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시절 초등학교는 집에서 다녔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워낙 멀고 교통이 불편해서 부득이하게 학교 가까이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다녔다. 중학생 시절은 외사촌 형제와 같이, 고등학교 시절은 혼자 자취생활을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 자취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막상 불가피한 상황에 부닥치니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취생활은 글자 그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부모 슬하에서 어리광부리며 살다가 어설픈 솜씨에 손수 밥을 짓고 찌개나 국, 반찬을 만들려니 어색하면서도 성가셨다. 어머니의 따스한 밥상이 항시 그리웠다. 그래도 배를 채워야 하는 까닭에 때가 되면 밥을 짓고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공부하랴 요리하랴 청소하랴 설거지하랴 빨래하랴 여러모로 바쁜 학창시절이었다.
쌀이나 간장, 된장, 고추장, 장아찌, 김치 등 기본적인 식량이나 반찬은 매주 토요일에 집에서 준비해 오지만 밥을 비롯한 찌개나 국, 달걀프라이, 어묵조림 등은 스스로 요리해 먹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실수를 해 가면서도 원리를 터득할 수 있었다. 밥을 짓기가 번거로우면 국수나 라면을 끓여 먹었다. 틈틈이 자취방 주인에게 부탁해 반찬을 얻어먹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취방 주인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나를 기특하고 대견하다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신선한 반찬을 가끔 주고 힘들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아낌없이 격려와 위로를 건넸다.
오랜 세월 학생으로서 자취생활을 한 덕택에 다른 건 몰라도 가벼운 요리법을 배우고 자립심은 충분하게 기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지만 무엇이든 스스로 해야 하고 학교생활에도 충실해야 하는 까닭에 공부에도 매진했다. 자취생활은 내게 많은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었다. 또한 자취방 주인에게 잘 보여야 반찬을 얻어먹고 방세를 한두 달 미루어도 야단치지 않는다는 세상살이 진리를 터득할 수 있었다.
자취생활은 요리에서는 된밥과 진밥의 이치를 일깨워 주었고 짠 국물과 싱거운 국물의 원리를 깨닫게 했다. 그리고 설거지, 청소, 빨래 등 소소한 집안일을 미루면 되지 않는다는 이치를 알려 주었다. 집안일을 미루니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냄새가 나고 벌레가 들끓으며 세균이 번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위생과 청결에 눈을 뜨게 하는 커다란 동기로 작용했다.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해 효도를 해야 한다는 삶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다.
청소년 시절을 자취생활로 부지런하게 보낸 덕분에 어른이 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지금까지 별다른 걱정 없이 보내고 있다. 때때로 아내가 집을 비워도 스스로 밥을 지어서 챙겨 먹고 집안일도 한다. 밥솥에 쌀을 안칠 때에 손바닥을 담그지 않고 눈으로만 보고도 물 조절을 능숙하게 잘해 밥 하나만은 아내보다 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지간한 반찬도 만들 수 있다. 각종 찌개 종류, 탕 종류, 멸치볶음, 나물 무침 등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반찬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가정을 꾸린 뒤에 자립심이 남달리 돈독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 적은 없다. 항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은연중에 몸에 배어 있다. 군대생활, 취업, 결혼, 자녀 양육, 주택 마련, 재산 형성 등 모든 일을 부모나 형제 도움 없이 오로지 스스로 했다. 가난했던 집안 환경 탓에 자나 깨나 홀로 험난한 세상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늘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지금껏 나라경제의 시한폭탄인 가계부채는 한 푼도 없이 살고 있다. 빚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고 느긋하다. 이는 자립심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사치나 허영을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기에 가능했다.
요즘 사람들은 자립심이 좀 빈약하다. 특히 아이들은 자립심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대학은 물론이고 취업, 결혼, 육아, 주택 구입 등 세세한 것 까지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부모도 성인인 자녀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부모는 노후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서 인생 후반전을 가난, 질병, 고독에 시달리며 비참하게 보낸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무조건 자녀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려고 하지 말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이 절실하다. 그래야 자녀도 평생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 언제까지 자녀를 캥거루처럼 품안에 둘 것인가? 캥거루족 자녀가 느는 이유는 부모나 학교의 그릇된 교육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강한 자립의지를 심어줘야 한다. 강한 자립의지는 지구촌 무한경쟁 시대를 헤쳐 나가는 비결이자 삶의 철칙이다. 요즘 같은 적자생존의 시대에 굳센 자립심만이 나는 물론이고 가정과 국가가 항구적으로 살아남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부질없는 허영심과 과시욕은 물리쳐야 한다. 요즘 생각 이상으로 남의 눈길을 의식해 무리해서 소비해 빚에 의존하여 사는 이가 즐비하다. 그야말로 허영심의 노예가 돼 ‘빛 좋은 개살구’나 ‘속 빈 강정’처럼 사는 이가 아주 많다. 자신의 소득수준에 맞춰 분수껏 사는 삶이 아쉽다.
누구나 화려한 물건을 갖고 싶고 넓은 집과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싶다. 그렇지만 자신의 경제상황에 맞춰 살아야 한다. 형편이 되지 않으면서 빚을 내 집이나 승용차를 구입하고 명품을 선호한다. 그래서 집집마다 빚의 굴레에서 허덕인다. 빚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다. 분수에 맞는 합리적인 소비가 절실하다.
요즘 물질적으로 풍요하다. 그래서 가난이나 굶주림을 모른다. 음식이 남아돌고 멀쩡한 옷과 물건을 함부로 버리기까지 한다. 그럴수록 너무 물욕이나 배금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정신의 성숙을 다져야 한다. 베짱이처럼 현실을 사치와 향락으로 보낼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개미처럼 대비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학창시절에 힘들게 자취생활을 한 덕분에 나는 외벌이 가정인데도 절제와 검소, 근면이 몸에 배어들어 별다른 걱정 없이 살고 있다. 자취생활은 내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은 시절엔 고생도 좀 하며 자립심을 기르고 절제력을 다져 인생 황금기를 알차게 엮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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