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냄새로 가득한 삶 (요 12:1-3)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시간에 “향유 냄새로 가득한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향유란 성경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향유는 성전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항상 향유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향유 냄새로 가득한 삶이란 마리아가 예수를 위해 향유를 부었듯 우리가 성전되고 제사장이 되어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했고, 롬14:8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했습니다.
살전5:16-18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히13:15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지만 천국과 똑같이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날마다 경외하고 살아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에 발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찬송처럼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형제가 그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4km 지점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지명이 ‘고난의 집, 가난한 집’이라는 뜻이듯 그곳은 사회에서 격리된 버림받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마리아의 가족이 살았다면 그들의 형편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잔치한 집도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시몬의 집입니다. 나병 환자촌입니다. 지금은 한낱 피부병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서는 사회에서 격리되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런 비천한 곳에 예수님께서 손수 찾아오실 뿐 아니라 죽어가는 시몬을 나병에서 살려주시고 또 죽어 냄새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시몬의 집에 함께 모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여기에 귀한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우리들을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 아니라 나를 살리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는 바로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우리들을 예표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지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주를 위한 삶이 가능합니다. 롬5:7-8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성경을 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좋고 찬송도 좋지만 성경이 우리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라 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곁에 두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1:1-2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했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내어 성경을 보지 않고는 향유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2. 예배하는 삶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시몬의 집에서 여럿이 모여 잔치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Here a dinner was given in Jesus honor.”(이 만찬은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며 배설한 것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 절 요11:57을 보면 당시 상황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잡아서 처단하고자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던 서슬 퍼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위해 잔치하다가는 공범자로 몰려서 함께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면서 잔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숨 걸고 예수를 위해서 잔치했습니다. 이처럼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깨달았다면 어떤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올인하시기 바랍니다.
올인(All-In)은 카드 게임용어로 “모든 것을 다 건다.”라는 뜻입니다. 즉 전부를 걸고 게임에서 이기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가져오고, 반대로 지면 모든 것을 털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찬송하다 살든지 죽든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라는 것입니다.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다니엘처럼 감사하고 기도하며 예배하기를 쉬지 않은 것처럼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황수관 박사가 웃다가 성공했는데 웃어도 성공하는데 날마다 예배하면 천국으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가 기쁨으로 섬기지 못하도록 재를 뿌리고 물을 뿌리는 등 무안을 주고 간섭하고 때리고 온갖 시험을 하더라도 이겨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도하다가 매를 맞고 빌립보 옥중에 갇혔지만 그래도 찬양한 것처럼 그래야 승리합니다.
3. 예수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아주 귀중한 것을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나드(Nard)’향유는 인도산 식물 나드(Nard)의 뿌리에서 얻어지는 향으로 귀하고 비싸서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에 바쳐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만찬의 절정에 이르러서 주빈에게 향유를 부음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유대의 전통적 관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300일 품삯에 해당하는 향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 나드향은 신부가 신혼 초야를 위해 일생 준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큰 희생을 의미합니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최고의 존경을 의미합니다. 본래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종이 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거친 저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그 영광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돈 궤를 맡은 가룟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절) 책망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13절) 하셨습니다. 바로 이 겸손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나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살아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고후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 선교사로 일생을 마친 영국의 아프리카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16년간 아프리카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영국에 귀국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스물일곱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그 당시에도 아직 말라리아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연약한 몸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 팔은 그저 몸통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한 채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큰 빚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 그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받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겠습니까? 그것은 희생이 아니요, 특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구원 받고 죄 사함 받고 다시 살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감사한데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영원한 상급이 준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 은혜에 기대어 살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를 깨닫고 마리아처럼 예수를 위해 더 사랑하고 더 열심하고 더 희생하며 예수 향기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