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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에노3 - 우에노 공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인 도쇼구를 구경하다!
2019년 4월 12일 시즈오카현 미시마(三島)에서 기차로 도쿄역 에 도착해 코인로까에 배낭을
넣고는 벚꽃을 보기 위해 JR 패스 로 야마노테선 山手線(산수선) 을 타고 우에노역 에
내려서 우에노 공원 으로 들어가는데, 1924년 다이쇼 일왕(천황) 이 천황가의 영지를
도쿄시에 하사를 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에노 온시코엔 (上野恩賜公園) 이라고 합니다.
405년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진왕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본에 한문을 가르쳤다는 왕인 박사의 비 (博士王仁碑) 를 보고는
창의대의 묘 를 지나 메이지유신 무진 전쟁의 1등 공신인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降盛像 (서향강성상) 의 동상 앞에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 를 회상해 봅니다.
그러고는 시노바즈노이케 不忍の池(불인노지) 라 불리는 연꽃이 자라는 연못 을 구경
하는데.... 원래는 에도만(현재는 도쿄만)의 물이 들어오던 호수 였다고 합니다.
주택지를 확보하려 개간하면서 물이 줄어들어 늪 이 되었다가 1625년 간에이사
건립 당시에 벤텐당(弁天堂) 을 만들면서 다시 물을 채워 만든 인공 호수 라고 합니다.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가니 오조천 신사며 화원 신사 등 작은 신사가 줄지어 나타
나는데...... 붉은 도리 (鳥居 조거) 의 붉은색 도리는 곡식과 사업을 도와주는
신으로도 알려진 이나리(稲荷) 신사 를 상징 한답니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긴 참배도로를 걸으니.... 저만치 구석에 도쇼구(東照宮 동조궁) 신사가 보입니다.
에도 막부의 창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모시는 도쇼구(東照宮 동조궁) 신사로 원 도쇼구
는 북쪽 멀리 닛코(日光)시 에 있지만...... 여기 도쇼구 東照宮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충성을 맹세한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가 닛코의 도쇼구를 본떠 만들었으며
현재 건물은 1651년 이에야스의 손자인 이에미쓰가 에도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이시도리이 를 지나 도쇼구의 문을 들어서서 안으로 들어가니 3천주의 모란 이
심겨진 보탕엔(牧丹園 목단원) 정원으로...... 높이가 7미터에 달하는 큰 탑
오바케도로 와 작은 탑에 종탑 이며 여러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표참도를
걸어 본전에 이르니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한 金色展(금색전) 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은 닛코와 여기 도쿄 두곳 말고도 3군데 더 있으니 이에야스가
아들들을 에도의 쇼군 본가 후손이 끊어지는 사태를 대비해 지방에 분봉한 고산케
(御三家(어삼가) 로 미토와 오와리에 기슈번이라 불린 와카야마 에 도쇼구 를 세웠습니다.
고산케 (御三家(어삼가)는 도쿠가와 9남을 나고야 오와리번 에 10남 요리노부는 와카야마
기슈번 그리고 11남 요리후사는 도쿄 동쪽 미토번 에 봉했으니 세 가문 을 이르는
말인데.... 에도(도쿄) 의 도쿠가와 본가 후손이 끊어지면 쇼군 후계자 를 낼 수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에도(도쿄) 막부의 초대 쇼군 으로..... 어린 시절 나고야 동쪽
미카와 성주의 아들 로 태어났으나 세력이 미약하다 보니 오다 가문에 이어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 을 했으며......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마가와 요시모토 가 오케하자마 전투 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독립 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에 들어가 힘을 기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 를 통해 전국의 패권을 쥐고 1603년 에도 막부 를 열었습니다.
슨푸성(시즈오카)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 로 있던 1555년 이에야스 는 요시모토로 부터
“모토” 라는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모토노부 라고 하고는 이마가와가
중신의 딸 쓰키야마도노 와 결혼 해서는 오카자키군(軍) 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 으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전사 하자 고향인 오카자키성
으로 귀환하여 자립 하는데.... 아미타불 을 외치는 일향종 봉기 (一向一揆) 를 진압
한 후에 미카와를 통일 하고는 새롭게 떠오르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을 체결 합니다.
미카와 (아이치현 동부) 통일을 이룬 이에야스 에게 조정은 미카와노카미 (三河守) 에
서임하니 이에야스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 조부 기요야스가 사용한 "도쿠가와로
성씨" 를 바꾸는데..... 조정에서는 도쿠가와 성씨는 이에야스 직계에만 한정 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에 속한 다른 일족들에 대해서는 마쓰다이라 성씨 를 사용하게 합니다.
1568년 가이국(야마나시)의 다케다 신겐 은 이에야스에게 이마가와 가문의 도토미국은
이에야스가, 스루가국(시즈오카) 은 자신이 분할하여 차지하자는 제안 을 하니
이에야스는 도토미로 출병 해서는...... 이듬해 5월에 거의 평정하고는 1570년에는
히쿠마에 성을 쌓아 하마마쓰 라고 이름 짓고 미카와의 오카자키에서 본거지를 옮깁니다.
노부나가 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서쪽 영토를 확장해 나가자...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에
기대 동쪽으로 영토 를 늘려나간 것인데, 노부나가가 교토 상경에 성공한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요구대로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아자이 · 아사쿠라 가문과 싸우기도 하는데
가이국(야마나시) 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 이 스루가를 차지하니 이에야스와 국경을 접합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가 노부나가를 반대하는 세력의 규합 을 촉구하자...
신겐 이 이에 호응해 서쪽 도토미국으로 진격 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결전 을 치릅니다.
1572년 12월 이에야스 는 오다 원군 3천이 도착하자 성을 나와 미카타가하라 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이에야스의 대패 로 끝났으니 패배를 상기하기 위해 그림 을 남깁니다.
고뇌에 찬 표정을 생생하게 그린 초상화 를 만들어 늘 옆에 두고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지요?
이 덕분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단 한번도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게 되는데 교토
를 향해 진군하던 가이국(야마나시) 다케다 신겐 은 1573년 4월 전장에서 병사 하니...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겐 이 남긴 絶命詩 (절명시) :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도다.”
또는 “뒤는 남은 자들에게 맡긴다. 꾸미지 않아도 빛나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 에게...”
다케다군은 가이 본국 으로 후퇴했으나 병력은 온존했으니 후계자가 된 다케다 가쓰요리 는
곳곳에서 싸움을 벌여 도토미를 침공 하여 난공불락인 다카텐진성 을 손에 넣는데....
1575년 5월 이에야스 는 오다군과 연합해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군에 대승 을 거둡니다!
1578년 에치고국 우에스기 겐신 이 죽은후 후계자 상속과 관련하여 내분이 발생하니
가쓰요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지지 했기 때문에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
간에 기존의 군사동맹이 깨지고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은 이에야스와 동맹 을 맺습니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와 장남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한 혐의
가 있다고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자결시키도록 지시 했는데, 이는 노부야스의 처인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가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 사이가 나빴기에 일어난 사건 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숙고 끝에 굴욕을 참고는 이를 받아들여서는 아내와 후계자인
장남을 죽여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훗날을 기다리는데......
한발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 라! 구렁이 같은 속과 인내심 의 끝이 어딘지 감탄합니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배경으로 이에야스는 다카텐진 성을 탈환하여 가쓰요리를 압박하니
1582년 3월 노부나가의 다케다 총공격이 실시되어 이에야스도 고후로 진격해
가이국(야마나시) 의 다케다 가문을 멸망 시키고는... 스루가(시즈오카) 를 손에 넣습니다.
1582년 노부나가 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교토 혼노지에서 죽었을때 노부나가
의 초대를 받아 상경했던 이에야스 는 오사카 사카이에 있었는데...... 혼겁한
그는 간신히 이가국의 험한 산길을 넘어 이세로 가서 배를 타고 미카와 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전화위복이라고 혼란에 빠진 동부지역으로 출진하여 호조 가문과 대치 했으나 10월
화평을 맺고 가이(야마나시)와 시나노(나가노) 동부와 남부 의 지배권을 획득하는데
이때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은 고즈케국(군마) 을 얻었으니...... 이에야스는 둘째 딸
도쿠히메 를 호조 우지나오 에게 시집 보내 인척관계를 맺어 동쪽에 평화를 유지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한후 1583년 오다 가문의 유력자 시바타
가쓰이에 마저 죽여 패권 을 장악하는데.... 히데요시가 독선적인 행위를 하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는 이에야스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와 대립 합니다.
1584년 이에야스는 오와리국으로 출진해 노부카쓰와 합류 하니 히데요시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이에야스와 대치하는데..... 히데요시군 일부가 이에야스의 본거지를 급습
하러 가다가 나가쿠테에서 전투 가 벌어지니 이에야스는 주력을 돌려 히데요시
별동대를 저지 합니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 로 빠져들자 히데요시는 강화 를
이끌어내니 이에야스도 어쩔수 없이 히데요시와 강화 를 맺게되어 차남을 인질로 보냅니다.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 (후에 유키 히데야스)가 히데요시의 양자(인질) 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 함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니 임진왜란중 히데요시
가 죽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에도에 막부를 열어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는
1868년 까지 일본을 지배하며 여기 도쇼구 를 세웠던 것이니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훈 은......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遠き道をゆくが如し、いそぐべからず、不自由を常と思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 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 堪忍は無事長久の基、
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 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 害其身にいたる、
おのれを責めて、人をせむるな、及ばざるは過ぎたるよりもまされり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 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가라이리(중국 입성)” 를 명분으로 임진왜란 전쟁을 일으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규슈 가라쓰의 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머물며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으니 조선과 외교관계 를 재개해 통신사 를 요구할때 일본은 이걸 내세웁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손들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후 메이지유신 으로 도쿠가와 에도
막부가 무느지는 1868년 까지 268년간 일본을 통치 했는데....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출병하지 않았으니 침략전쟁과는 무관 하고, 조선과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근절 시켰으며 268년간 대외 침략을 한번도 하지 않은 평화정권 입니다. 하지만 1868년
무진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망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신정부가 들어서 침략 으로 나가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나는 관동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 못했고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고, 화친하기를
바란다” 고 수교를 요청 하니 조선은 왜관을 재설치 하고 1607년을 시작으로 쇄환사 를
보내 포로를 일부 데려왔으며 1636년 부터 500명 가까운 통신사 일행이 12회 파견 되는데
동서고금 5천년 인류 역사에서 외교의 근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이니 이웃나라는 적 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웃한 나라는 예외없이 철천지 원수 라!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스와 터키,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프랑스, 중국과 베트남, 버마와 태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러하니 한국과 일본 사이
에도 평화로운 시대가 없었다고 알지만 조선과 일본은 1598년 부터 1875년 까지 무려 277년간
전쟁 없이 선린우호 평화롭게 지냈으니..... 인류 역사에서 이런 긴 평화는 전무후무한 사례 라!!!
세계사에서 바로 이웃한 나라 끼리 단 100년간이라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낸 사례 가 또 있나요?
도쇼구 를 나오니 벚나무 에 안긴 알 모양의 돌에는 '우에노 온시코엔 (上野恩賜公園, 주군에게
하사 받았다는 의미)'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1924년 쇼와 일왕의 결혼 을
기념해 왕실 소유이던 우에노 지역의 야산 을 도쿄 도에 양도 하면서 정해진 이름으로
도쿄 시민들은 보통 우에노 공원 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우에노 온시공원 인 것입니다.
벚꽃 을 구경하고는 공원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가면 국립 박물관 이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
포기하고 우회전해서 나오다 미술관 을 보는데 여긴 바깥에 무수히 많은 조각상 들을
설치해 두었으니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무료로 편안하게 구경할수 있어 좋은데 오늘은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 우에노 공원에 왔을때 노숙자 들을 보고 놀랐던 일이 떠오르니
금년에 조선일보 칼럼 만물상에 한현우 씨가 올린 글 "40대 니트족 20만명" 이 생각 납니다.
"2004년 후지 TV에서 니트족에 대한 프로그램 을 방영했으니 학생도 아닌데 무직이면서
취업훈련도 받지않는 인구가 급증한다며 한 20대 남자를 인터뷰 했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 는 질문에 남자는 "일하면 지는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지금도 '니트족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말' 로 회자되고
있다. 나중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부러우면 지는 거다' 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
"니트(NEET)족 은 1999년 영국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말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영국에서는 10대 후반 세대를 가리킨 용어였으나
일본에서 널리 쓰이면서 18세 이상 성인으로 확대 됐다.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대 교수는
책 '하류지향' 에서 니트족을 "풍족한 사회에서 성취동기를 상실한 신인류" 로 묘사했다.
하기싫은 일을하며 적은 돈을 받느니 놀면서 부모 잔소리 듣는게 더 합리적 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40대 니트족이 20만명 인데 일본은 중년 니트족이 123만명 으로 청년 니트족 보다
두배이상 많다. 지금이야 아베노믹스로 경제가 살아나 구인난 이라지만, 예전 '취업
빙하기시대' 에 정규직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한 니트족' 으로 눌러앉았기
때문인데, 얹혀사는 중년이 일본처럼 계속늘면 사회 한구석이 무기력해 진다는 뜻
이니 돌이킬수 없는 문제가 될수있다. 지금 노인 알바에 몇조원씩 쏟아부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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