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독중지성(毒中之聖)의 탄생(誕生)
①
만독림(萬毒林).
만독림은 천하제일의 독문인 천독문이 있는 곳으로, 운남성(雲南省)의 밀림이 우거진 오지 한가운데 있었다.
이곳에는 수많은 독충과 독초, 장독( 毒) 등이 사방에 퍼져 있어 일반인들은 물론, 사냥꾼이나 무림인들까지도 접근을 꺼려하는 곳이었다.
섣불리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어 죽음을 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만독림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들은 독인으로 불리워지는 천독문의 인물들이었다.
만독림 한가운데 있는 한 동굴.
지금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쓰쓰쓰...! 치치칫... 치잇!
온갖 종류의 독사(毒蛇), 전갈(全 ), 독전서(毒田鼠), 지네 따위가 동굴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하의 독물이란 독물은 모조리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동굴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벽과 천정에까지 빽빽이 들어찬 독물들에게서는 쉴새없이 독무가 뿜어져 나왔다.
동굴 광장의 중심부에는 사방 삼 장 정도의 독지(毒池)가 형성되어 있었다.
뭉클뭉클...!
독지에서는 자욱한 독무가 쉴사이 없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독지에 사람이 둥둥 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열 명이나 되는 소녀(少女)들로, 그녀들은 젖가슴과 하체의 중심부만 검은 가죽으로 가린 반라 차림이었다.
소녀들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피부는 독기를 흡수한 탓인지 새카맣게 변색된 채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
소녀들은 독지의 수면 위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에서는 새파란 녹광(綠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스스......!
문득 동굴 바닥을 기어다니던 독물들이 일제히 독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첨벙, 첨벙!
놀라운 일이었다. 독물들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앞다투어 독지에 투신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독지에 떨어지자마자 검푸른 연기를 내며 녹아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스스스...!
그로 인해 동굴 안은 자욱한 독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때였다. 독지에 누워있던 소녀들이 입술을 벌려 독무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독녀들의 피부는 더욱 검어지면서 윤기를 더했다. 뿐만 아니라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으스스한 괴소가 울렸다.
"흐흐흐...! 공령활독인(恐靈活毒人)의 탄생을 위해 너희들은 천독흑천비(天毒黑天妃)로 간택되었다. 이제 너희들이 모실 독문사상 최고의 제왕이신 독중지성을 경배할 준비를 하라!"
그것은 바로 천독문주인 마독 축시황의 음성이었다.
"크크...! 이제 광음독천합혼제(狂淫毒天合魂祭)가 끝나면 영세제일의 독중지성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우우웅......!
축시황의 흥분에 찬 음성이 동굴 안에 메아리를 남기며 울려퍼졌다.
동굴 안의 밀실.
돌침상 위에 한 청년이 누워 있었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그는 바로 단목천상이었다.
침상 곁에는 마독 축시황과 이검옥이 서 있었다. 한동안 단목천상을 바라보던 이검옥은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이 분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요?"
축시황은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 걱정마시오. 낭자의 정인은 이제 고금제일인이 될 것이오. 나중에 약속이나 잊지 마시오. 크크크, 물론 노부의 공을 잊지 않으면 더욱 좋고 말이오."
이검옥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서 시작하세요."
마독 축시황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는 물러나 주셔야겠소."
"왜요?"
이검옥은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축시황은 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후후후...! 이 자의 옷을 몽땅 벗겨야 하기 때문이오. 처녀의 몸으로 벌거벗은 사내의 몸을 볼 수 있겠소?"
".......!"
이검옥은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멈추며 야무지게 말했다.
"허튼 짓은 절대 용서치 않겠어요!"
동시에 그녀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쩍 일었다.
"헉!"
축시황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앞섶이 정확히 열십 자(十字)로 베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강호의 능구렁이답게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걱정마시오."
이검옥은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축시황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천독문에 들어온 이상...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구나.'
마침내 이검옥은 입술을 깨물며 밀실에서 빠져 나갔다. 그녀는 나가기 직전 안타까운 표정으로 단목천상을 돌아다 보았다.
그녀가 사라진 직후, 축시황은 득의의 괴소를 흘려냈다.
"어리석은 계집! 만독림에 들어오는 동안 너는 이미 도화무형장독(挑花無形 毒)에 중독되었다. 계집애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크크ㅋ!"
축시황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단목천상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흘흘, 볼수록 잘생긴 놈이군. 과연 계집이 홀딱 반할 만 하군."
그는 단목천상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너는 공령활독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후론 본좌의 꼭두각시가 될 테고."
축시황은 이미 완벽한 계략을 짜놓은 듯했다.
"너는 열 명의 천독흑천비와 교접을 나눈 후 그들이 십육 년 간 흡수한 독의 정화를 흡수하여 독중지성이 될 것이다."
마침내 그는 단목천상의 옷을 모두 벗겨냈다. 그는 알몸이 된 단목천상의 몸매를 훑어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탐나는 골격이구나!"
그는 홀린 듯이 단목천상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탄탄한 근육과 늘씬한 체격, 군살 한 점 없는 몸매는 같은 남자가 보아도 반할 정도였다.
문득 축시황의 눈길이 단목천상의 손가락에 가 멎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지고 있었다.
"이... 이것은 묵지환(墨指環)이 아닌가?"
축시황은 단목천상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것은 천추혈제(天秋血帝) 갈천륭(曷天隆)이 남긴 유품이었다.
"오오! 이럴 수가? 그럼... 이 아이는 대형(大兄)의 전인이란 말인가?"
축시황의 음성이 격동으로 인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음침한 얼굴에는 기쁨이 어리고 있었다.
그런 축시황의 뇌리에는 지나간 시절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
축시황은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는 스스로 독의 대가로 자부할 만큼 천하를 오시했었다.
당시 그는 물과 불을 가리지 않은 채 호승심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세상에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한 인물에게 도전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가 바로 천추혈제 갈천륭이었다.
당시 쟁쟁한 위명을 날리던 천추혈제에게 일개 독인에 불과한 축시황이 도전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축시황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천추혈제를 꺾음으로써 무림에 명성을 날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축시황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갈천륭의 절기인 혈혈인혼강(血血引魂 )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싸움에 패한 축시황은 마침내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축시황은 패배를 인정한 후 죽음을 택하려 했다. 그런데 비정인(非情人)이었던 갈천륭이 그를 설득하여 죽음을 모면케 해 주었다.
강(强)은 강(强)으로 통하는 것일까?
그날 이후 축시황은 갈천륭과 흉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그를 대형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날 이후 축시황에게 있어 평생을 통해 진정한 대형은 오직 갈천륭이 되었다.
축시황은 갈천륭의 신물인 묵지환을 보자 과거의 그를 만난 듯한 기쁨을 느꼈다. 결국 그는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변경해야 겠군."
그의 입가에 의미깊은 괴소가 그려졌다.
"흐흐... 진정한 독중지성을 만들리라. 아무에게도 조종받지 않는 독문사상 최초의 독황(毒皇)을 탄생시키리라!"
그는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던 비밀고(秘密庫)에서 검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속에는 여러 가지 기물(器物)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천독흑천비와 화합하기 전에 독령지체(毒靈之體)부터 되어야 한다."
축시황은 상자 안에서 흑갑을 꺼냈다. 흑갑 속에는 환약이 들어 있었는데 그 크기는 용안(龍眼)만했다.
그는 환약을 단목천상의 입에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본문에 마지막 한 알밖에 없는 만독성단(萬毒聖丹)이 비로소 주인을 찾게 되었군."
축시황은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한편, 단목천상은 일각 후에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가 서서히 먹물처럼 검게 변색된 것이었다. 이 각쯤 지났을 때 그는 완전한 묵인(墨人)이 되고 말았다.
축시황은 재빨리 상자 속에서 크고 작은 침들을 꺼냈다. 그것은 모두 삼백육십 개였는데 하나같이 검은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침을 하나씩 단목천상의 혈도에 꽂기 시작했다.
"백회혈(百會穴), 백양혈(百陽穴), 미심혈(眉心穴), 천돌혈(天突穴), 단중혈(壇中穴)......"
묵침을 꽂아가는 동안 축시황의 동작은 더욱 신중해졌으며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첫번째 침을 꽂는 순간 단목천상의 체질이 특히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목천상이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혈맥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침을 꽂는 그의 동작은 갈수록 느려졌다. 자칫 잘못 꽂았다가는 대사를 그르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런 혈맥을 지닌 자가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수많은 신의들이 모두 실패한 것도 이때문이었구나. 혈맥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으니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옥당(玉堂)... 기문(期門)......"
그는 진땀을 흘리며 침을 꽂아갔다. 머리칼 한 올의 오차만으로도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축시황의 손은 무거워졌고 이마에는 진득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 시진 가량 지났을까?
"휴우! 이제 끝났군."
축시황은 단목천상의 삼백육십혈에 모두 침을 꽂은 후 뒤로 물러섰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
축시황은 고슴도치처럼 전신에 침을 빽빽이 꽂고 있는 단목천상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일각이 여삼추(如三秋)라고나 할까? 축시황은 한 시도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단목천상의 혈도에 꽂혀 있는 침들을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팟!
문득 한 개의 침이 저절로 솟아오르며 핏방울이 튀었다. 그곳은 바로 백회혈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침들이 퉁겨져 나왔다. 그로 인해 단목천상은 얼마 후에는 시뻘겋게 혈인(血人)이 되고 말았다. 기이한 것은 그 피가 붉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라는 사실이었다.
침상도 온통 검은 피로 물들어 버렸다. 체내의 피가 거의 모두 빠져버린 듯 단목천상의 전신은 온통 창백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축시황의 얼굴에는 기쁨이 떠올랐다. 그는 이마에 밴 땀을 소매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제 천독흑천비와 광음독천합혼제(狂淫毒天合魂祭)를 치르는 일만 남았군."
그의 두 눈에서는 괴이한 벽록광이 치솟고 있었다.
"흐흐흐...! 두고 봐라. 이제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질 것이다."
②
한편, 이검옥은 한 석실에서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동안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으나 제대로 휴식 한 번 취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진기를 절반쯤 운행했을 때였다.
'......!"
그녀는 안색이 변했다. 진기가 심유혈(心兪穴)과 독유혈(督兪穴)을 지나면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은!'
그녀는 두 눈을 반짝 떴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형의 독(毒)을 입은 것이었다.
"감히 내게 수작을 쓰다니...!"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를 갈았다.
"가만 두지 않겠다! 축늙은이!"
이검옥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석실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 순간 통로의 좌우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으며 음침하게 말했다.
"크크...! 귀여운 아가씨, 어딜 가시지?"
"흘흘,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몸이 달아 오르셨나? 하지만 충고하건데 얌전히 방 안에 처박혀 있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야."
두 흑의인은 이죽거리며 이검옥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손에는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남빛의 괴형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극독이 발려진 것 같았다.
사실 그들도 이검옥의 무공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했다. 이검옥의 검미가 쭈삣 치켜 올라갔다.
"쥐새끼 같은 놈들! 비켜랏!"
이검옥은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흐흐, 버릇없는 계집 같으니!"
"요절을 내주마!"
쐐애액!
두 개의 독검이 양방향에서 이검옥을 베어왔다. 오른쪽의 흑의인이 펼치는 것은 오악단지(五嶽斷地)라는 검초였다. 반면 왼쪽의 흑의인은 독룡출해(毒龍出海)의 검초를 사납게 펼쳤다.
"흥! 그것도 검법이라고 펼치는 거냐?"
이검옥의 입에서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칼날처럼 뻗더니 좌에서 우로 휩쓸어갔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횡소천군(橫掃天軍)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펼친 것은 우내쌍혈로 강호를 위진시켰던 혈봉황의 독문절기인 쇄각대파수(碎角大破手)란 것이었다.
희리리링!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섬뜩한 강기가 흑의인들의 허리를 스쳐갔다.
"크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허공에서 네 개의 인육(人肉) 토막이 떠올랐다. 무참하게도 두 흑의인의 몸뚱이가 양단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내 앞을 막지는 못한다!"
이검옥은 피를 보자 더욱 흥분한 듯 섬광처럼 신형을 날렸다.
지하동굴에는 광장이 곳곳에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 광장마다 화원(花園)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원에는 온갖 종류의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심어져 있었는데 그윽한 향기가 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몹시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화원의 꽃들이야말로 은연중에 극독을 공기 중에 품어내는 독초들이라는 것을.
휘익!
백의를 휘날리며 한 교영(嬌影)이 화원에 내려섰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이검옥이었다.
그녀는 단목천상이 있던 밀실을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본 것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는 텅 빈 돌침상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치를 떨었다. 특히 돌침상을 온통 적시고 있는 검은 피는 그녀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급기야 그녀는 축시황을 찾기 위해 동굴의 이곳저곳을 이잡듯이 뒤지다 화원에 오게 된 것이었다.
"아아!"
문득 이검옥은 현깃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코끝으로 한 가닥 향기를 맡는 순간 시야가 뿌얘지며 어지러워진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 앞에 흑영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죽어랏!"
츠츠츠츳!
그녀의 장심으로부터 한 줄기 백광이 비수처럼 흑영을 향해 날아갔다.
"큭!"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뿜어졌다. 흑영은 다름 아닌 축시황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이검옥을 공격할 의향이 없었던 듯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당해 왼쪽 어깨가 축 처지고 말았다.
"잠깐! 낭자... 할 말이 있소!"
그러나 이미 분노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이검옥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시끄럽다! 이 노적...!"
그녀의 소맷자락이 다시 바람을 가르자 더욱 예리한 강기가 축시황을 향해 날아갔다.
"이... 이런...."
축시황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물어물하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녀를 향해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시커먼 독무가 이검옥을 향해 날아갔다.
이검옥은 이미 두 가지 독에 중독된 몸이었다. 첫번째는 만독림의 도화무형장독이었고, 두번째는 화원의 절금만향독(絶今萬香毒)이라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미 시야가 흐리고 감각이 둔해진 그녀는 축시황의 독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으... 음!"
그녀는 신음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축시황은 쓰러진 이검옥을 안아들었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축시황은 팔에 혀를 찼다.
"쯧쯧! 정말 성질 한 번 고약한 낭자로군. 조금만 참았으면 될 것을."
그는 이검옥을 안은 채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안심하시오. 낭자를 해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단목천상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역시 석실이었는데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침상 역시 호사스런 비단금침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으음... 으으..."
간헐적으로 그의 입술 사이로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석실의 벽에는 두 자루의 황촉이 타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벽옥향로가 모락모락 향연(香煙)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으으...!"
신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득 단목천상의 손이 움직이더니 허공을 휘저었다.
그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움켜잡으려는 듯 허우적대더니 갑자기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솟아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욕정으로 그의 혈관은 부풀대로 부풀었고, 피는 뜨겁게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것은 방 한쪽에서 소리없이 피어오르고 있는 향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전갈(全蝎)의 정액을 말린 가루와 만독림에서만 자생하는 독초를 혼합한 것으로 강한 최음효과가 있는 향이었다.
"으으...!"
단목천상은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전신을 경련했다. 그의 손은 금침을 뜯듯이 움켜 쥐었고, 목과 관자놀이에는 굵은 심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 현상은 그의 사타구니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나이의 중심부는 무섭게 팽창된 채 허공을 향해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
단목천상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을까? 침상 앞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여인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리 오너라... 제발!"
단목천상은 신음을 발하며 손을 뻗었다.
여인. 그녀는 실로 완벽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으며 한 줌밖에 안되는 가는 허리에 쭉 뻗은 다리, 삼각지역에는 무성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괴이한 것은 피부였다. 여인의 피부는 윤기가 번들거리는 검은 색이었다. 그녀는 바로 독지(毒池) 속에 누워 있던 독녀였던 것이다.
"호호호...!"
문득 독녀는 뇌쇄적인 웃음을 흘려내며 허리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젖가슴이 흔들리며 강한 육향(肉香)이 풍겼다.
단목천상은 온몸이 터질 듯한 괴로움으로 정신이 몽롱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욕망을 발산하는 것뿐이었다.
"으으...!"
마침내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그의 손은 독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호호...!"
독녀는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단목천상은 독녀를 껴안고 뒹굴었다. 독녀는 도발적으로 나신을 비틀어대며 단목천상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허억!"
단목천상은 정신없이 여체를 취하기 시작햇다. 그의 입에서는 거친 숨결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독녀는 허리를 활처럼 휘며 온몸을 꿈틀거렸다. 이윽고 두 남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사에 몰입했다.
석실을 가득 메운 최음향의 독기 속에서 그들의 정사는 온몸을 태울 듯이 진행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독녀의 전신 모공으로부터 자색의 독무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독무는 삽시간에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오직 전신이 녹아날 듯한 운우(雲雨)의 쾌락에만 빠져있을 뿐이었다.
문득 단목천상은 전신을 경련했다. 전신의 혈맥으로 알 수 없는 기운에 물밀 듯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기운은 삽시에 그의 혈맥을 팽창하게 했다.
"윽!"
그는 비명을 토하며 전신을 뻣뻣하게 뻗으며 혼절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독녀의 몸이 후줄근해지더니 힘없이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단목천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광음독천합혼제(狂淫毒天合魂祭)는 그런 식으로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은 독문(毒問)의 전설인 독중지성(毒中之聖)의 탄생을 위한 과정이었다. 한 명의 독중지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 명의 독녀(毒女)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천독문에서만 비전되는 광음독천합혼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법이었다. 독중지성에게 바쳐지는 독녀는 먼저 여아 열 명을 일천 종의 독물 속에 담그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대법의 시행을 위해서는 전신이 독으로 가득 찬 독녀의 연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녀를 만들기 위해서는 천독살후공(天毒煞候功)을 십육 년 간 연성해야 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천독흑천비가 되는 것이었다.
연후 독중지성이 될 남자와 차례로 광음독천합혼제를 벌여야 한다. 결국 그로 인해 그녀들의 체내에 녹아있던 만독정령(萬毒精靈)은 모두 남자의 체내로 옮아가 고금제일인의 독중지성을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었다.
반면, 천독흑천비들은 이 과정에서 원정(元精)의 고갈로 만독정력을 상실함으로써 목숨을 잃게 된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단목천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고른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의 피부였다. 그의 피부는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우유빛이 감돌며 은은한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교접을 나눈 천독흑천비의 만독정령 때문이었다. 만독정령이 그의 체내에서 융화되어 고금제일독(古今第一毒)의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
단목천상은 문득 눈을 떴다.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석실의 천장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체 이곳이 어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전신이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체내에서 대해(大海)와도 같은 기운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정좌를 한 후 공력을 운행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몸 속에 알 수 없는 괴이한 힘이 활화산처럼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괴력(怪力)의 힘은 섣불리 공력을 운행하기도 벅찰 정도로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자칫하면 스스로도 통제력을 잃어버려 폭발할 것만 같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단목천상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검옥과 함께 의원을 찾아 중원을 떠돌았는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이때 마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순간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석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여인이었는데 바로 이검옥이 아닌가?
"천상! 살아나셨군요!"
이검옥은 그가 앉아있는 것을 보자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녀는 기쁨에 못이겨 오열을 터뜨렸다.
"흑흑...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시나요?"
단목천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소. 그런데..."
단목천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곳은 대체 어디요?"
"하하하...!"
문득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의 흑포인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바로 마독 축시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침상 앞에 이르자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천독문의 축시황이 공자를 뵈오이다."
단목천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방외오문 중 하나인 천독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연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노인장께서 그럼 천독문주이신 마독..."
"허허! 그렇소이다. 공자."
단목천상은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석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독문이겠구려. 그런데 왜 내가 여기에 있게 되었소?"
축시황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물었다.
"갈천륭 대형은 안녕하시오. 공자?"
단목천상은 더욱 놀랐다.
"아니, 할아버님을 아시오?"
"그 분은 노부의 은공이시오."
축시황은 단목천상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묵지환을 가리키며 말했다.
"으음... 그랬었군."
단목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날 구한 것이오? 수많은 의원들도 손을 들었는데...?"
"허허허, 그것은 노부의 욕심 때문이었소. 본래 노부는 저 아가씨의 용설검에 욕심을 내 접근했는데 공자가 묵지환을 끼고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오."
축시황은 그간의 사정에 대해 숨김없이 얘기해 주었다. 특히 단목천상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독중지성을 만들어야 했다는 점과, 독중지성을 이루기 위해 열 명의 천독흑천비가 희생되어야만 했다는 점을 꾸미지 않고 털어놓았다.
"아!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세상에 그런 일이..."
단목천상은 그만 장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열 명의 소녀들이 희생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축시황은 전혀 달랐다. 그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공자는 부담가질 것 없소이다. 그 아이들은 독문의 제자들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오."
"그건 그렇지가 않소이다."
단목천상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생을 그녀들에게 안내해 주시오."
"아니, 공자! 어쩌려고?"
"부탁하오. 문주."
단목천상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단목천상을 바라보던 축시황은 마침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대체 시체가 된 계집들을 봐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하지만 공자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따라오시오."
축시황은 단목천상을 한 지하동부로 안내했다.
그곳은 천독문의 조사동(祖師洞)이었다. 넓은 광장에 수십 개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천독문의 역대 문주(門主)들을 모신 것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습기가 가득 찬 비좁은 석실에 열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이곳이오."
축시황은 관을 가르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단목천상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관 속에는 천독흑천비가 누워 있었다. 그녀들의 피부는 이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은 체내에서 만독정령이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소녀들의 시신을 바라보던 단목천상은 문득 무릎을 꿇었다.
"고... 공자!"
축시황이 크게 놀라 그를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관 앞에 무릎을 꿇은 단목천상의 안색이 너무나도 엄숙했기 때문이었다.
단목천상은 열 개의 관을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소생 단목천상,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소이다. 삼가 그대들의 명복을 비오이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검옥과 축시황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곧 강한 감동으로 바뀌었다.
무림계에서는 오직 독존(獨存)을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만이 지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목천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피지 못한 채 꽃잎처럼 스러져간 열 명의 소녀들에게 막중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단목천상을 대하는 순간 축시황은 지금껏 이기적으로만 살아왔던 자신의 생애에 대해 깊은 자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대인(大人)이다! 이 분 공자는 진정한 대인의 기질을 지니고 있구나...!'
마독 축시황은 단목천상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팔십 년의 생애를 통해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으로 천추혈제 갈천륭과 의형제를 맺을 때와는 또 달랐다.
한편, 단목천상은 일어설 줄을 몰랐다. 마침내 보다 못한 축시황이 간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공자, 그만 일어 서시구려."
단목천상은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는 열 개의 관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만독림에 열 개의 무덤과 함께 하나의 비(碑)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만독림의 중심지에 세워진 그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 천독흑천비지묘(天毒黑天妃之墓)
부군(夫君) 단목천상(丹木天相) 읍립(泣立).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