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8章 대탈주(大脫走)
①
백보구절하(百步九絶河).
동정호로부터 이어진 그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광대한 갈대밭이
다.
아니, 갈대밭이라기보다 한 번 들어서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
는 죽음의 숲(死林)이다.
이 사림(死林)을 관통하며 하나의 물줄기(河口)가 흐르고 있다.
하구(河口)라기보다는 사구(砂丘)라고 해야 옳을, 이십여 장 폭으
로 흐르고 있는 이 물줄기의 이름이 바로 백보구절하였다.
츄와앗- 츄왁-!
백보구절하의 하구를 따라 한 척의 뗏목이 물결을 가르며 미끄러
져 내려오고 있었다.
지다무후 주아영 일행이었다.
지금 봉학쌍성자는 쉴새없이 뗏목의 양 편에서 죽대로 뗏목의 방
향을 조절하고 있었다.
주아영의 병약한 몸은 뗏목의 중앙에 눕혀져 있었고, 그녀의 몸
위로 달빛만 처량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때였다.
파아아아-!
하늘에 엄청난 사운을 뿌리며 떠 있는 사연들 중 하나가 밤하늘에
찬란한 성광(星光)을 흘려 내며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사연은 세 생로 중 또 하나의 생로를 차단하며 주위에
희뿌연 묵연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학성자가 침통한 음성을 뱉어 냈다.
"여섯 번째 구겁마연… 이제 두 개만 남은 셈이로군."
순간, 봉성자의 아름다운 눈이 안타까움을 담고 주아영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은가? 갈수록 천주의 상세가 심화되고
있으니…….'
그녀의 눈길은 가닥가닥 아픔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천주의 생명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형세임을 말해 주
는 것인데, 문제는 백팔구겁마연진이 아니라 천주의 병세야.'
봉성자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이 때였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주아영이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무서운 일이다."
그녀의 느닷없는 행동과 탄식에 사람들은 경악의 시선을 던졌다.
언제 천주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었던가?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천주가 아니던가!
"무슨 일입니까, 천주?"
주아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방을 쏘아보며 말했다.
"전방(前方)에 열여덟 줄기의 가공스런 마기(魔氣)가 도사리고 있
어요."
"전방에 마기가?"
"마기가 유난히 어둡고 음습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틀림없이 마
정(魔井)의 마인들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것이에요."
"마정!"
"마정이란 말입니까?"
모두의 얼굴에 참담한 절망의 빛이 피어 올랐다.
학성자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들 또한 하나의 거대한 진세(陣勢)를 이루며 백보구
절하의 사로(死路)를 또 한 번 차단한, 사중사(死中死)의 절진을
형성하고 있군요."
절진 속에 또 하나의 절진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에 그들 모두 입
조차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주아영이 나직하게 소리쳤다.
"후방에서도 무서운 마기가……!"
그녀의 이번 음성은 전번보다 놀람의 도를 더한 것이었다.
가늘게 몸을 떨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밀려 오는 마기는
더욱 가공할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천중구마역의 마정보다 더 가공할 마기를 뿌려 낼 수 있는
자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주아영의 떨리는 음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가공할 한과 저주가 담긴 열여섯 줄기의 마기와 요기……."
천하 재녀의 음성은 점점 절망으로 꺼져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스물여섯 줄기로 갈라지기도 하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마기! 아아, 구겁예황!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대체 어디서 이토록 무서운 인물들을……."
②
부슬… 부슬…….
야우(夜雨), 음산한 기운을 뿌리며 밤비가 황폐한 얼굴에 눈물을
적시듯 내리고 있었다.
그 속을 헤집는 파리한 음성.
"이제 한 시진만 더 버티면 조그만 희망의 빛은 건질 수 있을 거
예요."
허공을 넓게 두르며 거대한 원진을 이루고 있는 죽음의 연과, 음
산한 빗줄기가 어울리는 가공할 마기를 헤아리며 터뜨린 주아영의
음성이었다.
그런 그녀의 음성이 조그만 희망을 담고 흘렀다 싶을 바로 그 순
간.
콰아아아-!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며 무섭게 떨어져 내리는 물체(物體)가 있
었다.
사연이었다.
번쩍- 번쩌적-!
허공에 찬란한 성광(聖光)과 성우(聖雨)를 터뜨리며 껌껌한 흑야
(黑夜)를 반쪽으로 가르던 사연은 뗏목이 흘러 내려가고 있는 전
면의 하구에 하늘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리박혔
다.
스스스……!
스으으읏-!
일렁이는 핏빛과 피어나는 마운(魔雲)에 주위는 죽음의 짙은 향기
로 꽉 차 버렸다.
그에 따라 주아영의 창백하고 섬약한 얼굴이 조그만 변화를 보였
다.
"과연 구겁예황이야. 사중사에서 사중생으로 바꾸어 나가는 나의
행동을 미리 읽고 있었어. 그래서 동북의 생로를 차단할 구겁마연
을 미리 이 곳에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중얼거림은 담담했으나, 오히려 그 담담함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암울함이 깔려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의 사연은 분명 내가 가려고 했던 곳에 이미 준
비하고 있을 거야."
음성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잔잔했다.
"그 곳에 사연이 떨어지면 아수라백팔구겁마연진은 그 동안 안고
있던 미세한 허점마저 완전히 보완되어 나는 물론이고, 신이라 해
도 빠져 나갈 수 없어."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던 주아영의 눈빛이 문득 무한한 지혜의 빛
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래, 마지막 한 개의 구겁마연이 떨어지는 시간이 지체될 수만
있다면…….'
주아영이 한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학성자의 어두운 음성이 흘렀다.
"천주! 마정(魔井)의 십팔 마인(魔人)이 오백 장 거리까지 접근해
왔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봉성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방에 일단의 신비인들 역시 오백 장 이내로 접근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천
라지망에 갇혀 버린 셈이었다.
주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온 셈이에요."
"……."
"준비하세요."
"……?"
"이제 최소한의 희망을 만겁일심천벽진(萬劫一心天璧陣)에 걸 수
밖에 없어요."
그녀의 초연하면서도 담담한 음성에 여섯 사람은 경악과 회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세차게 몸을 떨었다.
"천주!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이론상의 진일 뿐입니다."
"구현천 역사상 누구도 완성시키지 못한 미완성의 진을……."
주아영은 그들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만겁일심천벽진?
?누구도 완성시키지 못한 미완성의 진
이에요."
"……."
"때문에 이 미완성의 진을 펼친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렸음일까? 주아영이 가녀린 몸을 정좌하고 앉
았다.
"그러나 진을 성공리에 펼칠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한 시진의
삶은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낮고 담담했으나, 그 말 속엔 확신과 신념이 담겨
있었다.
침묵에 잠긴 구현 사대호경과 봉학쌍성자의 귀에 주아영의 힘겨워
하는 음성이 계속 흘렀다.
"천하의 구겁예황일지라도 한 시진 이내엔 이 진을 파해할 수 없
고, 아수라백팔구겁마연진이 발진(發陣)한다 해도 한 시진 이내엔
이 진에 영향을 주지 못할 거예요."
말을 끝맺는 순간이었다. 주아영의 두 눈에서 신비로운 서기(瑞
氣)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 신비한 서기는 급격히 강해졌고, 그 파장을 빠르게 주변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스스스……!
신비로운 서기는 그녀의 두 눈의 초점이 모이는 곳에 하나로 합쳐
지더니, 불쑥불쑥 인간의 사지오관(四肢五關)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③
스스스……!
환상처럼 일어난 인체의 부분들은 빠르게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하
더니, 급기야는 한 사람의 완벽한 인간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불가사의 속에서 탄생된 사람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성스
럽고 고귀한 성자(聖者)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악할 일!
그러나 비단 놀라움은 이것에 그치지 않았다.
주아영의 두 눈이 또 다른 방위에 초점을 모으자, 그 속에서 또
한 명의 성자가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순간, 주아영의 전신에서는 비지땀이 홍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쉴새없이 경련이 일어났
다.
'아아, 천주께서는 지금 영력(靈力)으로 사람을 조각하고 계신
다.'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최소의 삶이라도 주기 위해 자신의 생을 버
리고 계시다!'
'어찌 우리들이 이대로 천주의 뜨거운 마음을 짓뭉갤 수 있단 말
인가?'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여섯 방위로 흩어져 정좌(正坐)를 했
다.
동시에 주아영이 말한 방법대로 영혼과 정신의 힘으로 자연의 공
간 속에 영력의 조각을 해 가기 시작했다.
잡념은 없다!
생사(生死)의 절망 따윈 도대체 찾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천주를 향한 뜨거운 충성의 소용돌이만 그들의 시선
에 쏘아져 나올 뿐이다.
그 소용돌이는 바로 서기였으며, 그 서기는 그들의 마음이 뜨거운
만큼 더욱 짙어졌다.
동시에 불쑥불쑥, 사방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영력의 성자들!
순식간에 그것은 수십, 수백 개의 환영(幻影)으로 불어나 주위를
가득 메워 갔다.
영력을 쏘아 내는 그들의 몸은 거의 탈진의 지경에 이른 듯, 갈대
잎처럼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먼저 그만두려 하지 않
았다.
천주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목숨쯤은……!
스으으으……!
서기 속에 또 불어나는 환영!
그에 따라 병악하기 이를 데 없는 주아영의 입가에 선혈이 배어
오르고, 그 선혈은 급기야 울컥울컥 샘솟듯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영력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이 구현천의 성자들은 비록 무공을 지니진 않았으나 천지만물의
생성 원리는 물론, 오묘한 우주의 섭리조차 마음껏 조정할 수 있
는 영력(靈力)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엄청난 영력을 이용해 하나
의 가공할 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늘도 혀를 내두를 엄청난 일이었다.
어쨌거나 불쑥불쑥 솟아난 환영성자(幻影聖者)는 어느 새 일천 개
가 형성되었고… 일천의 환영성자는 일정한 위치와 질서를 이루며
뗏목의 천지사방을 물샐틈없이 방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아니, 철통의 방어망을 구축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 아아아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환상의 소리가 파장을 일으키며 흘러 나오지
않는가?
곧이어 일천 환영성자들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주위에 오색운무
(五色雲霧)를 가득 뿌려 냈다.
스스스스……!
일시에 뗏목의 방원 십여 장의 어둠은 일시에 걷히고 대신 오색운
무로 완전히 가려진 상태가 되었다.
"우욱!"
그 속에서 주아영이 참담한 신음 소리와 함께 핏물을 쏟아 내고
전신을 세차게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
득 차 있었다.
"어려운 일이었어."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일까? 그녀의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절박한 상황의 몸부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나를 향한 뜨거
운 마음이 없었다면 이 진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거야."
봉성자의 무릎에 몸을 의지한 채 걱정과 근심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섯 사람을 둘러보는 그녀의 안색은 분명 잿빛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지혜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위대해요. 천 년의 구현천이 이루지 못했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신 분들이니까요."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침잠되면서 음성이 급격히 미약해졌다.
"잠이 와요. 아아, 잠을 자야겠어요."
어떻게 손쓸 틈도 없었다. 주아영은 빠르게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
다.
봉학쌍성자와 사대호경의 파리한 얼굴에 고통의 빛이 흘러 나왔
다.
'천주께선 한 시진의 삶을 위해 일 년의 생을 버리신 것이야.'
'천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들을 위해서…….'
'불쌍하신 천주…….'
그들의 가슴 속에 탄식이 불길처럼 피어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신비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지… 다… 무… 후… 주아영… 그대는… 잠을 자서는… 안 되느
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 음성은, 우주만물의 아름다운 소리가 하나
로 집약되어 흐르고, 어느 틈엔지 그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영혼을 뒤흔들어 깨우는 힘이 깃들여 있었다.
이 음성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빙심의 여인이 허물어지고, 심
지어는 하늘마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④
부르르……!
주아영은 깊은 꿈결로 빠져 가는 속에서 깨어났고, 봉학쌍성자와
구현천 사대호경은 재빨리 목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
렸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그들의 뗏목과 불과 일 장의 거리인 곳에 한 척의 일엽편주(一葉
片舟)가 유유히 떠 있었다.
사공 하나, 돛대 하나의 일엽편주.
사공은 그들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핏빛 혈의(血衣)에 구름처럼 흘러내린 흑발은 편주의 바닥까지 흘
러내려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흡사 아름다움의 신(神)이 인세에 현신하여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
"……."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다른 한편으로는 처절한 고독과
비정한 기운을 전신 가득 채우고 있는 신비의 흑발청년!
그를 보는 순간, 일곱 사람의 시선은 온통 경악으로 가득 찼다.
물론 그들이 가장 먼저 놀란 이유는 청년의 신비로운 기도 때문이
었지만, 그들을 진짜 놀라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구겁천의 천주인 구겁예황 모용하라도 한 시진은 족히 걸려야 뚫
을 수 있는 만겁일심천벽진을, 불과 촌각(寸刻)도 지나지 않아 한
척의 일엽편주를 타고 유유히 접근해 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수가……?"
"언제… 어떻게 저 자가 여기까지……?"
그들의 눈에 서린 불신의 빛은 더욱 짙게 충만되었다.
하기야 천 리(里) 밖의 공기의 흐름조차도 그들의 영력(靈力)으로
꿰뚫어볼 수 있는 초능(超能)의 힘을 지닌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내는, 그들이 영력을 최대로 돋우어 사방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고, 거기에 만겁일심천벽진까지 설치된 상태
인데… 그들은 흑발청년의 숨소리 하나 느끼지 못한 사이에 일 장
밖까지 접근해 왔으니, 그들의 경악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순간, 주아영은 지혜로 일렁이는 눈빛이 세찬 파문을 일으켰
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한 사람의 몸에서 각기 다른 열 가지의 상
이한 기운이 느껴지다니… 마치 열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구현천의 다른 성자들은 또 다른 전율에 가슴을 움츠렸다.
'인간의 몸에서 어찌 저토록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힘이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오오, 뒷모습만으로도 가슴이 허물어져 내리는 아름다움을 흘려
낸다.'
'그 속에 저습한 증오와 한과 고독의 기운은……?'
그 때였다. 다시 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흑발사내의 신비한
음성이 들려 왔다.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그대가 내게서 한 가지 들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지."
"……?"
주아영을 위시한 일곱 사람은 흠칫했다.
흑발청년의 신비한 음성 속에 싸늘한 증오가 깃들여 있음을 감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듣는다면 그저 담담하고 무심하
며, 오직 그 속에 아름다움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음성이 계속 흘렀다.
"아마 팔 년 전이었을 거요. 잔인하고 비정한 인간 사냥이 행해진
때는……."
"팔 년 전의 인간 사냥?"
일곱 사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악몽처럼 떠오르는 북경파월겁!
한 명의 살수지황을 추살하기 위한 정파군웅의 일대거사(一大擧
事)!
이 때, 청년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무려 일만에 달하는 정도무인들이 인간 사냥을 하며 즐겼던 쾌
감, 그 쾌감을 길이길이 보존하고자 세상은 그 때를 북경파월겁이
라 한다던가?"
그리고 청년은 마치 자신의 한을 되새김질하듯 낮고 묵직하며 분
노를 새긴 음성으로 그 때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
"……."
어떤 불안이 뭉실뭉실 피어 오르는 속에 구현천 칠성자들은 청년
의 말을 들으며 침묵만 고수했다.
"짐승들이라도 최소한 먹이를 위한 목적으로 살생을 하지만, 목적
없는 살생은 결코 하지 않는 법인데……."
"……."
"……."
"그 날의 정파무인들이 목적 없는 살인을 한 것을 기억하나, 그것
도 잔인하도록 무자비한……."
점점 흑발사내의 음성이 잠겨 들었다.
그 음성이 잠겨 듦에 따라 일곱 사람의 가슴엔 불안의 불길이 걷
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저 자는 누구기에 그 때의 일을 저토록 한과 증오를 씹어 내듯
이야기하는 것인가?'
⑤
그 때 주아영도 가슴에 불안이 넘실거리는 듯, 그 불안을 억제하
려는 듯한 음성을 흘려 냈다.
"그것은 틀린 말이에요. 그들도 고월회를 없애고 그들이 키우는
살수지황을 죽여 무림 평화를 지속시키려는 목적이 분명 있었던
거예요."
"……."
청년이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음풍세우(陰風細雨)에 축축하게 젖어
들은 청년의 흑발과, 그의 등에 우수수 부서져 내리는 전율스러운
무심함과, 가슴에 치미는 어떤 울분을 참아 내는 듯한 작은 떨림!
그 속에 확연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통째로 녹이는 분노의 불길!
그의 그런 섬뜩한 모습에 일곱 사람은 내심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이 때, 닫혀 있던 청년의 입술이 열리면서 더욱 무심해진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조작된 목적, 조작된 살인……."
"……?"
"……?"
"우스운 일이야. 천기를 마음대로 헤아리는 그대들이 그것을 몰랐
다니."
"조작된 살인과 조작된 목적이라니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내리는 거죠?"
"……."
청년은 다시 침묵했다. 침묵하고 있는 그의 등은 음풍세우에 더욱
서럽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침묵에 일곱 사람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데 잠시 침묵하던 청년이 주아영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 밤은 짧고, 그대들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짧지."
"……?"
"진실로 중요한 것은, 그대들 역시 북경파월겁의 그 인간 사냥에
참여했다는 사실이지."
"……."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이제부터 본인은 그대들을 놓고 그 때 그
대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인간 사냥을 하겠어."
부슬… 부슬…….
세우는 그의 긴 흑발을 적셔 내고, 그의 등은 소리 없는 통곡과
분노를 토했다.
'아아, 무서운 일이다. 저 무형의 기 속에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저
주의 기운으로 보아… 세상이 통째로 피로 씻겨도 부족할 것 같구
나.'
주아영을 비롯한 구현천 사람들은 청년의 모습에 다시 가슴이 짓
눌리는 듯한 불안과 전율을 느꼈다.
그 때, 청년의 음성이 다시 흘러 나왔다.
분명 분노와 증오가 가득 담겨진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는
주아영 등은 어이없게도 달콤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어. 그날의 인간 사냥 속에서 당신들에게 당한
한 소년의 처절한 분노와 증오와 원한을 느껴야 할 것이며, 본인
은 당신들의 한과 저주를 마시며 쾌감을 느끼게 될 것이야. 크핫
핫핫……!"
광소(狂笑),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광소였다.
그런데 천지사방을 일시에 조각내는 듯한 광소가 끝나는 순간이었
다.
⑥
파아앗-!
흑발청년의 전신에서 가공할 열 줄기의 기운이 폭출되었다.
콰콰콰콰쾅-!
미증유의 거력(巨力)이 실린 무형강기(無形 氣)는 만겁일심천벽
진의 핵부(核府)를 강타했고, 무형강기에 맞닥뜨린 핵부는 기이한
이음(異音)과 기향(奇香)을 내며 파스슥 타 들어갔다.
스스스스……!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시각에 만겁일심천벽진은 완전히 와
해되어 버린 듯, 주위에 가득했던 찬란한 오색운무(五色雲霧)가
형체도 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바로 그 때였다.
슈슈슈슉-!
반대편의 늪지에서 검은 그림자(黑影) 하나가 가공할 빠름으로 솟
구쳐 올랐다.
구현천의 일곱 성자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한순간에 허공으로 까
마득히 치솟은 검은 인영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구현천의 광자들이여! 그대들의 목은 본 마겁자(魔劫
者)가 접수하겠다!"
스스로 마겁자라고 소리친 흑의인의 쌍수(雙手)가 주아영 등을 향
해 뿌려졌다.
콰콰콰콰콰아아아-!
무섭도록 비쾌(飛快)하고 가공무쌍한 장력이 주아영 등에게 폭풍
처럼 휘몰아쳤다.
그 때였다. 흑발청년의 무심한 음성이 주아영 등의 귓속으로 전율
스럽게 파고들었다.
"저 마겁자는 백 년 전 마정(魔井)에 갇힌 일만의 마인들 중 팔백
칠십 명의 마공(魔功)을 연성한 마정의 십팔수라겁(十八修羅劫)
중의 하나지."
속삭이듯 핏빛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흑발청년의 아름다운 음성은
전율스럽게 구현천의 성자들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부르르……!
구현천 성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박살내려는 듯 덮쳐 드는 가공스
런 장력보다 흑발청년의 음성에 더욱 공포감을 느꼈다.
콰콰콰콰콰아아-!
바로 면전에 덮쳐 든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청년의 속삭임
이 전율스럽게 흘러들었다.
"막아라. 한 사람이 몸을 던져 살신성인(殺身成仁)한다면, 만겁자
는 본인이 처리해 주겠다."
청년의 조건을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마겁자가 격출한
가공할 장력은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니까.
누군가 그 장력을 책임지지 않으면 편주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몰살당할 판국인 것이다.
순간이었다.
"천주의 무사를……!"
구현천 사대호경 중 남천경(南天警)이 거대한 장력의 소용돌이에
몸을 내던졌다.
콰아- 꽝-!
마겁자의 장력은 여지없이 남천경의 몸을 강타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동시에 남천경의 몸이 형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혈육편(血肉片)
으로 난도분시(亂刀分屍)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바로 그 때, 구현천 성자들의 귓속으로 속삭이는 듯한 청년의 음
성이 들려 왔다.
"그래, 그렇게 죽어 갔다. 나를 사랑했던 그 모든 사람들이……."
순간, 사대호경 중 한 백발노파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으으, 저… 저 놈의 속삭임……."
그녀는 듣지 않겠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였다. 청년의 음성이 악마의 숨결처럼 허공에 짧게 울려 퍼
졌다.
"무노!"
순간, 엄청난 속도로 재차 뗏목을 향해 공격을 펼치던 마겁자가
돌연 처절한 단말마를 토해 냈다.
"끄아아악……!"
그와 동시에 그의 복부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어느 틈엔지 한 사람의 장발괴인(長髮怪人)이 마겁자의 복부에 손
을 쑤셔박고 있지 않는가?
대체 그가 누구기에 마정의 정예고수인 십팔수라겁의 일 인을 이
토록 손쉽게 해치워 버리는가?
무노!
긴 장발을 늘어뜨리고 있는 괴인은 다름 아닌 무노였다.
밤낮으로 휴식 없이 무공을 펼쳐야 했던, 십뇌기형겁의 실험인간
이었던 무노인 것이다.
⑦
이 때 무노가 마겁자를 바라보며 참으로 기상천외한 말을 중얼거
렸다.
"이것은…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분명 노부는 내 배를 긁었
을 뿐인데, 노부 손이 왜 네놈의 뱃속에 들어가 있느냐 말이다."
마겁자는 경악과 불신과, 충격이 가득한 눈을 하얗게 부릅뜨며 무
노를 바라보았다.
"끄으으으… 네놈은… 네놈은……?"
"내가 누구냐고?"
반문하는 무노의 표정은 멍청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몰라. 내가 누군지. 그보다 갑자기 내 머리가 어째서
이렇게 가렵지? 감은 지 백 년 밖에 안 되었는데……."
실로 엉뚱한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컥!"
콱-!
마겁자의 두개골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면서 허연 뇌수와 함께 핏
물을 뿌렸다.
무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노부는 분명 내 머리를 긁었는데, 어째서 이 놈의 머리통이 박살
난단 말인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노가 흑발청
년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주군(主君), 아예 막 긁어 버릴까요?"
청년은 주아영 등을 차갑게 노려보며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대
답했다.
"천천히……."
"크ㅋ… 그럼 노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스스슷-!
무노의 신형이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주아영 등은 경악과 전율과 공포로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주아영은 그제야 비로소
장발청년이 후방에서 느껴지던 마기의 근원지였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녀의 가슴은 갈가리 찢겨지는 듯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보살펴 준 남천경의 죽음 때문이
었다.
주아영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잔인한 자!"
그녀의 분노 섞인 음성에 혈의의 장발청년은 더욱 낮고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흘려 냈다.
"이 정도로 잔인하다고 말한다면, 팔 년 전의 그 때는 어떻게 표
현해야 하는 거지?"
"……."
"아직 멀었어. 잔인이란 말을 앞으로 수천 번은 더 되뇌었을 때,
비로소 잔인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돼!"
울분과 한이 응어리진 장발청년의 속삭이는 듯한 말을 듣는 순간,
주아영의 뇌리를 무섭게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팔 년 전? 그렇다면 저 자는… 살수지황?'
그녀의 전신에 세찬 진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슈슈슉-!
늪지의 갈대숲에서 가공할 마기를 뿌리는 세 사람이 솟구쳐 올랐
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