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훈
1901년(1세)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珽)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우섭, 원섭, 명성)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 이름은 대섭(大燮), 호는 해풍(海風), 필명은 훈(熏).
아버지는 온로보통학교 교장, 신북면장 역임했다.
큰형 우섭은 희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와 경성방송국 과장 역임했다. 작은형 명섭은 동경 청신학원 졸업생으로 심훈의 미완성 소설 「불사조」를 완성했고,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했다.
1915년(16세)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입학하다.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박헌형 등이 동기생이다.
1917년(18세)
전주 이씨 해영(海暎)과 결혼했다.
일본인 수학 선생의 민족차별에 대한 항거로 백지 답안 제출로 낙제, 유급당했다.
1919년(20세, 4학년)
3·1운동에 참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학생 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 투옥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았다.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종결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11월 6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이미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1920년(21세)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 배움.
1921년 항주로 가서 지강(芝江)대학교 극문학과에 재입학했으나 1922년 중퇴했다.
베이징에서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감회를 받았다.
1923년(24세)
중국에서 돌아와 최승일, 이경손, 김영팔, 임남산, 안석주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연극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려는 의도였다.
1924년(25세)
이해영과 이혼.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번안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 번안을 맡았다.
1925년(26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의 후반부를 대역했다.
1926년(27세)
필명 ‘훈’으로『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26년(27세)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 사건으로『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
철필구락부는 1924년 11월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만든 언론운동단체.
(1925년 4월 무명회(無明會) 언론운동단체와 공동으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5월 『조선일보』『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임금인상 투쟁으로
신문사 경영진의 비위를 거슬렀다.
1926년 일제의 언론 탄압에 항의하여 언론 옹호 연설회를 개최했다.
4월 26일 순종(융희황제)이 서거하자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고종의 서거가 3·1운동의 한 계기) 5월 16일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를 게재해 6·10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27년(28세)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고,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주연, 감독(제작사 계림영화협회) 10월 26일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11월 22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만났는데,
고문과 병으로 몰골이 상한 동창생의 얼굴을 보고 분노해 「박군의 얼굴」을 썼다.
1928년(29세)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중외일보』, 7. 11∼28) 등의 평론 발표했다.
1930년(31세)
3월 1일 시작품 「그날이 오면」 집필.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으로 중단되었다. 12월 24일 안정옥(安貞玉)과 재혼.
1931년(32세)
『조선일보』 사직.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으로 잠시 일하다가 사상문제로 그만두었다.
8월부터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으로 중단되었다.
1932년(33세)
부모가 살고 있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해 창작 생활에 정진했다.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무산되었다.
1933년(34세)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를 집필해 7월 10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 『중앙』 창간호 편집을 맡았다.
1934년(35세)
1월 『조선중앙일보』학예부장 사임.
장편소설 「직녀성(織女星)」을 3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당진에 ‘필경사(筆耕舍)’라는 자택을 짓고 「상록수」의 집필에 매진했다.
1935년(36세)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창간 15주년을 맞아 장편소설을 공모하자
「상록수」를 응모해 당선되었다.
당시 부곡리에서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이 농촌 야학 운동을 운영하며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12명의 젊은이들이 공동경작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높게 평가해,
1935년 1월 경기도 반월면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펴다 요절한 최용신(崔容信)의 이야기를 연결해 완성한 작품이었다.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상금 500원 중 100원을 기부하여 상록학원(현 상록초등학교의 모체)을 설립해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도왔다.
1936년(37세)
1월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신동아』)를 발표했다.
8월 16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감격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마지막 글로 남겼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상경해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서 침식하며 집필에 몰두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렸다.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36세로 타계했다.
200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