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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08]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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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그분이 주시는 평화 <독서 : 사도 14,19-28 / 복음 : 요한 14,27-31ㄱ>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이 말씀은 미사통상문 중 평화 예식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통상문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미사를 주례할 때 가급적 발음을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늘 미사 때마다 이 부분도 남다르게 생각하면서 경문을 외우곤 한다. 특별히 우리 각자의 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평화는 온 교회가 보여준 믿음, 시대를 이어온 신앙유산의 힘을 통해서 주시는 평화라는 사실에 온몸이 전율에 휩싸이는 느낌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죄와는 상관없는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교회의 믿음으로 주시는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교회를 평화롭게 하는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하나 되게 하는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영원한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당신의 평화이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안에 다스리시는 분의 평화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평화가 이미 우리 안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자료 : 변윤철 신부(서천어메니티 복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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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5주간 화요일(2012-05-08) I 묵상기도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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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
평화의 주인이신 주님, 많은 말보다는 말씀이 온 존재 속에 스며들도록 하셨던 마리아처럼 저 또한 말씀 안에 깊이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복잡하고 분주한 모습보다 단순함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저 당신이 계신 그 자리에 함께 있음으로 충분함을 깨닫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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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교육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모든 교육자가 주님께서 주신 교육자의 길을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성실히 걸어갈 수 있도록 풍성한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과묵한 여인 마리아
마리아는 진실한 여인으로 '영적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면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리아가 과묵한 여인이라는 것은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이 존재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다.
과묵한 여인이신 성모님, 유창하게 말하다 불치병에 걸린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저희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감추는 데 익숙해져 단순한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말할 거리가 없어도 언제나 말해야 된다고 믿는 저희는 거미줄에 잡힌 파리처럼 어리석고 캄캄한 함정에 자주 떨어지곤 합니다.
저희가 당신처럼 투명하는 드러내는 성사가 되게 하시고 하느님께 단순히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바다에 빠져들게 도와주소서...........[안토니오 벨로, '성모님과 함께하는 31일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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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5주간 화요일(2012-05-08)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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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바오로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자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난다. 그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라고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면서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이방인 지역에서 있었던 하느님의 업적을 교회 앞에서 자세히 보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평화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주실 평화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신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다시 오심은 종말에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아버지께 돌아가신 다음에도 계속 체험하게 될 것이다(복음). |
<복음묵상-1> : †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ㄴ절)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평화(平和)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전쟁(戰爭)이나 분쟁(紛爭)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 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적•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전자(前者)에 해당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후자(後者)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再臨)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不信)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優勢)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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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내가 주는 것, 평화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음식이 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예수님이 주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다. 세상이 이끌어 가는 힘이 있고 예수님이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영위되어 가는 세계가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육과 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이 두 가지 세력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육이 영이 될 수 없고 영이 육이 될 수 없다. 영과 육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것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을 더 얻기 위해 세상 일에 관심을 갖겠지만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 예수님이 주는 것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먹는 음식이 다르고 관심을 쏟는 대상이 다르고 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다르고 이르는 목적지가 다르다.
따라서 둘은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보는 것이 다르고, 듣는 것이 다르고, 입는 것이 다르다. 처음에는 잘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세월이 흐를 수록 둘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즉 세상 것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 점 더 세상 사람이 될 것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닮아갈 것이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는 것이 더욱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둘을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오로 사도도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 5-8. 13-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처럼 육체를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자주 넘어지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바오로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라고 동감하게 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로마 7, 15-18. 21-23. 25)라는 바오로의 고백은 우리가 구구절절 동감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우리의 고민이요, 하소연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에 영적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의 삶도 투쟁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우리의 영적 생활도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 힘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쉽게 이루워지는 것이라면 굳이 신앙생활도 수도생활도 복음 삼덕의 서원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 48)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게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참피온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눈물나는 훈련을 해야하는가? 정상에 오르는 일은 항상 땀방울을 필요로 한다. 이런 삶의 목표가 없는 삶은 불행한 사람이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무엇인가 도달해야할 목표가 있는 삶은 의미 있는 삶이고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이며 살아야할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는 거대하다. 이 세상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영적 투쟁을 하면서 사는 것이 수도자의 아름다움이요, 신앙인의 아름다움이다. 어느 정도 도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닦아야할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도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도 있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주는 것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 한가운데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불리움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부르심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살겠다고 자원해서 하느님께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말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맛보리라. 평화란 성령의 열매이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맺어지는 열매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때에는 한번도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영적 투쟁이다. 영적 투쟁을 하려면 거기에 알 맞는 무장을 해야 한다. 어떤 무장을 해야하는가? 바오로의 말씀이 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에페 6,12-18)
세상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너무나 많은 데 아니 매일 매일 우리가 접하는 것은 세상 것이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 스스로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가겠다고 좁은 문을 택한 사람들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는 것을 알면서도 넓은 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자.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식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주는 것을 먹고 입음으로서 맛보게 될 평화를 누리며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말씀자료 : 유광수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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