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단일화] 60,70 기인열전② | |
김윤식(金潤植·1927~1996)은 소박한 농부에서 하루아침에 혁명시인으로 필명을 떨치다가 다시 고향의 농부로 돌아간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시인이다. 전상렬·윤혜승 등과 함께 ’시림’ 동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1957년 첫시집 ‘오늘’을 출간한 이듬해 경주여고 교사를 그만두고 귀향했다.
지금의 운문댐 수몰지역에서 땅콩농사를 짓던 그는 사라호 태풍으로 떠내려가고 남은 땅콩 30가마를 싣고 대구에 나왔다가 삼덕동 일대에서 학생 시위대와 마주쳤다. 60년 2월 28일, 그의 표현대로 ‘학생들의 의로운 행진’은 시인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정의감이 남달랐던 김윤식은 그 길로 밤새워 혁명시를 써서 3월 1일자 일간신문에 발표를 했다. ‘설령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먹장 같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쳐도/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 앓고 있는 하늘/ 구름장 위에서/ 우리들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기 때문//...// 빛 좋은 개살구로 익어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에/ 아아 우리들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모습// ...// 아아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 저리 우리들의 태양이 이글거리기 때문'.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아직도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이란 이 저항시로 인해 김윤식은 그후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4.19 직전이던 60년 4월 어느날 밤. 그는 봉덕동에 있던 목인 전상렬 시인의 판자집에 숨어들었다.
모처럼 따끈한 쇠고기국에 막걸리를 포식하고 도피자금까지 넉넉히 받았다. 그런데 깊은 잠에 빠진 김윤식은 그만 갓 시친 새 이불에 흥건히 방뇨를 하고 말았다. "공립중학 교사 신분으로 지명 수배자를 숨겨 숙식을 제공하고 도피자금까지 대어줬으니 ‘밥통’이 날아갈 일이었다." 김윤식은 목인의 넉넉한 인품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 ‘경산문학’ 제5집에 이 웃지못할 ‘방뇨사건’의 전말을 밝히기도 했다.
그해 6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김윤식은 형설출판사에서 시집 ‘아직도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을 출간하며 다시 문단 안팎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혁명시인의 봄은 5.16으로 1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김윤식은 64년에도 4.19를 기념하는 시 ‘4월의 종이여’ 등을 발표하며 군사정권의 요시찰 인물이되었다가 아예 고향인 경산 용성의 흙으로 돌아갔다. 다시 농부가 된 그는 70년대 초반에는 모범 농부로 선정돼 1년간 일본농촌시찰단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제 시인은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혁명시는 4.19 국립묘지와 2.28기념공원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 김윤식 시인의 장남인 김약수 경산 예총회장(대구미래대학 교수)은 “그때는 비록 온 가족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대정신에 부응한 진실된 삶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임을 깨우쳐주셨다"며 “선친의 피신시절을 ‘아버지와 검은 짚차’란 수필로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5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돌각담’이란 단편소설이 가작으로 뽑히면서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소설가 서석달(徐錫達·1929~1993)은 별명이 ‘진돗개’였다. 작은 체구였지만, 진돗개처럼 강한 집념과 의지를 지녔으며, 정말 진돗개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진 문인이었다.
전남 진도에서 진돗개를 입수하기 위해 사단법인 진돗개협회까지 결성할 정도였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진돗개를 타지방으로 반출할 수 없던 때였다. 회장은 자신이 맡았고, 권기호 시인을 총무로 임명(?)했다. 술집 '혹톨'에서였다.
‘진돗개’란 별명이 붙은 결정적인 동기는 사실 ‘엽사전’이란 그의 장편소설 때문이다. 진돗개와 함께 평생을 사냥을 하며 늙어간 송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데, 송노인은 곧 자신의 비유이기도 했다.
서석달은 술을 마시고 자정이 넘어 들어가도 주인을 기다리다 반색을 하는 진돗개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한참이나 진돗개와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에야 현관문을 들어서곤 했다. 그러나 개가 자꾸만 사고로 죽음을 당하자 자신의 띠가 ‘용’(辰)으로 ‘개’(戌)와는 맞지 않아서 그렇다며 진돗개와의 인연을 끊고 말았다. 애견을 잃어버린 쓰라린 상실감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문인들과 어울려 여러 단골 술집을 드나들었던 그는 술잔을 한번 들었다하면 끝장을 보는 술꾼이었지만, 결코 꼿꼿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대구대에서 정년을 몇 달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정노인의 죽음’이었다. 서석달이 추구했던 작품의 세계는 결국 인류의 보편적인 화두였던 죽음과 성(性)이었다.
당시 대구의 외곽 지역을 풍미한 기인으로 박종우(朴鍾禹·1925~1976)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무신(古無新)이란 신발 이름을 따서 지은 아호(雅號)부터가 특이하다. 두주불사에 호탕한 성격의 그는 서슴없는 기행 때문에 교편을 잡고 있던 학교에서 쫒겨나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음담패설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기차를 탈 때면 예사로 무임승차를 일삼았다.
제자인 정민호 시인(경북문인협회장)은 "특유의 시인적인 기질과 깜짝놀랄 기행으로 숱한 화제와 해프닝을 남겼다"며 "경주·포항·안동 등지의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안동고에서는 신세훈·김원길 같은 전국적인 문인을 길러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62년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첫 신라문화제가 경주에서 열렸을 때다. 어느 술자리에서 조지훈 시인이 좌장으로 웅변조의 담론을 들어놓고 있는데, 30대 중반의 거무튀튀하게 생긴 건장한 체격의 시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조지훈은 ’조지 훈훈’해서 참 좋겠다". 순간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동시에 '철썩' 뺨 맞는 소리가 뒤따랐다. 평소 거침없던 천하의 박종우도 조지훈 시인의 위엄 앞에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김유신 장군묘가 있는 경주 송화산 기슭에 박종우 시인의 '종'(鐘)을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음/ 터뜨리지 말라'. 에밀레 종을 소재로 한 것 같은데 이 또한 무엇에 대한 고무신 시인의 일갈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