마염 희옥영이라 한단다."
"......!"
단목천상은 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궁장부인의 모습이 상상하고 있던 소수마염과는 너무나 틀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수마염이 백 살이 넘었으므로 필시 노파(老婆)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야, 정말 네가 천룡사인잠(天龍死引簪)을 가지고 있느냐?"
단목천상은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소수마염은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애유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천룡사인잠을 가지고 있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고."
단목천상은 그만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애유란이라면 토지묘에서 만났던 옥차녀였다. 그녀는 그가 펼친 마공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지 않았던가.
'그녀가 죽기 전 옥차맹으로 보고를 했었구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 물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자 소수마염은 은은히 격동의 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지금 그걸 보여줄 수 있느냐?"
단목천상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옥비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소수마염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홍의소녀가 다가와 비녀를 받은 후 소수마염에게 바쳤다.
"과연 틀림... 없구나."
소수마염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이어 그녀는 단목천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걸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게 됐느냐?"
단목천상은 담담히 말했다.
"선모(先母)의 유품입니다."
"그... 그럼 너는 금소현의 아이가 틀림없겠구나!"
희옥영은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희게 센 눈썹을 떨었다. 한편, 단목천상은 더욱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애유란으로부터 옥비녀가 금소현의 것이란 말을 들은 후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애유란은 금소현이 사문의 배신자라고 했었다.
그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 옥차맹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옥차맹의 문주인 소수마염의 표정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단목천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소수마염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원독의 광채가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녀는 으시시한 저주(詛呪)의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그 더러운 위인 때문에 너마저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왔겠구나! 노신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감천위(甘天爲)... 그 노적의 생간을 씹어 삼키고... 가죽을 벗겨 자리를 삼으리라!"
'감천위!'
단목천상은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감천위란 이름이 나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주일신공(九州一神功) 감천위(甘天爲)!
무림인이라면 그 누가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설사 삼척동자라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무림을 떨어울린 일공(一公), 쌍혈(雙血), 삼마(三魔), 사괴(四怪), 오제(五帝), 칠현(七賢), 십살(十煞) 중에서 서열 일위를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구주일신공 감천위가 아니던가?
구주일신공 감천위는 본래 하북(河北) 감씨무가(甘氏武家)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무학의 천재로 이름을 날렸었다.
게다가 그의 총명성은 매우 뛰어나 한 번 본 것은 영원히 잊지 않았다. 따라서 고수들의 비무를 한 번만 보고도 완벽하게 그들의 무학을 재현해낼 줄 아는 타고난 무귀(武鬼), 아니 무신(武神)이었다.
감천위는 무학일도(武學一道)를 탐구하기 위해 불과 십삼 세 때 주유천하의 길에 올랐다.
그 후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구대세가, 흑도는 물론 바다 건너 동영을 비롯하여 천축, 새외까지 그는 두루 발길을 넓혔다.
그 결과 불과 삼십대에 그는 가히 천하무학의 집대성(集大成)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감천위는 중원제일고수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가 구주일신공(九州一神公)이란 별호를 가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현재 그가 살아 있다면 그의 나이는 일백여 세에 달한다.
만일 삼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나 백 년 전 마도삼상천과의 대혈겁에 직접 나섰더라면 마도삼상천은 그의 손에 풍비박산났을 것이란 설이 파다했을 정도로 그의 무학은 신경(神境)에 이르러 있었다.
소수마염은 만면에 증오의 빛을 띠운 채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홋......! 그 늑대같은 작자가 노신을 실컷 농락하고 배신한 것만으로도 능지처참할 지경인데 결국 너마저 그 작자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구나."
소수마염의 얼굴에는 서리서리 한이 어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고개돌려 자애스런 눈으로 단목천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얘야, 이 늙은이의 얘기만 했구나. 이제 네 얘기를 들어봐야 겠다. 그래, 소현은 어떻게 죽었느냐?"
갑자기 한없이 자애스럽게 변한 소수마염의 태도에 단목천상은 문득 가슴이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은 원수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부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내게는 조모(祖母)나 다름없지 않은가?'
단목천상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생이었으나 너무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이었기에 단목천상의 이야기는 근 두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때까지 단목천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소수마염 희옥영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는 탄식하며 말했다.
"얘야, 네가 그토록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니... 아아! 하늘이 무심치는 않았구나. 널 내게 보내주셨으니 말이다."
잠시 후 그녀는 부드럽고 자애스런 눈빛으로 단목천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상이라고 했지? 이리 오너라. 노신은 네 어미의 사부이니 네가 날 할머니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그렇게 해주겠느냐?"
"......!"
단목천상은 격동을 느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갈천륭이 죽은 후로 줄곧 혈혈단신으로 중원을 떠돌았다. 그런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혈육의 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소수마염은 자신을 조모라 불러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
마침내 단목천상은 격동에 찬 음성으로 불렀다.
"오냐! 얘야, 이리 오너라."
소수마염 희옥영은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④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조손(組孫)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소수마염 희옥영의 두 시비가 향차를 준비해 준 것이었다.
두 소녀는 그들이 조손지간의 정을 나누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인 듯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할머니,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째서 어머니가 옥차맹의 반도가 되었습니까?"
단목천상은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휴우! 그것은 이 할머니의 업보 때문이란다."
희옥영은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사연을 말한다면......"
희옥영의 얼굴에 회한이 어렸다.
"사실 그 일의 발단은... 노신이 십기무달(十技武達) 감천위란 자를 만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단다."
단목천상은 묵묵히 희옥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신이 그 자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자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당시 무학에 빠져있던 그 자는 수려한 용모와 화려한 출신에 비해 담백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단다. 그는 사해오악(四海五嶽)과 구주팔황(九州八荒)을 주유하며 오직 무학에만 심취해 있었지. 그런데 마침 강호에는 한 명의 사도(邪道) 출신의 절세미인이 나타났단다."
"그것이 바로 할머님이셨군요?"
단목천상의 말에 희옥영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단목천상은 내심 중얼거렸다.
'희대의 마녀라 불리웠던 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인이구나.'
"그렇단다. 그게 바로 나였지."
"그래서요?"
단목천상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어쨌든... 두 남녀는 서로를 한 번 본 후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지. 누가 뭐라하던 우리는 정도와 사도를 초월하여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되었지."
사랑에 대한 추억은 설사 그것이 불운한 종말을 빚어냈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일까? 과거를 회상하는 희옥영의 눈에는 꿈꾸는 듯한 회억이 어리고 있었다.
"그 후 우리들은 한 쌍의 용봉이 되어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지. 세인들은 그런 우리들을 무척 부러워했지. 오죽하면 그와 내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금릉의 한 정자의 이름을 그와 내 이름을 따서 지어주었을 정도니까......."
"......"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무공광(武功狂)인 감천위의 방랑벽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단다. 아아! 그로 인해 우리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지. 결국 나는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가문의 비전지학까지 털어놓게 되었단다. 실상 노신의 부친은 사도(邪道)의 신비문파였던 구밀교(九密敎)의 교주였단다. 그래서 노신은 구밀교의 비전지학까지 그에게 알려주게 되었지."
'으음....'
단목천상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그도 구밀교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구밀교는 천축에서 건너온 천진교(天眞敎)의 한 종파로, 중원무학과는 상반(相反)된 편격괴이한 무공으로 한때 무림을 뒤흔들었던 문파였던 것이다.
희옥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던지... 지금 와 생각하면 땅을 치고 싶을 정도란다. 어쨌든 감천위는 구밀교의 무학에 심취하여 도로 주저앉게 되었지. 그러나 그것도 잠깐 뿐, 타고난 무학의 천재였던 그는 불과 한달여 만에 본가의 무학을 모두 익히게 되자 곧 싫증을 내게 되었지. 그리고는 어느날... 짧은 글 하나만을 남긴 채 노신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단목천상은 어렴풋이 희옥영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기분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천하제일미녀가 아니던가?
감천위의 배신으로 인해 그녀가 느꼈을 분노와 원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침내 나는 세상 끝까지라도 감천위를 쫓아가 사랑의 배신에 대해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부터 나는 천하를 이잡듯이 뒤지며 감천위의 행적을 쫓았다. 그러기를 십여 년......"
잠시 말을 끊은 희옥영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나는 천하의 남자들을 증오하게 되었지. 그것도 미남자들을 더욱 증오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남자들만 보면 가차없이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단다."
"......!"
단목천상은 비로소 소수마염 희옥영이 희대의 여마란 칭호를 얻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노신은 혈세오마(血洗五魔)의 서열에 들게 되었지. 그러나 여전히 감천위와의 해후는 이루어지지 않았단다. 노신의 한은 깊을 대로 깊어졌지. 그래서 마침내 남자에게 한을 품은 여인들을 모아 하나의 문파를 만들게 되었다."
단목천상은 흠칫했다.
'음, 그게 바로 오늘날 방외오문의 하나가 된 옥차맹이었구나.'
비로소 그는 옥차맹이 무슨 이유로 수많은 남자들에게 살수를 뻗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무섭구나.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줄이야.'
희옥영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노신은 마침내 구주일신공이란 별호를 얻게 된 감천위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곳은 무산(巫山) 등우대(登羽臺)란 곳이었다. 감천위에 대한 한이 깊을 대로 깊어진 노신은 그를 만난 순간 다짜고짜로 공격했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 그 동안의 노신의 행실이 부정했을 뿐더러 무림을 어지럽힌 여마가 되었다고 질책하며 노신을 공격했단다. 결국 우리는 혈전을 벌이게 됐지. 그 결과... 노신은 중상을 입고 등우대 아래로 추락하게
되었단다."
단목천상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천으로 무릎을 가리고 있는 희옥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때 일로 인해......?"
"휴우! 질긴 것이 인간의 생명인지... 노신은 극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지. 하지만 그때부터 하반신을 못쓰는 폐인이 되고 말았단다."
"아......!"
단목천상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그녀가 감천위를 그토록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희옥영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참, 유란이란 아이로부터 천룡사인잠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노신은 무척 놀랐단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소식이 끊겼던데?"
단목천상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그 날 토지묘에서 일어났던 일을 사실대로 고백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희옥영은 크게 놀란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탄식했다.
단목천상은 다시 옥차대전에서 다섯 명의 옥차녀를 죽인 것을 떠올리고는 죄책감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 옥차대전에서 소손이 손을 심하게 써서 그만 할머니의 문도들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희옥영은 안색이 차갑게 변하더니 냉랭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상관없다. 그 계집들은 노신을 배반한 계집들이니까!"
"네?"
단목천상은 의아하여 희옥영을 바라보았다. 희옥영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노신이 하반신을 못쓰게 된 후... 옥차맹은 노신의 첫째 제자였던 조화연(朝花燕)이란 계집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계집이 감히 노신을 배신하고 이곳에 고립되게 했단다. 아! 노신이 힘을 쓸 수만 있어도 그 계집을 쳐죽였을 텐데... 더구나 그 계집은 얼마 전 환마미궁(幻魔迷宮)과도 손을 잡았다고 하는구나."
"넷! 환마미궁이라고요? 그럴 수가......!"
단목천상은 경악하여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환마미궁이라면 바로 마도삼상천 중 하나가 아닌가?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흥! 그 계집은 노신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멋대로 환마미궁과 손잡고 옥차맹을 더러운 색궁(色宮)으로 만들어 버렸다. 언제고 그 계집의 껍데기를 벗겨버릴 참이다!"
단목천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불행한 분, 정인에게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이젠 제자에게도 배신당한 셈이구나.'
단목천상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할머니. 소손이 그 계집을 처단하겠습니다."
희옥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 그래 주겠느냐? 정말 고맙구나. 아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상... 그 계집만 아니라면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노신을 잊지 못하고 있단다. 그러니 그 계집만 처단하면 옥차맹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단다."
"염려 마십시오. 조만간 소손이 옥차맹의 반도를 정리하겠습니다."
이어 단목천상은 지금까지 늘 마음 속에 남아있던 점을 물었다.
"할머니, 그럼 제 어머니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그의 얼굴에는 으시시한 살기가 덮였다. 그러자 희옥영의 안색이 굳어졌다.
"모두가 감노적의 짓이다."
"넷?"
뜻밖의 대답에 단목천상은 크게 놀랐다.
"노신이 그를 왜 그렇게 저주하는 줄 아느냐? 사랑 때문에? 아니다. 실상 그 노적이야말로 천하에 다시없는 효웅(梟雄)이기 때문이란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단목천상은 다급히 재촉했다.
구주일신공 감천위가 일개 여인을 죽였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희옥영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노신은 무산에서 하반신을 못쓰게 된 후에도 복수를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감노적의 행적을 추적하게 했지. 그 결과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그가 을주신풍가(乙朱神風家)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
단목천상은 의아했다.
"그 자는 그곳에서 제자를 하나 키웠다. 알다시피 을주신풍가는 구대세가의 으뜸이자 대대로 광명회의 회주(會主)를 맡았던 가문이 아니더냐? 그런 그가 을주신풍가의 후계자를 제자로 맞이한데 대해 노신은 필시 무서운 음모가 있으리라 여겼다."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십 년 전 을주신풍가의 후계자라면 바로 을주신목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노신은 계속 제자들로 하여금 그 자를 추적하게 했지. 그 결과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는 을주신목이란 아이를 제자로 키운 후 광명회를 기반으로 무림을 제패할 음모를 세웠다는 것이다."
"......!"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럼... 무림천자성이 생긴 것도 바로 감천위의 뜻이란 말입니까?"
희옥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무림천자성은 바로 감노적이 무림제패를 위해 세운 괴뢰단체란다."
"그럴 수가!"
단목천상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금치 못했다.
"아이야."
"......?"
희옥영의 눈에 잔잔한 기운이 어렸다.
"너는 무엇 때문에 네 어미가 죽었는지 아느냐?"
"알려 주십시오!"
"그것은 놈이 네 부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다."
단목천상은 뜻밖에도 부친이 거론되자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소손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네 부친은... 고금제일의 기인이었다."
희옥영은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을주신풍가(乙朱神風家)와 쌍벽을 이루는 가문 출신이었다."
단목천상은 격동으로 인해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희옥영은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이야, 그것을 말하려면 오늘날의 대명국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다."
이윽고 희옥영의 입에서 고사(古事)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중원은 바야흐로 대풍운(大風雲)의 시대였으니, 원(元)이 그 수(壽)를 다하고 마침내 한족(漢族)의 혈통을 이어받은 풍운아가 홀연히 일어서게 된다.
그는 원의 몰락과 함께 난세를 틈타 대명국(大明國)을 건국하게 된다. 그런 그의 주위에는 구름같은 영웅호걸들이 모였다.
결국 그는 중원에서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했으니, 그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璋)이다.
그가 곧 대명(大明)의 태조(太祖)였던 것이다.
태조 주원장은 참다운 제왕지목이었다. 그는 명국을 건설하는데 온 힘을 경주했다. 그런 그의 눈은 무림계에도 돌려졌었다.
당시 무림도 난세였다.
주원장은 무림인의 도움을 받으면 천군(天軍)을 얻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된다고 믿었다. 결국 그의 곁에는 무림인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림세력은 당시 쌍벽을 이루었던 두 무가였다.
천하제일지가(天下第一智家) 을주신풍가(乙朱神風家).
천하제일무가(天下第一武家) 단목세가(丹木世家).
그들 두 쌍벽의 가문은 한쪽은 주원장의 군사(軍師)로, 한쪽은 대무장(大武將)으로 숱한 격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주축이 되었다.
그것은 후세의 사가(史家)들조차 모르는 야사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명국을 건설했을 때 그들은 아무도 공신(功臣)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쟁이 끝난 후 강호무인들은 뿔뿔이 강호로 흩어져 돌아갔다. 그들은 애당초 관직에 뜻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주원장의 양팔이었던 쌍벽의 두 가문도 공신의 지위를 사양하고 강호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들을 그대로 돌려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가문에게 은밀히 하나의 약조를 하게 했다. 그런 연후에야 주원장은 두 가문을 떠나보냈던 것이다.
희옥영은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얘야, 너는 당시 주원장이 두 가문에게 어떤 약조를 하게 했는지 아느냐?"
단목천상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희옥영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주원장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지. 그는 대명을 세웠으나 황실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무림마저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단목천상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무림을 장악해야 한다고?'
"만일 무림인이 아니었더라면 그토록 쉽게 원을 몰아내고 명국을 건국할 수 없었지. 그래서 향후 무림인들이 반기(叛旗)를 들게 되면 명조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란 생각을 했단다."
"......!"
"그래서 그는 두 가문의 가주들에게 각각 약조를 받아냈지. 그것은 자신의 곁을 떠나되 그들로 하여금 명조를 위해 정도무림(白道武林)과 사도무림(邪道武林)을 장악하도록 한 것이었단다."
"아!"
단목천상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태조 주원장에 대해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아득한 과거의 일이긴 했으나 그의 치밀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가주는 충직한 인물들이었지. 약조대로 을주신풍가의 가주는 그의 하늘을 덮는 지혜를 발휘하여 머지않아 백도무림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단다. 오늘날의 광명회(光明會)는 그렇게 탄생된 것이란다."
"......!"
듣느니 놀라운 말들 뿐이었다. 단목천상은 급히 물었다.
"그럼 단목세가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 말에 희옥영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지. 광명회를 세워 정도무림을 장악한 을주세가와는 달리 당시의 단목세가의 가주는 사도무림을 평정하라는 밀명을 받았는데 그후 어찌된 셈인지 그는 강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단다."
"사라졌다고요?"
단목천상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그가 사도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지하로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단다."
단목천상은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희옥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노신이 어떻게 그 비사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단목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옥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노신이 이런 내막을 알게 된 것은 단목세가의 후예인 한 청년이 노신의 제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네 어미인 금소현이었지. 본래 옥차맹에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금법(禁法)이 있었는데, 노신은 제자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 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래서 그 아이를 강호로 보내게 되었지."
희옥영의 눈가에 언뜻 이슬이 맺혔다.
"그런데 그 아이는 옥차맹을 배신하고 그 자와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것이... 네 어미가 옥차맹의 반도로 낙인 찍히게 된 사연이란다. 하지만... 노신은 그 아이를 축출했지만 내심으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했단다."
문득 그녀는 단목천상을 안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당시 이미 임신중이었단다. 그게 바로 너였지."
"그... 그랬군요!"
단목천상은 비로소 자신의 내력을 알고는 격동을 일으켰다.
이때 희옥영의 눈에서는 차가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감천위 그 노적에게는 가장 꺼려하는 존재가 있었지. 그것은 바로 과거 을주신목가와 쌍벽을 이루었던 단목세가였다."
"......!"
단목천상은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놈은 단목가를 찾을 수 없었지. 대대로 광명회에 뿌리를 내린 을주신목가와 달리 오래 전부터 단목가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그 자는 단목가의 핏줄을 소현이 잉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代)를 끊기 위해 소현을 공격한 것이란다."
단목천상은 안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문득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제 아버님의... 존함은 무엇입니까?"
"네 애비의 이름은 단목성우(丹木星宇)란다."
'단목성우......!'
순간 단목천상은 쇠뭉치로 뒤통수를 힘껏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희옥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목성우란다."
"그... 그럴 수가!"
단목천상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 그렇다면... 자하별부에서 만났던 그 분이 바로...!"
단목천상의 뇌리에 공명산(公明山)의 자하별부에서 보았던 장막 속의 신비인이 떠올랐다.
'자하공주 주연하의 사부는 단목성우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아! 그렇다면 그 분이 바로 아버님이셨단 말인가?'
단목천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얘야, 왜 그러느냐......?"
희옥영이 몇 차례나 거듭 물었을 때야 비로소 단목천상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손은... 그 분을 만났습니다."
"뭐라고?"
희옥영은 놀라 마지 않았다.
"어... 어디서 만났단 말이냐?"
단목천상은 간신히 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공명산의 자하별부란 곳에서 분명 그 분을 보았습니다. 그 분의 성함은 분명... 단목성우라고 하셨습니다!"
"자하별부라니?"
희옥영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곳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분명......"
단목천상은 마침내 공명산의 자하별부에서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얘기했다.
"그, 그럴 수가... 오오!"
단목천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희옥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로구나. 피를 나눈 부자가 상봉을 하고도 서로 몰라보다니......"
희옥영의 눈에 뿌연 안개가 어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단목천상의 두 손을 꼬옥 거머쥐며 눈물을 흘렸다.
단목천상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는 희옥영의 행동에서 혈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진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다.
문득 그는 굳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소손 기필코 감노적을 처단하여 어머님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그리고... 부친을 찾겠습니다!"
그때였다. 문득 희옥영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얘야, 주연하란 아이에게서 마공구결을 얻었다고 했느냐?"
희옥영의 얼굴은 어딘지 어두워 보였다. 단목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할미에게 들려 주겠느냐?"
단목천상은 주연하에게 들은 마공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구유탈명멸마공(九幽奪命魔功)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루음부천마신공(고루陰府天魔神功)과 역천혈륜마겁공(逆天血輪魔功), 천살백팔겁(天煞白八劫), 천마소혼무(天魔消魂舞), 십마연환지옥공(十魔連還地獄功), 유령마소살기(幽靈魔笑煞氣), 만겁다라니공(萬劫多羅尼功)......"
"그... 그럴 수가?"
희옥영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오오... 맙소사!"
그녀는 전신을 무섭게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단목천상은 놀라 반문했다.
"그... 그것은 전설의 천마군림대총(天魔群臨大塚)에 묻혀있는 마공들이다!"
"넷?"
단목천상은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천마군림대총이라면... 바로 만상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일러준 천외쌍비지(天外雙秘地) 가운데 하나......!"
"틀림없다. 이 노신이 기억하는 한 그 마공들은 천 년 전 무림을 혈세했던 개세혈마들이 남긴 무공이다. 그것들은 천마군림대총에 묻혀있는 것인데... 아! 그렇다면 네 애비는 그 저주의 천마군림대총을 열었단 말이냐?"
"......!"
단목천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게 틀림없습니까?"
"틀림없다."
"으으음.... 그랬구나. 유령마혼대법을 시전했을 때 마성(魔性)을 느꼈던 이유도 바로 그때문이었구나."
단목천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⑤
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잠든 밤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 있었다. 불빛은 옥차궁의 한 화려한 방 안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음......."
어딘가 끈끈하며 음탕한 여인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내의 거친 숨소리도 울리고 있었다.
발등이 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있는 방 안. 안쪽의 상아침상 위에서 그야말로 질탕한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남녀가 한 덩어리가 된 채 엉켜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여상남하(女上男下)의 해괴한 모습이었다.
우윳빛 피부를 지닌 전라의 미부(美婦)가 긴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대며 마치 말을 타듯 몸을 굴러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근육질 사내의 가슴을 짚고 있었다.
미부의 손가락에는 산호반지가 끼여져 있었다. 미부는 온통 희열에 찬 얼굴을 뒤로 젖힌 채 둔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흐으윽......"
쾌감이 절정에 오른 것일까? 미부의 손가락이 사내의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한편, 사내는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위에서 젖가슴을 출렁이며 움직이고 있는 미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한 손은 미부의 허리를 잡고 한 손은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움켜쥔 채 청년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온통 이맛살을 찌푸린 채 사정의 순간을 억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부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에 따라 신음은 더욱 높아졌으며, 우윳빛 나신에서는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년의 가슴팍에는 손톱자국이 낭자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미부의 엉덩이를 잡아당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허억!"
미부의 몸도 딱 정지되며 무서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은 절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경직되어 있던 미부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호호호호호.......!"
문득 그녀는 요사스런 교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미부의 가슴을 만지려 했다.
"헤헤... 어떻소? 이만하면......"
청년은 교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정력(精力)을 자랑하는 듯했다. 그러자 미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손으로 청년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청년의 가슴은 온통 손톱에 긁혀 핏자국이 나 있었다. 미부의 손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더니 청년의 목을 어루만졌다.
"호호... 어떠냐고?"
"헤헤......"
"호호호호......! 이 얼간이!"
퍽!
"으아악!"
놀라운 일이었다. 중년미부의 손가락이 청년의 두 눈을 그대로 찍어버린 것이었다.
청년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쌌다.
"아악! 내 눈... 눈!"
그러나 미부의 다음 행동은 더욱 악독했다.
"호호호홋! 사내놈들은 모두 죽여야 해!"
파악!
여인의 손바닥이 이번에는 청년의 가슴에 떨어졌다.
"케에에엑!"
청년은 심장이 터지며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입과 코로 선혈이 뿜어져 나와 침상이 금세 시뻘겋게 물들고 말았다.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미부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열에 몸부림치던 나신을 동경 앞에 비추어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호호...! 이제부터 시작이야! 잘난 사내놈들의 씨를 모조리 말릴 거야! 왕강(王江), 도교의 진전을 이었다는 네 놈도 그 중 하나일 뿐이야."
미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방금 그녀의 손에 죽은 청년 왕강은 구화산(九華山)에 있는 도교의 사대동천(四大洞天) 중 하나인 왕자동(王子洞)의 차기 전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색에 눈이 멀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호호호...... 홋!"
조화연은 터질 듯이 솟아오른 육봉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동경 속에서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학!"
그녀는 문득 숨넘어갈 듯한 비명을 발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동경 속에 한 명의 흑의청년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단목천상이었다. 그는 냉혹한 눈빛으로 미부, 즉 조화연을 노려보며 입술을 열었다.
"조화연, 사부를 배신한 대가가 어떤지 가르쳐 주마."
"너... 넌 누구냐?"
조화연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러나 갑자기 신형을 빙글! 돌리며 장력을 날렸다.
우웅!
그녀의 쌍장에서 시뻘건 빛줄기가 폭사되었다. 그것은 소수적인강(素手赤刃 )이란 옥차맹의 독문절기였다.
단목천상은 차갑게 냉소했다.
"더러운 계집!"
단목천상의 쌍수가 허공에서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장심은 투명해졌다가 다시 담홍색을 띠었다.
꽝!
장력이 부딪친 순간 조화연은 가공할 반탄지력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두 팔이 으스러지며 무서운 기운이 그대로 가슴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녀는 뒤로 붕 떠올라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대로 절명해버린 것이었다.
단목천상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참하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조화연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할머니께서 창안하신 염홍접인살기(艶紅接引煞 )가 이토록 무섭다니......."
이때, 한쪽 문이 열리며 바퀴가 달린 의자를 두 명의 미소녀가 나란히 밀고 들어왔다. 의자에는 백발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
단목천상은 처연한 표정으로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노파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얘야, 이 할미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불구가 된 몸, 공력을 가져 무엇하겠느냐?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네게 전해주게 된 것이 기쁘기만 하단다."
노파야말로 다름아닌 소수마염 희옥영이었던 것이다.
얼마전 그녀는 반강제로 자신이 평생 동안 고련했던 내공을 단목천상에게 개정대법으로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로인해 그녀는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할머니......."
단목천상은 격동을 억누르며 희옥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희옥영은 단목천상의 어깨를 토닥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할미의 염홍접인살기는 쓸만 하더냐?"
단목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무공입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염홍접인살기(艶紅接引煞 ).
그것은 소수마염 희옥영이 자신의 절학이었던 소수백홍강을 새롭게 가다듬어 만든 무공으로 상대방의 공력을 맞받아 그 힘을 두 배로 퉁겨내는 기공(奇功)이었다.
단목천상은 완전히 노파가 되버린 희옥영을 보면 볼수록 안타까움을 느껴 말했다.
"할머니...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녀석......."
희옥영은 만면에 자애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단목천상을 바라보았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그녀는 단목천상에게서 육친 이상의 정을 느낀 것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단목천상과 같은 손자를 얻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