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음악과 술을 좋아하는 노신사가 오랜 해외 생활 이후 우리 전통을 찾아 한옥을 지은 지 십수 년. 세월이 켜켜이 쌓이며 이젠 자연의 일부가 된 집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대문에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모습. 차분한 정원과 기단 주위를 돌로 두른 경계, 팔작지붕 합각에 새겨진 그림 등이 조화를 이룬다.
집은 캐나다산 홍송을 구조목으로 하여 견고하게 지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공적인 성격의 응접실은 우물마루 방식으로 바닥을 짜고 난방은 벽난로와 라디에이터로 대응한다.
1세대 펀드매니저인 건축주는 젊은 시절 국제금융 관련 일을 하며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런던, 파리, 제네바 등 유럽의 근사한 도시에서 머물면서 배운 건 업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선 100년, 200년 된 건물을 박제하고 모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살며 집과 함께 나이 들어감이 자연스러운 일상임을 목격했다. 동시에 그것이 곧 전통이고,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에서 느꼈던 감회는 2005년 귀국한 이후까지 이어졌고, 한국의 전통주거이자 유년기를 함께 한 공간인 한옥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옮겨갔다. 서울 북촌 근처를 다니며 수년 간 오래된 한옥을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지금의 땅을 보고,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 당일 바로 계약까지 마치고 집짓기에 착수했다.
양평의 매곡산과 벽계천이 포근히 집을 감싸고 있는 형국. 본채는 팔작지붕, 별채는 맞배지붕으로 위계를 달리 하고 ㄱ자 배치로 구성하였다.
대지의 규모에 비해 집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대신 마당과 텃밭, 계곡과 면한 야외 공간이 집과 잘 어울리도록 축대를 쌓아 경사지를 세 개의 단으로 경계를 나누었다. 한옥과 바로 면한 마당에는 잔디를 깐 후 주변으로 낮은 관목을 배치해 집의 운치를 돋우고, 텃밭에는 노동과 수확의 기쁨을 줄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다. 계곡 가까이에는 오감으로 자연을 만끽할 정자와 벤치를 두고 이 공간들을 하나로 엮어줄 부드러운 곡선의 오솔길을 한 편에 내었다.
축대는 조경석을 엇물리게 쌓아 기능과 미학 모두 살렸다. / 추녀 끝 풍경 아래에 선 건축주
앞마당에서 텃밭, 계곡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바닥에는 불규칙적인 형태의 판석을 깔았다.
본채는 상시 거주용이 아니라 여름 별장처럼 쓸 요량으로 딱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과도하게 호화롭지 않도록 했다. 본질을 훼손한 화려함은 보기 흉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은 27평 내외로 응접실과 주방, 온돌방 한 칸을 나란히 배치해 일자형 한옥의 단순하고 전통적인 구성을 따르고, 손님용 게스트룸은 별채에 마련했다.
대신 원하는 부분에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예술을 애호하는 건축주가 편안히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한옥에 비해 응접실의 층고를 약 60cm가량 더 높여 지어 음향이 풍부하다. 가끔은 창을 하는 소리꾼이나 오페라를 하는 성악가를 초청해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와편 담장을 곡선 형태로 구성해 대문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초입을 꾸몄다.
계곡 옆에 자리한 정자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 재래식 공법으로 지어졌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든다고.
집 앞을 흐르는 벽계천은 벽계구곡이라고도 불리는 계곡으로 바위들이 유속을 줄여주어 시끄럽지 않게 흐른다.
한옥이지만 주방과 화장실은 현대적으로 꾸려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방에는 수납장처럼 보이는 한식 미닫이문 뒤로 별도의 미니 서재와 반침을 숨겨뒀다. 주방 앞 툇마루는 손님들과 술 한잔 기울이기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빗소리, 바람에 이는 풍경 소리, 논에서 우는 맹꽁이 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사실, 전원에서 이렇게 지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돈과 시간, 그리고 몸에 밴 삶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지요. 저 역시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왔지만, 분명히 남들에게 마음 편하게 권유하기는 어렵습니다.”
흥과 멋, 풍류를 아는 삶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서 되는 것만은 아닐 터, 그 뒷받침이 없다면 어려운 것이라고 건축주는 솔직하게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안팎으로 한식창호를 달아 고유의 멋을 살리고 주방과 통하는 실내 문과는 별개로 툇마루 쪽으로 향하는 문을 따로 내어 동선의 자유도를 높였다.
넉넉한 크기의 온돌방은 앉아서도 열 수 있되, 바닥까지는 닿지 않는 높이의 미닫이문을 설치했다.
단촐하게 꾸려진 주방. 천장의 우물 반자와 모서리 부분의 선자연이 한옥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 수납 공간인 것처럼 보이는 문을 열면 미니 서재나 파우더룸으로 쓸 수 있는 여유로운 깊이의 공간이 나타난다.
“투자 개념으로 집을 보는 시선이 가끔 안타깝습니다. 이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삶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공간을 집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되면 좋을 텐데, ‘평당 얼마’로 가치가 매겨지는 순간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생기고 실망이 커지기 마련이죠.”
운외몽중(雲外夢中) 추사 김정희가 쓴 서첩에 담긴 글귀로 ‘구름 밖에 구름, 꿈 속의 꿈’ 이라는 뜻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잠시 속세를 잊고 자연을 벗 삼는 한때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현판에 새겼다.
세면대까지는 건식으로 바닥을 구성했다. 가벽 너머에는 샤워실이 자리한다.
응접실 마루 바닥을 들어올리면 지하층으로 이어지는 비밀 계단이 나온다. 지하는 여름에도 서늘해 와인셀러나 창고로 쓰기에 제격이다.
퇴직 후 인생을 갈무리하는 시점에 서 있는 건축주는 이 집에서의 십수 년간 추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새로운 주인이 집의 온기를 이어가길 소망한다. 이번 생에 태어나 잠시 빌려 온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준비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집의 가치를 알아주는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되면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사회적으로 좋은 일에 쓸 계획이라고 전한다.
정성스레 집을 지은 후 깨끗하게 사용한 뒤 새로운 사람에게 다음을 부탁하고, 이를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일. 집과 새롭게 인연을 맺는 것만큼 중요한 건 멋지게 이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