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 (전북 부안군 위도면) 면적 11.14㎢, 인구 1563명(1999)이다. 해안선 길이는 36㎞이며, 최고점은 망월봉(望月峰:255m)이다. 섬의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 하여 '고슴도치 위(蝟)'자를 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섬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으며,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해상에 있다. 산지가 많아 경지율이 낮고, 해안선은 북서쪽에서 굴곡이 심한데, 특히 동북부의 진리만(鎭里灣)이 규모가 커서 연안에 취락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만 동쪽 끝 딴시름에는 방파제가 구축되어 있고, 만 안쪽 정금도(井金島)와의 사이에는 방조제가 조성되어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근해는 연평도(延坪島)·신미도(身彌島) 근해와 더불어 서해안의 3대 조기 산란장으로 유명하며, 4∼5월 산란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어선이 모여 파시(波市)가 선다. 김·굴 양식이 성하며, 근해는 서해의 고기떼들이 집결하는 청정해역으로서 우럭·노래미·농어·감성돔 등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다.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이후 위도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2000년까지 관광순환도로, 위도해수욕장, 4개의 여객선터미널, 3개의 방파제, 4개의 선착장이 완공되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 등 천혜의 경관이 살아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재로는 위도관아(지방유형문화재 101)가 있으며, 민속놀이에는 마을의 태평과 풍어(豊魚)를 비는 위도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재 82)가 있다. |
하늘이 숨겨놓은 신비의 섬
<김형미의 숨은 보물 찾기-4. 위도>
전라일보 기사 입력일 : 2020.08.17.
글 : 김형미 시인
고슴도치를 닮은 섬, ‘위도(蝟島).’부안에서 13km쯤 떨어진, 노을이 내려앉는 쪽에 위도는 있다. 격포항에서 큰 걸음을 하면 단숨에 건너 뛸 수도 있을 것처럼 지척인 곳. 그러나 막상 뱃길로 들어서면 40분이나 걸리는, 가까운 듯 결코 가깝지만은 않은 섬. 지금, 그 섬에 간다.
순우리말 땅이름이 살아 있는 섬
서쪽 당대 너머 해수욕장이 있는 도장금, 소금 생산하는 소금벌이라 해서 벌금, 떡시루 모양의 시루금, 파도가 길게 치면 어선이 몰려온다는 파장금, 솥뚜껑과 같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인 정금, 마을이 깊은 지형에 위치해 깊은금, 살을 쳐서 고기를 잡는다 하여 살막금, 유일하게 벼를 경작한다 하여 논금, 달빛이 바다에 아름답게 비친다 하여 미영금, 개펄 너머 마을인 개들넘…….
가는 곳마다 순우리말 땅이름들이 참 정감 있게 다가오는 곳이 위도다. 이밖에 돛단여, 배잡은여, 숨은여, 검은여, 딴달래섬여 등 바닷물 속에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암초를 뜻하는 ‘여’자가 붙은 토박이말로 된 이름도 있다. 격포에서 출발해 섬에 다다르기 전 먼저 맞이해주는 섬도 ‘돛단여’이다. 돛단여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돌섬이지만, 뱃길을 심심치 않게 해주는 데는 손색이 없다.
심지어 위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미영금 해안의 돌자갈마저도 ‘깻돌’ 또는 ‘팥돌’, ‘콩돌’이라고 불린다. 곡식이 많이 날 수 없는 섬 지역의 특성상 그렇게라도 얼마 안 되는 밭작물의 풍성을 염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려나, 이렇게 예쁜 이름들을 가진 곳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한 번 살아볼 만한 곳 아닐까.
금(金), 즉 ‘돈’이 붙는 섬
섬 안에‘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 데도 이유가 있다. 금(金), 즉‘돈’이 되는 곳이라는 얘기다. 무인도인 돛단여와 심청이가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바닷물에 뛰어들었다는 임수도 앞바다를 지나 섬에 들 때 제일 먼저 뱃머리가 닿는 곳도 파장금항이다.
어선이 몰려와 돈이 된다는 뜻이름만큼 파장금항은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이 높던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각지에서 몰려온 수백 척의 배들이 위도를 둘러싸다시피 하며 조기를 잡아 파장금에 들어와 파시를 이뤘던 것.
위도 남쪽 바다가 바로 조기잡이의 보고였던 칠산어장이었다. 과거에는 지금의 영광굴비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잡혔다. 명태가 동해안을 대표하는 어종이라면, 서해안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물고기가 바로 조기 아니던가. 명태가 설악의 매운 바람을 맞으며 황태가 되듯 조기는 칠산바다의 다습한 해풍 속에서 꾸덕꾸덕한 굴비가 될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데 없는 생선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온 굴비 말이다.
당시 파장금항은 섬 속의 거대 도시였다고 한다. 30여 곳이 넘는 술집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고, 뱃사람들에게 술을 파는 여성이 무려 6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말해 무엇 하랴. 지금도 파장금항 마을 뒤쪽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농짓거리를 던지는 뱃사람이나 흥정을 하는 장사꾼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북적임이나 흥청거림도 없다.
다만 골목골목 즐비해 있는 술집이며 여인숙, 술 파는 여성들이 사용하던 공동 목욕탕과 몇 개의 우물이 한때의 영화를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 무너지고, 피폐해지고, 파손된 모습으로 서 있을 뿐. 그리고 그것들은 싸구려 화장을 하고 술파는 여인들처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또 다른 방법으로 붙들고 있다.
조기가 더는 나오지 않게 되면서 1970년대 말 다시 키조개 잡이로 사기를 드높였던 파장금. 1980~1990년대에 들어서는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며 또 한 번 돈줄을 놓치지 않았던, 그야말로 생금 터였다. 이후 1999년 27km의 섬 일주도로가 뚫린 뒤로는 어떤가. 사철 관광지로 거듭나 지금껏 빼어난 경관과 서해의 황홀한 해넘이 낙조 장관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벌금리 ‘대월(大月) 습곡’의 신비
위도는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30여 곳의 섬을 하나로 뭉뚱그려 위도라 부른다. 이곳이 지난 2017년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부안의 적벽강, 채석강, 솔섬, 모항, 직소폭포와 함께 총 6곳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중 위도는 약 8천 5백만 년 전 호수 환경에서 퇴적된 육식공룡의 알 화석을 관찰할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위도 서측 해안을 따라 벌금리 퇴적층이 장관을 이룬다. 격포리 퇴적층처럼 호수 안으로 퇴적물이 흘러들어와 쌓이고 굳어져 만들어진 것.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기 때문에 중생대 백악기 말에 분출한 화산이 기반암을 이룰 수 있었다.
벌금리는 공룡알 화석과 함께 하늘이 숨겨놓은 것만 같은 비경이 또 한 군데 있다. 바로 ‘대월습곡’이다. 습곡은 지층이 수평으로 퇴적된 후 압력을 받아 휜 상태를 말한다. 채석강이나 적벽강에서도 이런 상태의 습곡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위도의 습곡은 다르다.
그 크기가 거대 바위만 해서 이름 하여 ‘대월(大月)’, 다시 말해 ‘큰 달’이란 명칭이 붙은 것. 지층이 둥글게 휘어 돌아 만월을 낳았다고 하나, 지금은 세월의 어느 시기에서인가 반절이 뚝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래서 만월이라기보다는 ‘반달’로 보아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반달이지 워낙 방대한 크기여서 ‘큰 달’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사실 위도는 그 명성과 달리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천혜의 해안절벽이 많다. 깊고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망집을 여의고, 집착을 떠나 있게 하는 보기 드문 절경들. 자칫 그 풍광에 눈이라도 베일 것만 같은 아찔함이 느껴지는 곳이 발 딛는 곳마다 산재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소유한 것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는 보고 있노라고,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또한 가장 좋은 것을 나는 알고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곳들.
일제의 창지개명으로 살가운 이름을 잃어
벌금리와 위도해수욕장 사이에는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이 있다. 그 끝부분에 용멀 또는 용머리라고 부르는 곳의 해식단애 바위 경치도 채석강 저리 가라 할 만큼 빼어나다. 누가 일부러 숨겨놓은 것도, 스스로 숨어 있는 것도 아닐진대 위도에 와서 한 발 한 발 재겨디뎌 보지 않으면 쉬이 볼 수 없는 풍광이다.
이 용머리 해안 들머리가 벌금항 옛 여객선터미널 옆인데, 이곳 사람들은 ‘갯것 다니던 길’이라고 표현한다. 갯것을 채취하러 다니던 길이라는 말이다. 이 역시 정겹고 살가운 표현이라 가슴에 깊이 담긴다. 정겹고 살가운 것이 그뿐이겠는가.
대월습곡 맞은편 쪽에는 ‘딴달래’라는 이름을 가진 딴달래 섬이 있다. ‘딴’이라는 말도 ‘여’처럼 순우리말인데, ‘조금 떨어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육지에 거의 붙어 있는 섬을 뜻한다. 그러고 보니 위도에는 딴정금, 딴치도, 큰딴치도, 작은딴치도, 딴시름 등 ‘딴’자가 붙은 곳이 더러 있다. 그 몇들 중에서도 딴달래 섬은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인지 외딴 섬마을 맑고 어여쁜 소녀를 연상시켜 살포시 안아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일제의 개명작업으로 살가운 지명들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현재는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살을 만들어 썼다는 ‘살막금’도 ‘전막(前幕)’으로 고쳐져 있고, 솥을 걸고 밥을 짓는 형국이라 해서 이름 붙은 ‘밥섬’은 ‘식도(食島)’, 수군 진영이 있다 해서 ‘진말’이라 불리던 마을은 ‘진리(陣里)’가 되어 있다.
고슴도치를 닮지 않은 고슴도치 섬
위도는 고슴도치 섬이라고는 하나 생김새를 보아서는 고슴도치 모양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떨어져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고슴도치를 연상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고슴도치 섬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찾아낸 옛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 쓴 『고려도경』. 거기에 서긍이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을 둘러보다가 위도에 들러 주민들로부터 식수를 공급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의 솔잎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하였다.
실제로 위도의 소나무는 독특하다. 지천으로 널려 있으면서도 서해의 거친 바닷바람 탓에 키가 2m를 채 넘지 않는다. 해풍에 시달리느라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소나무도 없다. 일부러 그렇게 키워놓은 것도 아닌데 다들 이리저리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해서 멋진 분재처럼 생겼다. 나무가 이러할진대 솔잎이라고 다를까. 어른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작고 억센 것이 위도 소나무의 솔잎인 것이다. 때문에 이 솔잎이 고슴도치 털을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 섬’이라는 이름이 나붙은 것 아닐까 한다는 것.
그도 그렇지만 섬을 다니다 보면 풍수지리적 차원에서 고슴도치의 형상을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다. 망월봉(望月峰)이 고슴도치 머리고, 밥섬인 식도는 그 머리 앞에 놓여 있으며, 용머리는 고슴도치 앞발, 살막은 고슴도치의 꼬리, 위도 사람들 발음대로 ‘짚은금’으로 불리는 깊은금은 고슴도치 자궁 자리이다. 깊은금은 일 년 내내 샘물이 안 마르는, 물이 귀한 섬 지역에서는 특별한 곳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가 오래 전 방폐장 자리로 꼽혔었다.
구불구불 해안 절경이 아름다운 신비의 섬, 위도. 버스 한 대, 택시 한 대가 고작이지만 걸음 놓은 발자국이 사라질까 차마 발을 뗄 수 없는 곳. 이 섬에서 지금, 하루만 더 쉬어가자.
/글 사진 김형미 시인
전북 부안 위도 망월봉·망금봉·도제봉
글·사진 지홍석(수필가·산정산악회장)
[매일신문 기사 작성일 : 2013년 08월 08일]
# 바다 어울린 숲·기암괴석
# 낮은 높이에도 위압적 조망
조선의 급진적 개혁가 허균이 꿈꾸었던 이상향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부안의 우반동에서 지은 ‘홍길동전’에서 그는 율도국을 그 모델로 제시했다. 그 실제적 모델로 알려진 섬이 위도로,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와 섬도(島)를 써서 위도라고 부른다.
모래해안이 대부분이며 간석지도 발달했다. 위도의 최고봉은 섬 북쪽에 있는 망월봉(255m)이다.
그 밖에 도제봉(152m)·망금봉(242m)·파장봉(162m) 등 200m 내외의 경사가 급한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이 자랑이다. 세계적 희귀종 위도 상사화가 유명하다. 대부분의 상사화가 진붉은색이지만 위도 상사화는 하얀색 꽃잎이다.
위도는 변산반도의 서쪽 해상으로부터 약 14㎞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식도, 정금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어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의 파장금항까지 카페리호를 타고 들어간다.
이른 아침 첫배를 탄다. 격포와 파장금항을 잇는 뱃길은 비운의 해상로다. 1993년 10월 10일. 위도 벌금항을 출발해 인근 식도를 경유해 승객 362명을 태우고 오전 9시 40분 파장금항을 출발한 배가 위도 3㎞ 지점 해상에서 오전 10시 10분쯤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승객 262명이 사망했다. 주말을 맞아 낚시꾼들과 관광객들이 많았고 추석을 쇠고 뒤늦게 일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의 정원은 221명, 초과인원이 141명이나 되었다.
위도로 등산을 떠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등산로의 선택과 시작점을 어디로 할 것이냐에 따라 차량 이용방법이 달라진다.
종주산행이 목적이라면 위도 마을버스를 이용해 위도의 해안 절경을 감상하며 최남단 전막리까지 진행한 다음 능선종주에 나선다. 망금봉을 필두로 도제봉`망월봉`파장봉을 이어 타고 파장금항까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군데군데 탈출로가 여섯 군데나 있지만 최종 목적지를 파장금항으로 하면 통제가 수월하다.
전막리에 도착 전. 섬의 끝 지점 좌측고개에 ‘위도등산안내도’가 있다. 능선을 오르면서부터 좌우측으로 아름다운 해변의 풍광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암릉길과 가파른 암릉을 통과하면 등산을 시작한 지 1시간 30여 분 만에 망금봉에 도착한다. 곳곳이 놓치기 싫은 전망대다. 좌로는 해수욕장이 조망되고 우측은 치도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가 훤하다.
치도교로 내려선 다음 위도해수욕장으로 가는 갈림길을 통과하면 진말고개다. 곧이어 도제봉이다. 도제봉은 해발은 낮으나 망금봉과 망월봉을 좌우로 거느린다. 능선을 이어가면서 바라보는 최고봉 망월봉은 낮은 해발인데도 불구하고 다소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개들넘교를 통과하면서부터 오름길이 다소 가파르다. 정상까지는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망월봉은 해발 254.9m로 위도방파제와 파장금터미널,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과 봉우리들이 사면으로 펼쳐져 원 없는 조망을 보여준다. 2006년 처음 망월봉을 찾았을 때에는 정상 표지석 대신에 고슴도치 모형물이 산 정상임을 알려주었지만 이제는 산의 높이에 비해 크게 보이는 정상석과 사각 정자가 세워져 있다.
망월봉에서 좌측 내림길은 서해훼리위령탑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이 시름교를 통해서 파장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정상과 등산로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친절하게 설치되어 있다. 종주 능선 중 가장 돋보이는 지점이 개들넘에서 망월봉으로 짓쳐 오르는 길과 시름교로 내려서는 능선길이다.
시름교에서 파장봉을 오르려면 한 번 더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한다. 파장봉에도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하산지점인 위도방파제까지는 25분 정도가 소요된다. 전막리에서 등산을 시작해 망금봉·도제봉·파장봉을 거쳐 위도방파제까지 내려서는 데 약 14㎞의 거리에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식사 및 휴식시간 1시간 30분 포함) 또 다른 종주 길인 깊은금·내원암·망금봉·도제봉·망월봉·시름교·파장금항까지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여름이라 길게 이어 타기보다는 망월봉과 도제봉을 이어 타는 코스도 고려할 만하다. 길어 봐야 2, 3시간 정도다.
섬 동쪽에 있는 영광 앞바다에는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칠산도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다. 이곳을 칠뫼(칠산)라고 하는데 여기서 시작하여 법성포 앞바다를 거쳐 위도, 변산,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해역을 ‘칠산바다’라고 부른다. 이 해역에 형성된 어장을 칠산어장이라고 하며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조기어장이었다. 이 칠산어장의 중심지가 바로 위도(蝟島)였다.
영광굴비의 명성이 알고 보면 위도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4년에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위도가 전남 영광군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안군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선착장에서 바닷길로 약 14㎞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원전수거물처리장 설치 문제로 전 국민의 이목이 쏠렸던 곳이기도 하다. 11.6㎢의 면적에 1천300여 명이 살고 있다.
위도로 등산을 떠나기에 앞서 반드시 체크해야 할 점은 선박운항 시간이다.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위도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전화로 통보하는 게 좋다. 참고로 위도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마을버스기사 백은기 씨다. 입담이 좋아 위도관광해설사를 겸하고 있는데 TV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다. 산행을 마치고 격포항 주변 변산국립공원 채석강도 둘러볼 만하다. 회 값이 다소 비싼 게 흠이다. 파장금항에서도 간단하게 회를 사 먹을 수 있다. 격포항에서 파장금항까지 운항요금은 편도 7천550원이다.
[길따라 멋따라] '홍길동이 꿈꾼 그 섬'…전북 부안 위도
연합뉴스 기사 송고시간 : 2017-07-29 07:00
세계 유일 하얀 꽃무릇 자생지
9월 '달빛 보고 밤새 걷기 축제'…보고 먹고 즐길 거리 풍성
(부안=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전북 서해안인 부안은 풍요로움의 다른 이름이다.
부안은 예부터 산과 바다, 비옥한 토지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맛과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해서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렸다.
'생거(生居) 부안'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생거 부안'은 조선 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 부안'이로구나"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다.
특히 부안 위도는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고슴도치를 닮아 '고슴도치 위(蝟)'를 쓰는 위도는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 수산자원이 풍부해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꿈꾸던 이상향 율도국의 모델로 그려졌다.
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던진 인당수가 위도의 부속도서인 임수도 해역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섬은 고슴도치가 편안히 누운 모양새다.
위도에는 파장금, 정금, 논금, 미영금 등 '금(金)'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조기어장이 형성돼 파시가 열렸을 정도로 수산물이 많이 잡혀 돈이 몰렸던 곳이었기에 이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섬 여행은 육지 여행을 갈 때와는 다른 설렘을 느끼게 한다.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여행이 일상의 일시 단절을 의미한다면 섬 여행자는 육지 길에서 물길로 물리적 단절을 경험한다.
역설적이게도 '단절의 힐링'이 가능한 곳이 위도다.
위도는 격포항에서 14㎞가량 떨어져 배로 50분이면 도착한다. 위도 해안가 절벽은 섬 장관을 병풍 삼아 고기를 낚는 바다 낚시터로 유명하다.
고운 모래가 펼쳐진 위도해수욕장. 특히 해지는 저녁 바다 멀리 왕등도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노을은 장관을 이룬다.
위도에는 엽전으로 정금다리를 놓으려 했다는 안동 장씨 이야기와 형제섬 전설, 피동지 전설, 칠산바다 전설, 대룡샘 전설 등 수많은 스토리로 가득 채워졌다.
1978년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위도 띠뱃놀이'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위도 띠뱃놀이는 170여 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임금님 진상품인 칠산조기가 많이 잡히는 대리마을 앞 칠산바다에 산다는 용왕에게 만선과 행복을 적은 띠지와 오색기, 어부를 상징하는 허수아비 7개, 어선 모양의 띠배를 갈대와 볏짚으로 제작해 바다에 띄우게 되는 풍어제로 중요무형문화재(82-3호)로 지정돼 있다.
백미는 '위도 8경'이다.
위도 8경은 내원모종(內院暮鐘)·정금취연(井金炊煙)·식도어가(食島漁歌)·망봉제월(望峰霽月)·봉산출운(鳳山出雲)·신소귀범(船所歸帆)·왕등낙조(旺嶝落照)·용연창조(龍淵漲潮)를 말한다.
일경인 '내원모종'은 위도면 치도리에 있는 내원암에서 아침·저녁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평화와 정서를 안겨주는 아름다운 소리'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경인 '정금취연'은 진리 앞 정금도의 초가집에서 저녁밥을 지을 무렵 뿌연 연기가 연한 바람에 날리며 동네 곳곳을 깔고 있는 광경이다.
진리 앞 2㎞ 떨어져 있는 식도에서 고기를 많이 잡아 팔고 있는 광경인 '식도어가'가 삼경이며 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망월산(해발 245m)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인 '망봉제월'이 사경이다.
오경은 '봉산출운'으로 새 머리 모양을 한 봉수산(해발 180m) 허리를 흰 구름이 감고 있는 모양이며 위도 앞 칠산바다에서 돛단배가 위도를 향해 만선을 의미하는 오색찬란한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모습인 '선소귀범'이 육경이다.
위도에서 20㎞가량 떨어진 왕등도의 '왕등낙조'는 칠경으로 서해의 일경으로 알려질 만큼 탄성을 자아낸다.
마지막 팔경은 진리 앞바다에 만조 광경을 말하는 것으로 만조가 되면 호수 가운데 몇 개의 바위와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듯한 절경을 이룬다 해서 '용연창조'라고 부른다.
'위도 여행의 1번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 바로 위도해수욕장이다.
위도해수욕장은 마치 소쿠리 안처럼 돼 있고 고운 모래사장, 깊지 않은 수심에 백옥같이 맑은 바닷물을 간직했다.
모래사장에 앉아 있으면 왕등도의 원경이 그림같이 펼쳐지는 낙조는 황홀경을 자아낸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상사화(相思花)라고 불린다. 이 중 꽃이 하얀 상사화 자생지는 세계에서 위도가 유일하다.
그래서 '위도상사화'라는 이름을 따로 가졌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위도상사화를 주민들은 '몸부리대'라고 부른다.
부안군은 오는 9월 1∼2일 달빛을 맞으며 세계 유일의 흰색 상사화꽃인 위도상사화가 만발한 자연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밤새 걸을 수 있는 '고슴도치섬 달빛 보고 밤새 걷기 축제'를 위도 일대에서 연다.
달빛의 추억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위도는 아름다운 경치 못지않게 얘깃거리도 많다. 농어·광어·감성돔·우럭·삼치·민어·장대 등이 많아 짜릿한 손맛을 잊지 못하는 갯바위와 선상 낚시꾼들로 사시사철 붐빈다.
볼거리는 물론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넉넉해 위도는 바다를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섬이다.
▲ 교통편·요금
위도로 가는 배편은 격포항여객터미널을 이용하면 된다. 위도카페리호와 파장금고속페리호가 8차례 왕복 운항한다. 소요시간은 50분. 뱃삯은 편도 9천100원이며 차량 운반비는 중형승용차 기준 1만8천원이다.
▲ 숙박
펜션과 민박 등 숙박업소가 120여 개에 달한다. 특히 백발의 노부부가 직접 내린 커피를 만끽할 수 있는 쉐백(☎063-584-7000)과 위도빌리지(☎063-581-7790), 위도여행스케치(☎063-583-4055)를 추천한다.
자세한 정보는 부안군청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기지개를 펴는 고슴도치섬 위도 위도/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한겨레 신문 기사 작성일 : 2005.04.12. 고슴도치섬 움츠린 네몸을 쭉 펴봐 핵폐기장 시름 턴 위도 새봄맞이 망월봉 산자락에 봄 햇살이 따사롭다. 키 작은 동백나무도 아름드리 후박나무도, 길섶 유채밭도 봄빛을 내뿜는다. 깊은금·미영금·논금·살막금… 산굽이 돌 때마다 그림같은 해안이 새로 열리고, 무수히 깔린 깻돌(팥자갈)들은 한 됫박 파도에도 몸비비며 깨쏟아지는 소리를 낸다. 격렬했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설 논란을 원점으로 돌리고 위도가 새 봄을 맞았다. 찬·반으로 나뉘었던 1500여 주민들은 갈등과 반목을 떨쳐버리고 새봄맞이 단장이 한창이다. 포구마다 새우·주꾸미잡이 그물 손질에 바쁘고, 뭍에서 몰려올 우럭·놀래미 낚시꾼들을 맞기 위해 낚싯배들도 점검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한 입으로 말한다. “우리 고슴도치섬 많이 좀 알려 주시요. 도시 사람 놀래 자빠라지게 경치좋은 곳 많응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 변산반도 격포항 서쪽 14㎞, 쾌속선으로 40분 거리에 있다. 위도는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굿 띠뱃놀이(무형문화재)나 조기 파시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잖은 사건·사고로 얼룩진, 가슴아픈 섬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방폐장’ 사태뿐 아니라 서해훼리호 침몰사건(1993년)이 있었고, 더 멀리 일제 땐(1931년) 한햇동안 세 차례나 강타한 태풍에 500여척의 어선이 수장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픈 기억 몇쪽 간직하지 않은 땅이 어디 있을까. 그 기억의 장막을 걷어내면, 빛나는 섬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30개 섬(유인도 6, 무인도 24)으로 이뤄진 위도(蝟島)의 본섬은 고슴도치를 닮았다. 고슴도치 모양의 입 앞에는 식도(밥섬)가 있다. 토박이말 이름들을 일제가 한자말로 바꿨다. 위도에 딸린 외딴섬 왕등도(旺嶝島)도 본디는 ‘임금 왕(王)’자를 썼었다. 그러나 유달리 깊숙이 파인 바닷가마을인 깊은금, 흔치 않게 벼논이 있었던 논금, 개펄에 대나뭇살을 엮어 세워 고기를 잡던 살막금, 개펄 넘어 마을인 개들넘 등 지금도 정겨운 토박이말들이 많이 살아 있다. 모두 덜 훼손된 환경과 빼어난 경치를 간직한 곳들이다. 여객선이 닿는 파장금항은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높던 곳이다. 위도 남쪽 바다가 바로 조기잡이의 보물창고였던 칠산어장이다. 위도에서 거래된 조기는 영광 법성포에서 말려져 영광굴비로 거듭났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각지에서 몰려온 수백척의 배들이 위도를 둘러싸다시피 하며 조기를 잡았고, 파장금항에 들어와 수상시장인 파시를 이뤘다. 당시 파장금항은 뱃사람들에게 술 따위를 파는 여성이 600명에 이를 정도로 흥청대는 ‘도시’였다고 한다. 파장금항 마을 뒤쪽엔 미로처럼 얽힌 당시 술집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70년대말 다시 키조개잡이로, 80~90년대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며 붐비던 위도는, 99년 섬 일주도로(27㎞)가 뚫린 뒤 이젠 깨끗한 자연과 경관을 자랑하는 사철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기암절벽 바닷가엔 홍합과 돌미역·돌김이 깔렸고, 산자락엔 달래·냉이·쑥이 지천이다. 숲길마다 꿩이 날아오르고, 바닷가엔 자맥질하는 수달 무리가 흔하다. 물이 빠지면 딴달래도·큰딴치도·작은딴치도·정금도 등 주변의 작은 섬들이 연결돼,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기암절벽 ‘꿈틀꿈틀’ 용도 이무기도 없건만… 위도 용머리 해안 - 변산반도 체석강 빰쳐 채석강은 변산반도 격포항 옆에 있다. 수만권의 책을 층층이 쌓아올린 듯한 모습의, 바닷가 기암절벽이다.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위도에 변산반도의 채석강 뺨치는 바위경치가 숨어 있다. 주민들이 용멀 또는 용머리라고 부르는, 외부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해안 절벽이다. 벌금리와 위도해수욕장 사이, 바다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의 끝부분, 고슴도치의 앞발에 해당하는 곳이다. 벌금항에서 800m 산길을 걸어들어가 바다쪽으로 내려서면, 거친 파도소리와 함께 얇은 돌판을 층층이 쌓아올린 검은 해안 절벽이 좌우로 500~600m 가량 펼쳐진다. 왼쪽으로 굽이돌아 튀어나온 웅장한 절벽은 수만권의 책들을 쌓아올린 격포 채석강의 모습 그대로다. 판자조각처럼 드러난 바위를 딛고 바닷가로 내려설수록 좌우의 바윗자락과 기암절벽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격포 채석강이 단순히 책을 쌓아올린 모습이라면, 이곳의 바위들은 형태가 변화무쌍하다. 층층히 쌓인 바위 사이에 굽이치는 다른 바윗자락이 틈입해 거대한 바위그림을 그려내거나, 무수한 세월 파도에 시달리며 형성된 바위굴과 벼랑이 가로질러 앞길을 막는다. 물이 빠져야 온전한 절벽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것은 격포 채석강과 한가지다. 물이 빠지면 바윗길을 내려가 왼쪽 절벽 밑으로 다가가 웅장한 절벽의 전모를 올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다. 오른쪽 절벽길을 감상하려면 깊게 파인 바위 틈을 몇 차례 건너뛰어야 한다. 바윗길을 따라 돌면, 따개비들이 깔려 파도를 뒤집어쓰고 있는 널찍한 바위자락에 닿는다. 바위의 물에 젖은 곳은 온통 김과 파래가 뒤덮고 있다. 이곳 바위절벽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이 해안이 용머리라 불린다. 이 부근 바위 밑엔 용굴로 불리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고 한다. 벌금항에서 만난 마을 토박이 정재선(67)씨 말로는 “위도와 20여㎞ 떨어진 상왕등도의 용문암까지 연결돼 있는, 이무기가 드나드는 굴”이다. 배를 타고 해안을 돌면 이 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바위자락엔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모습이 많다. 간혹 나무둥치 화석 모양의 바위형태도 눈에 띄지만, 동물의 발자국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은, 이곳에 지천인 홍합을 채취하는 주민들이나 일부 낚시꾼들만이 찾아드는 한적한 곳이다. 여기서 딴달래섬 쪽으로 떨어지는 해넘이도 아름답다. 딴달래섬 왼쪽으로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그림같은 섬들은 논금 해안 앞바다에 뜬 외조도·중조도와 작은 바위섬인 모여 등이다. 용머리 해안 들머리는 벌금항 옛 여객선터미널 옆이다. 80년대까지 간이조선소가 있던 곳으로, 바닷가엔 건조한 배를 내리던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 있다. 터미널 건물 오른쪽 산길을 따라 산책하듯 15분 가량 걸으면 용머리 해안에 닿는다. 오래 전부터 주민들이 이용하던 ‘갯것 다니는 길’(갯것 채취하러 다니던 길)이지만, 잡목이 우거져 길이 희미해졌던 것을 지난해말 몇몇 주민이 힘을 모아 오솔길을 정비했다. 자맥질하는 수달 재주도 쓰레기더미 널린 골짜기를 지나 능선에 오르면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 길은 위도해수욕장 쪽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용머리 해안 오른쪽 끝부분 용굴이 있다는 곳으로 내려서게 된다. 그러나 오른쪽길은 정비가 안된데다, 낭떠러지와 닿아 있어 위험한 길이다. 갈림길에서 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해안 절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주민들이 밧줄을 매어 놓아 잡고 내려갈 수 있다. 벌금 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시멘트길을 따라 더 가면 작은 두 바위섬까지 이어진다. 오재미라 부르는 곳으로, 용머리의 오른쪽 끄트머리가 바라다보이는 지점이다. 운좋으면 바위절벽 밑에서 자맥질하는 수달 무리를 만날 수도 있다. 위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일주도로 굽이굽이 점입가경 보석같은 깻돌해안 가슴 후련 붉게 타는 해넘이 탄성 절로 위도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차를 타고 일주도로를 달리는 것이다.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고, 파장금에서 출발해 섬을 도는 공영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그러나 버스가 단 한대뿐이어서 이곳 저곳에 머물며 버스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점이 단점이다. 택시도 한대뿐이다. 섬 일주도로 총 길이는 27㎞.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번갈아 깔린 왕복 2차선 길이다. 둘쭉날쭉한 해안선이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보이는 북서쪽 바닷가길이 더 아름답다. 벌금항과 오재미쪽 경치를 둘러본 뒤 고개를 넘으면 잘 정비된 위도(고슴도치)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위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으로, 깊숙한 만 안에 펼쳐진 단단한 모래밭이 유명하다. 차 바퀴도 안 빠져 흔히 ‘공설운동장’으로 불린다. 섬 주민의 식수를 100% 공급한다는 상수원과 정수장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좌우로 해안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대를 만난다. 돛단배 형상이 서 있는 곳. 해안 양쪽에 돌출한 악어 모습의 해안과 섬들이 이채롭다. 이어 나타나는 유달리 깊숙이 들어온 만이 깊은금(지픈금)이다. 고슴도치의 자궁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년 내내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방폐장’ 자리로 꼽혔던 곳이기도 하다. 바닷가는 모래가 아닌 자디 잘고 납작한 깻돌(팥돌 또는 콩돌)들로 채워져 있어 밟는 느낌이 색다르다. 깊은금에서 복주머니 형상의 미영금으로 넘어가면서 바닷가 절벽 옆에 서 있는 물개바위를 볼 수 있다. 미영금 지나면 논금. 영화 ‘해안선’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촬영된 곳으로, 본디 이 섬에 흔치 않던 벼논이 있던 곳이어서 논금(답구미)으로 불린다. 역시 깻돌이 깔린 해안인데, 옹기종기 모여 수묵화같은 그림을 보여주는 내조도·외조도·중조도 등 섬들 모습이 압권이다. 위도 논금에서 바라본 해넘이는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이다. 촬영세트들은 오히려 이 해안 경치를 해치는 걸림돌이다. 스님이 한분 산다는 거륜도를 바라보며 살막금(전막)으로 든다. 대나무나 싸리나무 등으로 살을 만들어 바다에 세워두고 물때를 이용해 고기를 잡던 지역이다. 위도 종주 산행길 출발지로 고슴도치의 꼬리쪽이다. 더 가면 위도띠뱃놀이의 본고장 대리가 나온다. 해마다 정월 산자락의 당에 제를 지내고 띠로 만든 배를 띄우며 풍어와 안녕을 비는 민속굿이다. 대리는 본디 대저목(큰돼지목)이었는데, 줄어져 대리로 불린다. 다음 마을은 소리로, 옛이름은 소돌목(작은돼지목)이었다. 한굽이 돌아가면 치도리가 나오고 큰딴치도·작은딴치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론 쌍둥이 형제 전설이 깃든 형제섬이 바라다 보인다. 두 딴치도는 물이 나면 위도와 연결되는데, 모래가 섞인 단단한 개펄에서 백합조개 등이 많이 난다. 더 가면 출발했던 망월봉 자락의 진리의 반대쪽 마을 개들넘이 나온다. 산자락을 에돌아 넘어가면 진리·파장금항길이 갈리는 시름마을이다. 차 타는 시간만 20여분 정도인데, 곳곳에 멈추고 경치를 감상하다 보면 반나절 시간이 모자란다. 섬 해안을 둘러보는 유람선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 |
[전라도의 숨은 명산 위도 망월봉] 홍길동 율도국 모델…전북에서 가장 큰 섬
월간산 2023년1월호 기사
김희순 광주샛별산악회 산행 고문
장보고의 해상무역로이자 한국 3대 조기 어장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蝟島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에서 여객선으로 50분 거리에 있다.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의 무대이며, 〈홍길동전〉의 율도국이 위도를 모델로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고,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여의도의 다섯 배 크기다.
위도를 쫓기듯 등산만 한다면 절반만 본 것이다. 22km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가는 ‘고슴도치길’에는 위도관아, 딴정금 육계사주, 치도리 날마통, 정금도, 용머리해안 등 독특하고 맛깔 나는 이야기보따리가 넘쳐난다.
위도에 딱히 대표주자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어쩌면 천의 얼굴처럼 발길 닿는 곳마다 도드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왕등 낙조전망대, 위도해수욕장, 용머리 몽돌해변과 악어바위, 거북바위, 사자바위, 물개바위 등 구석구석 기암괴석과 비경이 숨어 있다.
위도 서쪽 해안에서는 해넘이를, 동쪽 해안에서는 해맞이를 볼 수 있다. 섬의 맨 아래쪽에 있는 살막금 전망대에서는 해넘이와 해맞이를 모두 볼 수 있다. 특히 전 세계에서 오직 위도에만 군락하는 하얀색 ‘위도 상사화’는 해넘이전망대 주변과 위도해수욕장 뒤편 언덕에서 8~9월이면 만개한다.
고슴도치 닮아 붙여진 이름
위도는 예부터 고려와 중국을 잇는 해상교류의 중요한 경유지였으며 장보고의 해상무역로이기도 했다. 고슴도치 ‘위蝟’를 쓰는 위도라는 지명은 고려 중기 인종1년(1123년)에 송나라 사절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긍은 고려에 와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글로 기록했다.
‘죽도와 보살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섬섬(고슴도치털섬)이 있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고슴도치 털 같기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여기서 죽도는 지금의 안마도, 보살섬은 송이도, 고섬섬은 위도를 말한다. 실제로 등산로 주변에는 세찬 바닷바람으로 인해 큰 나무보다는 관목 수준의 소사나무가 많이 자란다.
위도는 50여 년 전까지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3대 어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조기 산란기인 4~5월이면 섬과 섬을 배로 건너다닐 정도로 많은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위도는 지형이 들쑥날쑥해서 배를 정박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위도에는 12곳의 항구가 있는데 항구 이름에 ‘금’자가 들어간다. 파장금, 정금, 딴정금, 용담금, 도장금, 벌금, 깊은금, 미영금, 논금, 석금, 살막금, 대장금. 여기서 ‘금’은 우리말로 내만 깊숙이 들어온 곳에 바닷물이 차 있고 배를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항구를 말한다.
주민 최주용씨의 말에 의하면 “파장금波長金은 파도가 오랫동안 치면 많은 배들이 위도에 정박하고, 머무르는 만큼 돈이 들어온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가파른 구간 많지만 다양한 코스 있어
위도의 주봉인 망월봉(254m), 도제봉, 망금봉은 모두 경사가 급하다. 지표면에서 시작해서 다시 바닥까지 내려가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4개의 코스 곳곳에 여러 갈래로 탈출로가 있다. 시름교, 개들넘교, 치도교 3개의 다리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다.
산행 들머리는 두 곳이다. 파장금 방파제에서 출발해서 전막리까지 가는 방법과 위도항에서 공영버스를 타고 전막리까지 간 다음 파장봉으로 거슬러 가는 방법이 있다. 또는 내원암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망금봉이나 파장봉으로 내려오는 코스도 있다.
위도항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고슴도치 모양 조형물이다. 위도방파제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 능선에만 올라서면 망망대해의 경이로움에 감동이다. 식도를 비롯해 북쪽으로 고군산열도, 동쪽으로 변산, 그리고 고창 선운산까지 사방으로 조망된다, 내리막길은 규암 성분의 잡석이 많아서 미끄러움에 주의가 필요하다.
최고봉인 망월봉에는 일등 삼각점과 팔각정이 있다. 산 아래쪽 멀리 서해훼리호 위령탑이 보인다. 1993년 10월 10일, 221명이 정원인 서해훼리호는 362명을 싣고 파장금항을 떠나 격포항으로 가던 중 임수도 근처에서 돌풍을 만나 침몰했다. 이 사고로 292명이 사망해 최악의 해양사고로 기록됐다.
경치 좋은 곳에는 쉬어가기 좋게 나무벤치가 곳곳에 있다. 굴곡진 해안도로 풍경도 일품이다. 치도교를 지난 농로에서 잠시 방향이 혼동되지만 묘지 쪽으로 직진하면 된다. 도제봉은 멀리 하왕등도 봉화봉(166m)을 마주보고 있어서인지 봉수대 터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주요 지점마다 위도 초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만든 안내도가 길 안내를 돕고 있다.
망금봉에서는 일명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가 한눈에 보인다. 물때에 따라 두 개의 섬 사이로 두 개의 길이 열린다. 두 섬은 생태계와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나 특정도서로 보호받고 있다.
300년 동안 사찰 지킨 배롱나무
망금봉은 오목한 해안선이 아름다운 깊은금 경치와 서해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조망 터다. 이곳에서 10여 분 내려가면 내원암 갈림길이다. 20분 거리에 있는 내원암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서 400년 역사를 가진 비구니 사찰이었으나 2021년부터 현적 스님이 기거하고 있다. 스님에게 차담을 요청하니 흔쾌하게 찻물을 우려 준다.
세존전 앞에서 300년 세월을 지킨 배롱나무가 압권이다. 화순 만연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와 버금갈 정도로 기품이 있는 보호수다. 배롱나무는 해마다 껍질을 벗으며 단단해진다. 그러한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의 욕망을 떨쳐버리라”는 의미로 절집에 배롱나무를 심는다.
내원암 갈림길에서 3.7km 더 가면 섬의 끝인 석금(전막)이다. 이곳에는 ‘위도 띠뱃놀이 전수관’이 있다. 해마다 정월초나흘이면 특별한 행사가 시작된다. ‘띠뱃놀이’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별신굿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어제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온 마을 사람들이 참가하는 용왕제를 끝으로 띠배를 바다에 띄워 고깃배의 안전과 만선을 기원한다. 1978년 전국민속 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다.
위도는 바다에 있는 지질공원이다. 한때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암질이 단단하다. 위도해수욕장 옆 벌금리는 거대한 바위가 둥글게 휘감긴 모양이 달 같다 하여 ‘대월습곡’이란 명칭을 얻었다. 습곡지형은 지층이 수평으로 퇴적된 후 강한 압력을 받아 물결 모양으로 휜 상태를 말하는데 바위들이 겹겹이 쌓인 장미꽃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 근처는 8,500만 년 전 후기 백악기 육식공룡알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지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산행길잡이
위도항-위도방파제-파장봉-시름교-망월봉-개들넘교-도제봉-치도교-망금봉-내원암 갈림길-석금(전막리) (14km 6시간 10분)
위도항-버스 이동-내원암 입구-망금봉-치도교-도제봉-개들넘교-망월봉-시름교- 파장봉-위도항 (11km 5시간)
교통(지역번호 063)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까지 배편이 1일(07:55~16:35) 6회 운행한다. 요금은 8,300원이며 약 50분 소요된다. 위도항에서 나오는 배는 1일(07:45~16:45) 6회 운행한다. 문의 대원카훼리호 581-1997, 파장금 카훼리호 581-0023, 부안여객터미널 581-1997. 위도항에는 배 시간에 맞추어 공영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요금 2,000원이며 막금까지 운행한다. 버스 기사의 위도 관광지 해설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다.
숙식
바닷가에 펜션이 많지만 숙박비와 식사 가격이 다양하다. 깊은금해수욕장 옆에 있는 핀란드펜션(010-2014-9993)이 가격에 있어 정직하고 친절하다. 1박 10만 원이다. 펜션 옆에 횟집이 두 곳 있어서 참소라, 광어회, 장어 등으로 술과 식사 모두 가능하다.
봄볕 맞으러 섬으로 떠날까
한겨레 기사 입력일 : 2005.04.08.
위도/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고슴도치섬 움츠린 네몸을 쭉 펴봐 핵폐기장 시름 턴 위도 새봄맞이
망월봉 산자락에 봄 햇살이 따사롭다. 키 작은 동백나무도 아름드리 후박나무도, 길섶 유채밭도 봄빛을 내뿜는다. 깊은금·미영금·논금·살막금… 산굽이 돌 때마다 그림같은 해안이 새로 열리고, 무수히 깔린 깻돌(팥자갈)들은 한 됫박 파도에도 몸비비며 깨쏟아지는 소리를 낸다.
격렬했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설 논란을 원점으로 돌리고 위도가 새 봄을 맞았다. 찬·반으로 나뉘었던 1500여 주민들은 갈등과 반목을 떨쳐버리고 새봄맞이 단장이 한창이다. 포구마다 새우·주꾸미잡이 그물 손질에 바쁘고, 뭍에서 몰려올 우럭·놀래미 낚시꾼들을 맞기 위해 낚싯배들도 점검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한 입으로 말한다. “우리 고슴도치섬 많이 좀 알려 주시요. 도시 사람 놀래 자빠라지게 경치좋은 곳 많응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 변산반도 격포항 서쪽 14㎞, 쾌속선으로 40분 거리에 있다. 위도는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굿 띠뱃놀이(무형문화재)나 조기 파시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잖은 사건·사고로 얼룩진, 가슴아픈 섬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방폐장’ 사태뿐 아니라 서해훼리호 침몰사건(1993년)이 있었고, 더 멀리 일제 땐(1931년) 한햇동안 세 차례나 강타한 태풍에 500여척의 어선이 수장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픈 기억 몇쪽 간직하지 않은 땅이 어디 있을까. 그 기억의 장막을 걷어내면, 빛나는 섬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30개 섬(유인도 6, 무인도 24)으로 이뤄진 위도(蝟島)의 본섬은 고슴도치를 닮았다. 고슴도치 모양의 입 앞에는 식도(밥섬)가 있다. 토박이말 이름들을 일제가 한자말로 바꿨다. 위도에 딸린 외딴섬 왕등도(旺嶝島)도 본디는 ‘임금 왕(王)’자를 썼었다. 그러나 유달리 깊숙이 파인 바닷가마을인 깊은금, 흔치 않게 벼논이 있었던 논금, 개펄에 대나뭇살을 엮어 세워 고기를 잡던 살막금, 개펄 넘어 마을인 개들넘 등 지금도 정겨운 토박이말들이 많이 살아 있다. 모두 덜 훼손된 환경과 빼어난 경치를 간직한 곳들이다.
여객선이 닿는 파장금항은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높던 곳이다. 위도 남쪽 바다가 바로 조기잡이의 보물창고였던 칠산어장이다. 위도에서 거래된 조기는 영광 법성포에서 말려져 영광굴비로 거듭났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각지에서 몰려온 수백척의 배들이 위도를 둘러싸다시피 하며 조기를 잡았고, 파장금항에 들어와 수상시장인 파시를 이뤘다. 당시 파장금항은 뱃사람들에게 술 따위를 파는 여성이 600명에 이를 정도로 흥청대는 ‘도시’였다고 한다. 파장금항 마을 뒤쪽엔 미로처럼 얽힌 당시 술집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70년대말 다시 키조개잡이로, 80~90년대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며 붐비던 위도는, 99년 섬 일주도로(27㎞)가 뚫린 뒤 이젠 깨끗한 자연과 경관을 자랑하는 사철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기암절벽 바닷가엔 홍합과 돌미역·돌김이 깔렸고, 산자락엔 달래·냉이·쑥이 지천이다. 숲길마다 꿩이 날아오르고, 바닷가엔 자맥질하는 수달 무리가 흔하다. 물이 빠지면 딴달래도·큰딴치도·작은딴치도·정금도 등 주변의 작은 섬들이 연결돼,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기암절벽 ‘꿈틀꿈틀’ 용도 이무기도 없건만… 위도 용머리 해안
채석강은 변산반도 격포항 옆에 있다. 수만권의 책을 층층이 쌓아올린 듯한 모습의, 바닷가 기암절벽이다.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위도에 변산반도의 채석강 뺨치는 바위경치가 숨어 있다. 주민들이 용멀 또는 용머리라고 부르는, 외부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해안 절벽이다. 벌금리와 위도해수욕장 사이,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의 끝부분, 고슴도치의 앞발에 해당하는 곳이다.
벌금항에서 800m 산길을 걸어들어가 바다 쪽으로 내려서면, 거친 파도소리와 함께 얇은 돌판을 층층이 쌓아올린 검은 해안 절벽이 좌우로 500~600m 가량 펼쳐진다. 왼쪽으로 굽이돌아 튀어나온 웅장한 절벽은 수만 권의 책들을 쌓아올린 격포 채석강의 모습 그대로다. 판자조각처럼 드러난 바위를 딛고 바닷가로 내려설수록 좌우의 바윗자락과 기암절벽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격포 채석강이 단순히 책을 쌓아올린 모습이라면, 이곳의 바위들은 형태가 변화무쌍하다. 층층히 쌓인 바위 사이에 굽이치는 다른 바윗자락이 틈으로 파고들어 거대한 바위그림을 그려내거나, 무수한 세월 파도에 시달리며 형성된 바위굴과 벼랑이 가로질러 앞길을 막는다.
물이 빠져야 온전한 절벽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것은 격포 채석강과 한가지다. 물이 빠지면 바윗길을 내려가 왼쪽 절벽 밑으로 다가가 웅장한 절벽의 전모를 올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다. 오른쪽 절벽길을 감상하려면 깊게 파인 바위 틈을 몇 차례 건너뛰어야 한다. 바윗길을 따라 돌면, 따개비들이 깔려 파도를 뒤집어쓰고 있는 널찍한 바위자락에 닿는다. 바위의 물에 젖은 곳은 온통 김과 파래가 뒤덮고 있다. 이곳 바위절벽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이 해안이 용머리라 불린다. 이 부근 바위 밑엔 용굴로 불리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고 한다. 벌금항에서 만난 마을 토박이 정재선(67)씨 말로는 “위도와 20여㎞ 떨어진 상왕등도의 용문암까지 연결돼 있는, 이무기가 드나드는 굴”이다. 배를 타고 해안을 돌면 이 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바위자락엔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모습이 많다. 간혹 나무둥치 화석 모양의 바위형태도 눈에 띄지만, 동물의 발자국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은, 이곳에 지천인 홍합을 채취하는 주민들이나 일부 낚시꾼들만이 찾아드는 한적한 곳이다.
여기서 딴달래섬 쪽으로 떨어지는 해넘이도 아름답다. 딴달래섬 왼쪽으로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그림같은 섬들은 논금 해안 앞바다에 뜬 외조도·중조도와 작은 바위섬인 모여 등이다.
용머리 해안 들머리는 벌금항 옛 여객선터미널 옆이다. 80년대까지 간이조선소가 있던 곳으로, 바닷가엔 건조한 배를 내리던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 있다. 터미널 건물 오른쪽 산길을 따라 산책하듯 15분 가량 걸으면 용머리 해안에 닿는다. 오래 전부터 주민들이 이용하던 ‘갯것 다니는 길’(갯것 채취하러 다니던 길)이지만, 잡목이 우거져 길이 희미해졌던 것을 지난해말 몇몇 주민이 힘을 모아 오솔길을 정비했다.
쓰레기더미 널린 골짜기를 지나 능선에 오르면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 길은 위도해수욕장 쪽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용머리 해안 오른쪽 끝부분 용굴이 있다는 곳으로 내려서게 된다. 그러나 오른쪽길은 정비가 안된데다, 낭떠러지와 닿아 있어 위험한 길이다. 갈림길에서 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해안 절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주민들이 밧줄을 매어 놓아 잡고 내려갈 수 있다.
벌금 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시멘트길을 따라 더 가면 작은 두 바위섬까지 이어진다. 오재미라 부르는 곳으로, 용머리의 오른쪽 끄트머리가 바라다보이는 지점이다. 운 좋으면 바위절벽 밑에서 자맥질하는 수달 무리를 만날 수도 있다.
일주도로 굽이굽이 점입가경 보석같은 깻돌해안 가슴 후련
붉게 타는 해넘이 탄성 절로
위도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차를 타고 일주도로를 달리는 것이다.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고, 파장금에서 출발해 섬을 도는 공영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그러나 버스가 단 한대뿐이어서 이곳 저곳에 머물며 버스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점이 단점이다. 택시도 한 대뿐이다.
섬 일주도로 총 길이는 27㎞.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번갈아 깔린 왕복 2차선 길이다. 둘쭉날쭉한 해안선이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보이는 북서쪽 바닷가길이 더 아름답다. 벌금항과 오재미쪽 경치를 둘러본 뒤 고개를 넘으면 잘 정비된 위도(고슴도치)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위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으로, 깊숙한 만 안에 펼쳐진 단단한 모래밭이 유명하다. 차 바퀴도 안 빠져 흔히 ‘공설운동장’으로 불린다. 섬 주민의 식수를 100% 공급한다는 상수원과 정수장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좌우로 해안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대를 만난다. 돛단배 형상이 서 있는 곳. 해안 양쪽에 돌출한 악어 모습의 해안과 섬들이 이채롭다.
이어 나타나는 유달리 깊숙이 들어온 만이 깊은금(지픈금)이다. 고슴도치의 자궁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년 내내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방폐장’ 자리로 꼽혔던 곳이기도 하다. 바닷가는 모래가 아닌 자디 잘고 납작한 깻돌(팥돌 또는 콩돌)들로 채워져 있어 밟는 느낌이 색다르다. 깊은금에서 복주머니 형상의 미영금으로 넘어가면서 바닷가 절벽 옆에 서 있는 물개바위를 볼 수 있다.
미영금 지나면 논금. 영화 ‘해안선’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촬영된 곳으로, 본디 이 섬에 흔치 않던 벼논이 있던 곳이어서 논금(답구미)으로 불린다. 역시 깻돌이 깔린 해안인데, 옹기종기 모여 수묵화같은 그림을 보여주는 내조도·외조도·중조도 등 섬들 모습이 압권이다. 해넘이 또한 아름답다. 촬영세트들은 오히려 이 해안 경치를 해치는 걸림돌이다.
스님이 한분 산다는 거륜도를 바라보며 살막금(전막)으로 든다. 대나무나 싸리나무 등으로 살을 만들어 바다에 세워두고 물때를 이용해 고기를 잡던 지역이다. 위도 종주 산행길 출발지로 고슴도치의 꼬리쪽이다. 더 가면 위도띠뱃놀이의 본고장 대리가 나온다. 해마다 정월 산자락의 당에 제를 지내고 띠로 만든 배를 띄우며 풍어와 안녕을 비는 민속굿이다. 대리는 본디 대저목(큰돼지목)이었는데, 줄어져 대리로 불린다. 다음 마을은 소리로, 옛이름은 소돌목(작은돼지목)이었다. 한굽이 돌아가면 치도리가 나오고 큰딴치도·작은딴치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론 쌍둥이 형제 전설이 깃든 형제섬이 바라다 보인다. 두 딴치도는 물이 나면 위도와 연결되는데, 모래가 섞인 단단한 개펄에서 백합조개 등이 많이 난다.
더 가면 출발했던 망월봉 자락의 진리의 반대쪽 마을 개들넘이 나온다. 산자락을 에돌아 넘어가면 진리·파장금항길이 갈리는 시름마을이다. 차 타는 시간만 20여분 정도인데, 곳곳에 멈추고 경치를 감상하다 보면 반나절 시간이 모자란다. 섬 해안을 둘러보는 유람선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동으론 변산반도, 남으론 선운산 ‘한눈에’ 아담한 망월봉 거침없는 전경
위도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해안선과 아담한 산봉우리들을 고루 갖춘 섬이다.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망월봉(255m)을 비롯해 정금봉(242m)·도제봉·파장봉 등 산봉우리들이 줄줄이 솟아 빼어난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다.
그중 최고봉 망월봉은 망봉제월(望峯霽月)이라 하여, 이 산봉우리에서 떠오르는 보름달 모습을 위도8경의 하나로 꼽는다. 망월봉 등산로는 세 코스가 있다. 파장금항 옆마을 시름에서 오르는 길(1.2㎞)과 개들넘에서 오르는 길(1㎞),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쪽 코스(0.8㎞) 등이다. 개들넘쪽 길은 다소 험하고, 위령탑쪽은 짧고도 완만한 편이다.
망월봉은 키작은 소나무들과 잡목들이 덮인 산이다. 산길과 정상에 이렇다 할 그늘이 없는 대신, 전망을 가로막는 것들이 드물어 전후좌우로 펼쳐진 섬 경치를 살펴볼 수 있다. 오르는 산길엔 붉은 맹감나무 열매들이 널렸고, 진달래는 가지 끝에 바짝 힘을 주며 꽃잎 터뜨릴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곳곳에 작은 동백나무들도 나타난다. 산길 중간에 나무의자를 마련해 놓아 앉아 쉴 수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동쪽으로 변산반도 격포쪽 산줄기들이 손에 잡힐 듯하고, 북쪽으론 식도와 상·하 왕등도, 남쪽엔 칠산바다와 영광 땅, 고창 선운산도 눈에 들어온다. 안내판과 돌탑이 있는 꼭대기는 옛날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였다는데, 사각형 석축 흔적이 있고 그 위에 헬기장 자리가 있다. 왕복 1시간30분이면 여유있게 다녀올 수 있다.
위도 산봉우리들을 잇따라 밟으며 섬 전체를 조망하는 등산로도 마련돼 있다. 세가지 코스가 있다. 종주 코스는 위도 남서쪽 끝자락 살막금에서 올라 망금봉~도제봉~망월봉을 거쳐 위령탑 쪽으로 내려오는 12㎞ 산길이다. 6시간 가량 걸린다. 위령탑이나 시름에서 올라 망월봉~도제봉~진말고개~위도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5㎞ 산길(2시간30분), 위도해수욕장에서 올라가 진말고개~망금봉~살막금으로 내려가는 7㎞ 산길(3시간30분)도 있다.
위도 여행정보(지역번호 063)=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부안나들목을 나간다. 격포·변산 팻말을 보고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읍 지나 변산반도 북서쪽 해안을 따라 격포항으로 간다. 남쪽에선 줄포나들목을 나와 곰소항 거쳐 격포로 간다. 격포항에서 신광카훼리2호와 위도카훼리호가 하루 일곱차례(07시·08시·09시40분·11시50분·13시10분·15시20분·16시50분 출발) 위도 파장금항을 오간다. 편도 요금 6700원, 승용차(운전자 1인 포함)는 편도 2만4000원. 승용차를 가져갈 경우 들어갈 때 미리 나오는 배편을 예약하는 게 좋다.
왕등도는 월·목 한차례씩 위도에서 왕복. 신광카훼리 581-0023. 위도카훼리 581-1997. 위도 안에 홍합죽·붕장어탕, 각종 회와 오리고기를 내는 그곳에가면(582-2630·깊은금), 백합죽과 각종 회를 내는 해너미식당(581-7886·파장금항), 매운탕과 회를 내는 여명횟집(581-3700·벌금) 등 15개의 횟집·식당이 있다. 민박집은 120여곳. 마을마다 민박집이 있고 식당도 대개 민박을 겸한다. 여관 간판을 내건 집도 민박 형태다. 펜션형 숙소도 있다.
시설에 따라 1박 2만~5만원선. 문의는 위도면사무소. 공영버스 1대(일주요금 2000원), 택시 1대(일주관광 2만5000원)가 있다. 낚싯배는 57척(3~10t). 하루 임대 8인승 30만원부터. 주변 바위섬까지 배삯은 1인 1만원. 봄부터 우렁·놀래미·광어 등이 잡힌다. 문화유적으로 치도 산자락의 백제시대 고분군, 조선시대 위도 관아, 내원암, 진리 당집 등이 있다. 위도면 사무소 583-3804.
불타는 하늘 불타는 바다…그 사이의 섬
전북 부안의 ‘고슴도치섬’ 위도
서울신문 기사 입력일 : 2016-08-31
글 사진 부안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수많은 사람과 사연들을 실은 배가 전북 부안의 격포항을 떠나 바다 위를 힘차게 내달린다. 행선지는 위도다. 배 오른쪽으로 임수도가 떠 있다. 섬 주변의 조류 흐름이 유난히 거칠다는 곳.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의 아픔이 잠긴 곳이자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인천 백령도와 장산곶의 중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위도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4㎞ 남짓 떨어져 있다. 쾌속선으로 40여분 거리다. 섬엔 아픈 기억이 여전하다. 서해훼리호 외에도 일제강점기인 1931년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섬을 강타한 태풍에 500여척의 어선이 수장된 일도 있다. 하지만 짙게 드리운 그 기억들을 한꺼풀 걷어내면, 섬은 그제야 제 진면목을 드러낸다.
●흑산도·연평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조기 파시로 이름 높던 곳
위도(蝟島)는 한자 표현 그대로 고슴도치(蝟) 섬이다. 섬의 모습이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이도 있고, 바람에 견디기 위해 작달막한 체구에 삐죽 솟은 모양으로 자란 소나무가 고슴도치의 털을 닮아 그리 부른다는 이도 있다. 위도를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차를 타고 일주도로를 달리는 것이다. 최근엔 자전거로 돌아보는 동호인들도 꽤 늘었다. 섬을 도는 공영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한데 단 한 대뿐이어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게 단점이다.
섬 일주도로는 총 27㎞ 정도다. 왕복 2차선 길이어서 어디든 수월하게 갈 수 있다. 들머리는 카페리가 닿는 파장금항이다. 예서 북서쪽 바닷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일반적이다. 위도는 흑산도, 연평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조기 파시로 이름 높던 곳이다. 위도 남쪽 바다는 조기잡이로 이름난 칠산어장.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수백 척의 어선이 조기와 삼치를 잡기 위해 몰려와 파장금항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덕에 파장금 앞의 밥섬(식도)까지 정박한 배들이 늘어섰고, 주민들이 배를 다리 삼아 두 섬을 오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태 전한다. 돈과 사람이 몰리다 보니 포구도 덩달아 흥청댔다. 당시 파장금항엔 뱃사람들에게 술 따위를 파는 여성이 600명에서 많게는 10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뱃사람들과 술집 여인네들 사이에 오죽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사랑에 빠진 술집 여인과 함께 도망치다 걸려 몸값 물어주고 만신창이가 된 이가 적지 않았고, 죽자 사자 소란 피우는 이들은 발부리에 차이는 돌만큼 허다했다. 이런 사연들을 기억하고 있는 술집 쪽방 골목이 지금도 파장금항 마을 뒤쪽에 그대로, 혹은 반쯤 허물어진 채 남아 있다.
●너른 소금벌 많다는 마을 벌금리… 얇은 돌판 켜켜이 쌓인 검은 해안 절벽
파장금항에서 일주도로를 따라가다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이 벌금이다. 너른 소금벌이 많아 벌금이라 했다는데, 이처럼 위도 곳곳엔 정겨운 순우리말 이름의 마을들이 여태 남아 있다. 유달리 깊숙하게 파였다고 해서 깊은금, 섬에선 드물게 논이 있었다는 논금, 개펄에 대나무살을 엮어 세워 고기를 잡았다던 살막금, 개펄 너머 마을인 개들넘 등이 그렇다.
벌금리 마을 안쪽의 포구에서 옛 여객선터미널 쪽으로 가다 보면 얇은 돌판이 겹겹이 쌓인 검은 해안 절벽이 펼쳐진다. 현지인들이 ‘위도의 채석강’이라 부르는 용머리 해안으로 수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하다는 격포 채석강의 자태를 빼닮았다. 터미널 건물 앞으로 난 시멘트길은 두 개의 작은 바위섬까지 이어진다. 현지인들이 오재미라 부르는 곳이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바위섬의 기세가 장하다. 이처럼 범상하지 않은 모양새 때문인지 무속인들이 즐겨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촛불에 그을린 자국 등 섬 여기저기에 치성의 흔적들도 역력하다. 벌금항에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정금도다. 장희빈의 숙부가 이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벌금리에서 고개를 넘으면 위도 해수욕장이다. 깊숙한 만 안에 펼쳐진 거무튀튀한 모래밭이 인상적이다. 해변의 모래는 단단하기로 이름났다. 차 바퀴가 안 빠질 정도란다. 해변 뒤 모래언덕에 위도상사화 꽃밭이 조성돼 있다. 상사화(相思花)는 꽃이 잎을 못 보고 잎도 꽃을 못 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초가을 무렵 피는 꽃무릇을 상사화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둘은 개화 시기나 모양새가 다소 다르다. 위도에는 유독 꽃잎이 하얀 상사화가 자생한다. 그래서 ‘위도상사화’라는 이름을 따로 가졌고 학명 첫머리에도 영문으로 ‘Korea’가 표기된다. 주민들은 위도상사화를 ‘모모릿대’라고 부른다. 고구마 줄기 닮은 꽃대를 무치면 어지간한 나물보다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유달리 깊숙하게 휘어진 만 ‘깊은금’… 영화 ‘해안선’ 촬영지 ‘논금’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유달리 깊숙하게 휘어진 만이 나온다. 깊은금이다. 고슴도치의 자궁에 해당되는 곳. 해변은 모래가 아니다. 잘고 납작한 깻돌 일색이다. 이 때문에 밟는 느낌이나, 파도에 부딪치는 소리가 모래해변과 사뭇 다르다. 깊은금에서 복주머니 모양의 미영금으로 넘어가면 바닷가 절벽 옆에 서 있는 물개바위를 볼 수 있다. 미영금 지나면 논금이다. 해안은 역시 깻돌이다. 뱀대가리를 닮았다는 사두혈과 내·외조도 등 섬들이 고즈넉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풍경 덕에 영화 ‘해안선’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논금을 지나 산자락을 힘차게 오르면 살막금이다. 대나무 등으로 만든 살을 바다에 세워 물때를 이용해 고기를 잡던 곳이다. 지금도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포인트 중 하나다. 살막금 언덕 일대도 위도상사화 군락지다. 해넘이 때 특히 아름다운 풍경을 선보인다. 붉게 달궈진 해가 바로 앞의 거륜도와 멀리 내·외조도 일대를 물들이며 바다로 잠긴다.
대리는 위도띠뱃놀이(국가무형문화재 82-3)의 본고장이다. 해마다 정월이면 띠로 만든 배를 띄우며 풍어와 안녕을 비는 굿판을 벌인다. 대리마을 윗자락의 ‘위도 띠뱃놀이 전수관’에 들르면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던 민속놀이의 원형을 접할 수 있다. 이어 한 굽이 더 돌아가면 치도리가 나오고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위도관아(전북도유형문화재 101호)는 꼭 둘러보는 게 좋겠다. 섬 지방을 통틀어 유일하게 남은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이다.
이제 루너티큐, 월광병 환자가 될 시간이다. 사실 위도를 찾은 것도 곱게 핀 상사화 보며 달빛 기행 즐기자는 뜻이었다. 보름달은 휘영청 떠올랐는데 사위는 여전이 붉다. 너무 가뭄이 심해 달도 붉게 타들어 가는 듯하다. 썰물은 섬과 섬이 연결되는 시간이다. 딴달래도, 큰딴치도, 작은딴치도 등 작은 섬들이 연결돼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또 다른 세상이 열린 듯하다. 검푸른 바다 위로는 하얀 달빛이 쏟아진다. 바다는 그 빛을 고스란히 은파로 되살려 낸다. 달빛과 바다가 어우러진 위도는 그래서 더 멋들어지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63)
→가는 길: 대원카페리와 파장금카페리가 주말과 공휴일 기준 하루 여덟 차례(07시 55분·09시 15분·10시 35분·11시 55분·13시 15분·14시 35분·15시 55분·17시 15분 출발, 10월 31일까지) 격포항과 위도 파장금항을 오간다. 평일엔 여섯 차례로 준다. 뱃삯은 어른 기준 격포 8300원, 위도 5000원. 차는 편도 1만 8000원(승용차는 쏘나타, SUV는 투싼 기준)이다. 주말에는 ‘승선 정체’가 생길 때도 있다. 승용차를 가져갈 경우 나올 때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격포항여객터미널 581-1997. 위도 내 공영버스와 택시는 각각 한 대다. 배 시간에 맞춰 운행된다. 위도버스 기사인 백은기씨는 문화관광해설사도 겸하고 있다. 010-3658-3875.
→잘 곳: 숙박과 음식점을 겸한 펜션들이 대부분이다. 아리울펜션(582-1655)은 살막금 언덕 위에 있다. 거륜도 너머로 빼어난 저물녘 풍경이 펼쳐진다. 위도상사화 군락지가 펜션 바로 아래 있다. 지난 2011년, ‘섬마을 연주회’ 차 들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가 묵어갔다고 해서 입소문 난 집이다. 하수오백숙, 갑오징어철판구이 등 독특한 요리를 맛깔나게 낸다. 생선회도 신선하고 감국발효액상차도 맛이 깊다. 치도리 쪽에는 쉐백(584-7000) 날마펜션(583-0949)이 있다. 난바다를 향한 언덕 위에 세워져 전망이 시원하다. 음식점을 겸한 민박은 파장금항 주변에 많다.
바다 절벽에 뜬 '큰 달'... 풍요의 섬 절경을 비추다
최흥수 기자
한국일보 기사 입력일 : 2023.08.23.
<215> 고슴도치섬, 부안 위도 한 바퀴
‘위도에 뜬 큰 달,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이 지난 11일 낸 보도자료 제목이다. 밤하늘의 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다고? ‘큰 달’은 다름 아닌 달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전북 부안군 위도면 진리 해안가의 퇴적층이다. 위도는 부안에서 가장 큰 섬이다. 6개의 유인도와 24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고 1,100여 명이 살고 있다. 격포항에서 위도 파장금항까지는 하루 4회(목요일은 3회) 카페리가 왕복한다. 뱃길로 16km, 50분가량 걸린다.
조기 파시로 풍요로움 누리던 고슴도치섬
늦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7일, 파장금카페리호가 격포항을 출항하자 갈매기가 떼를 지어 따라붙는다. 배와 속도를 맞춰 비행하며 손끝에 잡고 있는 새우과자를 부리로 낚아채는 솜씨가 하루 이틀 연마한 실력이 아니다. 한바탕 과자 파티를 끝낸 무리는 항구로 되돌아가지 않고 여객선 지붕에 내려앉았다. 섬 여행의 낭만을 더해 주는 동반자다.
우측 바다 수평선에는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이 줄지어 아른거리고, 좌측으로는 위도에 딸린 무인도가 하나둘 스쳐간다. 약 1시간이 걸려 파장금항에 내리자 고슴도치 조형물이 반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아주 못난 동물이라는 가정하에 생긴 비유일 텐데, 위도의 어미와 새끼 고슴도치 조형물은 귀엽기 그지없다. 섬에는 이곳 말고도 곳곳에 고슴도치 형상의 틀이 ‘포토존’으로 세워져 있다.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아 위도(蝟島)라 부른다.
한때 위도는 풍요로움의 대명사였다. 위치로 보면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정도로 어족 자원이 풍부한 ‘칠산어장’의 중심이다. 전남 영광군에서 전북 군산시 고군산군도까지 이르는 넓은 해역이다. 흔히 ‘영광굴비’로 불리는 조기도 이 바다에서 주로 잡힌다. 섬에는 논밭이 거의 없는 데도 많을 때는 4,0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섬 주민인 최만 부안문화관광해설사는 “조기 파시(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가 열리는 철이면 상인과 외지인 5,000여 명이 추가로 들어와 섬이 들썩거렸다”고 전했다. 파시는 사라졌지만 강태공에게 위도는 지금도 이름난 낚시터다. 섬 주변 투명한 바닷물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도미 우럭 농어 광어 등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황금어장에 세곡선이 지나는 길목이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였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해군 무관에 해당하는 수군첨절제사가 머물며 사법과 행정을 총괄했다. 면 소재지인 진리마을 한가운데에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숙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수군 진영의 동헌이다.
위도에 뜬 큰 달, 대월습곡
위도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섬이다. 파장금항에서 서남쪽 끝 대리마을까지 가장 빠른 길로 약 8km에 불과하지만, 구불구불 해안을 따라 이모저모 살펴보자면 여정이 무한정 길어진다. 걸어서 다 돌아보기는 쉽지 않아 여행객이나 낚시꾼은 대개 배에 차를 싣고 온다. 길쭉하게 생긴 섬 양쪽으로 해안도로가 조성돼 있는다.
진리마을에서 한 굽이를 돌면 위도해수욕장이다. 양쪽으로 낮은 산등성이가 길쭉하게 뻗어 깊숙한 만이 형성돼 있고, 그 안쪽에 제법 넓은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다. 해변에서 한참을 걸어 나가도 잔잔한 물살은 허리춤을 넘지 않는다. 외딴섬에서 한적하게 휴가를 즐기기 딱 좋은 장소다.
해수욕장 옆 공원은 위도상사화 군락지다. 육지에서 자라는 상사화와 다른 위도에만 자생하는 종으로 40~60㎝ 곧추선 꽃대에서 상아빛 화사한 꽃이 피어난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붙여진 애틋한 이름이다. 위도상사화도 이른 봄에 싹을 틔운 잎이 모두 진 후 8월 말경 꽃을 피운다. 반그늘의 산기슭과 바닷가 언덕에 무리 지어 자라는데, 이달 26일부터 섬 일대에서 ‘위도상사화축제’가 예정돼 있다.
대월습곡은 위도해수욕장에서 약 1km 숲길을 걸어가야 볼 수 있다. 해수욕장 좌측에서 숲으로 들어가면 오솔길을 따라 나뭇가지에 ‘대월습곡 지오트레일’이라는 리본이 매달려 있다. 언덕을 따라 평탄한 탐방로에는 상록활엽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덩굴식물이 뒤덮여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맞은편 산등성이와 푸른 바다가 어른거리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거칠고 넓은 암반 위로 이름처럼 커다란 달덩이 모양의 특이한 지층이 벽을 이루고 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큰 규모다. 절벽의 높이는 30m에 이르고 길이는 100m에 가깝다. 어떤 것은 1개 층이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새까만 것부터 검붉고 누런 것까지 색깔을 달리하는 수십 개 지층이 포개지고 휘어져 있다. 타원형을 이룬 지층의 형상에서 보름달을 연상해 대월습곡이다. 두꺼운 책을 두루마리처럼 접은 것처럼도 보인다. 절벽 아래 바다는 유난히 맑고 투명하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두둥실 떠오른 달이다.
습곡은 지층이 물결 모양으로 주름지는 현상이다. 주로 퇴적암층 지각에 횡압력이 작용해 형성된다. 대월습곡은 주름과 굴곡이 거의 수평으로 누워 포개진 횡와습곡이다.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지층이 양탄자처럼 말려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국내 대형 습곡이 대부분 백악기 이전에 형성된 데 비해 대월습곡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거대한 반원형 지층을 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큰 달’이라 불러 왔다. 대월습곡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10월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위도에는 이곳 말고도 지질 명소가 여럿 있다. 파장금항 고슴도치 조형물 바로 옆 바닷가에는 화산 분화의 생생한 증거인 주상절리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십 개의 연필 기둥을 세워 놓은 듯 모양이 선명하다. 벌금리에서 방파제로 연결된 작은 바위섬 '딴오자미' 퇴적층은 층층의 줄무늬가 선명하다. 행정 지명을 따 벌금리층이라 부른다. 위도에서는 가마우지를 ‘오자미’라 불렀다. 딴오자미는 벌금리에서 떨어진 가마우지 섬이라는 뜻이다.
심청전·홍길동전 전설 따라 해안도로 한 바퀴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면 섬의 속살과 바깥 바다 풍광이 정겹게 펼쳐진다. 도로변 몇몇 군데에 전망대 겸 쉼터가 조성돼 있다. 그중에서 돛단배 형상의 조형물이 설치된 상왕등도 전망대가 눈에 띈다. 언덕배기 아래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 끝에 조그마한 섬 두 개가 희미하게 보인다. 위도에 딸린 유인도 상왕등도와 하왕등도다. 육지에서 온 만큼 더 가야 하는 섬으로 여객선이 주 2회 운항한다.
상왕등도는 구한말 유학자 간재 전우가 3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이때 지명이 너무 높다 해 왕등도의 임금 왕(王)을 왕성할 왕(旺)으로 바꿨다고 한다. 간재는 순종 2년(1908)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 결심하고 왕등도·고군산군도 등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한 인물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깊은금, 미영금, 논금 등의 작은 해수욕장이 잇달아 나타난다. ‘금’은 위도해수욕장처럼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만 지형을 일컫는다. 섬에서는 이런 물굽이를 ‘구미’라 불렀는데 나중에 한자로 표기하며 ‘금’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만 해설사는 위도에는 14구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대리마을부터는 반대편 바다로 접어든다. 해안도로 우측으로 바다 멀리 부안에서 고창으로 이어지는 변산반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언덕배기 전망대에 ‘칠산어장’ 안내판과 함께 ‘심청전 전설’ 비석이 세워져 있다.
부안군은 위도에 딸린 섬 임수도 앞바다가 소설에서 효녀 심청이 뛰어내린 인당수라 주장한다. 아주 먼 옛날부터 섬에는 거센 풍랑을 잠재우기 위한 수장 풍습이 있었고, 고려시대부터 중국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이상 세계 ‘율도국’의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래전부터 신분의 고하에 따른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었고, 자연환경이 빼어난 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건 증명할 길이 없어도 풍광이 깨끗하고 수려하다는 점만은 수긍할 수 있다.
파장금과 진리마을 사이 바닷가에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1993년 10월 10일 110톤급 여객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로 숨진 292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탑이다. 사고의 원인은 정원 초과와 과적, 한마디로 ‘설마’가 빚은 인재였다. ‘파도를 헤치고 들려오는 슬픔과 절망의 통곡 소리’를 새긴 추도사는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다짐’하고 있다. 그 다짐이 부족했을까. 되풀이된 대형 참사는 많은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30년 전 섬의 아픔을 위로하듯 위령탑 주위에 위도상사화 몇 송이가 처연하게 피어 있다.
위도(부안)=글·사진 최흥수 기자
서해 훼리호 참사
정의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개설
서해 훼리호 참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362명을 태운 여객선 서해 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주민과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이었고,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입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 후 언론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후진국형 인재’로 규정했다.
사고 원인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m~14m, 파고 2m~3m로 좋지 않았다. 폭풍주의보 등의 기상 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기상 특보가 내려지면 항구별 어선 신고소에서 선박들의 입출항을 통제하지만, 사고 당일처럼 기상 특보 기준을 초과하지 않으면 선박 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운항을 결정한다. 항해 안전 운행 지침은 파고 2.5m, 바람 속도 10m 이상일 때는 여객선의 운항을 금지하고 있지만, 선장이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는 운항이 가능한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당시 기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출항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선장은 출항 결정을 내리고 출발 예정 시간인 9시에서 40분인 지난 9시 40분에 무리하게 출항을 강행하였다.
경과
1993년 10월 10일 위도를 떠나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 소속 110톤급 여객선 서해 훼리호가 침몰했다. 출항 당시의 서해 훼리호는 정원 초과 상태로 운항했다. 221명 정원에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362명이 탑승해 정원보다 141명을 더 태웠다.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15리터짜리 새우 액젓 600여 통과 낚시 도구, 자갈 7.3톤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은 상태였다. 배의 무게 중심보다 위쪽에 물건이 실리면서 평형 상태를 회복하는 복원력이 약해졌다.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m~14m, 파고 2m~3m로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악천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하였다.
오전 9시 50분께 해면에 떠 있던 그물이 왼쪽 스크루에 걸렸고, 다시 오른쪽에도 그물이 걸렸다. 속도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파도가 배를 쳤다. 과적으로 배의 복원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결국 서해 훼리호는 오른쪽으로 전복됐다. 서해 훼리호는 구명보트와 구명조끼 등을 형식적으로는 안전 규정에 맞게 갖추고 있었지만, 사고가 발생하자 구명보트[12명 정원]는 한 대만이 제대로 작동했다. 승객들은 아이스박스 등을 붙잡고 구조를 기다렸다.
정부는 사고 당일인 10월 10일, 교통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사고 수습 대책 본부를 구성하고 내무부, 국방부,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 해양경찰청장 등을 현지에 급파했다. 또 사고 해역에서는 경찰 헬기 19대, 해경 함정 16척, 육군 헬기 12대, 해군 고속정 6척, 해군 함정 20척, 민간인 어선 30척이 출동해 구조 활동을 벌였다.
사고 초기에는 몇 명이나 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은 출항 전에 여객의 이름, 주민 등록 번호, 주소 등을 적은 승객 명부를 작성해 1부를 매표소에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서해 훼리호는 군산해운항만청에 승객자 수만 무전으로 보고하고 승선자 명단은 바로 보고하지 않고 한 달에 한번 꼴로 사후 보고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 훼리호는 침몰 17일 만인 1993년 10월 27일에 곳곳이 부서지고 긁혀서 짓이겨진 모습으로 최종 인양되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의 마지막 실종자의 주검은 11월 2일 오후 5시 10분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부안군청 소속 어업 지도선이 발견했다. 이로써 희생자 292명의 주검을 모두 거두게 되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가 난 지 23일 만에 희생자 주검을 모두 인양한 것이었고, 군과 경찰, 위도 주민들, 그리고 대대적인 표류 사체 수색 작업에 나선 어민과 공무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의의와 평가
사고 선박은 승객들이 작성해 내는 승선 신고서를 부두에서 미리 받아 보관하지 않고, 배 안에서 승무원이 승객들의 명단을 파악해 여객 명부를 작성했다. 승객 명부가 없으니 사고가 발생해도 승선 인원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대형 해난 사고 뒤에는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문제점을 밝히고 철저한 후속 조치가 필요했다. 해상 교통 체계의 허점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 제시에 따라 철저한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나 극히 미진했다. 안전 불감증과 과거 역사를 기억하지 않고 경시하는 문화 속에서 불행은 싹튼다. 21년이 흐른 뒤 그렇게 싹튼 불행이 세월호 사건으로 이어져 꽃다운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며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전북 부안군 위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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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더불어소풍 원문보기 글쓴이: soo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