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갑수 여행작가
▲ 소고기 차돌박이처럼 생긴 황가오리회. |
지금이 제철, 살살 녹는 삼치회
KTX가 순천까지 개통되기 전, 고흥은 멀고 먼 곳이었다. ‘가도 가도 천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가 열리면서 남원, 구례 등을 줄줄이 거쳐야 했던 길도 고흥까지 곧장 내달릴 수 있게 됐다. KTX를 이용하면 서울 용산역에서 순천까지 2시간30분, 순천에서 고흥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는다. 어쨌든 이 겨울, 고흥까지 먼 길을 떠나온 까닭은 맛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다.
고흥 들어서자마자 나로도항으로 향한다. 삼치회를 먹으러 가는 길이다. 나로도 여객터미널 근처에 갓 잡아낸 삼치를 회로 내는 식당이 여러 집 있다. 나로도항은 예부터 삼치로 이름을 날린 포구. 일제강점기에는 삼치 파시(波市)가 열릴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나로도항을 삼치잡이 전진기지로 삼았는데, 그들이 최고로 친 삼치가 바로 나로도 삼치였다.
1960~1970년대는 나로도 삼치잡이의 최전성기였다. 나로도항을 드나드는 삼치잡이 배들만 200여척이 됐다. 그때만 해도 삼치는 귀한 어종이었다. 잡는 족족 ‘대일무역선’이라 부르던 배에 실려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바람에 제철에도 국내 생선가게에서는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삼치는 1㎏당 5000원을 받았는데 TV 한 대가 3만5000원 할 때였으니 얼마나 비싼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가 있다. ‘삼치 배 한 척이면 평양 감사 안 부럽다’는 말도 있었다.
지금이야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삼치 하면 나로도를 최고로 쳐 준다. 우리가 구이로 즐겨 먹는 30~50㎝ 정도의 삼치는 나로도에서는 삼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적어도 1㎏이 넘어야 그나마 삼치라 불리고, 3㎏이 넘어야 ‘아, 삼치구나’ 하는 대접을 받는다.
삼치는 지금이 딱 제철이다. 10월부터 살에 기름이 오르기 시작한 삼치는 12~1월이 가장 맛있다. 3~6월에 서해와 남해 연안에서 산란한 삼치는 9~11월에 먹이가 풍부한 일본 근해로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11월에서 2월 사이에는 지방 함량이 평소보다 40%가량이나 많아진다. 삼치라는 이름은 ‘자산어보’에서 유래했는데 ‘세 가지가 다르고, 세 가지 맛이 있고, 세 배 크며, 속도가 세 배 빠르다’고 기록돼 있다.
삼치는 꽁치나 고등어처럼 등푸른생선 중 비린내가 가장 적다. 도시 사람들이 가장 흔히 먹는 방식은 구이인데, 구웠을 때의 고소함은 고등어보다 한 수 위다. 그 다음에는 조림으로 많이 먹는다. 무와 대파를 큼직하게 썰어넣고 매콤하게 조려낸 삼치조림은 겨울철 밥도둑이자 술꾼들에겐 최고의 안주기도 하다.
하지만 이즈음의 삼치라면 역시나 회로 먹어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 삼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방식의 활어회가 아닌 선회로 즐긴다. 삼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자마자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로도를 비롯해 청산도, 추자도, 거문도 등 삼치가 잡히는 해안가에서만 회로 먹다가 냉장시설이 발달하면서 이외의 지역에서도 회로 먹을 수 있게 됐다.
경매를 끝낸 삼치는 바로 냉장 숙성에 들어간다. 삼치는 살에 수분이 많고 무른 편이어서 숙련된 사람이 아니면 회를 뜨기도 어렵다. 그래서 3시간 정도 숙성시킨 뒤 살짝 얼려 회를 뜬다. 삼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삼치 맛을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표현하는데 삼치 회 한 점을 맛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씹지 않고 혀만으로도 즐길 만큼 부드러운 것이 바로 삼치회다. 은백색을 띠고 있는 배쪽 살이 지방 함량이 많아 제일 맛있다.
삼치회를 먹는 방식은 고장마다 약간씩 다르다. 고흥 사람들은 두툼한 돌김 위에 큼직한 삼치회 한 점을 올린 뒤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다. 양념장은 간장과 고춧가루, 마늘, 설탕에 청주와 깨를 넣어 만든다. 청산도에서는 묵은 김치에 싸먹고, 여수에서는 양념된장과 갓김치를 올리고 마늘과 고추냉이를 얹어 쌈을 싸 먹는다. 해남 땅끝에서는 김 대신 봄동에 삼치를 올리고 묵은 김치를 더해서 먹는데 이를 삼치삼합이라고도 부른다. 나로도에서는 삼치회뿐 아니라 미역국에 삼치를 넣어 끓이는 삼치미역국, 삼치의 껍질을 벗겨 순살로만 만드는 삼치어죽도 먹는다.
삼치회는 쫄깃한 식감으로 먹는 회가 아니다. 처음 먹는 사람은 약간 푸석푸석하고 무르다고 느낀다. 그래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음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더해지는 삼치회는 한번 맛본 사람을 곧장 매니아로 만들어 버린다.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갈에 고추냉이를 조금 얹고 그 위에 삼치회를 올리고 먹어도 맛있다. 횟집에서 일정 비용을 내면 삼치회는 물론 삼치구이와 삼치탕까지 한꺼번에 맛볼 수 있으니 미리 문의해 보는 것도 다양한 삼치맛을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대한민국 우주 도전의 산실, 나로우주과학관
삼치회를 맛있게 먹었다면 본격적인 고흥 여행에 나서 보자. 첫 목적지는 나로도항이 있는 외나로도에 위치한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다. 고흥반도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외나로도는 15번 국도를 타고 가면 닿는다.
나로우주과학관은 우리나라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산증인이다. 2009년 8월 19일 첫 발사 시도 카운트다운 중단, 8월 25일 첫 발사 이륙에는 성공했지만 과학기술위성2호 궤도 진입 실패, 2010년 6월 9일 2차 발사 카운트다운 중단, 6월 10일 2차 발사
1단 로켓 폭발로 실패. 그리고 2013년 1월 30일 3차 발사 마침내 성공. 2009년 6월 12일 개관한 우주과학관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1, 2층으로 구성된 우주과학관에는 우주로 이동하기 위한 기본원리와 우주탐사, 로켓과 인공위성 등을 주제로 전시되어 있으며, 우주과학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1층에는 나로호 발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나로호 발사통제센터가 있다. 터치게임을 통해 나로호를 직접 발사해보는 게임으로 조립·이동·발사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돼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체험공간이다.
우주과학관을 나와 남열리에 자리한 고흥우주발사전망대로 향한다. 남열해변을 지나 고흥우주발사전망대, 용바위에 이르는 10㎞의 해안도로는 고흥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해돋이로 유명한 남열해변과 멀리 나로도가 바라다보이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 해안절벽이 아름다운 용바위까지 만나볼 수 있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역사적인 나로호 발사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 곳이다. 지상 7층 높이의 규모로 고흥과 여수 사이의 바다에 떠 있는 여러 섬과 멀리 나로도의 장관이 펼쳐진다. 전망대를 중심으로 다랭이논길, 해맞이길, 용바위길, 해돋이해수욕장길 등 6.1㎞의 미르마루길이 이어져 있어 산책 삼아 걷기에도 좋다.
남열해변은 길이 800m의 고운 모래가 깔린 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겨울이면 파도가 세찬 까닭에 서핑을 즐기려는 서퍼들도 전국에서 많이 찾아온다. 운이 좋으면 이들이 서핑하는 광경도 볼 수 있는데 그 풍경 앞에서 꼭 외국의 어느 해변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해돋이로도 유명해 매년 1월 1일이면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발사전망대 옆 용바위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마을 앞바다에 살던 용이 천년을 살다가 큰 천둥소리와 함께 바다에서 암벽을 타고 승천했다는데, ‘기도발’이 좋아 무속인, 신앙인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고흥 맛여행의 두 번째 목적지는 녹동항이다. 근해에서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이 모이는 포구다. 고흥 끝자락에 위치해 있지만 도로가 잘 연결되어 교통이 좋고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다리가 생겨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녹동항은 붕장어탕으로 유명하다. ‘붕장어’는 몸통의 측면을 따라 작고 흰 구멍(감각공) 여러 개가 점선처럼 길게 배열되어 있다. 지방 함량이 몸의 약 10%로 뱀장어의 3분의 1 이하로 적어 탕을 끓여 먹기에 적당하다.
푸아그라는 저리 가라
고흥의 붕장어탕은 여수나 통영의 그것과는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다른 지역에서는 국물이 약간 맑은 편이지만 고흥의 붕장어탕은 오히려 진하고 구수하다. 국물을 낼 때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뿌리기 때문이다. 구수한 된장과 붕장어의 고소함이 어울려 진득하면서도 개운한 맛을 빚어낸다. 여기에 후춧가루를 뿌리면 장어탕 맛이 훨씬 풍성해진다. 아침 해장용으로 그만이다.
고흥읍내에 술꾼들이 꼭 가봐야 할 집이 있다. 도라지식당이다. 29년 역사를 가진 이 식당은 황가오리, 서대회 등 각종 제철 회를 전문으로 한다. 관광객은 별로 없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토박이들이다.
이 집의 별미는 황가오리회다. 황가오리는 ‘가짜 홍어’라고도 부르는 생선인데, 차지고 오독오독 씹히는 그 맛에 한번 반하면 홍어도 쳐다보지 않는다. 배쪽이 누런색을 띠고 있어 황가오리라 불리며 큰놈은 한 마리가 리어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크다.
100㎏이 넘는 것도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펴고 덮치면 어부가 죽는다고 한다.
황가오리는 보통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주낙으로 잡는다. 황가오리 주낙은 200개의 낚싯바늘을 묶은 줄을 40개 정도 늘어뜨리는데 그 길이가 1500m에 이른다. 그렇게 낚시를 쳐놓으면 황가오리가 등이나 지느러미에 바늘이 걸려 잡혀드는 것이다.
황가오리회를 시키면 날갯살과 뱃살을 섞은 회와 애(간)가 함께 나온다. 먼저 애를 맛본다. 신선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좋아하는 이들은 애를 먹어야 황가오리 한 마리 다 먹는 것과 같다고 칭찬할 정도다. 이 집은 주인장 아저씨가 낚시광이어서 항상 싱싱한 선어(鮮魚)가 냉장고에 가득 들어있다.
애맛은 풍성하고 농밀하다. 푸아그라에 뒤지지 않는 맛이다. 애 한 점을 기름소금에 찍어 입에 넣으면 흐물흐물 녹듯이 넘어간다. 그 고소한 맛이 자꾸만 소줏잔을 비우게 만든다.
그 다음엔 회를 한 점 먹을 차례. 붉은 반점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데 그 모양이 꼭 소고기 차돌박이 같기도 하다. 식감은 차지고 쫀득하다. 특히 날개 쪽은 씹는 맛이 일품이다. 이 집에서 직접 만든 깻잎장아찌에 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그 위에 황가오리회 한 점과 마늘 하나를 올리고 먹으면 ‘좋다~’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 황가오리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이렇게 먹다 보면 어느새 겨울밤이 깊어간다.
고흥 맛여행의 마무리는 백반이다. 8000원짜리 백반 한 상에 13가지가 넘는 반찬이 오른다. 대충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하나 맛깔스럽다. 남계리에 자리한 대흥식당은 37년 전통을 자랑하는 곳. 그날그날 장봐온 재료로 푸짐한 한상을 차려낸다. 고흥을 벗어나기 전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것도 좋을 듯. 고흥 여행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 해거름녘이라면 중산일몰전망대에서 펼쳐지는 해넘이 장관도 놓치지 말자.
여행 정보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호남고속국도 익산분기점에서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를 탄 뒤 전주나들목을 지나 새로 난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순천나들목으로 나와 순천시내를 지난 뒤 2번 국도로 바꿔 타고 벌교까지 가서 벌교에서 15번 국도를 타고 끝까지 가면 고흥반도다. 운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KTX를 타고 순천까지 간 후 렌터카를 빌리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나로도여객터미널 근처의 순천식당(061-833-6441)은 삼치회로 알아주는 집이다. 녹동항 아리랑산장어구이탕(061-842-7797)은 주문과 동시에 장어를 잡아 탕을 끓여내는 집으로 유명하다. 도라지식당(064-835-2304)에서는 황가오리회 이외에도 준치회 등 제철 생선을 맛볼 수 있다. 고흥으로 들고나는 길에 지나게 되는 동강면 소재지에 있는 소문난갈비탕(061-833-2052)은 외지 사람들보다 고흥 사람들이 주로 찾는 맛집이다. 전복과 조개를 수북하게 넣어 끓여낸 짬뽕을 내놓는 일성식당(061-834-7061)도 가볼 만하다. 고흥읍 빅토리아호텔(061-832-3711)은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호텔 앞에는 프라이빗 비치를 연상케 하는 백사장의 해변이 있다. W호텔(061-835-0707)은 깔끔하고 교통이 편리해서 좋다. 백양리 형제섬농원(061-832-2004)은 독립식 펜션이다. 조용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