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2
#사사기 #입다
에브라임이 정말 양아치 싸패인게,어찌됐건 입다가 자기 무남독녀 외동딸을 잃었는데 빈말이라도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도리어 이때다 싶어서 민족구원자에게 깐죽대며 시비를 걸었다는것.그러니까 입다도 가뜩이나 딸을 잃어서 절망하고 있는데 에브라임이 저렇게 나오니 뚜껑이 안열릴수 있겠냐고.아마도 입다는 자기잘못으로 딸을 잃었다는 절망과 자책때문에 최단기간인 6년밖에 통치를 못했던듯.
#20220312
주님께서 정부를 통해서 2년동안 코로나를 잘 대처할수있게 해주시니까 한국교회가 모세에게 끊임없이 대적한 광야이스라엘마냥 백신 왜안들여오냐 코로나는 감기아니냐 백신효과없는거 아니냐 살기힘들다 완화해도 되지않냐등등 헛소리나 찍찍 내뱉으니까 주님께서 대노하셔서 그럼어디 걸려보든가 하셔서 오미크론변이로 확 훑으시는데도 여전히 한국교회가 정신못차리고 자기들만 걸려서 힘들다는둥 감성팔이는 오지리게 하면서도 정작정부에서 지원하는건 받을대로 다받아놓고도 비방했던것을 회개하지도 않고 꿀꺽해버리고서는 그저 주님께서 하루빨리 코로나를 없애주시는 은혜만 바라고있으니 주님께서 참으로 없애주시겠다.치명율높은 델타변이로 쓸어버리지 않으신것을 감사해야할판에.속터져.
#20210312
#신명기 #Deuteronomy 7:17-21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가나안을 정탐한 이스라엘의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열 명은 자기들의 육안으로 본 그대로 가나안 족속의 어마어마한 장대함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백성 전체가 선동되어 반역을 꾀하다가 여호와께 징벌을 받고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악평한 죄로 즉사하고 말았다. 정탐꾼과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는 징벌을 당해야 했던 것은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해서 저 가나안 족속들이 자기들보다 크고 우세하니 자기들이 어떻게 저들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고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결과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거부한 것을 두고 믿음이 없다며 편하게 정죄하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저 당시의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눈에 비친 가나안 족속의 모습은 여전히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패역한 영혼 자체이기 때문이다. 학업이나 취업이나 시험이나 사업이나 직장이나 여행이나 휴가나 연애나 경조사나 피곤함 등에 대한 갈망은 우리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가로막고 서 있는 장대한 아낙 자손과도 같아서 우리는 수시로 그런 육채의 소욕 앞에 스스로를 메뚜기로 치부하고 주일 지키기를 거부하고는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비겁하게도 그것을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 하지 않고 연약함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어쩔수 없었다고 변명하기 바쁘다. 연로하거나 치매가 있거나 질병이 있거나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가난한 부모를 봉양하고 모셔야 하는 상황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기에는 가나안 족속을 상대해야 하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여서 신자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부모를 외면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에게 극심한 피해를 끼치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뻔뻔한데다 호의호식 하는 가해자를 어떻게든 해치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너무나 높은 장벽이고 깊은 수렁과 같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한 죄이라서 말못하는 이가슴은 오늘도 울어야 한다는 자기 감정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보이는 대전 상대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일부러 자기 영안을 닫고 저러한 상황에 자기는 결코 이길 수 없으니 저항하지 않고 바로 굴복해버리고 만다. 조금 신앙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굴복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혈과 육으로만 대항하려 하기 때문에 이기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허공에다 주먹질 하듯이 저항하는 척만 하다가 굴복해버리고는 이만하면 할만큼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건 감정이건간에 그런 것은 죄책을 피하기 위한 아무런 면제 조건도 되지 않으며 가나안 족속 앞에 스스로를 메뚜기 취급한 것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는 눈에 보이는 장대하고 수다한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게 겁먹을 필요없이 담대하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로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애굽에서와 광야에서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놀라운 일을 이스라엘은 직접 경험하였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러지 못하였으니 우리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수는 없는데 이는 우리가 비록 여호와의 놀라운 이적과 기사와 돌보심을 이스라엘처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거하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것이 기록된 성경을 믿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나도 동일하게 지키시고 베푸실 것을 믿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때의 기적만을 체험하였으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거의 모든 기이한 사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비롯한 모든 대적을 진멸하실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난의 환경과 내 영에 거하신 성령의 소욕을 끝까지 거부하고 대적하며 싸우는 육체의 소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담대히 대적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들에게 보내신 말벌은 이스라엘이 예상하거나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크고 두려운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러 믿음으로 나아갔을 뿐이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원래는 가나안 족속이나 이스라엘이나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나 공격해야 할 말벌들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가나안 족속을 공격하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말벌은 만약에 이스라엘이 나서지 않았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이 말벌들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이스라엘이 담대히 가나안 족속을 향해 나아갔을 때였다. 여호와께서는 비단 말벌 뿐만 아니라 18만 5천의 앗수르군을 하루밤에 전멸시킨 천사를 비롯한 수많은 이적들을 통해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물리치셔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이적과 기사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영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로써 여전히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자 하는 영혼을 대적해 나갈 수 있다. 비록 성령의 역사가 드러나보이지 않고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살며시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내 영혼에 잠식해 있는 마귀를 쫓아내는데 말벌보다 말할 수 없이 탁월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영혼의 악을 대적하고자 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영혼의 악을 끊임없이 대적하게 해달라고 쉬지말고 간구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마치 말벌들이 이리저리 도망치고 숨어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일일이 찾아 공격해서 죽이듯이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악을 남김없이 찾아내어 소멸하시는 역사를 발휘하신다.
우리를 선택하신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시므로 예수께서는 육신만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영혼을 전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셨고, 사도는 그런 우리에게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언한 것이다.
#20200312
#창세기 #Genesis 제 49 장
야곱의 유언과 죽음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어떤 찬양사역자는 야곱이 요셉에게 남긴 유언만을 가지고 우리에게 익숙한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을 짓기도 하였다. 그 찬양만 들으면 마치 야곱이 요셉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게도 부드럽고 유쾌하며 사랑이 넘치는 축복을 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야곱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요셉에게처럼 축복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야곱은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아들들 각자에게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다. 통상적이라면 이런 경우에는 자식의 안녕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 맞겠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시고 선택하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유언은 개인적인 바람이나 소망일 수 없었고 오로지 아들들 각자의 살믜 행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사역에 대한 것이어야 했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장자였어도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간음을 저지름으로써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고 이로 인해 장자로서의 모든 권세를 잃고 만다. 야곱은 그런 르우벤의 죄와 부패한 성향을 물이 끓는 것에 비유했는데 이는 냄비에 가득 채운 물이 팔팔 끓게 되면 넘쳐 흘러 불을 꺼뜨리고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즉 르우벤은 빌하를 향한 자기의 음란한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불태워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서 다른 아들들보다 더 탁월하게 받은 장자의 권세를 끓는 물과 같이 쓸모없이 넘쳐흐르게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르우벤은 아버지의 신임은 물론이거니와 형제들 사이에서도 위신이 떨어져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해 온 것 같다. 그래서 형제들은 장자 르우벤이 아니라 넷째 유다를 맏형처럼 존중한 것 같다. 이는 전적으로 르우벤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이므로 자기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게다가 르우벤은 자기의 근친 간음을 아버지 야곱에게 들키게 되었어도 야곱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우물쭈물 하다가 적절한 기회가 오면 야곱이 기뻐할만한 성과를 올려서 아버지의 신임을 되찾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르우벤은 요셉이 상인들에게 팔려갔을 때 요셉의 안전보다는 자기 계획이 틀어진 것을 더 한탄하였다. 만약에 그가 빙빙 돌리지 않고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 죄를 진실되게 고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했다면 야곱은 죽는 순간에 축복 대신 저주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곱이 죽는 순간까지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야곱은 그런 르우벤에게 수 십 년 전의 죄를 상기시키며 형제들보다 낮아질 것을 선언한다. 그 전까지는 암묵적으로 장자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공식적으로 장자의 권위를 요셉에게 박탈 당하게 된다.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을 자처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풍이 당당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떠벌이지만 르우벤처럼 자기들이 지은 수치스러운 죄를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감히 전지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에게까지 속이며 감추려 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교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다 아시면서도 이들이 먼저 정직하게 회개하기까지 계속 기다리신다. 그러나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참람된 죄를 짓고서도 눈에 보이는 아무런 징계도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도 없으며 평상시처럼 지내게 되니 죄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회개할 필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어느 순간에 무언가 타격을 받아 영성이 깨어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통회하며 자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마지막 날까지 용서함을 받지 못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 죄를 놓고 물으실텐데 그 때에는 아무런 항변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회개할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 회개하지 않은 교회와 교인들이 받을 심판은 그들의 소망대로 영원한 복락이 아니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구더기도 죽지 않는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서 마귀들과 같이 울며불며 이를 갈게 되는 것 뿐이다. 오늘날 이 코로나19 시국에 한국 교회들은 이를 하나님의 징계라고 인식하며 교회의 회개를 부르짖지만 정작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는 교회는 한군데라도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 교회들이 부르짖는 회개라는 것은 그저 한국 교회라는 불특정 다수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존재에만 떠넘기고 정작 자기 교회는 숨기고 있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라고는 달랑 영혼에 상처입은 롯 한 명 뿐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그리스도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는 교회는 아마 단 하나도 없을 것 같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기들의 누이 디나가 세겜 족속 하몰의 아들인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자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표로 주신 거룩한 할례를 속임수로 악용하여 세겜 족속을 진멸한 죄를 저질렀다. 그들의 죄는 사람에게는 지나친 분노를 쏟음으로써 불필요하고 부당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고 하나님께는 거룩한 징표를 자기들의 범죄의 도구로 악용한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이로 인해 부족이 주변 족속들에게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어 아버지 야곱이 꾸짖었어도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여 용서를 구하지 않고 도리어 아버지 야곱에게 강하게 항변한 죄도 저질렀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야곱이 임종할 때까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곱은 마지막 남기는 유언으로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고 그들에게 임할 저주를 선포한다. 야곱의 저주가 시므온에게는 어떻게 성취되었능지는 모르겠지만 레위에게는 장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전담하는 지파로 구별되어서 다른 지파들처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각 지파별로 흩어지며 소속 된 지파에서 드리는 예물을 받아 근근하게 살아가게 됨으로써 성취되었다. 레위 지파의 일용할 양식은 전적으로 그 지파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만약 소속 된 지파가 예물을 주지 않으면 궁핍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가나안 땅을 들어가고 부패하여 타락했을 때, 레위인들은 양식을 지급받지 못해서 소속 된 지파를 떠나 유리하며 방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사실 야곱에게 있어서 유다는 라헬이 아닌 레아에게서 얻은 아들인데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팔아버림으로써 22년 동안 극심한 상실감을 안긴 아들이었기 때문에 야곱으로서는 유다를 축복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런 유다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주 대신 지극한 축복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당신의 구속사역을 어떻게 이루실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소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어쩌면 유다는 자기 위의 세 명의 형들과는 달리 자기가 요셉을 팔아넘김으로써 아버지를 심하게 근심시킨 죄를 야곱에게 정직하게 자백하고 진실되게 용서를 구했을 수 있다. 그래서 야곱은 더이상 유다의 죄를 상기시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야곱은 유다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뒤로 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앞세워서 그를 축복하였고 결국 유다 지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심으로써 성취되었다. 가나안 정탐꾼의 한 명으로서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밥이라고 믿음의 평가를 내리고 가나안 족속을 치는데 앞장 선 갈렙이 바로 유다 지파이다.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야곱이 단을 굳이 뱀에 비유한 것은 단 지파의 이후 행적이 뱀과 같이 매우 교활하고 잔인한 것이 마치 동산에서 하와를 꼬드긴 옛 뱀과 같았기 때문인 것 같다.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서도 다른 지파가 전부 지정된 기업의 땅을 차지할 때까지도 여전히 분배받은 땅을 소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자기보다 연약한 동족의 집을 강탈한데다 무고한 타 족속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역대 사사들 중에서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용맹했으나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삼손이 바로 이 단 지파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환상 중에 하늘의 열두 지파에서 오로지 단 지파만이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오직 단 지파만이 가룟 유다처럼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9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어느 익숙한 찬양처럼 그저 발랄하고 꽁냥꽁냥한 분위기가 아니라 매우 진중하고 엄숙한 것이다(찬양 제작자들은 제발 성경에 대한 안목을 먼저 길렀으면 한다.). 야곱의 축복대로 요셉은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을 이루어 번성하고 거기서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절반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남기로 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게다가 에브라임 지파는 그런 므낫세 지파보다도 더 막강해진다. 그러나 그들의 풍성함과 번성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의 발목을 잡아 교만하여 점점 패망하게 되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기들의 막강함을 힘입어 다른 형제 지파들에게도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계산적으로 대한다. 그래서 사사 기드온 때에는 초반에는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기드온이 우세하니까 그제서야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잡는데 동참하고서는 마치 기드온이 자기들을 부르지 않아서 늦었다는 듯이 떠넘긴다. 또한 사사 입다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입다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되려 쉽볼렛 학살로 4만 2천 명이 몰살 되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가장 큰 잘못은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 왕 때에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뜻을 대표한 여로보암의 요구사항을 거절했다라는 이유로 르호보암을 반역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열 지파에 동참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요셉 지파는 그 시작은 창대했어도 그 끝은 동족에게마저도 버림받고 외면받는 사마리아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에 대한 유언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중립적이다. 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들보다 더할 나위 없이 극도로 타락하여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방불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형제 지파들의 연합군과 대적하다가 장정 6백 명만 남기고 지파 자체가 멸절될 뻔 했으나 형제들의 긍휼을 힘입어 다시 간신히 한 지파를 이룰 수 있었다. 사무엘 이후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했으나 마지막은 비참했다.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 때에 베냐민 지파는 다른 열 지파의 반역에 동참하지 않고 레위 지파와 함께 유다 지파와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붙잡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사도로 부르신 바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사도 바울은 막내 베냐민처럼 가장 마지막에 부르심을 받았어도 그가 이룬 사역은 먼저 부르심을 받은 다른 사도들에 뒤지지 않을만큼 탁월하였다. 그런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은 이리가 움킨 것을 저녁에 나누는 것처럼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이방인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었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저주의 유언을 들은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들의 죄악된 행실 때문이기도 했고 야곱이 각자의 인격의 분량을 따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신자 각각의 인성과 형편에 맞게 형통함을 주시기도 하고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며 금 다섯 달란트를 주시기도 하시고 한 달란트를 주시기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지체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와 은혜의 크기를 부러워하거나 탐내거나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각자가 성령께 받은 분량대로 성령의 열매를 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맺어야 하고 적게 받은 자는 적게 맺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야곱은 자기가 죽으면 자기 조상들이 묻힏 곳에 장사 지낼 것을 유언하는데 이는 아무리 애굽이 살기 좋아도 참된 고향은 아니며 언젠가는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무덤에는 별로 사랑하지 않은 레아도 있었는데 정작 사랑하는 라헬은 다른 곳인 베들레헴에 묻은 것이다. 이 또한 아마도 라헬의 무덤을 옹해서 예언을 이루실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