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전기 68.지석영
인기멤버
hanjy9713
2024.06.15. 15:32조회 2
댓글 0URL 복사
68.지석영:
자 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본관 충주(忠州). 서울 출생.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그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귀국,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種痘場)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 그해 9월 전라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에 따라 전주(全州)에서, 이듬해에는 공주(公州)에서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33) 동래부사를 지냈고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 그 후 10년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1905) 6개조를 상소,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카페 공유수0
공유
클린봇이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