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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묵상글 ( 연중 제9주간 화요일. -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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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선행한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의 고통,
사랑의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의 불행,
저는 이 문제를 오늘의 토빗기를 가지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토빗기는 선행한 토빗에게 고통이 또 닥치는 것으로 얘기를 전개합니다.
그것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토빗은 어찌하여 새가 똥을 누는 곳에 가서 눕고
하필이면 새 똥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되는 겁니까?
이것은 인간의 악행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새 똥 때문에 눈이 멀었다면 하느님께서 멀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토빗의 선행에 하느님께서 상으로 보답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앙갚음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악으로 갚아주신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이것으로 토빗은 불행해졌을까요?
제 생각에 토빗이 고통과 불편을 느꼈을지언정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보기에는 불행한 사건을 겪었는데도
그는 아무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평생 선행을 하며 살았는데 그 대가가 이거냐고
하느님께 원망을 퍼붓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사랑과 참 행복으로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고통은 있을지언정 불행은 없고
고통으로 인한 원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는 사람은 그로 인해 고통도 받고 불행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똑같은 경지에 올라 있으면 고통을 겪어도 불행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고통 때문에 불행해할 것이고 그가 무척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오늘 토빗의 아내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토빗을 원망하며 선행의 대가가 뭔지 따집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의 아내는 토빗의 경지에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선행에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아직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대가가 있어야 선행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선행의 대가가 고통일지라도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가라면 대가이고 상급이라면 상급입니다.
어떤 고통에도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선행에 악이 뒤따라도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사랑에 어떤 고통이 뒤따라도 사랑 충만으로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이것이 참사랑으로 선행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대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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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재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곧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되, 자신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텅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제한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새겨진 그분의 것입니다. 돈에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우리에게는 그분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그분께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분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그분의 생명이 흐르며, 그분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의 빛이 빛나며, 그분의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릅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형상을 압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영원토록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는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빛이 되어 비추는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새겨진 저는,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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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빚을 지고 사는 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경제민주화, 창조경제를 밤낮으로 외친다고 해서 서민 경제가 나아지지 않았고,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도 헛구호였습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시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은 각자는 경쟁에서 스스로 살아 남아라는 라는 위험성이 던져주고 있습니다. 실질적 재원 마련 대책이 없는 복지는 소용이 없습니다. 세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 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아직도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하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여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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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나 성지순례로 비행기를 탑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좌석이 있겠지만 저는 주로 복도 자리를 선택합니다. 옆 사람에게 방해 받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는 약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물냉면인지 비빔냉면인지를 놓고 잠시 고민하기도 합니다. 짬뽕인지 짜장면인지를 놓고도 잠시 고민하곤 합니다. 그래도 그런 고민은 잠시이고, 선택에 따른 책임이나 피해는 없습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과 같이 가격이 비싸고,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들은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 꼼꼼히 살펴보고, 다른 제품과 비교해 보고, 사람들의 평가를 찾아보고 선택하면 도움이 됩니다. 평생을 함께하는 배우자라면 선택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상대방의 건강, 외모, 능력, 재력, 성격, 종교, 학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지, 성실한지’를 살펴보라고 조언합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3년간 같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4학년 2반, 5학년 1반, 6학년 3반이었는데 선생님이 저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담임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어린 제게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전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때로는 엄하셨지만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저도 교사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릴 때 사촌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습니다. 형님이 입은 군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소위 계급장도 빛나보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통령도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군대의 조직과 문화가 사회의 조직과 문화를 선도하던 시대였습니다. 운명처럼 제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는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입으시는 수단과 제의도 멋져 보였습니다. 구교우 집안으로 부모님의 후원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큰 고민 없이 신학교를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 지내는 것에는 ‘교사와 군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교사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조직과 규율을 따라야 하는 것은 군인의 모습입니다. 사제가 되면서 저는 교사의 역할도, 군인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이렇게 말하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지내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그릇된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르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싸가지’가 없다고 야단치셨습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4가지의 마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권력을 갖고, 재물이 많아도 4가지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답게 사는 기준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였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마라.” 악의 유혹은 교만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부자였던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우리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눌 수 있었던 자캐오는 존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신앙인인 우리는 ‘희생, 겸손,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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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실리아 블리스데일이라는 여성이 딸 그레이스의 결혼식을 앞두고 런던의 쇼핑몰에서 77달러짜리 드레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결혼식에 입을 생각으로 사진을 딸에게 보내 의견을 물은 것이지요. 그런데 딸 그레이스와 예비 사위 카이는 사진 속 드레스 색깔에 대한 의견이 달랐습니다. 딸은 파란색-검은색 드레스라고 했고, 사위는 흰색-금색 드레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이 본 색이 맞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에게 어떤 색깔로 보이느냐고 의견을 구했습니다. 이 색깔 논쟁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래픽 편집 회사인 어도비사에서 ‘파란색-검은색’이 맞다고 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흰색-금색’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우리의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내면의 현실은 외부 세계가 모종의 방식으로 재현된 것이며, 외부 현실의 복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내부 모형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도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색깔까지 확인했다고 해도 틀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나는 맞고, 너는 틀렸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겸손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직접 듣고, 직접 본 것도 틀릴 수 있는데,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어떻게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도 ‘겸손’을 담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겸손은 과연 어디에 있나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많은 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고, 이에 대한 표징으로 각종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어도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이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큰 죄인이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주민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둘은 정치적으로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로데 당원은 철저히 로마의 편이어서 주민세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고, 바리사이는 민족주의자이기에 주민세를 거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맞춥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이 됩니다. 즉, 주민세를 내라고 하면 하느님을 버리라는 것이라며 따질 수 있고, 주민세를 내지 말라고 하면 반로마 반란자라는 죄목을 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하느님께 해야 할 일이 있고, 국가 권력자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는 것입니다. 철저한 겸손으로 서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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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어. 단, 다시 일어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야(영화, ‘밤비,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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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
저는 강론을 묵상할 때는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 제목입니다. 제목을 정한후 강론을 쓰며 후에 제목을 정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이 강론 제목 역시 참 많이 반복했던 주제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음을 새삼, 삶은 반복이란 진리를 깨닫습니다.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날로 내적으로 깊어지는 깨달음의 반복입니다.
바로 윗 제목에 그대로 해당되는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시고 성인들이고 살아 계신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정말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동하시는 모습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사적인 삶은 전혀 없고 완전히 공개된 공인의 삶입니다. 쉴 시간이 거의 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만납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는 바, 목자로서의 하느님 스타일의 삶입니다. 바로 친밀함(closeness), 온유함(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 하느님의 스타일이라 하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지난 5월27일 교황님은 이탈리아 공영방송 TV에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세상 상황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 있었고, 교황님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세계 평화에 관한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전쟁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평화와 함께 여러분은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일것이나 얻는 것이 있다. 반면 전쟁과 더불어 너는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것을!(영어 ‘Everthing!’로 강조된 표현이 강력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위 얻는 것들은 잃은 것들뿐이다(gains are losses).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세계 2차 대전에 앞서 라디오 메시지에서 말씀하셨다. ‘어느 것도 평화와 함께 할 때는 잃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쟁과 더불어 사라진다.’”
평범하나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백배 낫다합니다. 인간 역사만큼이나 깊은 전쟁의 역사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나 늘 전쟁과 함께 살았던 역설적 인간존재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쟁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그대로 압축 요약된 전쟁입니다.
교황님의 6월 기도지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황님은 “고문의 공포를 멈추십시오,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고문은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역사의 일부입니다.” 말씀하시며 고문 폐지를 위해 기도할 것을 청하십니다. 유엔은 6월26일을 세계 고문 희생자 지원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이 말하는 것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영적전쟁의 삶이라 규정했고, 자신을 주님의 전사 즉,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라 했고 이것은 제가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정말 죽어야 끝나는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이고, 우리는 주님의 영적전우에, 영적전우애를 지니게 됩니다. 영적전쟁 승리의 본보기가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 공통 찬미가는 늘 불러도 감동입니다.
“하느님 위해 싸워 승리한 용사. 그 몫의 월계관을 씌우신 주여.
순교자 우러르며 기리는 우리,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소서.”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을 보면서도, “아 예수님의 삶이 참 고달프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적대자들의 공격속에 살아가는 영적전쟁의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어야 휴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인들은 놀랍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성무일도시 계응송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마음 바른 사람들아 춤추며 기뻐하라.”
바로 지옥같은 세상속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수님이요 그 후예들인 성인들입니다. 이어 더불어 생각나는 응송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기쁨이시도다.”
하느님을 나의 힘, 나의 기쁨으로 삼아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내적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에게 분별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오늘 주님의 양자택일의 곤궁한 처지에서 그 분별의 천상적 지혜가 빛납니다. 적대자들은 주님을 한껏 부풀린후 양자택일의 답을 요구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이어지는 대화가 참 통쾌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이런 침착하고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지혜로운 처신은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삶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신의 한 수’ 같은 답변에 이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합니다. 예수님께 크게 한 수, 지혜를 배우는 적대자들입니다. 혹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 스스로 분별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바치고 안바치고는 너희들이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에 앞서, 하느님의 모습이 각인된 존엄한 품위의 너희들이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지혜로이 스스로 판단하여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를, 서로가 사는 ‘상생相生의 승리(win-win)’를 상징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는 의인의 시련을 말해줍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런 인내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어 참으로 주님의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안나의 도전적 유혹의 말이 토빗에게는 아팠을 것이나 토빗은 이를 너끈히 통과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일면 타당한 듯 보이지만 악마의 간교한 질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물음도 우리에게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 왜?, 왜?, 이렇게 충실히 살아왔는데 하느님은 왜 이런 불행을, 고통의 병고를 주셨느냐는 등 끝없는 질문입니다. 무수한 미사예물의 다양한 지향들을 보면 기도는 간절해질수 뿐이 없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미사참례 하면서 예쁘게 살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꿈처럼 떠난, 도저히 실감이 가지 않는 스테파노-비비안나 부부를 생각하면 정말 하느님이 이해불가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이자 시련입니다. 암투병하던 비비안나 자매는 2월에, 요양원에 있던 스테파노는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두분의 연미사를 신심깊은 도미니카 자매님이 봉헌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지혜와 믿음과 용기로, 온갖 유혹을 통과하여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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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바다는 짭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짠 바다 안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회 좋아하십니까? 회가 짠가요? 아니면 짜지 않은가요? 분명 회는 짜지 않습니다.
바다는 짠데 왜 물고기는 짜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물고기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닷속에서 물고기가 죽는다면 그 물고기는 부패하고 몸은 점점 짠물로 절여질 것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짠 물에서도 짜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우리의 영혼을 해치거나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가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생명을 유지하며 짜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세상이라는 바다에 살면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야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력은 하느님이 주신 것인데 그중에서도 몇 가지를 뽑자면 사랑하는 마음, 양심,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마음들을 잃어버리면 우리 안에 죽음의 짠 내가 들어차기 시작한 것일 것입니다. 사랑할 줄 모르고, 또 무엇이 바른 것이고 선한 것인지 모르고, 또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말입니다. 꼭 죽어버린 물고기처럼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니게 돼 버리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하느님의 것은 바른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사랑하고 또 죄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이 쓰시도록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우리의 자선과 사랑을 통해서 말입니다.
길이란
길을 걷다 보면 얻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길은 다니면 다닐수록 짧아지는 마법 같은 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처음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 처음 가는 길을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그다음 날도 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짧아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실제로 길이 짧아 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영적인 길도, 기도의 길도 같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 걷는 길은 멀게 느껴지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걷다 보면 그 길이 짧아져서 조금 더 걷고 싶다는 기분마저 들게 됩니다.
그렇게 영적인 길고, 기도의 길에 맛 들여가는 것 아닐까요.
포기하지 말고 걸어보세요.
우리의 길도, 우리의 기도의 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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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너의 것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너는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하느님께
나의 것은
네가 아니라
나에게
나는
너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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