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6】
1910년대 면사무소의 설치와 면장,면서기의 등장도 농촌 사회에서의 마을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독부는 마을에 이장을 두어 각 마을을 면사무소 밑의 행정단위로 종속시켜갔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농촌의 중견 인물 양성을 통해 각 마을의 전통적인 리더를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리더들로 교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비록 이와 같은 사업이 충분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농촌 마을의 기존 질서를 흔들어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말 전시 총동원체제하에서 국력총력조선연맹 등의 말단조직인 부략연맹과 애국반을 마을에 만들었다.
이는 마을을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국가권력에 확실히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권력의 의지는 이제 마을 단위에서까지 강력히 관철될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이 찾아왔지만 마을 공동체의 질서를 다시 전처럼 복원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후반의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내외로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신분의식의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마을 내에서의 신분에 기초한 위계질서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게 되었으며,마을 내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토지개혁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지주층의 힘도 크게 약해졌다.
그런 가운데 중앙정치에서의 좌우의 분화는 마을에꺄지 영향을 미쳤다.
마을 내부,마을 간에 좌익과 우익으로서의 분화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주로 마을의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그들이 지닌 영향력으로 인해 마을 구성원들도 서서히 분화되어갔다.
좌우의 분화는 현실 속에서는 좌익단체와 우익단체의 조직 혹은 참여로 나타났다.
특히 좌우익 청년단체의 등장은 젊은 층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앙정치에서의 좌우 대립은 마을 내부에서의 좌우 대립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1948년 남북에는 각각 우파와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농촌 마을에서의 좌익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우익 세력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국가권력은 다시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를 통해 마을에 관철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의 마을들은 다시 요동치게 되었다.
좌익 세력이 다시 부활하고,우익 세력은 큰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민군은 북에서 내려온 정치보위부를 중심으로 점령지를 통치했다.
그들은 면 단위에 내무서를 두고,각 마을에는 인민위원회,자위대,
농민위원회,생산유격대 등을 만들게 했다.
또 민청,부녀동맹 등도 만들게 했다.
여기에는 대부분 하층민들이 많이 참여했다.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들 포섭하는 전술이 대개 무식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들,이런 사람들을 포섭하더라고"
또 다른 증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사람을 시켰지.그래야 말을 잘 들으니"
북한 정권도 남한 지역의 통치에서 마을 단위까지의 권력의 침투를 대단히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한 정권도 전쟁 이전에 이장,
국민회,청년단 등을 통해 마을 단위까지 권력을 침투시키고자 했지만,북한 정권의 경우에는 더욱 철저히 마을을 장악하려 했다.
북한 정권은 각 마을의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고,특히 토지개혁을 통해 마을 주민들의 경제기반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려 했다.
인민재판도 마을의 기존 질서를 철저히 해체시키려는 또 하나의 장치였다.
9.28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각 마을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을의 하층민들을 동원했다.
인민군이 패퇴한 이후 들어온 국군과 경찰 또한 마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각 마을에서 인민군에 협조한 세력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처단하고자 했다.
각 마을에는 역시 치안대 혹은 청년단이 조직되어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경찰에 넘기거나 경찰의 묵인하에 직접 처단했다.
이로써 각 마을에는 좌든 우든 지도적인 역할,혹은 적극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들이 대부분 희생되었다.
결국 전쟁 이후 마을은 요행히 살아남은 우익인물들에 의해 지도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제 더 이상 마을 주민들의 존경심에 기초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국가권력에 의지하여 마을을 지도하는 위치에 섰을 뿐이었다.
물론 동족마을이나 전쟁기에 서로를 감싸 희생이 크지 않았던 마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 마을의 경우에는 과거의 공동체적 성격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전쟁의 상처는 컸다.
그리고 전후 마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의 강도는 훨씬 더 강해졌다.
면사무소의 이장을 통한 개입,경찰지서의 우익청년단을 통한 마을에 대한 감시는 훨씬 강화되었다.
박찬승 지음,돌베개 출판
<마을로 간 한국전쟁>에서 요약한 글입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