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5/4_cafe_2008_07_11_09_35_4876aab9e09f1)
영랑생가의 모란
바다 냄새 물큰한 마량 부두에 언제나…
-전남문협 심포지엄·문학기행 참관기-
하늘 맑고 날씨도 푸근한 현충일 날.
스물 여섯 번째 전남문협 심포지엄이 고려청자의 고장, 영랑 시인의 고향인 강진에서 개최되었다. 새벽부터 나서서 전남 각지에서 참여하신 문우 회원님들의 밝은 표정과 정담으로 문화원 2층 강당은 활기가 넘치고, 오늘 이 행사가 푸짐하고 알차게 진행될 것을 예상케 한다.
여기에 오시기 위해 먼 곳에서는 두세 시간 긴 여행을 하셨을 회원님들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전연 없고, 문학 심포지엄과 문학 기행에 대한 기대로 동심처럼 부풀어 있는 것 같다.
기실 속마음은 딱딱한 문학 토론보다는 강진의 요리로 고픈 배 채우고(아침을 안 먹은 회원님들이 많으니까) 소문난 명승과 유적들을 어서 둘러보고픈 동심일 게다. 심포지엄과 문학 기행을 연계해서 하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가 스스로 매를 무서워하듯이(선조의 체험), 배달민족의 예술적 피를 이어받아 각고의 노력으로 좋은 글을 쓰자는 조수웅 회장님의 인사말씀에 장내는 숙연해진다. 이 대회를 준비하고 주관하신 강진문협 양치중 회장님의 환영사와, 오덕렬 광주문협 회장님, 황주홍 강진군수님을 비롯한 여러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져서 이 행사의 중요성을 실감케 했다.
시 낭송가님들의 아름다운 시낭송으로 심포지엄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2부 심포지엄 발표 및 질의 응답 시간에는 4명의 발표자가 단상에 나와서 2시간여 동안 진지하게 주제 발표를 하고 관중들의 질문을 받았다.
오늘 심포지엄의 주제는 현구 시와 삶의 재조명, 영랑의 생애 두 가지이지만 영랑의 생애는 유인물로 대체하고 김현구 시인의 시와 생애에 대해서만 토론했다. 먼저 발표자로 나온 전원범 시인(광주교대 교수)은 '김현구 시문학 재평가의 과제'란 논문을 가지고 85편의 시를 남긴 김현구, 김현구 시에 대한 관심, 김현구 시문학 연구, 김현구 시문학에 대한 논의와 과제 등 네 분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김현구는 강진이 낳은 훌륭한 시인이었다. 영랑과도 친했던 현구(김현구의 호)는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학업의 중퇴를 반복하며 김영랑, 박용철, 신석정,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파에서 활동했으나 시집 한 권 발간하지 못하고 한국전쟁 때 아깝게 작고했다.
한국시문학대사전이란 책자에는 김영랑에 대해 4, 5페이지를 할애했으나 김현구에 대해서는 극히 짧게 설명하고 있다고 전원범 시인은 애석해한다.
현구는 작품에서 전라도 강진을 중심으로 한 남도의 언어를 구수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의 시는 영랑의 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현구 시의 연구가들은 말한다. 그가 작고한 후 20년 후에야 그의 아들(현구기념사업회)이 12편의 발표작과 70편의 미발표작을 모아 비매품으로 '현구시집'을 첫출간했다. 이 때부터 현구의 시에 대한 논문이 나오고 김선태 씨에 의헤 본격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김현구 시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그의 시에 대한 연구도 극히 미미하다.
김현구는 문학사에서 소외된 불운한 시인이었다. '앞으로 김현구 시에 대해 보다 심층적이고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동안 우리 현대시사에서 지워진 또 다른 시인들에게도 재평가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전원범 시인은 국문학도들에게 과제를 부여했다.
양치중 시인(강진문협 회장)은 김현구의 시에 대해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발표한 현구 시의 연구가이며 동향의 문학 후배로서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하다. 심포지엄 책자에 발표한 '현구 김현구 시인의 재조명'이란 논문에는 김현구의 대표시와 시평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현구의 시는 영랑의 시처럼 생명의 근원인 물의 이미지를 시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의 시에 나오는 강물은 외형적이고 구체적이다. '물우에 뜬 갈매기'는 서럽고 외로운 갈매기이다. 갈매기는 향리에 묻혀 사는 현구 자신의 불우한 모습이기도 하다. '내 마음 사는 곧'이란 시에서는 고향 강진만 바다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다. 그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 내려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자신의 심정을 '검정 비둘기'에 담아 표현했다.
지나친 결벽과 자족적 자세가 스스로에게 무명의 굴레를 씌워 잊혀진 시인이 되게 했지만 그의 시에는 섬세하고 소박한 남도적 기질이 숨쉬고 있다. 이 심포지엄은 현구 시를 재조명하고 그를 망각의 뒤안길에서 밝은 광선 속으로 걸어나오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 발표가 어떤 결실을 맺기보다는 들판에 씨 한 톨 떨어뜨리는 농부의 마음이기를 바란다고 양치중 시인은 결론을 맺는다.
세 번째 발표자인 이순자 시인은 '김현구 시인은 왜 잊혀진 시인이 되었는가?'고 우리가 그를 몰랐던 무지보다 그 자신의 존재를 문학사의 그늘 속에 감춰야 했던 현구 자신의 시에게 질문한다. 그는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검정 비둘기'란 시를 쓴다. '검정 비둘기'는 현구의 아호이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곧 중퇴하고 귀국하여 영랑과 함께 문학동인 활동을 한다.
김영랑과 박용철의 천거로 시문학파의 일원이 된 현구는 시집을 내려고 하였으나 박용철의 사망으로 빛을 못 보고 5년 후 다시 '무상'이란 제목으로 출판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는 영랑의 경쟁자였으나 가정적으로 유복했던 영랑과 경제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현구는 가정의 불행을 문학으로 소화시켰다. 지나치게 결백하고 자신의 시를 비하하여 세상에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함께 활동했던 박용철의 죽음으로 시단 활동을 중단한 현구는 발표 작품수의 부족과 고지식한 성격 때문에 문단에서 각광을 받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심포지엄을 통해 현구의 시를 재조명하고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모국어로 조국의 예술적 자존심을 지켰던 한 시인에게 정당한 예술가 대접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 발표자인 윤영훈 시인은 현직 고등하교 교감이다. 뛰어난 교육적 직관과 예술적 안목으로 김현구의 시 작품세계를 고찰한 그는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짧지 않은 논문을 통해 청중을 감동시키는 발표를 했다. 그의 논문은 1. 서론 2. 김현구의 시작품 세계(시의 형식면, 시의 내용면, 시어의 특성) 3. 결론 등 소제목이 말하듯 짜임새 있는 문장과 조리 있는 발표로 현구 시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현구의 시는 영랑의 시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 그의 시에서 4행시와 4행언의 잦은 사용을 볼 수 있는 바, 그 점은 영랑과 유사하다. '작별' '길' '시름꽃' 같은 시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현구의 시에는 음악적 요소가 다분하며 반복적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시에는 두견새, 꾀꼬리, 물오리, 비둘기 같은 새들이 자주 등장하여 끊임 없이 비상하고 싶은 시인의 의지를,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자연의 상징물로 표출했다. 답답한 조국의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은 메타포(은유)로 보여진다. 영랑의 시가 시각적인 것을 강조한다면 현구의 시는 시각과 청각 모두를 강조한다. 형식면에서, 내용면에서, 시어의 특성면에서 그는 영랑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시인이었다.
그는 1930년대의 한국 문단을 주동했던 쟁쟁한 시문학파 시인이었지만 남앞에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잊혀진 시인이 되었다. 잊혀진 그의 시를 찾아내고 문학사에 재조명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것은 우리 문학인 모두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3/3_cafe_2008_06_23_12_04_485f12a7b1483)
심포지엄이 끝난 후 식당으로 이동하여 강진문협에서 준비하신 강진의 산해진미 음식으로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식사에 곁들여 나온 귀한 홍주와, 선물로 주신 강진 도자기 술잔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이 행사를 주관하느라 불철주야 애쓰신 강진문협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남성리 영랑 생가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도보로 걸었다. 서재에서 영랑 선생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가이 맞이해 주시는 것 같다. 모란꽃은 이미 졌으나 집 안 곳곳에 모란의 향기가 배어 시심을 일깨워 준다. 여러 번 와 본 곳이지만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오늘은 앞마당 샘 가에 모여 영랑의 '샘'에 대한 시에 담긴 에피소드를 들었다. 양 시인은 강진의 관광 해설가이기도 하다. 양 시인을 통해 처음으로 '사의재'란 귀한 유적지를 알게 되었다.
사의재는 영랑 생가에서 가까운 동성리에 있으며 다산 실학의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보은신방,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과 함께 정약용 선생의 위대한 실학사상과 문학이 탄생하게 했던 산실. 사의재는 주막 이름. 다산이 강진에 유배 왔을 때 주막 주인 할머니의 호의로 이 주막 객실에서 4년 동안 기거하며 6명의 제자와 함께 성리학(실학)을 연구했다. 사의재는 사(생각), 모(용모), 언(말씀), 동(행동)을 바르게 가지란 뜻으로 다산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강진에 와서 오늘 심포지엄의 주인공인 김현구 시인의 생가를 안 찾아갈 수가 없다. 그 곳까지 도보로 걸어갔다. 현구 선생의 생가는 서성리 골목에 있는 고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관료(부친이 관료)의 집답게 기와지붕으로 된 6간겹집의 큰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담너머로 현구 선생의 흔적만 스쳐 보았다.
현구 시인이 분가해서 살았다는 집은 다른 골목에 있는데 역시 사람이 살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현구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그의 이름이 더욱 알려지면 영랑 생가처럼 군에서 관리하여 대중들에게 공개할 것이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침에 광주와 순천 방면에서 타고 왔던 두 대의 버스를 타고 묘당도 이충무공의 유적지로 향했다. 묘당도는 완도군 고금도에 있는 작은 섬이며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을 때 적에게 전사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 곳에서 80일 간 시신을 안치해 두었던 장소다. 묘가 있던 동산 솔숲에는 묘자리만큼 낮은 철책이 둘러쳐져 있어 무덤이 있던 곳임을 말해 준다.
동산 아래 충무공의 해전 기념비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에 제를 모시는 큰 제각이 있다. 제각과 동산 주위는 바다이다. 썰물때여서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볼 수 없었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런 좁은 해역까지 다 알아내어 해전에 유라하게 이용했음을 생각할 때 그의 탁월한 전술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남해 곳곳, 전라도의 바다 구석까지 충무공의 발길과 숨결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동산 주변은 수도도 가설되고 관광객이 쉴 수 있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제각 서편 숲 속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있었다. 충무문을 지나 계단으로 된 언덕을 올라갔다. 충무사는 다른 지역의 충무사처럼 넓고 아름다웠다. 시설물들을 세어 보니 3단으로 된 계단식 부지에 대문이 두 개, 충무사를 포함하여 부속 건물이 여섯 동이었다. 이 건물을 1990년에 이 곳 군수와 유지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다음 관광지는 약산대교. 약초와 흑염소로 유명한 약산면 조약도에 가서 그 곳의 약기운을 흠뻑 몸에 담았다. 약산대교는 완도대교 다음으로 세워진 연육교이다. 고금도는 많은 군소 섬을 거느린 큰 섬이며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많은 농토가 있어 섬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조약도는 행정구역상 고금면에 속해 있는 군소 섬 중의 하나이다. 어농을 겸하고 있어서 지나는 마을마다 배와 어구들이 보이고, 모내기를 막 끝낸 푸른 모들이 논배미를 장식하고 있다.
약산대교를 되돌아 나와서 마지막 관광지인 마량항으로 향했다. 버스는 산과 들을 지나 곱게 포장된 해안도로를 따라 웃음과 정을 싣고 달린다. 가는 곳마다 여기도 바다 저기도 바다. 전라도는 수려한 바다를 가진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삶에 쫓겨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 짭짤한 소금 냄새를 풍기며 밀려오는 파도 위로 서녘 해가 눈부시게 빛난다. 버스가 주황빛 교각이 아름다운 고금대교 위를 달린다. 다리 건너 편은 강진. 고금대교에서 바라본 마량 포구는 한 폭의 수채화이다. 인공으로 꾸민 해상 공원이 신기루처럼 곱다.
버스에서 내린 문인들은 아기자기하게 꾸민 넓은 공원과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자유 시간을 즐겼다. 강진행 버스의 종점 마량은 이 해상 공원 때문에 유명해졌다. 해상 공원은 등대와 방파제 역할도 하며 마량을 강진의 명소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선창에 줄지어 정박한 어선들을 바라보며 긴 축대를 따라 등대가 있는 해상공원 끝까지 걷는다. 길 가에 말리고 있는 생선에서 비린내가 풍기고 배들은 밀물 때를 기다리는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언제 이 마량에 다시 찾아온다면 그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단둘이 오고 싶다. 마량의 전어회도 사 먹고 일 주일에 두 번 열린다는 공연장에서 환호하며 춤추고 싶다. 그이와 함께 온종일 사랑의 시를 쓰리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3/10_cafe_2008_06_23_12_03_485f125ba2e1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