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는 미얀마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이 더 친숙할 수 있다. 1948년 미얀마(Myanmar)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의 나라 이름은 버마(Burma)로, 이후 1989년 그 이름을 미얀마로 변경하기까지 버마라는 국명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옛 이름 버마는 인구의 약 2/3를 차지하는 버마족(Burman)으로부터 연원 된 것이며 서방에서는 지금도 버마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미얀마는 한때 아시아의 축구 강국이었다. 나의 학창시절 라디오를 통해 축구 경기 중계를 들었던 1960년대에는 당시 미얀마의 수도였던 랭군(현재의 이름은 양곤)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참가하는 축구 경기가 열리고는 했다. 내게 축구를 통해서 가깝게 느껴졌던 미얀마는 우리나라와 같은 해인 1948년 독립한 이후 공산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극히 고립적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멀어졌다. 2000년대의 민주화 운동으로 한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미얀마는 2021년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현재는 권위적인 군사정부의 통치 하에고 있다.
미얀마와 나는 비교적 여러 인연을 맺어왔다. 1996년의 미얀마 아웅산결핵병원 연구개발 사업, 2012~2013년 대미얀마 개발 장기계획 수립, 2015년 미얀마개발전략연구소 설립 자문사업 등 우리 정부와 미얀마 정부 간의 국제협력 사업을 추진하면서 여러 차례 미얀마를 방문했다. 미얀마로부터 한국을 찾은 연수단의 미얀마 사람들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편 미얀마의 여러 모습을 접하고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우리와 미얀마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자연과 지리 환경과 역사, 정치·경제의 모습은 두 나라 간에 그 차이가 워낙 크지만, 사람들의 외양적 모습,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부분적이지만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전반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우리와 가장 많이 닮아있는 사람들이 미얀마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얀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1996년 당시의 미얀마 수도인 양곤(Yangon: 2006년 미얀마의 중심부 신도시 네피도/Naypyidaw로 수도가 이전됨) 방문 시의 것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우리나라 1960년대의 모습 그대로만 같았다. 사람들의 체구는 왜소하고 까무잡잡하지만, 그 얼굴 모습과 표정은 매우 온화하고 순박해 보였다. 도심 속 호숫가에 자리한 호텔이지만 시골 전원풍의 느낌이 묻어났다. 근처 포장이 되지 않은 도시의 뒷골목에는 소달구지가 달리고 있었다. 마치 내 어린 시절의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양곤 북쪽으로 약 80km 거리에 있는 바고(Bago)라는 읍내로 여행을 하면서는 더욱 그런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쌀농사 중심의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 나의 향수를 자극했다.
2001년 e-비즈니스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미얀마 기획부의 공무원 한 사람으로부터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미얀마에도 우리나라 견우직녀의 이야기와 같은 설화가 있다는 것이었다. 견우에 해당하는 까이나야르(Kainnayar)와 직녀에 해당하는 까이나에(Kainnayee)라는 새는 하룻밤만 서로 떨어져 있어도 700년을 운다고 했다. 중국에서 유래된 칠월칠석 견우직녀의 이야기가 중국의 서남쪽과 붙어있는 미얀마까지 전래되면서 다소의 변형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미얀마와 정부 간 협력사업의 확대를 위한 방안의 마련을 위하여 미얀마를 네피도를 방문한 2012년은 미얀마의 민주화가 무르익기 시작한 시기였다. 문민정부의 관료들과 미얀마 각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이런저런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적잖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제한된 대외 교류로 인하여 대내지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미얀마에서는 뜻밖에도 2000년대 초부터 한류(韓流)의 물결이 퍼지기 시작했다. 2002년 미얀마에서 방영된 우리의 TV 드라마 「가을동화」는 60%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미얀마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의 대중문화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2년 우리가 미얀마를 방문할 당시는 주요 시간대에 매일 2〜3편의 우리 드라마가 미얀마의 TV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오피스의 미얀마 여성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배운 우리말 한두 마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듯했다. 이토록 미얀마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강한 이끌림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미얀마 사회의 집단 정서와 문화적 토양이 우리와 많이 닮이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얀마는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와 농촌 공동체 사회, 대가족 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 피식민 지배의 아픔, 절대 왕정과 권위적 군사정부 통치, 민주화 운동 등 과거 우리나라가 경험한 것과 매우 유사한 사회·경제·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결핵의 감염 억제와 치료를 위한 협력사업의 경우도 대가족이 밀집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과거의 우리와 유사한 미얀마의 가족 주거 생활 형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에 그토록 친화적인 연유에 대해 그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의 집단 정서가 우리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얀마 사람들은 ‘탕요진’이라는 우리의 정(情)과도 같은 독특한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우리만이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 ‘눈치’라는 독특한 의미와 뉘앙스의 말이 미얀마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걸 알았다. 예엠에께. ‘예엠’은 눈을, ‘에께’는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 느낌, 분위기를 일컫는다. 에엠에께는 우리의 눈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恨)과도 같은 정서를 미얀마 사람들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생활 문화의 면에서 한가지 유사한 점은 찾아온 손님을 매우 성심으로 대접한다는 점이다. 버마어에는 ‘Say da nar(사이 다 나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성심의 친절’ 또는 ‘융숭한 대접’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미얀마에는 “무일푼의 처지라면 롱지(longyi: 남성이 허리에 둘러 입는 치마와 같은 옷)를 팔아서라도 손님을 대접한다”는 옛말이 있다고 한다. 머리를 잘라 팔아서 손님을 접대하던 우리의 옛 모습과 닮아있다. 또 우리의 체면과도 같은 정서도 있다고 한다. “거지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함부로 던져주는 동냥은 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아나바배(ar-nar-bar-bae)’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혹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지극히 꺼리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살펴주고 마음을 배려하는 그들의 섬세함과 따듯함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이 말은 미얀마 사람들의 워낙 독특한 감정이 담고 있는 것이기에 어느 미국인 여성 학자는 이 표현을 주제로 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2014년 7월 미얀마개발연구소 설립에 관한 정책 자문을 위한 출장길, 양곤에서 네피도를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옆 좌석에 자리한 젊은 여성이 온통 동그라미로 가득한 듯한 글자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나타내자 그녀는 미얀마의 공용어인 버마어(Burmese)는 33개의 자모로 구성되는 언어로 아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이틀만 배우면 쓰고 읽을 수 있다니 우리의 한글과 같이 과학적인 언어가 아닐까? 비슷하게 동글동글한 글자가 끊임없이 연결되는 버마어는 배워도 배워도 익히지 못할 듯한데 말이다.
버마어와 우리말은 어족(語族) 자체가 서로 다르다. 언어적인 면에서 그 유사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버마어가 우리의 말과 닮은 점은 존칭어가 잘 발달 되었다는 점이다. 미얀마 남성의 이름 앞에는 ‘U(우)’라는 존칭을, 여성에게는 ‘Daw(도)’라는 존칭을 붙인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가려서 존칭과 존댓말을 쓰는 것도 우리말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녀는 버머어로 ‘아버지’와 같은 발음의 말은 정확하게 우리의 아버지를 뜻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른’을 의미하는 말이라 했다.
미얀마에서 때때로 우리의 과거 모습과 그들의 현재 모습이 오버랩되는 게 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신봉하는 애니미즘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자연물과 정령을 숭배하는 ‘Nat(나트)’라는 민간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정령 나트를 모시는 ‘Nat-sin(나트신)’이라고 하는 신당에서 기도를 드린다. 약 90%에 가까운 미얀마 사람들이 불교 신자이기에 불교와 동화된 나트 신앙은 곳곳 어디에나 있는 사찰에 부속된 나트 신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들이 믿는 정령의 부인인 ‘Nat Kadaw(나트 카도)’는 우리의 무당과도 같이 주술 또는 혼령 치료와 같은 역할을 하고, ‘Nat Pwe(나트페)’라는 굿판을 벌이며 칼춤을 추기도 한다.
2012년 미얀마 여행 시에는 중서부 지역의 옛 도시 바간(Bagan)을 방문할 수 있었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통일된 미얀마 파간 왕국의 중심지이자 수도였던 곳이다. 이 도시에는 한때 1만 개에 달하는 불교사원, 수도원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그 숫자가 약 2천 개로 줄어들었지만, 도시의 모습은 피안의 불국토와도 같이 평화로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호수의 물 위에 밭과 정원인 쮼묘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꽃을 가꾸는 인레(Inle) 호수의 사람들이 사는 독특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방문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미얀마는 국토의 면적도 제법 넓지만, 100여 개의 종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미얀마의 모습을 충분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접해본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미얀마 사람들은 우리와 서로 많이 닮아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나의 민족인 한민족이라는 사람 중에서 북한의 사람들보다도 말이다. 양곤 시내에는 북한이 경영하고 있는 평양고려식당이 있다. 불고기와 냉면이 주메뉴인 이 음식점에서 보여주는 저녁 공연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북한 투의 말, 어색하게 느껴지는 복식, 경계심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 등 같은 민족이기는 하지만 그들로부터 어떤 정겨움이나 동질감 같은 걸 느끼기 어려웠다. 그들과 우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면서 닮은 것보다는 서로 다른 것이 많아져 간다는 불편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글픈 일이다.
여행 내내 왠지 모르게 따뜻함, 편안함, 정겨움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미얀마의 사람들과 풍경이 그립다. 다시 한번 미얀마 여행을 떠나고 싶다. (2024. 3. 28.)
첫댓글 세계인이 되어 여러나라를 주유한 순우선생 덕에 앉아서 세계일주를 하게 되네요. 이제는 선뜻 짐을 꾸려 운수납자가 되는 것도 어려운데 기행문이나 영상자료를 통하여 대리만족을 하게 됩니다.미얀마, 너무나도 낮선 나라에 대한 정보 잘 읽었습니다.
미얀마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
이 되었습니다.
나는 수년전 태국 치안마이 여행시 미얀
마와 라오스를 서너시간 들린적인 있는
데 미얀마 재래시장은 우리나라 60년
대 장날비슷하던군요
문제는 미얀마의 극심한 가난은 지금
의 정치체제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국호가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되었다는 첩보를 버마주재 국방무관으로부터 통보받고 긴급으로 국방장관께 보고했던 기억이 살아나는군요.
미얀마에 대해공부 많이 합니다. 코이카사업으로 또 갈 프로젝트가 있긴 한데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