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양극화와 가치 소비의 확산으로 전통적 의미의 중가시장(Middle Market)에 대한 위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감성적 만족을 충족시켜 주는 프리미엄 제품 시장과 경제적 가치를 제공하는 저가 시장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중가 시장은 성장세가 위축되고 있다. 흔들리는 중가 브랜드의 생존 가능성을 살펴본다.
프리미엄 브랜드, 매스티지, 초저가 열풍. 지난 몇 년 새 소비 시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화두다. BCG 컨설팅그룹 부사장이자 <트레이딩 업>의 저자 마이클 실버스타인은 이제까지 주로 중가제품을 구입하던 중산층 소비가, 품질이나 감성적 만족을 위해 비싼 제품을 기꺼이 구매하는 트레이딩 업(Trading Up)과 실용성 위주의 구매인 트레이딩 다운(Trading Down)으로 양분될 것을 예견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 중간시장의 상징적 브랜드인 제너럴 모터스, 맥스웰 하우스, 갭 등의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 지난해 맥킨지 컨설팅 그룹이 발표한 유럽과 북미 지역의 25개 산업 및 제품군에 대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과거 10년간 시장에서 중간 가격대에 위치한 제품들의 성장률이 전체 시장 평균 성장률을 5.7% 정도 밑돌았다(<그림 1> 참조).
이에 중가시장에 대한 위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가시장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 때는 적당한 품질과 가격의 합리적 소비 대안으로서 시장의 주류를 차지했던 중가 시장이 이제는 침몰의 조짐을 보이면서 벗어나야 하는 시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중가시장의 정의
그런데 위기에 빠진 중가 시장은 과연 무엇인가?
소득 계층에 따른 소비가 지금보다 일관되게 나타났을 때에는, 대량의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스마켓(Mass Market)’을 중간 시장으로 간주하였다. 지금은 동질적인 거대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많이 희석되었고 ‘매스티지’나 ‘뉴 럭셔리’ 같은 이름으로 조금씩 모습이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중가 시장의 본질은 ‘대중성’에 있다. ‘뉴 럭셔리’라는 용어로 중가 시장의 트레이딩 업 현상을 설명했던 마이클 실버스타인은 뉴 럭셔리를 소득기준으로 상위 40% 정도의 가정이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라 구분해 놓았다. 몇 가지 예외는 존재하되 일반적으로 ‘브랜드가 있는 매스 마켓 제품’을 중가 시장의 제품으로 정의해 볼 수 있다. 중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중가 시장은 많이 위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많은 기업이 중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여전히 매력적인 규모
비록 성장이 둔화되고 심하게는 위축되기까지 하지만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가 시장은 여전히 가장 큰 시장이다. 고가나 저가 시장이 확대되고 있기는 하지만 소비라는 것이 소득과 전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양 시장의 성장에도 한계는 있다.
양극화 현상이 뚜렷한 자동차 시장의 경우 지난 4년 중가 시장의 평균 성장률은 전체 시장 평균을 2.8%포인트 밑돌았다. 하지만 규모만을 놓고 보면 여전히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통 구조의 격변을 겪었던 화장품 시장의 경우에도 프리미엄 시장의 가파른 성장이 차츰 완만해지며 매스 시장과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그림 2> 참조).
밀레와 같은 외국 프리미엄 가전 업체들이 최근 중가 시장으로 영역 확장을 선언했다. 그동안 소득수준 상위 5% 이내 고객만을 타깃으로 최고급 제품 위주의 판매 전략을 펼쳐 왔으나 매출 확대와 인지도 제고 측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가 시장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매스티지나 신규 브랜드로의 대체
많은 사람들이 중가 시장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경쟁력을 잃고 사라진 중가 브랜드의 자리가 매스티지 브랜드나 또 다른 신규 브랜드로 대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가 브랜드는 매출 확대나 대중적 인지도 제고 차원에서, 저가 브랜드는 이미지 제고나 수익성 제고 차원에서 중가 시장의 기회를 찾는다. 나이키는 최근 할인점 평균 수준보다는 2배 가량 높지만 자사 브랜드의 평균 가격에는 훨씬 못 미치는 서브 브랜드를 출시했다. 반면 9,800원이라는 가격 상한선을 놓고 국내 화장품 업계에 가격파괴 바람을 몰고 왔던 에이블씨엔씨는, 저수익 저가 브랜드 라인 일부를 철수하고 1만원대 이상의 중가 시장으로 진출했다.
한편 보통 수준의 소비를 주도한다는 동질적 매스 마켓으로서의 중가 시장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매스티지와 같이 소비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시장은 유지된다. 기존의 고가와 중가 시장 사이에 교묘히 자리 잡은 매스티지는 제한적이지만 독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대중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중가의 세분화된 갈래로 볼 수 있다. 미국 시장에서 매스티지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 정도라는 통계도 있다.
● 어느 시장도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로 유명했던 광고 스토리처럼 시장도 매력을 상실했다면 더 매력적인 시장으로 움직이는 것이 정석일지 모른다. 하지만 위축되고 있는 중가 시장을 피해 고가나 저가 시장으로 움직이는 것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웬만한 브랜드들은 이미 프리미엄화를 경쟁 전략으로 내세우며 트레이딩 업에 편승하고 있다. 최고급 명품 브랜드들까지 보다 대중적인 서브 브랜드를 출시하여 고급 시장에 발을 디디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프리미엄에는 그에 합당한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을만한 제품, 브랜드 역량이 필요한데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가 시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치더라도 박한 마진 때문에 매출에 대한 부담이 항상 뒤따른다. 한 때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던 저가 시장도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레드오션이 되고 있어 신규 진출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재작년 국내 화장품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했던 초저가 시장의 성장이 주춤한 것이 대표적이다. 결국 어느 시장을 택하건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하다. 이처럼 아직은 그 규모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상하로의 이동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모든 기존의 중가 브랜드들이 선뜻 ‘철수’ 전략을 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비 시장 변화의 특징
중가 시장의 위기를 가져온 소비 시장의 변화는 무엇인가? 어쩌면 중가 시장에서 발 디딜 틈이 없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발을 잘못 짚고 있었던 것이 문제일지 모른다.
오늘의 시장은 소득 계층에 따라 시장을 가늠하던 소비의 법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가치 소비의 시장이다. 가치소비 시장에서 브랜드의 소비는 감성적이고 자기 만족적이다. 사람들은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한다. 물론 자신을 ‘싸구려’ 이미지에 투영시키고 싶어하는 이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꼭 최고급 이미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가치가 가격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 시장의 영향력자인 오프라 윈프리, 마사 스튜어트 등에 의해 전파된 가치를 보라. 집안의 인테리어를 개조한다던가 의뢰인의 패션을 변화시키고 생활을 개선하는 메이크오버(Makeover) 프로그램들은 상류층의 생활에 대한 무리한 모방이 아니라 현실성 있는 대안들을 제시하며 삶의 질을 높일 것을 강조한다. 이들이 변화를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들은 고급 백화점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대형 마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또한 소비자들은 가치에 대한 선호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가치와 가격 사이의 상쇄관계(trade-off)를 따짐에 있어서도 ‘적당한 품질과 가격’ 선에서 타협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주관적인 가치에 부합하면 선뜻 프리미엄을 지급하기도 하고, 저가 제품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가격에 대한 인내심은 높아진 반면 가격대비 만족도라는 가치 측면에 있어서는 훨씬 엄격해진 것이다. 가격이 절대적으로 높으냐 낮으냐 보다 가격대비 최대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소비를 이끄는 데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명품의 브랜드 가치나, 저가품의 경제적 가치를 제공해 줄 수는 없었지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았던 중가 브랜드들의 중도적 가치가 별다른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여전히 고가이든 중가이든 원하는 이미지를 최적의 가격에 제공해 줄만 한 제품에 갈증을 느낀다는 점에서 아직 기회는 있다.
시장의 변화에서 살아남기
이처럼 과거의 ‘무난함’이라는 강점이 더 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는 중가 시장에서 일부 기업들은 제한된 자원으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려 분투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중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상구를 찾아보도록 한다.
● 핵심가치에 집중하라
미국 유통 업계에 ‘만 가지 손님을 위해 만 가지 모습의 소매상이 되려 하지 말라’는 금언이 있다. 모두를 잘하려다 하나도 특출나지 못한 중간이 되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는 뜻이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앨릭스파트너(AlixPartners)는 유통 업의 핵심가치로 가격, 상품, 서비스, 접근 용이성, 경험 등의 다섯 가지 항목을 꼽는다. 그리고 이 중 두 가지에만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고 나머지 세 가지는 기본적인 기대치 수준만 유지할 것을 충고한다.
크래이트 앤 배럴(Crate & Barrel)은 제품, 서비스, 레이아웃(product, people, presentation)의 편의성을 강조하며 여타 유통업체에서 찾기 힘든 디자인 소품을 쾌적한 쇼핑 환경에서 제공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쇼핑몰 밀즈(Mills Corp.)는 쇼핑 아이템의 위치를 검색해주는 키오스크의 설치로 쇼핑 편의성을 높이고, 스포츠용품 매장에 연못, 스케이트 파크, 자전거 트랙 등을 만들어 엔터테인먼트적 측면을 강조했다. 쇼핑을 즐거운 경험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대형 할인점이나 온라인 유통, 카테고리 킬러와 같은 저가 유통의 공세에서 차별화를 꾀하였다. 코스트코(Costco), 타깃(Target) 등도 월마트의 가격 중심 판매 전략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 제품의 다양성 및 디자인 그리고 쇼핑의 경험 측면에 치중해 저마다의 차별화를 모색해 왔다. 월마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쟁해 결국 특색을 잃어버린 K마트의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이들 기업은 거인 월마트가 있는 치열한 유통 환경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선택과 집중은 나날이 첨단을 달리는 제조업에서도 유효하다. 최근 들어 휴대 전화 제조사들은 위성·지상파 DMB 기능을 제외해 가격을 낮춘 30만~40만 원대의 중가 휴대 전화를 연이어 출시하고 있다. 대신 저가 휴대 전화와는 달리 디자인과 핵심 기능에 충실한 이들 제품은 실제로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무난함이라는 장점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중가 시장의 많은 브랜드들은 핵심 가치에 집중해 그 분야에서만큼은 만족스러운 가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켜라
오늘날의 고객은 브랜드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가격과 상관없이 고객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초저가 제품마저 자연주의 등을 활용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자아내려고 하는 이때, 감성적 소구를 활용해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키고 고객이 개성을 투영하고 싶은 브랜드 자산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유통업체인 타깃은 패션 부문을 강화해 월마트와는 차별적인 감성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 타깃은 ‘모든 여성을 위한 호사’라는 구호와 함께 아이작 미즈라히 같은 디자이너 제품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다. H&M이나 자라(Zara)는 결코 고급 브랜드가 아니지만 칼 라커펠트나 스텔라 메카트니 등 유명 디자이너 라인의 한정 판매 이벤트를 활용해 트렌디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잡화 및 의류전문 패션업체 쌈지는 중저가 브랜드이지만 해외명품 브랜드를 제외하고 닥스와 MCM에 이어 백화점 잡화업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쌈지길, 쌈지마켓, 낸시랭 라인 등의 문화와 예술을 접목시킨 독특하고 새로운 사업으로 문화마케팅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성공 비결이다.
‘당신은 소중하니까요(Because you’re worth it)’라고 말하며 호사품의 소비를 부추기는 듯한 이 문구는 사실은 중가 화장품 브랜드의 광고 카피다. 최고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 최저 가격보다 최고 가치를 선사해라
고가 명품의 희소성도, 저가 제품의 경제성도 주기 힘든 것이 중가 브랜드들의 애환이라지만 원가 경쟁력을 높이거나 서비스 질을 개선할 만한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침체기를 겪고 있는 중견 화장품 기업 가운데 엔프라니와 같은 일부 브랜드는 백화점 브랜드들의 고객 관리와 유사한 방식의 밀착 마케팅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점포 판촉 이외에는 별도의 고객 관리를 하지 않았던 중간 브랜드들의 영업관례를 깨고 주요 고객을 대상으로 쿠폰을 발행하고 증정품과 교환해 주는 프로모션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가격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은 가치 시장에서, 역으로 교묘한 가격 전략으로 만족을 높이는 전략을 활용해 볼 수도 있다. 비쌀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명품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명품을 구매할 때조차도 저렴하게 구매했을 때 더 많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살 때 쇼핑이라는 게임에서 이겼다 생각한다.
코스트코는 고급 브랜드 제품을 할인 가격에 파는 전략으로 저가 유통 월마트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보물찾기’라고도 불리는 코스트코의 판매 전략은 유명 고급 브랜드 가운데 재고 과다가 된 제품이나 생산 중단된 제품을 사들여 14%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고급 소비에 대한 니즈는 높아졌으나 합리적인 측면도 포기할 수 없었던 소비자들에게 최저 가격이 아닌 최고 가치로 다가간 코스트코는 <포춘>지에 ‘월마트가 유일하게 겁내는 기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될 만큼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스로를 진화시켜라
단순히 가격대에 있어서 중간 시장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특색 없이 무난하기만 하고 별다른 매력 포인트를 가지지 못한 ‘어정쩡한 상황(Stuck in the middle)’에 있었던 것이 많은 중가 브랜드에 위기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시장은 다양한 니즈가 공존한다. 차별화에 대한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변화의 모습에 맞추어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것만이 중가 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