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102]애일당愛日堂과 효도론孝道論 단상
귀향한 지 햇수로 5년째, 7월이면 만 4년이 된다. 내 고향에서 여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야 서울생활 40여년 동안의 오랜 꿈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새삼스럽다. 세월이 유수流水라더니 진짜다. 본채의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이라 정하고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받아 새겨서 내려올 때만 해도, 그 이름 그 자체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효자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현관과 거실에 걸어놓은 당호를 볼 때마다 불효자임을 인정하고 한없이 면구스럽다.
예전엔 ‘긴 병에 효자없다’고 했지만, 요즘엔 ‘장수長壽에 효자없다’는 말이 맞을 것같다. 얼마 전 전주의 한 친구가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친구 등 주변에 전혀 알리지 않고, 발인 후에야 소식을 전해 왔다. 그 친구가 ‘백수白壽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며 극진하고 모셨는지를 우리는 익히 들어 문상을 하고 싶었는데, 조금은 유감스러웠다. 반면교사反面敎師임을 생각하며 애일당 편액을 올려다본다.
당초 본채 당호를 ‘애일당’으로 정한 것은, 경북 안동에 있는 농암 이현보(1467-1555) 종택의 '애일당'을 흉내낸 것이다<사진>. 농암 선생은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의 ‘상지부모지년 즉기희기수우구기쇠 이어애일지성 자유불능이자(常知父母之年 則旣喜其壽又懼其衰 而於愛日之誠 自有不能已者: 부모의 연세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장수를 하면 기쁜 일이지만, 또한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가는 것이 두렵다. 그러하니 하루하루가 가는 것을 아끼고 아까워하며 효도하는 정성을 그치면 안된다)에서 따왔으리라. 이른바 '애일지성愛日之誠: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날짜가 적음을 안타까워하여 하루라도 더 정성껏 봉양하려고 노력하는 정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이다. 선생은 칠순의 나이에도 어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서 ‘애일효자’라 불렸다한다. 또한 구순의 아버지 등 아홉 노인을 위해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명절이나 생신때 잔치를 열어드렸다고 한다. 잔치 그림이 <애일당 구경첩>에 실리자 당대 명현 47명이 축시를 보내고, 선조임금은 <積善>이라는 글씨를 하사했다<사진>.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한데, 현대인들이 어찌 100분의 1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마음자세도 갖지 못한 채 당호를 하늘만큼 높은 당호를 지은 불효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도포기도 할 수 없고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아무튼, 설 직후 사촌동생이 조카 세 명을 데리고 큰아버지께 세배를 왔다. 당질堂姪들이 큰할아버지께 세배할 것은 당연한 일. 거실의 당호를 보더니 저희끼리 ‘사랑 애’ ‘날 일’자는 안다는 듯, ‘하루하루를 사랑하라’는 뜻이라고 얘기를 한다. 다 큰 조카들에게 복돈 1만원씩을 주면서 얘기했다. “이때의 ‘애’자는 '사랑하다'로 해석하면 안되고 ‘아까워하다’ ‘안타깝다’로 풀이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가면 부모님이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올 것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아껴야 한다’거나 ‘하루하루 세월이 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으뜸효자인 농암 이현보가 ‘애일당’ 편액을 걸어놓고 90세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는 데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설명을 하면서도, 그 뜻대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는 나는 참 곤혹스러웠다.
아직까지는 아버지가 보행이 가능하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노치원老稚院’에 다니니, 모신다고 할 것도 없다. 겨우 일요일 세 끼를 차려 드리는데, 워낙 소탈하고 무엇이든 잘 드시니 어려울 것은 ‘1’도 없는데도, 나대로 불평불만이 많으니 이 노릇을 어이 하랴. 아무리 부자父子라 해도 ‘습習(습성, 습관)’이 다른 채 일상을 지내다보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스트레스를 솔찬히 받는다. 평생을 극도의 근검절약으로 사신 것이 몸에 배인 때문에 ‘소비가 미덕’ 어쩌고하며 전기나 물을 아끼지 못하는 아들을 보면 한심할 것이 아니겠는가. 여름철에는 해가 긴 지라 노치원에서 돌아오면 캄캄할 때까지 일을 하는데, 자식 입장에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겨울에는 기름보일러를 툭하면 끄곤 해 곤혹스럽다. “일을 해도 좋은데 해가 저물면 들어오시라” “기름값은 아무것도 아니니 제발 보일러 끄지 마시라”해도 한 귀로 흘린다. 정말 건강하시니 복 받았다 해야 할 것이나, 시력까지 좋으셔 전등을 환하게 켜지도 않은 채 돋보기를 쓰지 않고도 신문의 잔글씨까지 어둑한 데서 잘도 읽으신다. 좋은 일이긴 한데,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면 짜증이 나는 건 아무래도 내가 못돼서일 듯. 불을 켜고 읽으시라고 아들 딸 며느리가 번갈아 말을 하건만 오불관언이니 어찌 미웁지 않겠는가. 우리가 아버지처럼 굴 속에 살고, 겨울철 춥게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꼭 돈 때문도 아니지만 한번 몸에 밴 습관은 이렇게 고치기 어려운가 보다. 하기야, 우리 부모세대들의 근검절약이 우리나라를 고도성장국가로 만들기도 했을 터이니, 되레 고마워해야 할 일인 것을.
아내와 나는 “10년 공덕을 쌓아야 월말부부가 가능하다”며 우스갯말을 하지만, 우리가 함께해야 할 ‘노후老後 생활’이 언제나 가능할지를 생각하면, 때로는 막막해지곤 한다. 세상에 어느 며느리가 97세 시아버지를 봉양코자 시골에 남편을 따라 내려온단 말인가. 더구나 도회지 생업이 아직은 5, 6년 남아 있기에, 여지껏 내려와달라는 말을 한번도 꺼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간청’은 할 수 없는 일. 그저 ‘(현명한)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하지만 60대에 떨어져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아내의 ‘장기부재’가 갈수록 외롭고 불편하다.
문제는 아버지가 크게 아프시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며, 당신이 터잡고 90년을 산 고향집에서 자연사自然死를 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그게 어디 인력으로 되는 일인가 말이다. 나의 업보려니 하고 마음을 거듭 다잡지만, 부자간에 실은 별 할 얘기가 없는 것도 문제이다. 아버지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를 얘기할 것인가. 얘기해본들, 귀도 상당히 어둡고 가치관도 크게 다르니 소통이 안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그저 안위安慰만을 살필 뿐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이란 좋은 말도 실천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진실로 어려운 일임을 금세 알게 된다. 하루에 다 합해 몇 분이나 얘기할 것인가. 잘 주무셨어요? 이것도 들어보세요, 편안히 주무세요,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오셨어요, 동네 누구는 이렇다네요, 이모와 작은엄마로부터 안부전화 왔어요, 에미가 오늘 내려온다네요, 등등이 고작일 뿐이니 10분도 되지 않을 터.
당신이라고 얘기할 친구가 주변에 어디 있겠는가. 1920년생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동갑친구들이 20여년 전에 죽으니 소통할 친구들이 없는 게 가장 '죽을 맛'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저 시간이 가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시간을 죽이는 게'(말이 좋아서 킬링 타임이다) 일이니(즐겨보는 게 책이긴 하지만, 책이나 텔레비전이 재미 있으니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을 날마다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저 안쓰럽고 짜안하여 연민이 앞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얼마 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가 인터뷰에서 병을 끼고 사는 팔순의 어머니를 “2년 안에 너끈히 보내드릴 수 있겠다싶어 구례 고향집에 내려왔는데, 11년째 건강하게 사셔 상경도 못하고 발목이 잡혔다”고 해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이러다 자칫 하늘같은 아버지가 나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효孝 백행지원百行之源>이라고? 효도孝道? 효자孝子라니? 어림 반푼없는 소리다. 아내가 말한다. "당신 아버지 돌아가시면 얼마나 울려고 그래? 살아계실 때 잘 하셔. 정철의 시조도 몰라?"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장수는 축복인가? 불행인가?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지 모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