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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스크랩 고령지역 기독교100년사
지평선 추천 0 조회 263 20.12.20 19: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령기독교면려회 식수기념

 

 고령읍교회 부흥회

 

 

 

 

        고령 기독교 100년사

1.고령지역의 문화사적 배경

  1)고령역사의 시작

    한반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전기부터인데, 고령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B.C. 1000년)보다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가장 오래된 유적지로는 고령읍 장기리의 알터 암각화와 안화리 암각화인데, 이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 해당된다. 알터 암각화는 조각된 그림의 형태가 동심원, 십자형, 가면형상 등으로 한데 어울려 있다. 이들 그림들은 아직 문자가 발달되기 이전인 청동기 시대에, 농업의 풍성한 수확과 소원 성취를 기원한 표시로써, 이곳을 제단으로 삼아 태양신이나 하늘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다. 암각화 주변 언덕에는 당시 주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문토기와 마제 석기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 소뿔 모양의 돌도끼는 찍고 짜르는, 두 가지 역할을 하는 석기로써 고령지방 특유의 것이다. 장기리 알터 암각화를 남긴 주민들은, 고령 모듬내(회천) 평야의 비옥한 토지를 터전으로 삼아, 농업을 크게 발달시키고, 토기와 마제석기를 제작하여 생활하였고, 깨끗한 바위에 암각화를 새겨서 제단으로 삼아, 농사의 풍성함과 번영이 하늘의 신에게로 말미암는 소박한 믿음으로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대가야국의 건국과 변천

    기원전 2세기경 삼한시대에는, 고령지역에 미오야마국이라는 소국이 성립하였고, 그것이 곧 대가야국으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가야국은 서기 42년 이진아시 왕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진아시 왕은 가야산신 정현모주가, 천신인 아비가에 기원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맏아들이 대가여국의 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국의 김수로왕이라고 한다.1)

  대가야국의 주변에는,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상주군 함창의 고녕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그리고 김해의 금관가야의 6가야 연맹체가 있었고, 후기에는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맹주로서 활약하였다. 6가야 연맹은, 낙동강 중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북은 상주에서부터 남은 김해에 이르기까지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맹주인 대가야국은 4세기경부터 국세가 두드러지게 뻗어났다. 

 

 

  3)대가야국의 문화와 생활

    대가야 지역에서는,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야로(冶爐)에서 제철을 하여, 수준 높은 철기문화가 발달하였고, 농기구와 무기를 제작하여 국력을 높여 갔다. 이 무렵 축조된 것으로 보는 주산 산성과, 지산리의 순장묘들, 그리고 가야 금관과 고분벽화 등은, 5, 6세기경에 번창하고 강성하며 화려했던 대가야의 위세와 문화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 논이나 밭을 갈면, 발에 차이는 것이 가야 토기의 파편이요, 고령읍내의 지명까지도 모두 가야시대의 오랜 왕국의 도읍지임을 대변하고 있다.2) 대가야는 철기문명이 발달하여, 호전적이면서도 강력한 전제 왕권국가를 형성하였으나, 신라의 강성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52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것은, 500년이 넘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아주 가볍게 취급하거나,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은, 가야국을 아예 일본의 한 속국으로 취급한,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여 3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라 하여, 가야를 역사에서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서로 증명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이, 고령의 주산 능선을 따라서 늘어서 있는, 대가야 왕릉의 발굴을 통하여 나온 여러 가지 유물을 근거로 하여, 우리 나라의 고대사는 당연히 4국시대로 복원되어야 하며,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4)신라시대의 고령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대가야국은, 대가야군(大伽倻郡)이라 불려지고, 757년(경덕왕 16년)에 고령군(高靈郡)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오늘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고령이란 높을 '高'자, 신령 '靈'자로 표기하는데,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범상하지 않는 이름으로 굳이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신령한 기운이 높고 아름다운 성읍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태평시대가 계속되었고, 특히 귀족 중심의 사회 속에서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고령에 남아 있는 지산리 당간지주는, 높이가 3.4m나 되며, 전국 당간지주 가운데서도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에 큰 깃발을 달았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에 고령에 대규모의 화려한 사찰이 건립되어, 승려의 활동과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쌍림면 용리에 있는 반룡사(盤龍寺)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고찰이다. 그리고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있는 벽송정(碧松亭)은, 수해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지만, 신라 박혁거세가 왕이 될 때 세운 것으로, 이곳을 지나가는 길손들의 휴식처로 이용된 유서 깊은 정자이다. 신라 말 최치원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김굉필, 정여창 등의 시가 남아 있다.

  

5)고려시대의 고령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된 고려는, 태조 왕건 이후에는 숭불정책으로, 호국불교의 기치아래 불경을 새기고 숭배함으로, 국가의 힘을 기르려 하여, 현종 때 거란족의 침입으로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고종 때 강화도 등지에서 다시 판각을 시작하여, 1251년인 16년만에 완성하였으며, 고령의 아름다운 개포나루(개진면 개포리)를 거쳐, 영남 일대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 경판을 머리에 이고, 장사진을 이루어 알터와 고령읍을 지나, 낫질 신동재를 넘어, 합천 해인사에 대장경 판고를 지어 보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포나루는 이후 개경포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나중에 이곳으로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드나들었으며, 지금은 없어진 개포교회를 개척한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의 불교는 말기에 이르러, 현세 구복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 나라와 백성을 이끌어 주고 희망을 주기는커녕, 온갖 미신과 협잡으로 얼룩져서 분열을 일삼으며, 이권 쟁취에 여념이 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고려가 무너지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일어났던 안동장군 이미숭은, 최후까지 충청도에서 이성계와 싸우다가 쫓겨 김천, 성주를 거쳐, 고령의 상원산(지금의 미숭산, 합천군 야로면)에 진을 치고,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하며 대항하다가, 결국은 절벽으로 몸을 던져 순절하였고, 그를 따르던 장병들도 그와 함께 목숨을 버렸는데, 이 미숭산은 고령 4대 산의 하나로, 충의를 지킨 산성과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령의 불교적인 흔적으로는, 치사리 고분 벽화의 연화문과, 지산동의 당간지주와, 개포리의 관음보살상 등인데, 모두 희미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6)조선시대의 고령

    고령은 1413년(태종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새로 현감을 두어, 자신의 관할구역을 책임지고 소신대로 다스리게 하여, 조선왕조의 방어의 요새로 삼았다.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고, 낙동강변에 위치하여 제방이나 보와 저수지를 만들어, 물 관리를 함으로 농사가 발달하여 수확량이 갑절이나 되었으며, 수시, 은어, 도자기, 꿀 같은 특산품이 유명하였고, 지황, 작약, 복령 등의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었다. 그 중에 은어는 진상품으로 특히 유명하였다. 고령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분청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하여, 전국은 물론이요, 멀리 일본에까지 수출하였으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할만큼 고령의 많은 도공들을 데려갔으며, 고령토와 유약의 재료들까지 배로 실어 갔다. 고령의 사부동이나 기산동에는, 지금도 그때의 도요지에서 수많은 도자기의 파편들이 발길에 채일 만큼 널려 있고, 지금도 도자기 산업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조선시대는 유학이 발달하여, 사림의 영수였던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이, 사화 이후 고령에 은거하여, 쌍림 합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낙강 7현은 어릴 때부터 교제하여, 여러 차례의 왜란이 거듭될 때, 40여 년간 고락을 같이한 이들로, 한평생 학문과 효도와 우정에 힘을 쏟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목숨을 바쳐 국토를 지킨 우국의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  고령지역 기독교 전래의 경로


1). 대구-순회전도, 장날, 학업등

  원송교회 -월산

            화암 대평

  고령읍-중앙 제일 내곡 회천

  사부-성산 기족

  평리-다산제일 벌지 월성  


2). 낙동강-뱃길, 포구

  현풍-객기-우곡제일

  개포-옥산


3). 합천-이사 유민

  산당-신촌

 

4). 성주-이사 유민

  안림- 평지 고곡


5). 기관-전도회,단체

  반성 경동 평지 외동 운산-운수제일


6). 해방이후-교단

  중앙 노곡 일량 벌지

  귀원 예동 관동 고령감리 한결 금류



2.고령지역 장로교회의 시작과 발전


   1)자생(천부)적인 교회

   자생이라는 말은 천부(天符) 천생(天生) 자발(自發)등의 용어로 바꾸어 부를수도 있으며, 본서의 제목에서처럼 전래사 또는 수용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정서의 변화와 역사관의 변천과정 속에 있음을 일깨워 주는 용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자(I AM THAT I AM)로서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며 교회의 설립자요 창립자며 교회로 교회되게 하시는 분이시며, 성삼위가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요 그 외의 어느 누구도 감히 교회의 주인노릇이나 스승 지도자 아비가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하물며 교회의 시작이나 출발 창립에 대하여, 선교사 중심사관과 자국민 중심의 국수주의적인 교회사관을 구분하여 아전인수격으로 역사를 곡해하려 한다거나 자기들의 업적이나 공과를 전시하고 선전하며 기리는 것은 백해무익 하려니와, 지금까지의 선교보고서나 선교사편지에 의존하여 마치 대부분의 교회를 선교사들이 세웠다는 의식으로 기술한 교회사는 소위 심각한 역사왜곡이며, 편향적인 시각이라는 것이다.

   위로 하나님과 선교현장과 일선에서 실질적으로 복음의 열매가되고 봉사자가 되어 섬김으로 천생의 교회를 이룬 자국민들을 기만하는 식민사관의 횡포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봉사자 수혜자가 되어, 커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한국선교의 정체성을 묻지 않을수 없으며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여 초기의 교회형편과 여러 가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선교사들의 노고와, 실질적인 숨은 봉사자들의 자취를 함께 더듬어 정리함으로 균형잡힌 역사기록을 갖고, 이를 통하여 정직한 교회가 되고 선교하는 교회로서도 100년이후의 한국선교의 역사를 위하여 궤도와 자세와 시각과 역사관의 수정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령지역의 장로교회의 시작은, 대구와 인근 성주 합천 지방의 교인들이 이주하여 오거나, 자녀 교육이나 장을 보러 대구에 왕래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순회 전도하는 선교사들과 조사들을 만나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전도지나 쪽 복음을 받아 읽고,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는 말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였다(성산교회). 또한 스스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친구나 일가 친척을 모아, 신식 종교를 연구 토론하는 사랑방 모임을 갖게 되었고, 이웃에 미리 세워진 교회나 가정집회에 출석하며, 신앙 훈련을 받았으며, 고령의 자연부락마다 자기 마을에 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특히 안림이나 산당, 그리고 성산교회 객기교회등의 처음 기독교신앙에 입문한 이들은, 모두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합심 협력하여 스스로 전도하였으며, 물질을 바치거나, 초가집과 땅을 바치거나 구입하여 교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대부분의 공식 기록들이, 선교사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선교사들이 순회 전도하여, 교회 설립을 위한 모든 준비와 절차를 주도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 고령지역 교회사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록과 자료에 근거하여, 솔내교회나 앞서 세워진 여러 한국교회들과 함께, 고령에 세워진 교회들도, 엄연히 복음 진리를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들이, 자생(자발)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선교사들은 창립을 위한 준비와 협조를 하였거나, 일년에 한 두 차례 교회들을 순회하는, 순회당회장으로서 창립예배를 주관하거나, 성례식을 집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때 당시의 각교회의 창립교우들은 자택을 드리기도 하며, 예배당건립을 위한 비용을 일정한 비율을 따라 분담하기도 하였다. 교회들이 세워지게 된 몇가지 정황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역주민들간의 연락과 이웃교회나 성도들의 협력으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중에, 말씀에 근거한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며, 성례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원송교회)   

  둘째. 문중에서 쫓겨나거나, 천민으로 소외된 자연부락의 경우에는, 중소도시나 선교부와 연락이나 접촉을 꺼리어, 자연히 자기들끼리 상당기간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안림교회)  

  셋째. 교회의 예배처소를 건립하기 위하여, 교인들이 각자 믿음의 분량을 따라, 토지나 주택을 드려 예배와 모임의 장소로 삼고 교회를 설립하거나 창립하였으며,(산당교회)

  넷째. 교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한국인 조사들이 교회를 담임하였으며, 영수직과 집사직을 두어, 교회의 재정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다섯째. 대부분의 교회가 그 후에 선교사들이 조사나 평신도의 안내로 창립 예배를 드리거나 성례를 집례하는 정도의 ‘순회당회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같은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하여, 고령지역 교회 100년사는, 교회설립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성 삼위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역사하심으로써, 자국 성도들과 지역민과 유지들의 협력에 의하여, 천부 자생적으로 세워졌으며, 성장해 왔다는 점을 밝히며, 흔히 ‘설립자는 아무개 선교사’ 라는 식의 선교사 중심의 왜곡된 교회사관을 바르게 고치고, 후학들의 보다 깊은 조사와 연구를 기대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설립

     고령지방의 교회의 설립 또는 창립은, 앞서 정리하였거니와, 지역주민 스스로의 자생적인 노력과 헌신 위에,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하나님의 은혜아래 이루어졌으며, 미국 선교사 안의와, 부해리, 맹의와(맥의아) 등의 책임과 미국장로교 선교부의 다소간의 물질적인 지원 으로 세워 졌다. 이때에 조사들의 헌신과 노고가 많았으며,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섬기고 돕는 숨은 일군들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의 조사들에 대하여는, 다음 항목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설립을 단계적으로 구분해서, ①순회전도 ②가정집회 ③설립 준비 ④창립 또는 창립예배 ⑤교회성립 등으로 나누어 생각한다고 할 때, 어느 시기를 개 교회나 지역교회사의 창립 년 월 일로 잡느냐 하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교회사가의 자문을 구하였으며, 본 고령지역 기독교 100년사는 ④번 창립 또는 창립예배를 설립연도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앞에서도 기술하였지만, 엄밀하게 정립된 교회론에 입각하여, 정기적으로 정한 장소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며, 복음이 전해지는 때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3)


  3)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대구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초기의 선교사들은,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서, 고령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여, 말을 타고 다니거나, 걸어서 고단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으며, 고령지방(당시에는 서편지방)은 부해리 선교사가 주로 담당하여,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좇아오면 쪽 복음이나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며, 엽총을 들고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령인근에 해인사가 있어서, 선교사들이 관광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거나, 부산 쪽이나 대구에서는 개포나루나, 덕곡 또는 낫질의 신동재를 드나들며 전도한 결과, 자연부락을 따라 교회들이 세워 지게 되었다.



   4) 가정집회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신 대로, 복음은 처음에 어디서든지 한사람 한사람으로 시작하여, 가족과 형제, 일가친척, 이웃들에게로 전해져 가정 집회로 시작되었다. 사랑방 모임이나, 가족 모임 형태로 모이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며, 서로 보고 들은 대로 의견을 나누다가, 지도자를 찾게 되고, 선교사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 또한 선교부에 연락도 하여, 점차 교회의 형태로 성장하여 갔다. 가정집회로 교회역사를 말한다면, 고령지역의 교회사는 기록보다도 한 두 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사기상의 연도나, 경북교회사의 연도표기가 부정확한 것은, 여러 학자들이 밝힌 바가 있거니와, 상식선에서 생각하여 보더라도, 가정에서 모이고 집회를 가지다가, 구색을 갖추어 창립예배를 준비하는데, 한 두 해는 족히 걸리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라고 계산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같은 가정집회야 말로 초대교회의 본래모습이요, 생생한 복음의 현장이요, 그 자체를 교회라고 보아도 가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5)조사들의 활동

     조사(助事 또는 助師)란 돕는 자(helper)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초대 한국장로교회의 직분으로, 한국인 목사가 대거 양성되기 전, 선교사들을 도운 자들로, 교역 일선에서 선교사들의 손발이 되었으며, 눈과 귀와 입이 되어, 그림자와 같이 선교사들과 동행하며, 선교사들이 서투른 일이나, 모르는 풍습과 문화에 적응하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어렵고 힘드는 일이나, 궂은 일을 앞장서서 감당하였으며, 지방유지들을 접촉하며 집회를 주선하고 예배를 준비하며, 통역, 강설, 성경공부나 문답 등 목회 활동의 실무를 일선에서 담당하는 요긴한 직분이었다. 선교사공의회 시기에는 조사(助事)로 시작하였으나 독노회 이후에는 조사(助師)라는 호칭을 선호하여 봉사하였다.4) 

   선교사들은 조사들을 앞장세워서, 어렵지 않게 각 지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갈 수 있었고, 교회의 설립이나 발전을 도모하고, 긴밀한 연락과 효율적인 지도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개척자들이며, 초대교회 최 일선의 파수꾼들이요, 숨은 봉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전도․치리․순회심방 등의 일체의 활동을 보좌하고, 혹은 단독으로 조직․미 조직 교회에서의 목회활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전도사에 해당되는 직분이라 할 수 있으나, 사실 교회법상의 정식직분이라고는 보기 어렵고, 초기 교회의 과도기적인 교직, 또는 선교사 활동시기의 독특한 직분이었다. 이들은 당회의 조직요소가 되었으며, 장로교회 치리조직의 기본성원이며, 안수, 장립의 과정을 거치는 「장로」나, 지역교회의 지도자로 교역자를 도와, 교회인도와 유지를 책임 맡던 「영수」등의 직분과는 크게 구별되는 직분으로써, 오히려 순회 전도인이나 신학후보생으로 전임 교역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 7인 목사의 대부분은 조사 출신이고, 그 이후로도 조사의 일을 보다가 목사가 된 이가 많았다.

   1901년 1월에 영문으로 간행된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기본규칙인 《Standing Rules and By=Laws》에는, "조사란 선교사에게 속한 자로서 선교사의 선교활동에 중요한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독교인을 이른다"(A Helper is a Christian personally attached to a missionary as his or her special assistant in the work)라는 기록이 있어서, 조사의 직분성격의 한계를 규정해 주고 있으나, 이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규정한 것일 뿐, 현실적으로는 그보다는 훨씬 요긴하고 중요하게 교회를 봉사하고 섬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댓재 교회에서 모인 대한 독노회시에 대한 장로교회 신경과 정치와 (시행)세칙을 마련하였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측 제삼조 직원 제6항에서 “강도인은 로회의게 강도하난 인허를 밧고 인도함을 좃차 일하며 로회가 작뎡한 목사압헤서 혹 조사가 되느니라고 하였으며” 이하 셰측(세칙) 재2항 강도인과 조사를 인허함에서 “원위목사인(?)이나 혹 다른 사람이나 신학공부를 졸업하기 전에라도 로회가 시취하여 가합하면 강도인이나 조사를 인허할수 있나니 이리한 사람은 혹 로회의 인도대로 행하거나 혹 로회에서 명한 목사나 위원의 인도대로 행할 거시라 이러한 조사와 강도인이 교회를 쥬장하난 권세는 업스나 로회의 허락을 밧으면 당회업는 지회에셔 원입교인을 시취하여 세울수가 있느니라”고 하였다.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조직과 함께, 조사의 선택도 규칙규정에 넣어 노회에서 정할 일로 규정하였는데, 1912년의 제 1 회 《총회록》에는 "조사를 사용난 일은 로회에셔 주관할 거시니 혹 뎡사(定事)위원 혹 시찰위원이나 당회의게 맛길 수 잇나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의 안내역으로 시작하였으나, 차츰 일선 교역자의 직분으로 인정을 받고 개 교회를 담임하였으며, 한 사람이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겸임하여 2-5개 처에서 7-9처의 교회를 돌아본 경우도 있었다. 개 교회에서 조사의 일은 보았지만, 조금은 부족한 데가 있거나 형편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주로 재정) 충분한 대우를 하지 못하여, 반 조사라고 이름 붙이고 봉사하게 한 사례도 있어서, 노회에서 시정하도록 의논한 적이 있었다.

   경북노회록에는 주로 초기 20년간 조사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을 접할 수 있다. 영주지방과 안동지방에, 여러 명의 조사들이 활동하였으며, 1917년 제3회 노회시에 당시에, 안동지방에서 연봉을 60원으로 조사 세우기를 청원하였으며, 영덕지방 8처 교회에서는 월봉 10원으로 리샹동시를 조사로 청원하기도 한 기록이 있다.        

   1918년 1월 경북노회 제3회 임시노회에서, 조사의 월봉이 15원 이상이 되도록 각 지방에 권면하여 편지하기로 하여, 그해 6월 제4회 노회에서 편지 보낸 일을 광고 보고로 받았다.      1918년 6월 제4회 노회시에는 조사에 대한 대우가 대폭 향상되어, 서북지방 시찰위원 보고에 “리희봉 목사 시무하고 남는 8처교회는 년봉 170원으로 셔샹룡씨를 죠사 시무키로 쟉졍하였사오며” “권영해목사시무하던 6처교회중 칠곡진평 ......    남는 3처교회와 군위군 5처교회가 연합하여 봉급 170원으로 9개월만 소병권씨로 조사시무키로 작정하였사오며” “리문쥬시 죠사 시무하든.... 남는 4처교회는 년봉 180원으로 숑병근씨로 죠사시무키로 쟉졍하였사오니 죠량하심을 경요함”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동북지방시찰위원 보고에는 “청송지방 9처교회에서는 140원으로 강원백씨를 죠사 시무키로 하였사오니 허락하심을 청원하오며” 서편시찰위원 보고에는 “림시죠사 세운사건 고령군 림문길시는 해디방 7처교회에셔 림시죠사로 시무키로 하였사오며, 달셩디방 9처교회에서 배셕쥬시를 림시죠사로 시무키로 하였사오니 허락하심을 바라오며 셩쥬, 지례 두디방은 다 반조사를 곳처 완전한 조사로 세왔사오며” 등의 보고와 청원을 하였다.

  안동지방 시찰위원 청원서에는, 주로 조사의 지방변경과 조사교환과 월급 작정한 것을 무려 9명의 조사에 대한 상세한 상황을 보고하고 청원하였다. 한 명이 적으면 3개 교회에서 5 6 7 8 9개 처의 교회를 담임하여 순회하며, 월급 10원부터 13원의 생활비로 봉사하였다는 것이다. 제4회 노회의 임사위원보고에는, “조사 지방변경과 새로 조사세운 사건-각 지방 시찰위원의 청원대로 허락하되, 월급이 부족한 교회는 힘나는 대로 속히 개량할 일이오며”라고 하였다. 김천의 4처교회에서는 매삯20원으로 김충한씨가 시무하기도 하였다.

  제6회 노회 보고에도 안동지방에서만 19명의 조사가 이동하거나,  시무처가 1 2 3 4 5 6개처 교회로 줄여서 시무하도록 보고하였으며, 윤호영씨만 9개처의 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때에 조사의 자질향상과 계속 교육을 위하여, 목사와 같은 교역자의 자격으로 노회 관내에 목사 조사수양회를 조직하기로 하여, 이는 대구시찰위원에게 맡겨서 시행하게 하였으며, 도사경회를 열어서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고령지역 출신이나 고령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조사로는, 김호준, 전영호, 임문길, 손인식, 강신창, 조기철, 김삼도, 최영돈, 김수원, 조성암, 김만석, 박춘식, 이영균, 최상수 등이었으며, 이들은 1905년을 전후하여, 개척초기부터 1956년까지도 많이 수고하였으며, 후에 교회의 장로로 혹은 목사로 봉사하였다.

  임문길 조사는 1910년대부터 임시조사로 고령지역 교회들을 순회시무하여(7처-3처교회) 섬겼으며, 1920년에 개포교회에서 장로로 임직을 받았으나, 그 후에도 계속 조사로 시무하다가 경신년 홍수이후 교회들이 어려울때에 1924년 6월에는 고령지방 9처교회를 순회 시무하였으며 불과 25년 1월 6개월후에 사면하였고 25년 6월에 별세하였다고 보고한 것(경북노회록 16회- 18회 참조)을 미루어 짐작하여 본다면  과중한 업무로 건강이 나빠져서 별세한 것이라 생각된다. 달성지방에서는 리성재씨로 10처교회를 시무케 하기도 하였으니 당시에 조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수고하고 교회들을 섬기며 지켰는지를 생각하면, 이들이야 말로 한국교회의 지킴이들이요 산 순교자들이라 하여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조직이 강화되고,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이 확립된 이후에는, 한국인 교역자가 대거 양성되고, 일선 교회의 교역과 전도 등의 실무가 선교사 중심에서 한국인 목회자 중심으로 이관되면서, 조사제도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사들의 역할을 신학교에 재학중인 전도사나 성경학교 출신의 전도인들이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 1930년도에 간행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도, 교회 직원란에 조사에 대한 사항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일선 교회에서는 그후 60년대까지도 실제로 조사들이 시골의 약한 교회를 담임하여 섬기는 일이 많았으며, 그 숫자는 무려 1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 표에서 괄호안의 숫자는 장로교회 초기의 조사수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경상남북도지역 초기 조사수 변화표5)

 년도

조사수(경상도)

 

1905

80

 

1906

105

 

1907

160(19)

 

1908

161(21)

 

1909

171(26)

 

1910

224(34)

 

1911

205(33)+강도사1

 

1912

236(40)

 

 

 

 

 

 

 



  

   6) 영수들의 헌신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활동하여, 복음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자, 지역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평신도들 중에서, 교인들을 대표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할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영수(領袖)라고 불러, 주로 미조직교회에서 장로를 선택하기 이전에 조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재정을 담당하거나 교인들의 신앙을 살피고 돌보는 등의 일을 보게 하였다. 선교 초창기의 영수들은, 지역의 유력자들이나 활동성이 있고 재력이 있는 이들이, 교회건물을 세우거나 지역민을 전도하는데 앞장섰으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는 이들이 많아서, 이들이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조사나 장로가 되어 충성하기도 하였으며, 목사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들 중에는 산당교회의 조무약 조진약 형제, 객기교회의 김재규 김덕오 유봉서, 월산교회의 김문극, 사부교회의 임문길 이환증 양경로, 개포교회의 이두천과 손한주, 원송교회의 정재현 김영수, 이웃 달성 하동교회(현풍교회)의 이영우 조기철, 다산평리교회의 이경화 이도홍 이술이, 성산교회의 김경호 등이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교회들을 지켰으며 일으켜 세웠다.




   7) 전도(부)인들의 활동

     전도부인들은 소정의 교육을 받은 후에, 여전도사로 또는 선교사 부인의 조력자로 채용되어, 전체적으로는 선교부에 소속되거나 기관에 속하여, 주로 새 신자를 발굴하거나 심방을 돕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가르치며, 기초적인 신앙 안내자로서 주로 선교사의 파송을 받아 전도사업을 수행하였다. 선교부의 한국선교가 활발하여 짐에 따라, 점차로 많은 전도부인들을 정식으로 채용하였으며, 장로회 공의회 통계보고는, 1919년에 전국에 114명의 전도부인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8년 6월 18일 경북노회 제4회 회의록에 "고령군 각 교회에서 여전도인 1인을 세웠사오며"(경복노회록 p.75), 1920년도의 회의록에는 '교회에서 전도회를 세우고, 전도인을 세워 전도를 전적으로 하게 하고, 개인전도를 힘쓰는 중 한 주일에 하루씩 바쳐서 전도하는 부인들이 많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 제8회 회록에도(6월) “고령 김성로 목사 지방....전도부인을 세워 열심으로 시무하는 중이오며” 라고 하였으니 개척전도 내지 지교회 담당 교역자에 준하는 직분으로 시무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산의료원에서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교회가 없는 농촌지역에 무료진료와 전도를 병행하였으며,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명의 전도인들을 파송하였다. 고령지역에도 전도목사와 함께 농촌 개척교회를 돌보며 담임하는 여자 전도부인을 파송하여, 이들의 생활비와 교회의 개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고령에서 활동한 동산의료원의 여전도사로는, 운수면 운산교회의 정일선 전도사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전도부인들은, 남편의 외도와 주벽 또는 노름등의 핍박을 받으면서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으며, 유교의 인습과 불교와 무속의 핍박속에서도, 잡초와도 같이 신앙을 사수하며, 한국 여인 특유의 끈기와 지혜와 불굴의 믿음으로, 가는 곳마다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심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었다.


  

   8) 권서들의 활동 

   책을 권하는 사람, 또는 그 직분이라는 뜻으로, 매서인(賣書人)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름 그대로 이들은 책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조직적으로 구역을 나누어, 전도용 소책자나 주로 성경을 짊어지고 다니거나, 이고 다니면서 팔거나 나누어주면서, 순회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인정을 받고 성과가 많았으므로, 경북노회 제7회 회의록의 권서위원 보고에

  “1. 교회에서 사경회나 부흥회를 하고자 할 때에는, 일주일 전에 권서를 청하여 해 교회 교인과 합동하여 성서도 전하며, 전도도 힘씀으로 신령한 터를 미리 예비할 일.

   2. 다음 노회부터는 권서들의 일한 성적도 노회에 보고하는 것이 합당한즉, 권서위원에게  권서에 대한 간섭권을 주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여, 그 이후에도 따로 권서위원에게 맡겨 일하게 하였다.

 동 제 13회 회의록 오월번씨의 권서위원 보고에도

   “1. 권서 8인중 7인은 믿지 아니하는 곳으로 시무하오며 1인은 교회중으로 다니면서 시무하오며,

    2. 권서 7인은 복음(?) 2만권을 방매하였사오며, 권서 1인은 8삭동안각 성서 방매한 돈이 160원 가치를 팔았사오니 감사한 일이오며,

    3. 성서공회에서 조흔 책을 만히 출판하였사오니 권서를 만나는대로 신서적을 보시고 만히 구람하도록 장로 조사와 교인에게 권면하여 주심을 바라옵나니다”

  라고 하여 권서의 맡은 대상이 불신자전담(8명중 7명)과 교회전담 권서(1명)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기독교 서점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현 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하는 대부분의 신앙서적들과 성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일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수고한 권서들의 공헌이 컷다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사경회나 부흥회를 열기 일주일 전에 해당 교인들과 합동하여 주로 전도대상자들인 불신자들을 접촉하여 성서를 전하거나 전도도 힘씀으로 신령한 터를 미리 예비케 하였다는 것이다.


★ 경북노회 역대 권서위원 명단 및 권서들의 활동(독노회록 및 경북노회록 참조)        

  년도

 권서위원

 매서(경상도)

비고

1905

 

44

 

1906

 

51

 

1907

 

58(14)

 

1908

 

39(5)

 

1909

 

72(4)

 

1910

 

74(13)

 

1911

 

129(22)

 

1912

 

128(22)

 

1913

 

 

 

1915

 

 

 

 

 

 

 

 

 

 

 

20년

방혜법 백신칠

권찬영 김영옥

 

 

22년1월

부해리 위철치오월번

 

 

23년6월

부해리 백신칠

 

 

24년1월

부해리 백신칠

 

 

 

 

 

 



 

고령지역 교회의 사회활동


1. 개포 사립학교 설립 

1902년부터 1910년 사이에,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39개 교회에서 학교를 열어, 기독교 신앙과 신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과거의 서당식 교육을 탈피한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고령 최초의 신교육 기관은 지금은 없어진 개포교회의 개포학교인데, 개포는 고령의 관문으로서 낙동강의 강줄기를 타고 객기(손터)와 성산의 멍덤이나루와 더불어 옛날부터 물산과 인물이 교류하는 나룻터였으며, 고려 대장경을 수운하여 개포를 통하여 해인사로 이고 지고 날랐다 하여 개경포라고도 불리워오는 포구이다. 개포교회의 손한주 영수는, 개포교회 개척예배의 처소로, 자신의 가옥을 열어 예배를 드렸으며, 사립학교를 세워 근방의 자제들을 학생으로 모집하여, 신학문을 배우는 길을 열었다. 개포학교는 1907년에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개화를 위하여 이바지하다가, 1915년도에 운영난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교회에서 세운 학교로써 운영난으로 폐교되었다는 사실은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2. 야학과 사숙운영

야학과 사숙의 설립과 운영 폐지- 여러 교회에서 야학 또는 사숙의 이름으로, 문맹퇴치와 서양 선진문물과 신학문을 학습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나, 이 역시 계속되는 흉년과 천재지변으로, 운영난에 힘겨워 모두 폐지되고 말았다. 1918년경에는 고령읍교회와 달성군 설화교회에서 “사숙을 설립하여 공부를 시키는 중 자미가 만사오며”라고 노회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안림 원송 월산 사부 등지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겸한 교육기관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특히 전국적으로 성경구락부 운동이 일어날 때에, 고령지역 교회에서도 성경구락부를 설립하여, 일제 암흑기를 거치며, 전후 60년대까지도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과정을 그린, 누가복음 2장 52절의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한데서, 균형성장, 전인교육의 본을 삼아,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으며, 초, 중등 교육과정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3. 성경구락부와 고등공민학교

 1) 안림교회 성경구락부(Bible Club)

   성경구락부를 전경률 목사가 시작하였는데, 1957년부터 64년까지 야간에만 실시하였다. 학생은 초등과정 50명과, 중등과정 50명이었다. 당시 교사로는 김수관, 박중열(영어), 곽경용, 조성조씨 등이 수고하였고, 배출된 학생들로는, 곽해석 백재봉 배만현 김성용 김상덕씨 등이다. 한편 마을에서 시작한 고등공민학교는, 주간에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이 좀 나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2) 산당교회 성경구락부와 공민학교

 1951년 고은용 전도사가 시무할 당시에, 성경구락부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1954년 9월1일 사립공민학교(초등과정)를 개교하고, 교장에는 박신호장로가 수고하였다. 9월 13일에는 고령지방 소년 성경구락부 군 연합 주최 토론회와 음악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보아 이미 이전에 고등공민학교가 있었고, 성경구락부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3년 3월 성경구락부를 시작하였는데, 학생은 80명이었고, 교장은 박봉석 장로가 수고하였다. 당시 교사로는 김영배목사, 김춘옥, 최병수, 백학성, 석종철(쌍림지서장), 김정민(농협직원) 등이었다.

성경구락부를 1년간 실시하다가, 1964년 5월 사립고등공민학교 중학과정을 허가 받아, 13년동안 지역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졸업생 약300명) 설립자는 박성도장로였으며, 교장에는 박봉석장로가 수고하였다. 당시 교사로는 김춘옥, 최병수, 김숙희, 백학성, 이영연, 이종관, 김식규 등이었고, 교실은 산당교회를 이용하였다. 배출된 학생들로는, 김재근, 류명암, 이재동, 김영수, 김성덕, 정강조, 정성자, 김용갑, 박판암, 오해수 등이 있었다.


 3) 우곡제일교회 성경구락부(Bible Club)

 1968년 4월8일에 성경구락부를 설립하여, 학생 80명을 모집하여 교육하였다. 이듬해인 69년 3월 15일에는, 학생 60명을 모집하여 교육하였으며, 70년 3월10일 제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그해 3월 20일 신입생 50명을 모집하여 교육하였으나, 주도적으로 일하시던 오명근전도사가 영일교회로 가고, 지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자녀들을 중학교에 입학시킴으로써, 성경구락부는 쇠퇴하여 1975년 제3회 졸업식후에 폐교하고 말았다. 당시 교사로는 박재일, 윤인열, 오태근씨 등이었고, 교실은 박태림씨 창고를 구입하여 보수하여서 사용하였다. 졸업생들은 오영세, 오일현, 문두상, 김갑수 한수환씨 등이다.  



4. 유아교육

고령유치원-고령읍교회

고령유치원은, 초기의 모든 자료가 6.25동란으로 소실되어 확실한 자료는 없으나, 원로들의 증언과 연혁을 참고하여 보면,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일제 중엽인 1932년 박제원 목사가 시무할 당시에, 유치원을 시작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김문배 이광식 이하영 등을 배출하기 시작하여, 고령의 역대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고령유치원을 통하여 선진교육과 기독교신앙의 은택을 입고 자라났다 한다. 그후 1964년 7월 14일 경상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사립유치원 제1호로 인가를 얻어서, 우수 사립 유치원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94년 이후 원아모집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개인에게 위탁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2000년에 이르러 폐원하게 되었다.



1) 용담어린이집- 경북고령군 쌍림면 산당리 300-1번지 산당교회내

1982년 2월 신촌새마을 유아원으로 인가가 나서, 신촌 마을회관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유기순씨가 원장으로, 김애경씨가 교사로 수고하였다. 1983년 산당교회로 교육관으로 이전하면서 용담유아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박봉석장로가 원장을 맡아 수고하였으며, 교사는 허선희씨가 수고하였다. 그후 1984년 6월 21일부터 김태문 장로가 원장으로, 전선연 선생이 교사로 수고하였으며, 1993년 1월1일부터 용담어린이집으로 전환하였고, 2000년 12월 12일부터 조명숙집사가 원장으로 수고하고 있다. 현재 어린이집은 교사3명(김성순, 김종옥, 이혜숙)이며, 아동수는 53명이다.(이들은 합가, 귀원, 송림1,2리, 산당, 백산, 하거1,2리, 신촌, 산주 등에서 오고 있다) 그리고 행사로는 화요예배, 생일잔치, 소풍, 연합체육대회(성산, 안림, 용담), 여름캠프, 문화활동, 재롱잔치 등이 있다.


2) 성산어린이집-경북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 272번지 성산교회내

1983년 3월 성산교회 당회장 조성대목사가, 도천 기념관에 성산 새마을 유아원을 인가 받아, 초대원장으로 유병완장로가 중심이 되어, 10년동안 어린 유아들을 돌보다가, 1993년 1월 1일부터 1098년 12월 31일까지, 성산 어린이집으로 전환하여, 초대원장으로 김위영장로가 수고하였다. 어린이들이 튼튼하고 슬기롭게 자라도록, 가정과 어린이집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충실한 탁아교육 서비스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2002년 현재 서청화원장을 초빙하여, 교사 3명과 직원 3명이, 해님반 별님반 달님반으로 나누어,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자라고 있다. 특별행사로는 각종 견학프로그램과 다양한 실습이 있으며, 부활절행사와 성탄절 행사 등으로 어린이들 가슴에 복음을 심고 있다  


  

5. 고령지역의 기독교 농민운동


1) 농민계몽운동 

   안림교회 출신인 최민호장로는, 농업에 대한 전문가로서, 지역에 농업강습회를 여러 번 주도하여, 지역민들의 농업에 대한 인식 및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최민호 장로는 일제시대에 토목기술을 배워서 토목기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안림제방, 산당교회 앞의 다리 등 여러 가지 토목일을 했는데, 해방 후 안림 간이학교(야간)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2년 동안 농업을 전공하였으며, 그후로는 선진농법의 전문가로 고령지역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특히 수박재배와 구들(평양식 골구들)에 대해서는 고령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전문가였다.

  또한 지역에 공헌한 업적으로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장 김용기씨 등을 모셔와서, 농업강습회를 여러 번 개최하여, 지역의 어려운 여건 하에 있던 농민들에게, 농업기술과 생활의 의욕을 고취 시켰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여러 자료는 불타서 없어지고 다만 1954년도에 산당교회로 온 공문이 있어서 참고가 될 뿐이다. 그 공문에는 당시 주최자는 최이호씨로 되어있고, 후원자로는 군수, 경찰서장, 교육장, 고령군기독교연합회장, 고령농고교장, 고령중학교장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일은 최민호장로가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강사로는 김용기선생, 여운혁선생, 김기윤선생이 있었고, 강의 과목은 축산, 양돈, 양계, 양봉, 전작과 과수였다. 이런 강습회를 5일 동안이나 고령읍교회를 빌려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또한 수강자격을 규정해 놓았는데, 정 수강생으로는 교육제직원, 농사교도원, 부락중견인물로 하였고, 준 수강생으로는 관공서원, 일반남녀로 구별해놓았다. 이 때 회비는 5백원이었다.


2) 발전소의 설립  

장학수 장로는, 1936년 4월 2일 산당교회에서 학습교인으로 출발하여, 그해 가을 11월 4일 세례를 받고, 해방후 안림교회에서 57년 3월 1일 장로로 피택 되었으며, 9월 고시하여 11월 12일 안수를 받았다. 안림교회에서 봉사하며, 일본에서 수력터빈에 관한 책을 사서 직접 설계 제작하여, 안림천의 물을 이용한 사설 발전소를 설립하여, 정미소를 경영하며 지역을 밝히는 전등을 집집마다 달아, 한전이 가설되기 전까지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전등요금으로는 쌀 닷 되 보리쌀 닷 되로 저렴하게 받았으며, 당시 정미소의 도정료로 한 가마에 두되 반씩 받을 때, 장학수는 되 가웃(한 되 반)을 받아 주민들은 모두 좋아하였다고 한다.

 장학수 장로는 월막교회를 설립하는데 전력을 경주하였으며, 평생을 하나님중심의 삶을 실천하며,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어보고 실천한다’는 좌우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편, 각종 사회활동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3) 쌍림새마을금고

1983년 1월 11일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박봉석 장로가 백산리 158-7번지에 쌍림새마을금고를 설립하였다.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여 출자자는 60명이었으며, 자산은 530,000원이었다. 8월2일에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취득하고, 박봉석 장로가 초대 이사장을 맡아 수고하였다. 1984년 7월 7일에는 김태문 장로가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수고하였다. 지금은 임병철씨가 이사장으로 수고하고 있으며, 회원수는 7,980명에 이르렀고, 자산도 65억원에 이르게 되어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4) 부동교회의 농민운동

(1) 신용협동조합의 창립과 발전

1979년 농촌 실태가 가장 어려웠을때에 농협 등 금융기관에서 돈을 대출받는 것은 지방 유지들이나 끈을 대어 이용하였을 뿐 가난한 농민은 사채에 의존하여 월 4-5부씩의 높은 이자를 주고도 쓰기가 힘드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김광호장로(당시집사,미국이민)가 주축이 되어 부동교회 교인들을 포함하여 이웃 어른들과 함께 30여명이 자본금 16만원으로 청립을 하게 되었으며 초대 이사장에 안상호목사(당시 전도사, 현 카나다 이민)가 선임되고 실무 책임자에 신병휴집사가 일을 맡아 교회 안에서 캐비넷 하나를 두고 출발하게 되었다.

   자산증가와 함께 대인관계(불신자와 교회의 관계)의 문제점이 드러나서 1984년에 신병휴집사의 집앞 공터에 슬레이트 건물을 지어 조합 엄무를 보다가 1991년에 개진면 생리 88-1번지 240평에 현대식 건물(콘크리트 슬라브조)과 농약 및 농자재 판매용창고 2동을 지어 재무부 안가를 취득하고 지역주민의 민생문제는 물론 대정부 차원의 농업 정책을 바로잡는 지역센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4년 독일 아데나워 재단에서 Y.M.C.A 농촌부를 통하여한우 10마리를 대여받아 추천을 통하여 10가구에 입식하여 송아지 1마리에 130만원을 주었으나 2년을 키워 어미소와 새끼를 모두 팔아도 겨우 70만원을 건져서 가뜩이나 어려운 농촌경제에 오히려 부채만 떠안게된 사건도 있었다.


(2) 수세 폐지운동

1980년대 초에 진촌 신용협동 조합이 중심이 되어  대구 Y.M.C.A 농촌부와 연대하여 부동교회 교인들이 농촌교육을 받다가 1986년 8월 진촌 신협 조합원 청년 10여명이 대구 팔공산 산장에서 3박 4일간 교육을 받던중 우리지역의 현안 문제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의 하다가 무엇보다도 수세가 농촌경제에 어려움을 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니 당시에 논 300평당 벼 40-50kg씩 농지개량조합에서 매년가을 걷어가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으며 신협사무실에서 인근 청년회를 조직하고(정우회) 3명씩 조를 짜서 각 지역의 수세 실태조사를 한 결과 부동지역이 가장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우회에서는 대책위원을 구성하고 위원장에 신병휴집사(본부로 정함)가 되고 전국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기농의 협조를 얻어 수세가 부당하다는 요지의 유인물을 작성하여 각 가정에 돌리고 이미 거둬간 수세반환운동을 벌였으나 당시 지역유지들의 비판과 일부 농민들의 비협조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3개월간 끈질기게 농지개량조합의 부당성을 알리고 3차례나 유인물을 뿌렸으며 조합장이 현장에 와서 설명할 당시에 닥달을 하여 부당하게 수세로 갈취한 벼를 1단보당 2kg씩 받아서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으며 해마다 조금씩 내리겠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승리를 하게 되었다.


(3) 불량종자 배상사건

  1989년 8월 개진 농협을 중심으로 사질양토에 감자가 잘 되는 지역이라 농협 조합장과 임원들의 권유로 가을감자(대지마) 1포당(20kg) 9000원에 사서 100여 농가가 파종하게 되었다. 11월말 감자를 수확하려고 하니 상품가치가 전혀 없어 조합장에게 항의 하였으나 종자문제가 아니라 재배기술상의 문제로 조합원들의 잘못이라 함으로 이에 분노한 40-50여명의 농민들이 농협앞에서 항의하였으나 오만한 조합장은 마음대로 하라며 버티었고 형사 및 민사 소송을 하게 되었다. 형사에서는 무죄가 되었고 민사 1심에서 농민들이 패소하게 되었으나, 다시 뜻있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부동교회의 신병휴집사가 대책위원장이 되어 조직적으로 조사하고 검토하여 경북대와 영남대 농대 교수들의 협조와 일본 교수의 협조로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승소하게 되었다. 이는 6년간의 끈질긴 법정투쟁으로서 종자싸움에서 농민이 승소한 드문 일이었으며, 이때 받은 배상금은 장학금과 농민운동 단체에 기부하였으며 당시에 협조한 경대 이호철교수와 영대 박의호 교수의 적극적 도움이 있었다. 


(4) 농촌교회 연합운동(우진상조회)

1980년 농촌교회 인적자원의 도시유출이 심화되어 교인이 상을 당하면 상당한 문제점과 시험되는 일이 있어서 이웃교회와 연합하여 그 문제를 해결코자 초교파적으로 우곡면과 개진면면에 산재한 교회들이 연합으로 우진 상조회(牛津相助會)를 창립하게 되었으며 답곡 객기 우곡제일 사촌 직동 부동 6개교회가 참여하였다. 상조회에서는 ①교인이 상을 당하였을때는 한교회에서 교역자와 교인 2명이상씩 나와서 함께 봉사한다. ②매년 어버이 주일에는 초등학교를 빌려서 야외예배를 가진다. ③격년으로 연합 사경회와 제직회 친목회를 가진다. 는 3가지 내규를 중심으로 토착적인 지역교회 연합운동을 통하여 상부 상조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5) 미원비료사건

1988년 9월 16일 딸기 농가에서 미원비료를 구입하여 기비와 추비를 하였는데 12월3일부터 가스가 발생하여 딸기 모종이 죽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비료회사에 항의하고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합의가 결렬되어 서울 미원비료 본사에 찾아가 항의 농성 및 전산실을 점거하여 1989년 1월 21일 피해를 보상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당교회교인들도 함께 항의 농성하 였다. 이 일로 피해 농민들로부터 교회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아지게 되었다.


6) 추수감사잔치

농민회 추수감사 잔치가, 1990년 11월 13일부터 14일까지 안림교회에서 열렸는데, 전국에서 농민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지역 현장에서 활동하는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예배와 강연, 마당극, 횃불놀이, 풍물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하였다.


7) 딸기 정전 피해 보상 운동

1996년 1월 12일 새벽 쌍림면 일대에 4시간동안 예고없는 정전으로 인하여 딸기재배농 523호 176ha 딸기 하우스가 피해를 입었다. 금액으로는 52억3천만으로 추정되었다.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차례 한전에 피해보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여 서울 민사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장을 1996년 12월 30일 접수하여 1998년 11월 20일 피해액의 약 40%인 21억 3천3백만원에 대한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한전의 고법과 대법의 상고가 있었으나 각각 기각당하여 2002년 4월 22일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예고없는 정전으로 인한 피해를 한번도 보상한 일이 없는 한전에 일대 타격을 주었고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승소한 사건으로 지역교회와 전주민들이 참여하여 농사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받는 사례를 남기게 되었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이르기를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16세 520년간 다스린 왕국으로 이조 500년보다 길었으며, 최치원의 석리정전에 장자는 뇌질주일이요 둘째는 뇌질청예라고 하여 각각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임을 밝히고 있다.  


2) 헌문동(軒門洞)은 동헌의 문이 있던 동네요, 쾌빈리(快賓洞)은 쾌빈정이라는 정자도 있어손님을 즐겁게 맞이하는 곳이요. 고아동(古衙洞)은 옛날의 관아가 있었던 마을이란 뜻이며, 연조동(延詔洞)은 연조문이 있었고 이 문을 통하여 조서를 올린다 하였으며, 그 밖에도 내리 외리 등 왕궁터를 중심으로 여러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3) 이재원, 개신교 대구전래사의 문제점,1985, 창조 창간호 pp83-99


4) 박창식, 대구 경북지방 장로교회 초기 조사연구, 대구경북 기독교역사연구회 pp1-3


5) 독노회록 및 제1회 총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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