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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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도둑-종로2가 |
게재일 : 1971년 01월 20일 [7면] |
19일 새벽4시쯤 서울 종로2가32 종로2가 우체국(국장 김영일·43)에 3, 4명의 괴한들이 침입, 1호 금고에 붙어 있는 비상「벨」선을 끊고 금고 3개를 털어 현금7천85원과 50원 짜리 우표 1천38장을 비롯한 우표 15가지 11만8천4백97장 등 모두 1백69만7백80원 어치를 털어 달아났다.
괴한들은 전날 밤 우체국「빌딩」안에 잠입해 있다가 이날 새벽 2층으로 통하는 복도 쪽의 중문 손잡이를 「드라이버」로 따고 침입, 파출소로 연결된 비상 선과 전화선을 끊고 국장석 옆에 있는 2호 금고 등의 「다이얼」을 쇠망치로 부숴 문을 열어 뒤졌다. 이 우체국은 매일 저녁광화문우체국에 현금을 불입하기 때문에 마침 현금은 별로 없었고 금고 속에 가득찬 우표를 가져간 것으로 보고 있다.
괴한들은 우체국 속에 있는 우편함까지 뜯어 송금환을 노렸으나 실패, 다시 우체국 안 1호 금고가 들어있는 방으로 들어가 금고의 「다이얼」을 빼내고 문을 연후 우표 30원권 5천장, 40원권 1백59장, 2백원권 3백장을 털어낸 다음 밖으로 통하는 문을 따고 도망쳤다.
우체국장 김씨는 지난67년2월 동우체국장에 부임한 후 동건물 3층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우체국을 순시하기 때문에 숙직원은 두지 않고 있으며 매일하오 9시쯤에는 우체국의「셔터」를 내린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인들이 금고에 지문과 유류품 등을 남기지 않은 점등으로 보아 금고 털이 전문 전과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범인을 수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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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우변제 실시 |
게재일 : 1971년 01월 23일 [7면] |
국무회의는 22일 수표 등 유가 증권류를 우편물로 발송하고자 할 때는 10만원이하인 것에 한해 보험등기로 할 수 있게 하고 외국에서 인가 받은 제3종 우편물은 국내에서도 제3종 우편물로 취급 할 수 있도륵 한 내용의 우편규칙중 개정안」을 의결했다.
보험등기제도는 등기물이 망실될 때 실 손해액을 체신부가 배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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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전공세 허 찔려 주춤 |
게재일 : 1971년 01월 23일 [2면] |
○…김대중 신민당대통령후보의 연두회견은 후보로 지명된 후 가진 첫 회견과 그동안 지방유세에서 밝힌 각종 공약과 구상을 다시 정리하여 구체화한 내용.
「대중반정을 실현하자」는 제목이 붙은 7천자의 회견문에서 김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회견과 공화당공청을 논평하면서 『영구집권체제를 도모하고 있다는 정보와 자료를 갖고 있다』고 주장. 그는 소련 등 동구제국과의 외교 또는 준외교 길을 틀 필요가 있다는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는다 하면 예비군문제에서는 신민당의 대안을 확인하면서도 『집권하면 예비군을 전면 폐지하겠다』고-. 김후보의 회견에는 고흥문·홍익표 운영위부의장·정해영 원내총무·김홍대 전당대회의장 등 당간부들이 배석했다.
○…공화당의 윤치영 상임고문은 지난해말 당 의장서리에서 물러난 뒤 22일 하오 처음으로 공화당사에 들렀다. 당사 2층에 새로 마련된 상임고문실을 처음으로 구경한 윤고문은 『방이 산뜻해서 마음에 든다』면서 『앞으로 시간 나는 대로 들른 생각』이라면서 길재호 사무총장·문창택 사무차장 등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공화당은 당의장용으로 마련해 줬던 「벤츠」승용차를 윤씨가 계속 타도록 했다. 한편 연초부터 충남서산에 내려가 있는 김종필 고문은 지난 10일 서울집에 잠깐 다녀갔을 뿐 언제 귀경할지 모른다고 그의 측근이 전했다.
○…김포·강화사건을 추궁하기 위해 열린 국회내무위는 이 문제에만 국한하려는 공화당과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전체를 문제삼으려는 신민당의원들의 격론이 부딪쳐 일진일퇴. 김포·강화 충돌사건만을 다루어 야당에 맹타를 가하기로 작전계획을 짰던 정부와 여당은 박경원 내무장관의 강경한 태도로 초반전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야당이 야당계인사의 우편물 검열 등 정치사찰문제로 공세를 취하자 허를 찔려 주춤. 『문제를 딴데로 돌려 흐리지 말라』고 고함을 치던 공화당의원들은 갑자기 불려나온 김형수 체신차관이 『검열을 하는건 사실이나 야당우편물 검열은 않고 있다』고 명확한 부인을 않고 얼버무리자 난처해져 오히려 김차관을 힐책하기도 했다.
내무위, 격론 거듭
게재일 : 1971년 01월 23일 [1면]
국회내무위는 김포·강화에서 일어난 신민당 김대중후보경호원과 경찰관충돌사건을 놓고 이틀째 격론을 벌였다. 여야는 내무위질의가 끝난 뒤 현지조사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어 내무위원들로 진상조사소위를 구성할 것 같다. 여야총무는 이날 내무위와 병행, 조사방법을 절충했다.
22일 하오 회의에서 공화당의 김용진 박규현 양찬우의원은 김후보일행이 경찰과 충돌을 유발, 경찰이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을 탄압한다는 인상을 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①이같은 조작극의 배후조종자가 누구인가
②특정인을 위한 경호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신민당의 김상현 송원영 김수한의원은 『경찰의 야당에 대한 지나친 정치사찰과 탄압이 이번 사건의 배경』이라고 주장, ①경찰이 야당집회에서 비밀녹음을 할 수 있는 근거 ②경찰의 김후보 경호대책 ③우정연구소가 야당우편물을 검열하는 것은 헌법위반이 아니냐고 물었다. 박경원 내무장관은 ①앞으로도 공개집회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녹음을 계속 하겠으며 ②사설경호단체의 법적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배영호 법무장관은 『공개집회는 누구나 녹음할 수 있고 경찰이 임무수행상 증거보전을 위해 녹음을 하는 것은 헌법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며 김후보 발언의 사전선거운동여부는 「케이스·바이·케이스」로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 김형수 체신부차관은 『체신부에 있는 우정연구소와 분소가 우편물을 검열하는 것은 사실이나 국가안보에 관한 것만을 검열하고 야당우편물을 폐기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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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 행낭 도난 |
게재일 : 1971년 02월 08일 [7면] |
【속초=장창영 기자】지난 3일 하오 4시20분 대진을 떠나 속초를 거쳐 강릉으로 가던 동해 상사 소속 (대표 최돈응·43) 강원 영5-284호 버스 (스페어 운전사 김승화·36·강릉시)가 대진∼속초 사이의 거진·간성·죽왕·천진 등 5개 우체국에서 실은 우편 행낭 13개중 거진 우체국에서 실은 현금 1백45만원과 등기 우편 3통, 일반 우편물 30여 통이 든 우편 행낭 (번호 11755번) 1개가 없어졌다.
이날 동 버스의 우편물 수송 책임자였던 버스 조수 김남수 (33·강릉시)는 버스가 속초시 동명동 종합 버스 주차장에 닿자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말하고 행방을 감춘 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7일 하오 거진 우체국에서 속초 우체국에 우편물 발송 확인 전화를 함으로써 밝혀졌다. 경찰은 법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조수 김을 지명 수배하는 한편 운전사와 차장과의 공범 여부를 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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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건설을 기념담배·우표발매 계획 |
게재일 : 1971년 02월 15일 [8면] |
서울시는 오는 4월쯤 예정하고있던 지하철 건설 착공에 앞서 기념담배 및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로 하고 15일 전매청·체신부 등 관계 부서에 협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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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11만장 훔쳐간 범인들 인책해직 전국 장 찾아 반환 |
게재일 : 1971년 02월 22일 [7면] |
지난달 19일 종로2가 우체국에서 우표11만8천여장(1백69만원)을 훔쳐 달아났던 범인들이 당시 김영일 국장이 이 사건으로 직위 해제되고 배상조치를 받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지난 8일 우표전부를 김 국장을 만나 돌려주었음이 밝혀졌다. 이들 범인들은 모두 3명으로 장물아비의 사주를 받아 범행을 저지른 후 우표판로가 여의치 않아 고민하다가 지난 7일 김 국장과 여섯 차례의 통화 끝에 설득을 받고 지난 8일 상오 10시 서울역 앞 한진 터미널 2층서 모두 돌려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범인들은 김씨에게 지난 7일 낮12시50분쯤 우체국1층에 전화를 걸어 김 국장을 찾아 통화 끝에 경찰에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우표를 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범인과 통화 끝에 7일 상오 경찰에 신고했으나 아직까지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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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불 |
게재일 : 1971년 02월 23일 [7면] |
【여수】22일 밤11시30분쯤 여천군 돌산면 군내리 돌산 우체국에 원인 모를 불이나 55평짜리 단층 목조 건물 한 채를 모두 태우고 그 속에 들어있던 등기 우편 등 우편물 4백62통과 수입 인지·우표(7만6천원 상당)·교환대 2대·통신 기구 등 모두 1백10만원(경찰 추계)의 피해를 냈다.
이날 밤 숙직실에는 숙직자 정영수씨(49)와 이 마을 김민태(20) 김종식(17) 이대원군(16) 등 4명이 놀고 있다가 불이 나자 밖으로 뛰쳐나와 화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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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에 불 |
게재일 : 1971년 02월 27일 [7면] |
【인천】 26일 하오 6시20분쯤 인천시 창영동 133앞 인천 우체국 105호 박상묵씨가 부친 편지 8통이 다 타고 인천 세무서가 발송한 세무통신 등 우편물 30여통이 반쯤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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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돌려준 도둑 자수 |
게재일 : 1971년 02월 27일 [7면] |
지난1월19일 새벽 서울 종로2가 우체국의 금고3개를 뜯고 1백69만7백80원 어치의 우표와 현금 7만5천 여원을 훔쳐 달아났던 범인 2명 중 주범인 전과6범 김문갑(34·일명 김욱· 종로구 사직동632)이 범행 38일 만인 26일하오 정찰에 자수하고 공범 강장희(22·전과2범)가 26일 밤 신설동 무허가 하숙집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자수한 김은 그동안 우표 도난의 책임을 지고 직위 해제된 김영일 전 종로2가 우체국장의설득과 호소로 『새 삶을 찾아 자수했다』고 말했다. 가난에 못 이겨 범행했다는 주범 김은 『3월에 해산할 어린 생명에게 보다 밝은 삶을 주고 싶었으며 김 국장이 사건 후 직장에서 물러나게 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왔다』고 말하고『이제는 홀가분한 심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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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당한 "불신 체신" 시민이 사고우편 배상 요구 |
게재일 : 1971년 03월 08일 [7면] |
뒤늦게 배달되거나 또는 배달되지 않은 지급전보·내용의 오기 등 전신사무취급의 부실에서 초래된 피해를 보상하라는 색다른 요구서가 체신당국에 접수됐다. 서울영등포구 사당동608의18 김주석씨(33·한국화약 기획과장)는 지난 14년 동안 5차례에 걸쳐 고향인 월성군 서면건 천리의 큰집과 긴급 연락하는 전보·우편물들이 늦게 도착하거나 내용이 잘못 기재되어 배달되거나 배달되지 않는 등의 사고로 정신적·경제적 손실이 컸다고 주장, 전기 통신법의 규정에 따라 요금과 여비 등 5만3천6백80원을 배상하라고 지난 2일 서울 체신청에 요구했다.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 통신사무의 취급잘못으로 일에 낭패를 본 것은 14년 전 경주 공고를 졸업, 서울대학에 입학원서를 보내주도록 요청했으며 서울대학은 등기로 우송했으나 체신관서의 잘못으로 받지 못해 진학의 기회를 놓친 것을 비롯, 서울에 이사와서 경주의, 큰집과 급할 때 이용한 전보 및 우편이 다섯 번이나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최근에도 「삼촌사망」이라고 친 지급전보도 받지 못해 불효자의 낙인까지 찍혔다고 주장, 참다못해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됐다고 밝히고 꼭 금전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것은 그때마다 체신당국의 사과를 받아도 시정되지 않아 이후에는 틀림없는 시정을 촉구하는 뜻에서라고 말했다.
14년 동안 다섯 번이나 잘못된 통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7년1월=경주공고를 졸업, 서울대 공대 토목과에 진학하려고 서울대학에 입학원서 송부를 의뢰했으나 오지 않았으며 서울대학에 두 번이나 확인한 결과 등기로 원서를 발송했다는 회답을 받았다. 기다리는 중 원서접수기일을 놓쳤는데 뒤에 조사결과 원서는 경주고교로 배달되었음이 확인되었다.
▲62년11월 연세대를 졸업, 충주비료에 취직하기 위해 호적 등본을 보내라고 고향에 전보를 쳤으나 오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 뒤에 조사결과 이 전보는 집배원이 분실한 것으로 밝혀졌다.
▲69년10월1일 고향의 삼촌 김우봉씨(48)가 별세했다는 것을 알리는 부고전보의 수신인이 「김규섭」으로 둔갑, 한국화약 총무부까지는 왔으나 이 같은 이름의 직원이 없어 되돌려 보내 사망소식을 못 받아 장례에도 참석 못했다.
▲69년12월9일 김씨가 부산진구 문현동606 이삼상군(20)에게 소송 관계 서류의 작성을 알리는 전보를 쳤으나 3일만인 12일에 도착, 늑장을 부려 낭패를 빚었다.
▲70년1월9일 김씨가 고향에서 고교를 마친 동생 동석에게 졸업 축하 전보를 쳤으나 도착하지 않아 중앙전신국에 문의한 결과 송신누락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체신부는 잘못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시인, 전기통신법 제80조와 82조에서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전보가 몇 시간 안에 도착되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나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전달해야 한다는 내규에 의해 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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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의 고발 |
게재일 : 1971년 03월 09일 [1면] |
잠시 외국의 경우를 본다. 미국의 공중 전화는 10「센트」짜리 은전(다임)을 넣으면 발신음이 떨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은전만 삼키고 말 경우도 있다. 이때는「0번」을 돌린다. 교환 양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 바로 그 자리의 공중 전화에서 은전이 다시 나온다. 『땡그렁』소리를 듣고야 교환 양은 전화를 끊는다.
거리 모퉁이엔 무슨 자동 판매기들이 많다. 신문의 경우, 역시「다임」을 넣으면 된다. 그러나 「핸들」을 잘못 움직이면 돈만 들어가고 신문은 안 나온다. 신문사에 그 사실을 알리면 신문은 물론, 은전 한 잎도「스카치·테이프」에 붙여서 우송돼 온다. 자동 세탁기나 자동 거스름돈 교환기 옆엔 아예 「클레임」 (청구서 용지철)이 있다. 세탁기는 대개 30분쯤 돌아가는데, 어떤 경우는 10분쯤에서 정지하고 만다.
「릴레이」식 편지 배달도 있다. 이사를 갈 때면, 살던 지역의 우체국에 가서 주소 변경을 알린다. 이 신고 용지에는 자상하게 「앙케트」가 적혀 있다. 『임시냐, 완전 이사냐』,『임시면 언제까지 거기에 머무르느냐?』 또는 『정기 간행물 구독자의 경우, 그 이름을 적어 넣으시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또다시 이사를 할 경우에도 같은 절차를 밟는다. 이런 때는 설령 몇 년 전의 묵은 주소로 편지를 보내도 새 주소로 찾아간다. 다만 시간이 좀 지체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가항력이다.
이런 경험도 있다.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대학에 보낸 편지를 캐나다의「터론토」시에서 받아본 경우이다. 수신인이 그리로 주소를 옮긴 것이다.
지금 미국이 무슨 「신용 천국」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도 적당히 직무 태만이었고, 도둑도 있다. 은전에 가느다란 철사를 묶어서 각종 자동 판매기를 악용하는 무리도 없지 않다. 하물며 은행을 터는 강도인들 없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모든 일은 신용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원칙을 선량한 시민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도를 누구나 신뢰하고 이용한다. 당국도 그 공신력을 생명으로 여긴다. 공신력을 잃었을 때의 혼란과 충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선한 선량한 시민이 체신 당국에 불신 우편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부고 전보의 수신인 이름이 바뀐 예, 우편물 분실의 예, 송신 누락, 배달 착오 등에 대한 피해 시민의 고발이다.
정부에서 하는 우편 사무의 안전까지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에서 무슨 공신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건설은「신뢰 사회」부터』라는 구호라도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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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통신업무재개 |
게재일 : 1971년 03월 10일 [7면] |
체신부는 9일 낮 12시부터 지난 1월20일 영국우편종사원의 무기한 파업으로 인해 중단했던 한·영간 국제우편 및 국제전신업무를 재개했다고 밝혔다. 이는 영국 우정성으로부터 체신부에 온 통보에 의한 것으로 한·영간국제우편 및 국제전신업무를 재개했다고 밝혔다. 이는 영국 우정성으로부터 체신부에 온 통보에 의한 것으로 한·영간 통신업무의 정상취급을 보게되었으며 통상우편물에 한하여는 영국측 요청에 따라 당분간 취급을 보류한다고 체신부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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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갑 등 둘 기소 / 우표 도난 사건 |
게재일 : 1971년 03월 16일 [7면] |
서울지검 민경택 검사는 16일 서울 종로 2가 우체국의 거액 우표 도난 사건에 관련, 훔친 우표를 체신부에 돌려주고 자수한 김문갑 (34)과 강장희 (21)를 특수 절도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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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한장 천만원 |
게재일 : 1971년 03월 26일 [3면] |
뉴요크UPI동양】희귀한 우표와 봉투들이 경매에 붙여져 70만6백90 달러(약 3억2천만원) 에 팔렸으며 비행기가 거꾸로 나는 그림이 새겨진 1918년의 미국의24 센트 짜리 우표는 자그마치 1천만원도 넘는 값에 팔렸다.
로버트·A·시킬 회원들에 의해 경매에 붙여진 우표 및 봉투들은 세계기록을 세운 가격으로 모두 팔렸는데 1869년에 인쇄된 30 센트 짜리 우표도 7백50만원에 팔렸다.
이 회원들의 한대변인은 2백61점의 이 물건들을 사기위해 미국전역 및 유럽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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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거의가 우편 수취함 불비 |
게재일 : 1971년 03월 26일 [8면] |
서울시내에서 우편 수취함을 설치해야할 고층건물 1천9백45동 중 약 반수인 1천75동이 우편 수취함이 없어 우편물 배달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건축법상에는 연건평 4백54평 이상 되는 건물에는 우편 수취함을 설치해야할 고층건물 1천9백45동 중 약 반수인 1천75동이 우편 수취함이 없어 우편물 배달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건축법상에는 연건평 4백54평 이상 되는 건물에는 우편 수취함을 설치하도록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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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 / <제9화>우정 80년 / 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1일 [5면] 기고자 : 강직순 |
<편집자주>필자 강직순씨 (69)는 1919년 체신국 전신 사무원으로 체신계에 발을 디딘 이래 보험 과장, 남원 우체 국장, 인천 우체 국장, 부산 체신청장을 역임하고 1949년 제3대 체신부 차관으로 재직하다 52년 체신부를 떠난 재야 체신 인이다. 34년간 체신부의 거의 모든 직종을 거쳐 거의 한 평생을 체신계에서 일했다. 퇴직 후 삼척 시멘트 사장과 재야 체신인 모임인 대한 체우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동회 고문으로 있는 필자는 지금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 36의 13의 자택에서 부인 김우복씨와 다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선각자 홍영식> 신식 우체 제도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마련된 것은 1884 (고종 21년) 3월27일, 지금부터87년 전 일이다. 개화파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과 특히 홍영식 선생의 선견지명으로 우정 총국이 처음으로 문을 열고 일을 시작한 것이 같은 해 11월17일 (음력 10월l일) 일본보다는 10년 뒤졌지만 청국 보다는 빨랐다. 장안에만 해도 초가집이 그득했던 그 무렵 신식 우편 제도에 대해 홍영식 선생이 눈을 두기 시작한 것은 1880년5월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갔을 때였다. 약 4개월 동안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선생께서는 일본 우정 제도의 창시자 「마에지마」(전도밀·당시 농상공부 역체료 요두)를 찾아갔다. 「마에지마」는 홍 선생에게 우편 제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우편에 관한 서류를 보이면서 선진국 인양 자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난 홍 선생께서는 그 자리에서 당시 부산항에 일본인들이 우체국을 설치하고 우리 나라에 송달하는 우편세를 일본 내국세와 동일하게 한 이유를 따지고 외지에 설치한 우체국인 만큼 일본의 그것과는 달라야 마땅하다고 힐책함으로써 「마에지마」를 크게 놀라게 했고 훗날 우리 나라에 우체국이 설치되면 마땅히 우리 나라 제도에 따르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또한 1881년 우리 나라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훗날 우정 창시에 힘쓴 홍영식· 조준영·박정양·이상재·유길준 등 많은 인사들이 끼어 있었다. 이때 수원으로 따라갔던 강진형은 『네거리마다 구리나 돌로 만든 우체통이 있었다. 서신을 부치는 사람은 지명과 성명을 봉면에 쓰고 전표를 붙인 다음 이를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이리하여 일본의 역체국에서 파는 우표 대금이 지세수 입과 비등하다고 한다. 이는 한가지 일을 통지하기 위해 한사람을 일부러 수고시키는 괴로움을 덜고 통신할 수 있으니 과연 양법이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거만금을 거둬들여도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는다』고 보고서를 올린 것을 보면 우편 제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홍영식 선생은 일본 우정 제도를 살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883년6월 조미통상 조약에 따른 보빙정사 민영익을 따라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에도 우정 제도 시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서부 연합 전신국과 「뉴요크」 우체국을 방문했다. 도포에 갓을 쓴 홍 선생이 「뉴요크」우체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사람들은 처음 보는 선생의 의관에 우르르 몰려들어 묻는 말에 대답은 제대로 안 했지만 선생께서는 늠름한 몸가짐으로 좌중을 압도,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오던 미국 개척자들의 개척자 정신을 상기시켜줌으로써 나오실 때 전국원의 배웅을 받았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한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들은 한성 순보를 발간하면서 영국 우정·일본 역체국·덕국 우정·미국 우정·각국 우편 수입표 등을 소개하여 우정 제도의 중요성을 계몽했다. 드디어 1884년3월27일 고종의 칙명으로 우정 총국이 설치되고 병조 참판 홍영식 선생이 우정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우정 총국 건물은 당시 전동 (현 종로구 견지동 39의 3 및 7) 에 건평 35평 기와집으로 되어있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어 동양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정 청사로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지난해 사적 제2백13호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앞으로 체신 박물관으로 활용 될 것이라 한다.
이때 우정 총국 사사 (임원)로 임명된 인사는 이상만 김낙진 안종수 박영효 심상기 서교창 홍병후 서광숙 조한상 이상재 신낙균 남궁억 조창교 안욱상 성익영 등이었고 외국인으로서는 일본인 오미 (소미보명)가 총판 보조원으로 「미야자끼」 (궁기언성)가 영문 번역관으로 채용되었다. 이중 이상재는 초대 인천 우정 분 국장에 임명되었다.
선각자들의 피땀 어린 결정으로 세워진 우정 총국은 그 해 11월17일 (음력 10월1일) 우선 한성과 인천간의 업무를 처음으로 개시했다. 이때 사용한 우표로 11월20일자 서울 소인이 찍힌 5문 짜리 우표 1장, 11월28일 인천 소인의 10문 짜리 1장과 같은 날짜 서울 소인의 5문 짜리 1장 등 사용필 문위 우표 3장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2월6일까지 20여일 사이에 적어도 2개의 우편 행낭이 왕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개국한지 17일만인 12월4일 전동 우정 총국 청사에서 열린 개국 축하연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 신진정객들이 수구와 사대 정책으로 기울어져 가던 민씨 척족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로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이른바 갑신정변이 삼일 천하로 끝남에 따라 모처럼 빛을 본 우정 총국은 모진 비바람 앞에 피지도 못하고 꺾이게 되었다. 홍영식 우정 총판은 12월6일 창덕궁 뒷산 넘어 옥류천 상류에서 박영효의 형 박영교와 함께 청병의 칼 아래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쓰러져 천추의 한을 남겼다. 우정 총국은 이로써 개국 21일 만에 혁파의 비운을 맞아 문을 닫았다. 선각자는 가고 고종 32년 (1895년) 전우 총국이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 그 깊은 상처는 아물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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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 /<제9화>우정 80년 /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2일 [5면] |
<최초의 한국 우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 총국이 제대로 일도 해보지 못 한 채 문을 닫자 화려했던 모든 계획은 일장 춘몽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직원으로 채용됐던 일인 2명에 대한 처우와 일본에 주문했던 우표가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대금 지불이 골치 아픈 문제로 등장했다.
일본인 오미는 월급 1백원 「미야자끼」는 70원으로 당초 3년 기간으로 계약되었지만 우정 총국이 문을 닫은 뒤 할 일 없이 되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 일어날 일본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 2명은 갑신정변 때 서울에 있던 일인 거류민들과 함께 인천으로 재빨리 난을 피했지만 혁파령이 내리고 세상이 가라앉자 곧 시끄러운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대리 공사 「곤도오」 (근등진서) 는 이들의 고빙약정서 초본과 함께 미 불 임금 지불을 요구하고 계속 고용하겠느냐고 우리 정부 통서 독판에게 따졌다. 미 불 임금이라는 것은 갑신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 동안 월급과 여비를 한푼도 받지 못 했다는 주장이었다. 우정 사무에 전력을 기울이던 홍영식 선생이 5개월 치 월급을 주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월급과 여비 한푼 받지 않고 5개월씩 참았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독판 김윤식은 이와 같은 생떼에 대해 약정서 원본을 제시하라고 점잖게 거절했으나 곤도오 대리 공사는 원본은 갑신정변 때 없어졌다고 변명하면서 한술 더 떠서 5개월 치 밀린 월급 9백30원과 그 동안 출장 여비 54원40전, 갑신정변 때 우정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적과 표식류를 모두 분실, 동경에 가서 새로 사야하겠으니 왕복 3개월 치 여비 7백원과 6개월 치 월급 1천2백원을 선불해줄 것 등 모두 2천8백84원40전을 은화로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해왔다. 이러한 억지에 대해 김윤식은 밀렸다고 주장하는 5개월 치 월급만 청산하고 이들 2명은 해약되었다고 「곤도오」에게 통고해 버렸다. 「곤도오」는 이에 대해 그날로 만족한다고 전해와 그들의 검은 뱃속을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또 한가지 골치 아픈 문제는 일본에 주문했던 우표가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에 도착, 그 대금을 요구해온 것이다. 당초 우리 정부는 음양 태극장 도안으로 된 5종류의 문위 우표 2백80만장을 일본에 주문, 그중 2만장은 우정 총국 개설 이전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머지 2백78만장이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해인 1885년3월 2개의 궤짝에 실려 왔고 동시에 일본은 대금으로 은화 7백58원92전과 지폐 15원71전1리를 요구해 왔다. 우리 정부로서는 우정 사업을 곧 재개할 형편이 못 돼었으므로 쓸모 없는 이 우표가 반가울리 없었다. 계속 대금 지불을 독촉하면서 일본측은 가끔 우체 사업을 다시 열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우정 총국은 없어졌으나 전납이 있는 이상 갚겠다고 약속했지만 대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한해를 넘긴 우리 나라 정부는 1886년 대금 조달의 한 방법으로 이들 우표를 인천에 있는 독일 상사 세창 양행에 불하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불하하기로 한 우표 수량은 25문 짜리 50만장, 50문 짜리 50만장, 1백문 짜리 30만장 등 모두 1백30만장이었다. 세창 양행은 함부르크의 상인 메이어가 경영하던 것으로 일찍부터 홍콩·상해·천진 등지에서 기반을 갖고 있었고 1884년 인천에 지점을 개설한 후 기선·전신 기기 등 주요 물자의 매입과 금전 대여를 우리 정부에 주선하여 정부와는 인연이 있는 양상의 하나였다.
이 결정에 대해 고종 황제는 『우리 우표를 타국에 발매할 필요는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일단 취소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결국 세창 양행에 불하했다. 세창은 앞으로 우표를 다시 찍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서 이 우표를 외국의 수집가에 팔아 재미를 볼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 판매 대금이 얼마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 정부는 1886년2월3일 일본측에 우표 대금을 청산하고 일본 대장성 인쇄국이 보관하고 있던 우표 원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4월중에 원판 18개를 인수받아 당시 우체 사업 주관 청이었던 농상공부에서 다시 통신원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1905년5월 통신 사업권이 일제에게 강탈당한 후 이 원판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정 총국이 없어진 후 국내 통신은 종전의 역체 조직으로 되돌아갔으나 역체 제도가 날로 문란해진데다 외국 기관의 이용에도 불편한 점이 많아 1895년 전우총국이 설치됨으로써 10년만에 우편 사업이 재개되었다.
전우총국의 최고 책임자로는 형조 판서 조병직이 임명되고, 국내 체신 총판에 외무협판 이용직, 국외 체신 회판에는 미국인인 내무 협판 구례가 임명되었다. 구례의 원이름은 「그리트·하우스」, 일본 「요꼬하마」 주재 미국 영사로 있다가 고종 27년11월 우리 나라 정부의 내무 협판으로 임명되었고 그 뒤 대한 제국의 법무 고문으로 재임 중 사망한 사람이다. 또 기미 3·1운동 때 민국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오세창씨가 이때 전우총국의 비서 과장으로 있었다. 오 선생은 이때부터 체신계와 인연을 맺어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우정 사업에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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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 /<제9화>우정 80년 /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3일 [5면] |
<우정국과 홍영식> 우리 나라 우정 제도의 창시자 홍영식 선생은 남양 출신. 철종 6년 (1855) 영의정 홍순목의 2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육, 호는 금석, 약관 16세 때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이처럼 비범한 재능과 뛰어난 가 벌을 지반으로 홍 선생은 일찍부터 선구적 활동을 전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0살의 한창 나이에 고종으로부터 초대 우정 총국의 총판으로 임명되었으니 그의 감개는 무량했을 것이다. 총판에 임명된 후 선생께서는 침식을 잃고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병의 칼 아래 쓰러진 홍 선생의 시체는 찢어발기는 극형 (나륙) 을 당했고, 역신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했지만 그 후 광무 연간에는 죄명을 벗어 충민이란 시호를 받아 충민공이 되었다.
그러나 우정사에 있어서 우리의 은인인 홍 선생의 모습은 이와 같은 참혹한 최후와 가문이 쑥밭이 되는 바람에 오래도록 볼 수 없었다. 1936년 일본인 요시다 (길전신일)가 일한 통신 사업 합동 전말 사고라는 책을 쓸 때 홍영식 선생의 사진을 구하지 못 해 책 끝에 홍영식 선생의 사진을 구한다는 광고를 싣기도 했었다. 이처럼 뜻 있는 인사들의 가슴을 태우던 홍 선생의 사진이 해방 후 나타났으니 얼마나 모두들 기뻐했는지 모른다.
견미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현흥탁의 후손 현동완씨 (당시 YMCA 총무) 집에서 단체 사진 중에 있는 홍 선생의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우정 연구가 진기홍씨가 그 복사 사진을 중앙대학교 교수 최준씨와 자유당 때 국회의원 박영종씨로부터 구했으나 흐릿해서 사진으로는 쓸 수 없어 동화 백화점 (현 신세계 백화점) 의 초상화부 김종래 화백에게 부탁, 달채색 초상화로 그려 다시 사진으로 복사했다. 도포에 큰 갓을 쓴 기념 우표에도 나오는 홍영식 선생의 모습은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다. 그러던 중 또 한번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l967년 미국에 유학 갔던 서강대학 이광린 교수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홍영식 선생이 단독으로 찍은 아주 선명한 사진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진씨는 이 사진으로 그림 엽서 2천장을 만들어 미국에 5백장, 일본에 50장, 기타 각국 우표 수집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선각자 홍 선생의 늠름한 모습이 우리들 손에 입수됐을 때 나와 같이 있던 몇몇 동료들은 한동안 마음속으로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홍 선생의 웅대한 숨결에 간직되어 있는 우정 총국 청사가 자칫하면 헐릴 뻔했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우정 청사인 이 건물도, 우리 나라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긴 뒤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가 1884년 우정 사업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숨기고 왜곡하던 때라 일본인의 사택으로 쓰였다. 당초 이 건물은 전의감 자리였는데 홍영식 선생이 개수하여 우정 총국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적산 가옥으로 4, 5인에게 공동 불하되었고 6·25 때에도 용케 남아 있었으나 몹시 낡고 헐었었다. 민충정공 사업 협의회와 김옥균 기념 사업회인 고균회 등 사회 단체와 민속학자 최상수씨, 김문도 종군 취재 중 순직한 최병우 기자 등 많은 사람들이 구 우정 총국 청사 보존 방법을 논의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 집 장사의 손에 넘어갔고, 유서 있는 집이라고 해서 감히 헐 생각을 못하다가 마침 동대문을 개수하는데 기와를 쓰기 위해 곧 헐리게 되었다.
만약 이 소식이 진씨 등 체신계에 관심이 많은 인사들의 귀에 들어가지 앓았더라면 우리는 커다란 문화재를 없앨 뻔 하였다.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진씨는 곧바로 이 집을 사기로 마음먹고 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당시 체신 차관이던 최재호씨를 찾아갔다.
최 차관은 이 말을 듣자마자 체신부가 사겠다고 선뜻 나서 진씨는 정말 감격했다고 늘 말하고 있다. 얼마 후 당시 체신 장관 이응준씨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이 건물을 사들이자고 진언하여 보수했고, 앞으로 기념관으로 쓸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이때 이 박사는 몹시 기뻐하면서 장한 일이라고 칭찬까지 했으나 『우정국 청사는 갑신정변 때 불탔을 텐데 정말 그 건물이 남아 있느냐』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우정 총국 건물은 본 청과 주위에 많은 별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갑신정변 때 불에 탄 것은 별채였고 본 채는 그대로 남아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소상히 몰랐던 이응준씨는 그 자리에서 이 박사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얼마 후 경무대에서 경무관 곽영주씨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선각자 홍영식 선생의 참모습이 찍힌 사진과 선생의 뜻이 담긴 우정 총국 청사가 제모습 대로 우리들 앞에 남아 있게 된 것은 크게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람의 욕심에는 한이 없는지 이때 체신인들은 선생의 유해와 유족을 찾아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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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담배·우표 발행 |
게재일 : 1971년 04월 03일 [7면] |
정부는 예비군의 날을 맞아 기념 우표와 기념 담배를 만들었고 전국 각 극장은 3일 하룻 동안 예비 군복을 착용한 대원에게 20∼40%씩의 할인을 해주는 한편 고궁과 명승지는 무료 개방하는 한편 서울에선 밤 8시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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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부터 5월까지 통신 소통 강조 주간 |
게재일 : 1971년 04월 03일 [7면] |
체신부는 선거 기간 중 부재자 투표 등 우편물이 많이 늘어날 선거 통신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오는 6일부터 5월31일까지 약 2개월 동안을 「통신 소통 강조 기간」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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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제9화> 우정 80년 (5/|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6일 [5면] |
<초창기 우편> 홍영식 선생을 위시한 많은 선각자들이 우리 나라에 우정 제도를 만들 때 미국·일본 등 여러 나라의 제도를 참고한 것은 이미 적은 바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선진 제국의 제도를 참고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들 선각자들이 보여준 자주 독립성을 지나쳐서는 안될 줄로 안다. 당시 체신관계 용어 제정에 있어서 우리 선조들은 외국 용어를 무조건 수입하지 않고 적절한 용어를 창안한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제도 수입에 있어서 일본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용어에 있어서는 일본 것과 다른 것이 많았고 우리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것이 많았다.
우선 우정 총국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이 무렵 중국에선 외국인이 경영하는 해관 우정이 있었고, 우표에는 우정국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일본에서는 우편국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우정 총국이라고 다른 글자를 쓴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 글을 써오는 동안 우정 총국이라고 적어 왔지만 이는 오늘날 우정이란 단어가 쓰이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필자가 쓴 것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정자는 「세받을 정」이므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릴」정자를 쓰는 것보다는 훨씬 우정 제도를 적절히 표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표도 일본에서는 우표 혹은 절수라고 했지만 우묘라고 썼고, 일본의 서류 대신 등기로, 특사 배달을 별분전으로, 우편상은 우정 괘함으로, 배달부나 체전부는 우체군으로 각각 다른 용어를 창안해 냈고, 집신·분전·우양 등 독창적인 전문 용어를 만든 것이다. 무분별하게 외국 용어를 직수입하여 우리들 생활에 익지도 않은 외국 용어들이 활개치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 선조들의 이 같은 정신은 이제 영영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일까, 한번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해방 후 우리 나라 정부가 서고 정부 기구를 만들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구 명단을 훑어보다가 우편국을 보고 편자를 체자로 고쳐 놓으면서 『우리말이 있는데 구태여 일본 용어를 쓸 필요가 없다』고 관계자들을 꾸짖어 우편국은 우체국으로 바뀌었지만 관계자들이 다른 곳은 손대지 않고 버려 두었기 때문에 일본인 자신들도 탐탄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자가 다른 곳에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우정 총국이 개설되면서 서울 시내 우표 판매소에는 반드시 우체함이 설치되었다. 처음으로 우체함이 세워진 곳은 종로 십자가 모퉁이, 삼간 정동 노변, 돈의문 (서대문) 문안, 수표동 노변, 진고개 노변, 남대문 문안, 재동 노변, 교동 일본 공사관 앞, 수문동 궐문 앞, 동대문 문안 등 10곳에 있었다. 이 10곳의 편지를 수집 (집신) 하는 일은 3명의 집신인이 맡았다. 집신 시간은 상오 7시∼8시와 하오 5시부터 5시30분, 1일 2회였으며, 분전 (배달) 은 상오 8시30분∼9시30분, 하오 6시부터 9시까지였다.
우체 요금을 보면 거리에는 관계없이 오직 중량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균일 요금제를 채택했다. 편지는 무게가 1돈 이하 10문, 1돈 이상 2돈까지 20문, 2돈 이상 3돈까지 30문으로 무게가 1돈 증가할 때마다 10문씩 증수했지만 서울 시내간의 편지에 대해서는 요금을 반감했다.
또한 요금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여 봉투를 작게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편지 봉투는 길이 5치, 너비 1치5푼∼2치 정도가 적당하다고 규정했다. 11가지 금지 물품 내용을 보면 재미 있다.
①독약·극약 등 중독 할 우려가 있는 것
②술·간장·식초·연유 등 흘러내리기 쉬운 것
③밀납·설탕·고약 등 유동하기 쉬운 것
④유황·염초·성냥 등 발화하기 쉬운 것
⑤조수·어충의 살과 소채·과물·병선 등 부패하기 쉬운 것
⑥새·짐승·벌레 등 움직이는 것
⑦초목·식물 등 보호하기 어려운 것
⑧대소의 칼·송곳·바늘·가위·자력 등 자부하기 쉬운 것
⑨통조림·유리 도자기 등 부서지기 쉬운 것
⑩음분·외설 한문서·그림 및 그 기구 등 인심을 오혹 하기 쉬운 것
⑪금·은·보옥류 및 금·은·동화의 화폐로 사람의 양심을 해치기 쉬운 것
등이 이때 규정된 금지물이었다.
서울과 인천간의 체송법은 매일 상오 9시 서울과 인천 양 우체사에서 우체군을 1명씩 출발시켜 신장기 (현 오류동) 근처에서 만나 우체낭을 교환했다. 이때 우체군의 걸어다니는 속도는 1시간에 10리로 정했다. 한편 국제 우편은 인천, 부산, 원산의 3항구까지는 국내 요금, 항 외는 해외 요금으로 하되 이곳에 있는 일본 우체국을 당분간 사용했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통상 우편 외에 등기 우편 제도가 실시되었고 우체물에 대해서는 국가판상 책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마디하고 싶은 것은 현행 체신의 날 (12월4일)에 대한 문제다. 우정 총국이 종래 12월4일 (음 10월17일) 개국설에 따라 체신의 날이 이날로 정해진 모양인데 그후 이날은 우정 총국 개설 축하연이 열린 날로 밝혀졌다. 우정 총국이 창설된 것은 3월27일이며 개국일은 11월17일 (음력 10월1일)이므로 체신의 날은 마땅히 재고되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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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6)/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8일 [5면] |
<우표 (상)>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종이를 이용하여 그 뒤 면에 부착성 있는 도료를 발라 편지 앞면에 붙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 우편의 창시자 영국의 「로랜드·힐」경이 영국 의회에서 요금 선불을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 방법의 하나로 우표를 사용하면 된다고 답변한 대목이다. 영국에서 1840년5월6일 세계 최초의 두가지 우표가 발행된 이래 각국은 저마다 우표를 발행, 현재 20여만 종 우표가 나왔으며 거의 매일같이 새 우표가 찍혀 나오고 있다.
우정 총국이 생긴이래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우표가 발행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찍어오고 다음에는 미국에서, 다시 프랑스에서 찍어오는 등 우리 우표에는 구한말 물밀듯 다가온 외세의 손길과 선각자들의 자주 독립을 위한 몸부림이 굽이굽이 얽혀있다.
구한말 문위우표·태극우표·이화우표를 살펴보자. 우리 나라 최초의 우표는 문위 우표다. 1884년 선각자 홍영식 선생의 힘으로 창설된 우정 충국의 개설과 함께 우리 나라에도 처음으로 우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위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백문 등 5가지 종류였다. 이 우표는 당시 한국 해관 (세관)에 고빙된 「묄렌돌프」(목린덕) 의 수원인 「하스」가 상해 주재 일본 영사 「시나가와」(품천)에게 제조 가능성을 조회,「시나가와」는 일본 외무성에 이첩하여 일본에서 찍어오게 되었다.
문위 우표의 원도는 태극기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때 그린 태극기모양이 현재 국기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기의 양식은 그 후 우표나 기타 문헌에 각양각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보내온 우표는 한국 측이 제시한 이와 같은 원도는 많이 개안되었다. 문위 우표 중 5문짜리와 10문짜리는 일부가 우정 총국 개국 전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부 사용되어 사용 필 우표가 전해지고 있지만 나머지 것은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 해인 1885년3월에 도착함으로써 실제로 사용되지 못했다. 발견된 문위 우표는 8장으로 국내 소장품으로서는 진기홍씨가 갖고 있는 5문짜리 한 장일 뿐 나머지는 외국인이 갖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인 「노먼·타운센드」씨와 「헬렌·지클」여사가 5문짜리를 각각 1장씩 갖고 있으며 그 밖에 미국에 10문짜리 l장, 일본에 5문짜리 2장, 10문짜리 2장이 있다 한다.
문위 우표의 시중 유출 경위에 대해 5문짜리와 10문짜리는 극히 일부가 사용된 외에 일부는 난리 통에 약탈되었거나 흩어진 것으로 보며 다른 종류는 세창양행에 불하되었음이 최근에 밝혀진바 있다. 문위 우표의 인쇄 수량은 5문짜리 50만장, 10문짜리 1백만장, 25문짜리 50만장, 50문짜리 50만장, 1백문짜리 30만장 등 모두 2백80만장이었다. 1895년7월22일 농상공부에 통신국을 두고 우편 업무가 재개되면서 찍어낸 우표가 태극우표다. 이 우표는 5푼, 10푼, 25푼, 50푼의 4가지였다.
중앙에 태극기가 있고 네귀에 이화를 그려 넣었다. 이 우표는 전우총국 회판으로 임명되었던 미국인 구례 (「그레이트·하우스」)의 알선으로 미국「앤드루·B·그레이엄」조폐 회사에서 찍어 왔는데 모두 8백만장이었다. 태극 우표에 박힌 국명은 「죠션우표」 (조선우표) 로 되어 문위 우표에서 보던 대조선의 대자가 빠졌고 표침 대신 표표라고 썼다. 대자가 빠진 것은 당시 중국의 압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나 표자의 사용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해석이 없다. 이 우표의 초기 소인 우표가 극히 희귀한 편인데 얼마전까지만해도 황우상씨가 갖고 있는 1895년6월23일 (음력) 한성우체사 일부인이 찍힌 5푼짜리가 최고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진기홍씨가 1895년6월1일 (음력) 태극 우표의 발행 초일 인천우체사 소인 5푼짜리를 발견했다. 1897년10월 조선국을 대한 제국으로 개칭하는 정체 개혁이 있은 후 우표 면의 조선을 대한으로 고치기 위해 목각인으로 「되한」이나 「대한」으로 가쇄 한 것이 이른바 대한가쇄 우표다. 1900년1월6일 칙령으로 국내 우체 규칙이 개정, 신문 우편 요금을 종전의 최저 요금 5푼에서 2리로 인하했고 요금을 후불하는 요금 약수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에 쓰일 2리 우표를 새로 발행할 때까지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태극 우표 5푼, 25푼에 1푼 (2리 상당)으로 개정 발행한 것은 소위 「일자 첨쇄」우표다. 우리 정부는 1896년 우표를 국내에서 찍기 위해 7천2백원을 들여 독일제 인쇄기를 발주, l899년에 들여왔다. 2리에서 2원까지 이르는 14종의 이 우표는 이화와 태극이 주도안을 이루고 당초 모양을 배합한 섬세한 것으로 원도는 지창한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우표는 우리 나라 고급 인쇄 최초 작품으로 인쇄 문화 사상 기념할만한 것이다.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이 우표를 시쇄할 때에는 이화 대신 무궁화를 썼다는 것이다. 무궁화가 언제 국화로 되었는지 모르는 이 마당에 왕가의 문장이 이화 대신 무궁화가 한때 인쇄되었다는 것은 국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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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7)|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09일 [5면] |
<우표 (중)> 우리 나라 최초 유일의 구 한국 기념 우표가 1902년10월18일 발행되었다. 고종 황제가 왕위에 오른지 40년, 51세가 되어 60을 바라보는 것을 기념하는 어극 40년 기념 우표가 바로 그것이다. 3전 짜리인 이 우표는 중앙에 왕이 조하에 나올 때 쓰던 원유관을 그려 다이어먼드형으로 둘러싸고 4귀에는 이화를 넣었다. 이 우표의 특징은 「대한 제국 우표」「POSTESDE COREE」「대 황제 폐하 어극 40년 경축」「XL ANN TUBILE DAVENEMENT」하는 한문과 불문이 적혀있을 뿐 한글과 태극 도안이 보이지 않은 유일한 구 한국 시대 우표라는 점이다.
각국 우표에 그 나라의 왕이 나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왕위에 오른 지 40년을 기념하는 기념 우표에 고종의 모습을 쓰지 않고 관만 넣은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한다.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그때인 만큼 고종의 얼굴을 넣기에 민망했던 것이지 아니면 그때만 해도 아직도 실존의 얼굴을 백성들이 쓰는 우표에 넣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알 길이 없지만 결국 우리 나라 우표에 고종의 얼굴은 지금까지 끝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 우표는 5만장 발행되어 당시 인기를 모았으며 지금도 값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한편 1900년쯤부터 국내 인쇄 시설에 의해 전회에 적은바 있는 이화 우표가 새로 발행되었으나 미국에서 인쇄해온 태극 우표도 함께 쓰였다. 그중 25푼, 50푼 짜리는 용도도 적고 남은 양이 많아 수요가 많은 1전, 2전, 3전의 소액 우표로 개정하여 이것을 전위 날쇄 우표라고 부른다. 우리 정부는 국내 인쇄 시설을 갖추었으나 다시 프랑스에 독수리 우표 인쇄를 의뢰했다. 프랑스에 우표 인쇄를 주문하게된 데에는 당시 우정 고문으로 와 있던 불인 클레망세 (길맹세)의 입김과 주한 불란서 공사의 이면 공작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클레망세는 농상 공부 대신에게 두 차례 건의서를 냈다.
내용은
①외체를 실시하려면 고액 우표의 발행이 긴요하다.
②신 우표를 찍어내면 우표 수집가들이 많이 살인즉 단시일 내에 큰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③우편 엽서도 국내 유명 풍경, 비각, 성읍 등을 넣으면 고가로 팔 수 있다.
④우표를 만들 때 일본인 공정을 엄중히 감시하되 공장 출입 시에 옷을 들어 조사하고 우표 용지의 출납을 세밀히 하여 무효 지도 충분히 검사할 것이며 기구 간수에도 주의하여 위조나 기타 불미 사고를 방지할 것.
⑤이와 같은 사고로 공정이 중도에 그만두거나 항의함을 막기 위해 이미 부탁한 우표의 판도만 조각하게 하고 인쇄는 구주에 있는 어느 나라 우정성에 위탁함이 10배나 좋은 일이다.
요컨대 일본 사람들은 믿을만하지 못하며 우표의 질적 향상을 위해 자기 나라인 프랑스에 발주해 달라는 말이었다. 결국 1900년7월26일 우표 3종과 엽서를 프랑스에 발주, 3년만에 30만장이 국내에 들어왔다. 독수리가 바톤과 지구의를 양손에 들고 있는 이 우표는 서구적 냄새가 물씬나는 것이다. 하필 독수리를 그려 넣은 이 이유는 자세치 않으나 발주할 당시 제정 러시아 사람 재정 고문 알렉시프가 득세했던 때이므로 그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가 채택되었다는 설이 제일 그럴듯한 풀이다.
이 우표에 나온 독수리는 시쇄때 것 보다 한결 부드럽게 하여 실제 우표에 나타났으며 독수리의 배에 그린 태극이 시쇄와 우표간에 차이가 있어 태극 표시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클레망세의 위력이 어떠했나 하는 점은 당시 인천 우체 사장 (국장) 박기홍의 우편 관계 규칙 노트 (동기홍 소장)가 모두 불어로 되어 있으며 1900년 5월19일 내외 각 기관에 돌린 1전 짜리 우표 발행 안내서도 붙이어 클레망세 이름으로 되어 있을 정도였다.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외국 기관이 자체 통신 수단으로 강구한 해관 우편이 한동안 있었다. 일본은 일찌기 우리 나라에 불법으로 소위 재외 우편국을 설치했으나 우리 정부와 재한 외국 기관은 이들 마땅치 않게 생각해 왔다. 중국 해관 (세관) 이 중국 국립 우표 기관이 창설되기 전에 자체 우편을 가졌던 선례에 따라 한국 해관이 중국 해관 우표를 사용, 간이 우편 사무를 1899년 1월쯤에 서울, 인천 등지 해관에서 실시했다. 한국 해관 우표는 당시 중국 해관 소룡 등 우표에 한국 해관 일부인이 찍혔을 때에만 한국 해관 우표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1900년 외국 우편 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없어진 듯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우편엽서는 1900년5월10일 국내용 1전 짜리다. 이 엽서는 독수리 우표와 함께 프랑스에서 찍어왔다. 처음에는 정중한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 탓인지 한 달에 5백∼2천장 정도 팔렸으나 얼마 후 이해 타산이 빠른 우리 나라에 왔었던 일본인들이 당시 일본 엽서는 1전5리인데 반해 우리 나라 엽서는 1전이고 그것도 당시 환율로 보면 일본 돈 7리 정도면 우리 나라 엽서를 살 수 있었고 이것으로도 일본에 부칠 수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많이 팔려 한때 품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은 요금을 배로 올리라고 요구해 왔고 반년동안 통신원 총판 민상호 선생은 이를 거절하면서 버텼으나 결국 요금을 올리게 되었으니 약소 국가는 우편 요금하나 제 마음대로 매길 수 없는 비참한 처지였다. 한마디 첨가할 것은 전회에서 발견된 문위 우표가 8장 밖에 없다는 것은 일부 인이 찍힌 사용될 문위 우표가 8장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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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 (8)|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10일 [5면] |
<우표 (하)> 구 한국 시대 우리 나라 우표는 1905년4월1일 소위 한일 통신 합동 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없어지게 되었다.
1884년 선각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나오게 된 우리 나라 우표가 21년,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사이 10년간의 공백기를 빼면 11년만에 일인들의 총칼 아래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 것이다. 비록 그 동안 일본·프랑스·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우표를 찍어오기는 했으나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을 넣고 대 조선이라고 못박아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체모를 만방에 과시하려던 수많은 노력이 독수리 우표를 마지막으로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구 한국 시대의 마지막 우표는 1905년6월 말일을 기하여 그 판매를 폐지 당했다. 이 무렵 일본측에 인계한 나머지 우표는 8백40만5천1백94장으로 당시 가격으로 6억9천2백33만7천2백53원 어치였고, 엽서는 9백51만7천5백59장 7억1천9백35만4천8백26원어치나 되었다. 사장된 이들 우표와 엽서는 일부 일본 체신 박물관에 전시용으로 보관되고 대부분은 총독부시대 체신국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해방되었을 때 체신국 경리과에 근무한 김용봉씨에 의하면 6·25전까지만 해도 구 한국 시대 우표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후 전쟁통에 타버렸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정 치하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 나라는 일본의 우표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1945년 광복이 되자 다시 우리 우표가 햇볕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 우표를 제조 발행 할 때까지 잠정적인 조치로 일본 우표에 「조선 우표」라는 문자와 액면을 가쇄하여 썼지만 46년9월10일 금관을 그려 넣은 5원짜리와 이순신 장군의 늠름한 모습을 그린 10원짜리 등 제1차 보통 우표가 나왔다. 특히 1954년9월16일 독도 풍경을 넣은 2환, 5환, 10환짜리 3종의 우표는 독도가 우리 나라 영토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나온 것으로 우리 나라 일반 국민들에 대한 계몽은 물론 독도 영유권을 들먹거리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말문을 닫으라는 뜻이 담겨 져 있어 국내외에 큰 파문을 던진 것이었다.
일본은 한때 이 우표를 붙인 일본행 우편물은 취급하지 않겠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었다. 또한 1946년8월 해방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그림 엽서에는 태극기를 든 시위 군중들이 일장기를 땅에 짓밟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때 일본에서 수집가들 사이에 이 엽서가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어 주문이 쇄도했다고 하니 고소를 금치 못할 일 중의 하나다. 해방 후 1건의 기념 행사를 위해 발행한 기념 우표 중 1951년 국제 연합군의 6·25 참전을 기념하는 기념 우표는 3회에 걸쳐 44종이 발행됨으로써 기록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태리 국기를 잘못 그려 다시 발행하는 일도 있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6백여종의 보통 우표와 30여종의 항공 우표, 6백여종의 기념 우표, 3백여종의 특별 우표, 10여종의 자선 우표, 기타 각종 엽서가 발행되었다. 이들 우표와 엽서에 등장된 인물은 이준 열사·이순신 장군·세종대왕, 홍영식 선생·이승만 전 대통령·박정희 대통령 등 국내 인물과 외국인으로는 「아이젠하워」·「뤼프케」·「존슨」·「셀라시에」·「티우」·「말레이지아」 국왕·「하마니」「니제르」 공화국 대통령 등 각국 원수와 「맥아더」 장군이 등장했다.
또한 첨성대·독립문·무열왕릉, 거북선 등 문화재, 무궁화·개나리·해당화·봉선화·수수꽃 다리 등 꽃, 사슴·곰·호랑이·오소리·반딧불·원앙·두루미 등 동물, 명태·조기 등 물고기, 장구·장피리·가야금·나팔·태평소·대금, 월금 등 고전 악기, 6·25 참전국 국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상이 등장했으나 전 대통령 윤보선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태극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태극에 대한 집념이 이처럼 대단한 줄은 미처 몰랐다.
우표 이야기에 덧붙여 끝으로 일부인에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보자. 일부인은 원래 봉투에 붙인 우표를 무효화하고 발착 일시와 국명을 밝히기 위해 쓰인 것이지만 훗날 우표 수집가들에게 옛일을 고증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갑신년 10월1일 (음) 우정 총국이 문을 열고 그때 사용된 문위 우표 중 8장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적은 바와 같은데 이중 같은 해 10월3일에 서울에서 소인 한 5문짜리는 일부인이 아주 묘하게 찍혀 있어 우취가들의 가슴을 더욱 죄게 했다.
일부인이 우표에 반쯤 걸쳐 있는데 삼자는 선명하게 찍혀 있지만 왼쪽에 10월을 나타내는 ○일이 겨우 찍혀 있고, 오른쪽에는 「신」자가 3분의2 정도 보일락말락하게 찍혀 있어 일부인이 조금만 밑으로 내려갔더라면 이 우표가 10월3일자 소인 우표라는 것을 가릴 수 없 을 뻔했던 것이다. 이 우표를 갖고 있는 진기홍씨는 하늘이 도와주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판독한 다음의 묘미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구한국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런던」으로 부친 편지 일부인데 국명이 GWENDOLINE이라고 된 것이 있었다.
외국 우편 용 일부인은 원칙적으로 흑색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은 자색으로 되어 있었고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이런 국명은 없었던 것이다.
불어 사전을 찾아봐도 알 길이 없던 이 일부인의 국명을 오랜 연구 끝에 평안도 은산 광산촌에 있던 영국인들이 사설 우체국 이름을 이렇게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은산에는 고인돌 많았고 GwendoLine은 「고인돌」을 옮긴 국명이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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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 (9)|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12일 [5면] |
<배달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편지요. 전보요. 먼데 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아저씨. 가방 메고 이곳 저곳 수고하며 다니네. 집집마다 문패 달고 기쁜 소식 기다리자. 』 우체부 아저씨라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체부는 먼데 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구 한국 시대에는 설움도 많았다. 구 한국 시대 체전부는 하인들이 쓰는 벙거지를 쓰고 다녔다.
이 벙거지가 설움 받은 꼬투리가 된 것이다. 「독립 신문」은 논설을 통해 체전부들의 지위 향상를 역설하기도 했다.
이 무렵 독립 신문 논설에 나온 체전부들의 설움을 살펴보면 『…양반 칭호 하는 사람들은 체전부를 자기 집 문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 하인을 시켜 서신을 받아들이며 혹 체전부가 양반의 집 사랑에 들어간 즉 양반이 가라사대 아무리 개화한 세상이기로 벙거지 쓴 놈이 무엄하게 방에 들어오니 그럴 법이 있으랴하면서 자기 집 하인을 불러 이놈 잡아내려 문 밖으로 쫓아내라 하며 이놈 저놈 호령하고 그 괄시와 멸시가 비할 곳 없으니 일향 이러할진대 체전부 노릇 할 사람이 없을지라…』
이 당시 체전부들이 또한 애 먹은 것은 지금처럼 주소가 구분되어 있지도 않았고 문패에 이름 대신 호를 붙였을 뿐 아니라 편지를 받을 사람을 제대로 적지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안동 부사 개탁」은 안동에 부사가 여럿 있을리 없고 「대구부 비서과 이학관 여차소입납」 은 비서과에 이학관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뒷면에 친절하게도 「티구부 (대구) 비서과에 가셔 리학관 나리께 드리라」고 한글로 써서 더욱 쉬웠다. 그러나 「중관 대궐 전좌 포도청 행낭후곡 제삼와가 서향대문 김주사 댁 입납」같은 것은 주위 지형이 까다롭다든가 편지를 쓴 사람이 정확하게 적지 않을 경우 잘못 배달되기 안성마춤이었다.
실제로 김 주사에게 보내는 이 편지 (1898년3월16일) 는 김 주사 집이 제3가가 아니라 제4가였기 때문에 잘못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우리 나라는 번지라는 것이 없었고, 통 호로 표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초창기 우리 나라 체전부의 의관을 살펴보면 또한 재미있다. 물론 우체사가 있는 곳의 체전부들은 양복으로 된 정복을 입었지만 지방에 있는 우편소 체전부들은 짧은 두루마기에 벙거지를 썼고, 입에다 장죽을 물고 다니기도 했다. 벙거지 대진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를 쓰기도 했으며 신발은 미투리를 신고 있었다.
체전부들의 가방은 처음에는 목면으로 만든 것이었고 마직류 가죽 등으로 해왔다. 초창기에 체전부가 된 사람은 군노나 역졸의 후예들이 많았는데 특히 동 주인·면 주인·군 주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활약이 컸다. 동리나 면·군에서 사환으로 오래 근무한 이들은 동네 구석구석을 잘 알았기 때문에 체전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이들이 대거 체전부로 들어오고 그 동네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동·면·군 주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또 한가지 기억 나는 것은 시골 체전부들은 편지를 긴 대나무 가지에 끼워 가지고 다녔던 사실이다. 요즘 「쇼·윈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긴 대나무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편지를 그 틈 사이에 끼워들고 다니던 그 당시 체전부들의 모습은 특이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체전부들에게 아랫 동네로 가는 청첩장이나 부고를 부탁하기도 했고 편지와 우표 요금을 맡기면 이들이 어김없이 우표를 사서 붙이기도 했으니 퍽 양심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첩을 전달할 때는 대나무에 보자기를 씌워 사람들이 윗동네에 경사가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체전부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이들 주인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동네 지리와 인심을 잘 아는 것 외에 한글과 한문을 웬만큼 알아야 했다.
체전부들의 월급은 처음에는 쌀·광목·신발 등으로 주었는데 쌀은 대개 l개월에 3말∼5말 정도였다. 그 뒤에는 호봉 (3급)이 7원, 2급이 8원,·l급이 9원 정도였다. 진주 박명준씨 같은 사람은 면 주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훗날 집배원 감독까지 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주인들은 한글과 한문을 조금씩 했기 때문에 문맹이 많았던 그때인 만큼 가끔 편지를 대신 읽어주면서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답장을 써 주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우체사에서는 주판 대신 죽산을 썼다. 죽산이라는 것은 길이 15cm쯤 되는 대나무를 가지고 셈하는 것이었다. 다섯개가 되면 옆으로 하나 놓고 10개가되면 다시 옆에 하나 세워놓는 셈 법이었다. 이것은 1915년께 까지 써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체전부들은 어떤 때는 괄시를 받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애환을 함께 해오는 동안 인심도 많이 각박해져 그 후 전하라는 편지를 전하지 않고 강물에 띄워 보낸다든가 송금을 가로채는 집배원이 한 두 사람 생겨 전체 집배원들에게 누명을 끼치고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우편 배달 중에 남은 3통을 전해 달라면서 숨을 거둔 연무대 우체국 장두량씨, 하루 평균 80리를 다니며 16명 식구를 부양하며 쉬는 날에는 이발 기구를 갖고 머리를 깎아주고 극빈한 두메 환자에게 간단한 약을 전해준 충북 단양 우체국 홍해기씨 등의 이야기는 고맙고 또 고마운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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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 / <제9화>우정 80년 (10)|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13일 [5면] 기고자 : 강직순 |
<한국인 차별 대우> 왜놈들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체신 계통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나온 일본 사람들은 웃머리 몇몇을 제외하고 밑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왜놈들 중에서도 죽쟁이 급에 속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을 때마다 정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우선 월급부터 비교해 보자. 배달부의 경우 한국 사람은 1급이 70전이었으나 일본 사람은 1원을 받았다. 판임관의 경우에는 일본 사람은 무조건 6할을 가산했고 고등관은 4할을 가산했다. 가령 판임관 초봉이 15원이었을 때 우리들은 15원을 받았지만 일인들은 6할을 보탠 24원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저들은 외지 수당이라는 명목으로 6할을 가산했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다. 내가 1919년 사무원으로 들어갔을 때 일급으로 58전씩 받았지만 같이 들어온 형편 없는 일본인은 65전을 받았던 것이다.
승진에서도 차별 대우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기보에서 서기로 올라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10년 가까이 걸려야 겨우 승진할 수 있었으나 일본인들은 4, 5년이면 거의 올라갔다. 판임관이 되는데도 일본인은 5년 정도면 되는 수가 많았으나 한국 사람은 10년이 돼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봉급과 인사에서의 이와 같은 차별대우는 법상으로는 아무런 차별이 없었으나 저들이 편리한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내규라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법상으로는 평등이었지만 사실상으로는 차별 대우를 했으니 왜정 때 법은 양두구육이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 내가 대구 우체국 보험 과장으로 있었을 때 일이다. 이곳에 1년 동안 있으면서 나는 여섯번씩 이사를 다녀야했다. 물론 이때 관사는 비어 있었지만 내게는 좀처럼 줄 생각을 안했다. 과장이 여섯번 이사 다니는 동안 일본인은 서무 주사까지 모두 관사에 들어가 살았으니 왜놈들의 차별 대우는 철저한 것이었다. 그 알량한 내규에 의하면 한국 사람은 국장급이 아니면 절대로 관사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차별 정책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감사과, 인사과, 기획과 등 감독계통의 부서에는 거의 일본 사람으로 메우고 한국 사람은 창고, 우표 창구, 소포, 전신, 전화접수구, 배달 등 말단 일만 맡겼다. 체신 관리를 길러내는 양성소에서도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인사. 기획, 감독 같은 요직의 일은 가르치지 않았으며 기술 계통도 중요한 것은 다 자기들끼리만 하고 잡일만 한국 사람들에게 맡겼다. 한번은 우스운 일이 있었다. 내가 부산 우체국에 있을 때다.
일본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한국 사람 3명이 특정 우체국을 하겠다고 신청해 왔다. 이때 배달부하나 하려 해도 일본말은 물론 일본 고관들의 집까지 알아야 하는게 절대의 요건으로 붙어 있었는데 비록 청원 우체 국장이기는 했으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몰라서야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온 이들 3명을 여관으로 찾아가 『곤니찌와, 곰방와』 (안녕하십니까) 단 두 마디를 가르쳐 놓고 일본인 상사에게 일본말을 썩 잘한다고 속여 이들을 특정 우체 국장으로 임명한 일이다. 지금도 경북반동 (상주군) 정헌섭씨, 전남도성원 김병순씨, 제주애월 강기숙씨 등 그분들의 이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처럼 일본 사람들이 차별 시책이 각 분야에 걸쳐 철저히 시행되었기 때문에 해방되었을 때 많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 무렵 곤란을 받더라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기술과 경험을 부려먹자는 의견이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인사지만 체신계에 흩어져 있던 한국인 기술자와 행정 실무자들을 규합,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부산 체신청장으로 있던 길원봉씨를 비롯하여 나맹기, 정용신, 이동환, 강성소, 이신득, 이현재, 남원 우체 국장으로 있었던 필자 등 행정 실무자와 이헌곤, 노창성, 황갑성, 윤태안, 안동렬, 진해정, 신용철, 정수봉 등 기술진이 힘을 합했다. 기사 박봉조씨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끝에 경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전을 쳤으나 이미 사망했다는 답전을 받았을 때 모두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이때는 한사람의 기술자가 아쉬운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1905년 3월 우리 나라와 일본간에 국제 전화가 처음으로 개통되게 되었다. 나는 이때 독립된 대한 민국의 체신부 차관과 첫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벅차 오르는 감격에 눈을 감고 차별 대우 등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첫 통화식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당시 체신 장관 장기영씨가 귓속말을 주었다.
『방금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첫 통화 때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라고 연락왔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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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 (11)|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14일 [5면] |
<통신의 자유 박탈> 소중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체통에 넣을 수 있는 것은 통신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식 우정 제도가 마련되기 전에만 해도 대부분의 편지는 인편으로 부쳤기 때문에 편지 내용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는 경우에는 물론이고 잘 아는 사람에게 부칠 때에도 편지 내용이 중요하건 말건 타인이 읽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정 총국이 생기기전 우리 나라 편지를 보면 봉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붓으로 쓴 편지를 얇은 한지로 한번 싸고 다시 이것을 두꺼운 한지로 마치 보자기에 물건을 싸듯 차곡차곡 접고 풀로 단단히 붙여놓았다.
이처럼 단단히 조치해 놓고도 그 위에 관인을 큼직하게 찍어놓은 것도 많다. 암행 어사의 경우에는 마패를 인주로 크게 찍어놓아 편지를 갖고 가는 사람이나 중간에서 받는 사람들에게 소중히 다루도록 경각심을 높여놓고 있는 것이다. 이때 편지는 또한 요즘과는 달리 한쪽에 편지를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을 함께 쓰는 것이 관례였다.
1879년 홍영식 선생이 평안도 증산 현감에게 보낸 편지도 한쪽면에 「증산 현감, 내각 직중 후서」라고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함께 적혀 있다. 홍영식 선생의 친필로 된 이 편지 내용은 증산 현감에게 『병풍 만드는 돈을 보낸다』는 것이다. 당시 동궁 (순종) 이 홍역을 무사히 끝낸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전국 관원이 돈을 모아 병풍을 만든 것이다. 이용구의 아버지인 증산 현감 이헌기에게 왜 병풍 값을 못 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증산 현감이 그림을 잘 그렸는지 아니면 유명한 화공이 그곳에 살았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볼만한 문제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봉투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우정 총국이 생긴 이후로 생각한다.
1905년 한일 통신 합동 협약이 맺어져 일본이 우리 나라 우정 사업을 손아귀에 틀어쥐게 되면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통신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우리 나라 우정을 강점하기 시작한 1905년 바로 그해 12월31일 당시 학부 대신으로 있던 이완용이 동경에 있는 윤모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 남아 있다. 이 편지도 밑부분을 떼어 일단 검열한 자국이 남아 있다. 친일파였던 고관 이완용의 편지가 이러했다면 일반인들에 대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지난달 편지에 회답을 못했는데 다시 너의 편지를 받았다. 잘 있었느냐. 나는 다난한 때를 만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너의 아버지 일은 법원에 이야기해서 곧 풀려 나오도록 했다. 또 네가 부탁한 관비 생일은 한치유 감독에게 잘 부탁해놨으니 그리 알아라.』 한문으로 된 것을 옮겨본 것인데 그 당시 이완용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일부나마 엿 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일제의 감시하에도 1919년 기미거사를 앞두고 독립선언문을 우편으로 교묘하게 지방에 보낸 일도 있다. 미납 우편으로 보낸 이 독립선언문을 서울에서 황해도로 보내진 것으로 봉투와 함께 도봉형씨가 한국 연구원에 기탁, 지금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
편지에 얽힌 갖가지 사연도 많겠지마는 우리 문단의 거성 춘원 이광수 선생이 황해와 현해탄을 넘어 허영숙 여사에게 보냈던 사랑의 편지는 일제 밑에서 자취조차 없어진 우리 나라 우정 암흑기 동안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한 떨기 장미꽃 같은 편지가 아닐 수 없다.
『…하루하루 지나감에 따라 더욱 견딜 수 없어 그리웁고 건강 때문에 적지 않이 염려되고 있읍니다. 서로 헤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두 사람의 건강은 점점 허약해질 따름, 두 사람을 구할 길은 단지 하루라도 빨리 만나는 것 뿐으로 아외다. 3월이라고 생각만 하여도 괴롭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으니 말하기도 부끄러우나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부터 늘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는 사업이라든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만 살고 싶소이다. 동경에 돌아오니 공허와 고독에 견딜 수 없어 실로 마음 둘 바를 모르외다. 이러한 심정은 영도 같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밤도 편지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지낼까 생각만 해도 슬퍼지옵니다.…내 영이여 와주오. 와주오!』 1918년 동경에서 귀국한 애인 허영숙씨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사랑의 손길을 구하는 춘원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이때 춘원은 이미 자식까지 있는 전처와 이혼한 몸이었다. 춘원의 편지는 그후 상해에 갔을 때에도 하루가 멀다고 계속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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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2)-우정 80년(12)<제9화>강직순 |
게재일 : 1971년 04월 15일 [5면] |
<체신학교>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슬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어릴 때 다니던 학교가 없어졌을 때 허전한 감정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장하지 못할 일이다.
우리 나라의 유일한 체신요원 양성기관이었던 국립체신학교가 폐교된 것이1962년 1월, 49년 동안 1만2천여 명의 졸업생을 내놓고 문을 닫았다. 나는 기미 3·1만세가 3천리 강토를 뒤흔들어 왜놈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던 1919년에 제11회로 졸업, 동기생은 43명이었다.
처음에는 일인들이 한국사람들을 많이 쓰지 않을 속셈이었기 때문에 1기부터 6기생까지는 모두 1명씩 밖에 없었다. 그 후 체신사업이 확대되고 체신요원도 많이 필요하게 되자 점차로 우리 나라 사람도 많이 졸업하게 되었다. 체신학교 1기생으로 1913년 12월에 졸업한 이용협 씨는 지금 생존해 계시지 않으며 살아있는 선배들로서는 8기 최요익 씨, 9기 홍병훈 씨 등이다.
왜놈들의 차별 정책은 체신학교에도 미쳤다. 내가 체신학교에 다닐 때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은 학급도 달랐고 기숙사도 따로 따로 썼다. 자연히 서로 간에 경쟁심이 생기게 되었고 우리는 매사에 이를 악물고 이들보다 뛰어나려고 애썼다. 이쯤 되자 일본인들은 노골적으로 차별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고 때로는 감정적인 처사를 자행하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기숙사 제1호실에서 4, 5명의 동료와 함께 나는 호떡내기로 화투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 판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일본인 기숙사 사감 청수란 자가 우리 방을 급습했다. 우리는 늘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딴 돈과 화투를 날쌔게 천장에 감추고 시치미를 떼 화를 면한 일이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제3호실에 있던 중광이란 일본인 학생이 고자질했다는 것이었다. 중광은 한국인 학생 중에서 제일공부를 잘했던 1호실 학생만 없어지면 자기가 다른 학생들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날 밤 기회를 노리다 청수에게 고자질했던 것이다.
체신학교의 역사를 더 들으면 구한말로 올라간다. 1887년 조선전보총국이 창설됨에 따라 정부는 양장과 공두의 파견을 화전 국에 의뢰하는 한편 배재 학당에서 외국어에 능통한 학생 10명을 전국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시킨 것이 첫 시초라 하겠다. 그 후 1897년 7월 전보 학습 원이 서울과 지방에 있었고 1900년 3윌 통신원이 창설되자 민상호 총판에 의해 전무학도와 우무학도가 법제상의 근거를 가진 완전한 3년제 학교조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전무 우무학도는 한종익 교장과 더불어 존속해오다가 1905년 4월 통신사업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감에 따라 없어지게 되었다. 일정 때에는 체신요원 양성소 (현 국민대학 자리) 와 무선전신 강습소에서 체신요원 양성을 맡아왔으나 해방 후 1946년 체신학교로 발족하게 되었다. 그 후 2년제 초급대학 과정까지 곁들여 명실공히 우리 나라 체신요원의 양성기관으로 발전을 거듭해온 것이다. 그러나 5·16 혁명 이후 예산상의 이유와 공업고등학교와 공과대학에 전기통신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체신학교가 학교법인으로 있는 한 교양과목 70%, 전문과목 30%라는 법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체신학교는 폐지되고 체신공무원 훈련소가 대신 들어앉았다.
정부는 이곳에서 2주부터 10주까지 이르는 각종 코스를 마련, 단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특수하고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체신업무는 공무원으로 채용되기 전에 장기간 교육을 받아야 하며 방대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초급대학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의 국립체신학교 부활을 강력히 건의하는 바이다. 체신학교 폐지 때 체신장관이었던 배덕진 씨도 가끔 만나면 그때 체신학교를 폐지한 것은 실수였다고 인정하면서 늘 미안해 하고있다. 교통요원 양성을 위한 철도 고등학교가 지금도 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하필 체신학교를 폐지시킨 당국자들의 단견은 마땅히 빨리 시정되어야 할 줄로 믿는 바이다.
없어진 모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6·25 때 체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길원봉 씨가 괴뢰군에 납치돼 간 것이다. 이때 전무국장으로 있던 황갑성 씨와 중앙전화국 교환과장 한점순 여사도 끌려가고 말았다. 특히 한 과장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 과장으로 중앙전화국장 정대갑 씨가 빨리 후퇴하라고 말했으나 "내가 자리를 뜨면 전 교환양들이 동요할 것" 이라면서 교환 실을 사수, 27일 하오 9시까지 대전과 수원에 비상긴급 통신을 보내고 납치된 것이다. 남자보다 더욱 용감하게 임무에 충실했던 한 과장을 생각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서 고생하고 있을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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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우정 80년(13)강직순<제자는 필자> |
게재일 : 1971년 04월 16일 [5면] |
<홍영식과 유족> 1964년 12월6일 상오 9시30분, 흥분 속에 휩싸인 버스 한대가 고요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체신부 뒤뜰을 떠났다.
목메어 찾던 홍영식 선생의 묘소 있는 곳이 알려지자 전국 우취인 단체 대표 26명이 서둘러 첫 성묘 길에 오른 것이다. 우리 나라 우정의 창시자 홍영식 선생이 잠들고 계신 곳은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문장리 뒷산이었다. 그 동안 체신계 인사들은 인편에 묻기도 하고 신문에 광고까지 내면서 홍선생의 유택과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 유족을 찾아 헤맸으나 모두 허탕만 쳐왔으니 엎드리면 손에 닿을 지척이 천리 길이었다.
버스가 서울을 떠나 경기도 땅에 들어서자 버스 안의 화제는 홍 선생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선생의 부친 홍순목 씨가 시골 현감으로 있을 때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홍 선생께서는 7세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하게 보였기 때문에 아전 이 속들이 장난 삼아『내 아들』 이라고 저희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았다. 농담을 들은 홍 선생께서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몹시 분한 생각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홍순목 현감이 『웬일이냐』고 물었지만 홍 선생은 끝내 농담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면 큰 벌을 받게 될까봐 마음을 죄고 있던 아전 이 속들은 홍 선생의 이와 같은 성품에 눌려 이후 농담을 삼가 했으며, 훗날까지 충심을 다하면서 그때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갑신정변 거사가 터진 날 아침 말에서 떨어져 주위 사람들이 흉조라고 거사를 말렸으나 동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시 한 수를 남기고 떠났는데 이때 이미 홍 선생께서는 죽음을 예견했다는 등 갖가지 일화가 쏟아져 나왔다.
선생의 묘소와 유족을 찾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동안 노력한 체신인 들의 지성에 대한 감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63년 11월16일 김의창, 최재호, 김영빈, 김봉렬, 김헌씨등 재야 체신인 들은 친목 단체로 대한 체우회를 만들고 64년 우정 80년 기념사업으로 홍 선생께서 청병의 칼 아래 쓰러진 창덕궁 안 옥류천 상류에 동상을 세우기로 결의, 이 사실을 신문에 실었던 것이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기사를 본 오류 우체국 교환원 이우금 씨가 홍 선생의 증손 홍석호 씨(27)와 묘소가 있는 곳을 재야 체신인 이응주 씨에게 전화로 연락해 온 것이다. 이응주 씨는 석호 씨의 어머니 심재봉 씨를 만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홍 선생 가문의 참혹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심씨에 의하면 갑신정변이 실패되자 홍 선생은 역신으로 몰렸고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것이다. 수구파들의 강권으로 어명이 내려 홍 선생의 5세난 아들은 조부의 손에 독사 당했다. 선생의 동생 정표는 그때 2세,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유모가 수구문 밖 공동묘지에서 유아시체를 가져다 죽은 것처럼 꾸며 화를 면했지만 16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이처럼 홍 선생의 후손이 끊기자 문중에서 선생의 4촌형 홍만식의 2남 성겸을 선생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만식도 을사 때 자결하고 말았다. 성겸에게서 현기·응기 두 아들이 태어나고 현기도 아들을 두었으나 이들은 모두 6·25 때 실종되고 지금은 응기의 아들 석호 씨와 딸 해진양이 홍 선생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되었다. 또한 응기가 서울서 중앙고둥 보통학교(현 중앙중·고교)에 다닐 때 박영효가 뒷바라지를 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6·25 때 심씨는 친정 심호섭씨 집(충남 당진군 합덕면 운산리)으로 내려가 석호씨와 해진양은 외조부 손에서 커왔다.
한약방을 하는 외조부 심씨는『사화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 때문에 그 동안 석호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를 꺼렸다』고 이응주 씨에게 털어놨다. 역신으로 몰려 발겨 찢기는 극형을 당한 홍 선생의 시체가 처음에는 광주 쌍용 땅에 묻히게 된 것은 고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비록 역신이라고 하나 어릴 때부터 동년배로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도록 유족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그 후 성겸씨가 문장리로 옮겼다. 버스가 문장리에 도착한 것은 이날 낮 12시40분쯤, 모두들 제물을 손에 들고 50도 경사의 뒷산에 올랐다. 일행이 정작 선생의 묘 앞에 갔을 때는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잔디 한 포기 없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묘는 쥐구멍이 난채 애기 묘처럼 봉분이 낮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묘 앞에 섰을 때 이것이 선각자가 받아야 하는 대우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질듯 했다한다.
또한 석호씨가 몇 해 전 당진 우체국장의 소개로 대전 체신청에서 실시한 기능직 시험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나와 더욱 더 일행은 몸둘 바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 후 석호씨는 당국의 주선으로 합덕 우체국을 거쳐 지금은 서울중앙우체국 집배 운송과 행랑계에서 증조부 홍영식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85년, 그 동안 우리 체신사업은 UPU(만국우편연합)에 가입, 우주 중계도 하는 등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왔다.
일행은 그 동안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 죄스러움 때문에 홍영식 선생의 영현에 엎드려 한동안 일어날줄 몰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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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피고에 1년 6월 |
게재일 : 1971년 04월 30일 [7면] |
서울형사지법 이건호 판사는 30일 상오 종로2가 우체국 우표도난사건 선고공판에서 김문갑 (33) 강장희 피고인(22)에게 특수절도죄를 적용, 각각 징역1년6월씩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인들이 범행을 뉘우치고 40여일 만에 자수를 했으나 피해액이 너무 크고 판매처를 미리 정해놓는 등 장물의 처분과정이 너무나 조직적이었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할 수가 없다고 실형선고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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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업무 TV감독 국제우체국에 설치 |
게재일 : 1971년 06월 03일 [8면] |
서울체신청은 우리나라최초로 TV모니터·시스팀을 국제우체국에 설치, 우편물취급의 명랑화와 사고를 예방할 계획이다. 이 모니터 감시 기는 6백50만원을 들여 통상과·소포과·창구과 등 3곳에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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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식 날 임시 공휴 |
게재일 : 1971년 06월 11일 [7면] |
정부는 오는 7월1일하오2시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할 제7대 대통령 취임식 및 경축 행사 계획을 확정했다.
취임식에는 3부 요인과 외국특사 및 각계 대표·해외 교포 경축사절단 등 2천명이 참석토록 됐으며 취임식에 예술제를 거행한다. 취임식 날은 임시 공휴일로 하고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축하하며 야간 통행 금지를 해제한다. 그밖에 대통령 취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기념 메달 2천개, 기념우표 2백만장, 기념연초 1억8천만 갑도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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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극비국방문서 20회 도난 |
게재일 : 1971년 06월 18일 [3면] |
워싱턴 17일 AP동화】지대 공「미사일」관계문서 등 정부의 극비국방문서들이 최근 몇 해 동안 우편물로 수송도중 미국 안에서 절취 당하여 소각되었다는 사실이 16일 한 절취 범의 의회증언에서 밝혀졌다.
유죄판결을 받은 우편물 절도범「로버트·쿠다크」는 상원의 상설조사소위에서 4년 동안에 걸쳐 미국 안 여러 공항에서 우편물·보석 및 유가증권 등을 절취하는 동안 수차에 걸쳐 정부의 극비국방문서들을 훔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언들이 두려워 문서를 팔려 고는 하지 않고 공범들과 함께 소각해버렸거나 없애 버렸다고 자백했다.
「쿠다크」는 1967년부터 1970년 여름까지의 사이에 약20회에 걸쳐 그와 공범들이「뉴요크」의「케네디」공항과 전국의 공항에서 훔친 우편「파우치」속에는 국방성 중앙정보국 (CIA)및 연방수사국(FBI)의 비밀문서들이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는「찰즈·퍼시」상원의원(공)의 질의에 한문서는 지대 공 탄도「미사일」에 관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쿠다크」는「노드웨스트」공항 사(NWA)의「캠프」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우편물 및 그 밖의 귀중품을 공항에서 절취한 4년간의 절도생활 중 큰 대목도 소위원회에서 설명했는데 정부의 극비문서들이 그들의 절취대상이었던 보석을 넣은 작은 상자와 유가증권을 넣은 봉투와 함께 일반등기 우편물 부대 속에 보통 들어있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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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송금「달러」빼내 횡령 |
게재일 : 1971년 06월 24일 [7면] |
24일 치안국 의사과는 서울 국제우체국 통상우편과 직원 최공호(30) 박가순(36) 등 2명과 유종희(41·삼진 공업사 수리공) 등 3명을 특수절도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조사로는 최·박 두 사람은 통상우편과 직원임을 이용하여 외국에서 들어오는 보통우편물을 지역 구분하는 과정에서 수표나 「달러」가 들어있는 듯한 우편물을 빼내 돈을 골라 편지를 없애버리는 등 지난 3월 l5일부터 5월 20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4백 90「달러」를 훔쳐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자백에 의하면 3백 60「달러」짜리 1매, 50「달러」짜리 2매, 30 「달러」짜리 1매 등 주로 주월 노무자·서독광부의 가족에 대한 송금인데 여죄가 클 것으로 보고 추궁중이다. 이들은 훔친 돈을 유를 통해 암「달러」시장에서 팔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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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을 자동처리-일본서 새 기계 개발 |
게재일 : 1971년 07월 15일 [3면] |
【동경 AFP합동】일본전기회사 (NEC) 는 14일 세계최초로 우편물을 완전히 자동식으로 분류, 처리하는 기계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새로운 기계는 우편물이 그 속으로 넣어지면 우선 일률적으로 이를 한 방향으로 싣고 가서 소인을 하고 전광장치로 우편코드 번호를 읽고 최종적으로 지정된 장소에 있는 각각 다른 철에 우편물을 분류한다. 이 장치는 불과 3명만으로 가동하며 우편물처리능력도 종래 보다 1·5배 향상시킬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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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청에 전화센터 민원업무 등 전담 |
게재일 : 1971년 09월 02일 [8면] |
체신부는 2일 서울시민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서울체신청에 전화「센터」를 설치, 운영한다고 밝혔다. 새로 업무를 개시한 전화「센터」는 고지서재발급과 전화가입 원부 등기사항증명청구 등 2건의 업무를 전화로 접수, 처리하고 우편요금 후납 승인신청·우편물반환청구 등 27건의 체신민원사무에 대한 수속, 절차, 안내를 전담한다. 시민들이 사용할 전화「센터」의 번호는 (28)000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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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기념우표 미스프린트 발견 |
게재일 : 1971년 10월 05일 [3면] |
【오클라호마시티AP동화】우표수집가인 「오클라호마」의 「콜린즈·B·앨런」 여사는 8「센트」짜리 (약30원)「아폴로」 기념우표에 「미스·프린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문가는 이 발견으로 10만 「달러」(약3천7백만원)는 벌게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우표에는 달 표면에 착륙한 「아폴로」15호의 모습과 그 밑에 『우주 속의 미국, 눈부신 업적의 10년』이라는 글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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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미·소 공동위원회|문제안(제자는 필자) |
게재일 : 1971년 10월 30일 [5면] |
「스티코프」등 소련 측 대표단이 평양으로 돌아간지 3일 만인 8일에 회담결과와는 아랑곳없이 평양에서는 김일성과 김요봉이 주동이 된 소위「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요봉 이었고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양욱이 서기장이 됐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까지 이어온 북괴집단의 출발이었다.
비밀로 붙여졌던 예비회담의 토의 내용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여러모로 순조롭지 않았음과 아울러 남북분열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첫날 회의에서 미군은『소련군은 북한에서 중요물자를 실어가고 있으니 이에 대해 토의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소련 측은『그것은 급한 일이 아니니 토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마디로 거부해 버렸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자 중공업시설을 비롯 식량·수산물 등을 대량 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미군은 38선을 들고 나갔다. 38선은 위도상 직선으로 되어있어 불편하니 도 경계선으로 구분, 행정적으로 가르자고 제의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소련군 측은 예비회담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해 버렸던 것. 미군은 세 번째로 조선의 통일 독립을 위해서는 방송이 남북 합쳐서 일원화되어야 한다고 내세워 이 문제를 다루자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신문도 남북에서 자유롭게 보급되어야한다고 제안했으나 역시 거부했다. 미군은 또 통화(돈)도 통일해야 한다고 내놓았으나 거부했다. 다만 남북의 물자교류를 하자는 미군 측의 제의에 대해서는 소련군이 동의했는데 소련군 측은『그렇다면 남한의 쌀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미군 측은 이 같은 소련 측의 요구에 대해서『거두어 논 쌀이 없으니 줄 수 없다』(이 발언은 뒤에 문제가 되었다)고 하여 결국 말은 꺼냈지만 물자교류의 원칙 마저 합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한가지 합의한 것은 남북우편물 교환이었다. 미군 측은『남북간의 각 점령지구에 사는 조선사람이 다른 점령지구를 여행하며 가족 친척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우편물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는데, 『상대방 점령지구의 여행은 50일전에 여행허가 신청을 내야한다』는 등 원칙을 논의하다가 좌절되고 우편물 교환만은 3월15일부터 실시하기로 합의에 도달했다.
이밖에 철도와 자동차등 운수사업의 일원화 등이 거론되어 1월25일께는 소련군의 실무장교들이 당시 군정청의 운수국이던 용산역 까지 현지 출장, 수송업무 처리상황까지 살폈으나 그 이상 진전이 없었다.
이때까지 미군은 해방된 한국인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진실로 과도정부의 수립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비쳤으나 예비회담을 끝내고 간 소련대표단이 곧 8일에「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운 것을 보면 소련군 측의 뱃속은 이미 알만한 것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신탁통치반대의 물결은 험해지고 있었다. 특히 2월7일에「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미군방송에서 『공 위에서는「조선의 신탁관리」가 결정되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이 소문이 퍼지자『소련에 속지 말고 미군을 믿지 말라』는 유행어까지 돌면서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놀란 군정청은 공보국장「뉴먼」대령을 통해서 해명하기 바빴다.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조선에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자는 것밖에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장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특히「신탁」이란 뜻에 대해서『신탁이란 말은 고문 또는 원조란 뜻을 의미한다』고 극구 변명했다. 「하지」의 이 말은 45년 12월 28일「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알려져서「신탁」이란 무어냐고 반발이 일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십 번 되풀이 해온 변명의 말이었다.
그런데 8일 밤「번즈」미 국무장관의 말이 북새통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예비회담에서 약간의 진전을 봤으나 남북물자교환은 성과가 없었다. 그것은 남북의 농민들이 쌀을 거두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해 회담의 실패가 마치 농민에게 있는 것 같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맹랑한 발언으로 반·찬탁의 사태가 악화되자「하지」장군은『개인이나 국가간의 불행 또는 걱정은 오해에서 기인합니다』면서「번즈」발언이 잘못 전해졌다고 성명서를 냈다. 「하지」는 곧 예비회담내용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발표는 없었다.
이때 서울은 온통 술렁거려 미 군정청은 한국인 직원의 총 사표 제출과 결근으로 골치를 앓았다.「아널드」는 할 수없이 이승만과 김구를 찾아가 사태수습을 부탁했다. 청을 받은 김구는 가만히 있다가『「아널드」장군! 우리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신탁을 반대하는 거요』하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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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제21화><미·소 공동위원회>(7)문제안<제자는 필자> |
게재일 : 1971년 11월 01일 [5면] |
<본 회담 개막> 예비회담의 결정한 바에 따라 본 회담이 열린 것은 3월20일 하오1시였다. 46년12월28일 이후 예비회담이 열리는 동안 사회상은 극도로 혼란했으나 (이 항목은 별도로 다루겠음) 2월5일에 평양으로 돌아갔던 소련대표단은 3월18일 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스티코프」등은 전과같이 조선「호텔」에 들고 일부 수행원은 소련영사관에 들었는데 그래도 인원이 남아 회의장소인 덕수궁에도 몇 사람 나와 있었다. 회담장소인 덕수궁 석조전은 공위를 위해 특별한 배려가 돼있었다. 국기게양대도 3개가 마련되어 가운데는 태극기, 우측에는 미국기, 왼쪽에는 소련 기가 게양되었다.
건물도 반을 똑같이 갈랐다. 계단도 반으로 갈라 오른쪽은 미군, 왼쪽은 소련군이 쓰게되어 이른바 우·좌로 분명히 선이 그어진 것이었다. 미군 측은 계단을 오를 때도 바른쪽을 걸어가 바른쪽 건물을 씻고 소련군은 계단 왼쪽으로 걸어가 왼쪽 방을 쓰는 것이었다.
아침저녁 국기를 계양하고 하강할 때의 두 나라 병사는 복장인 경례나 동작이 판이하게 달라서 좋은 구경거리였다. 미국은 걸음걸이 등 동작이 평민적이었고 소련군은 어제까지 우리를 지배한 일본군인들의 동작을 닮은 데가 많았다. 본 회담 개회식은 20일하오1시 정각에 열렸다. 개회식에는 예비회담 때와 같이 기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국인 기자와 외국인 기자 7명도 들어갔다.
미군 측에서는 「하지」장군, 수석대표 「아널드」육군소장, 「랭돈」·「데이어」·「부스」대령과 고문·전문부 기술자들이 참석했고 서련 군 측에서는 「스티코프」를 비롯 「차라프킨」과 「레베테프」소장, 「발라시노프」·「카크덴케」중령 등이 참석했다. 개회식에서 「하지」장군은 『지금 국기게양대에는 3개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우리 공위의 노력으로 태극기만이 남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연설하여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첫날회의는 하오6시5분까지 계속되었는데 주로 회의진행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사회는 양측이 각각 1주일씩 교대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주일은 미군이 의장이 되고 또 1주일은 소련군이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첫날회의를 마친 공위는 이튿날인 기일에 공위 공동 성명 제1호를 냈다.
『서울에서 열린 공위에서는「모스크바」3상 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제2, 3항의 조항을 성취하기 위해 회담을 개시했다. 제1차 회의는 46년3월20일 하오l시에 시작되었다. 「하지」중장과 「스티코프」중장이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은「라디오」로 중계되었다』는 것이 성명의 전문이다.
이 공위 첫 회의에는 미군 측에서 한국인으로서 이묘묵 박사가「하지」장군의 고문겸 통역자격으로 참석했고 노어통역에 고정훈씨, 영어통역에 허현씨(작고)가 참석했다. 소련군 측에서는 영어통역으로 남일이 나왔다. 휴전회담 때 북괴군대표로 나온 바로 그 남일이다. 회의진행방식, 회의순서를 싸고 난항을 거듭했는데 가장 큰 난관은 공동「코뮤니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용어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가령「국민」이란 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영어로는 「피플」이라 하지만 노어로는「나로드」이다. 「피플」은 「국민」으로 번역되지만 「나로드」 는 「인민」이란 뜻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어상의 「뉘앙스」가 엇갈려 국민이란 말을 표현하는 단어는 그 당시「민족」이란말로 얼버무렸다.
「코뮤니케」의 작성이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즉 미군 측의 연설 (또는 결정문) 과 소련 측의 연설문을 놓고 한국어로 일단 번역, 양측연설의 뜻에 가장 합당한 말로「코뮤니케」를 작성, 한국어와 영어를 잘 아는 미군 측 담당관과 한국어와 노어를 잘 아는 소련군 측 담당관에게 보여 좋다는 「사인」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경우와 같이 뜻이 다른 말이 많았던 것이다.
제1차 공위는 이같이 어려운「코뮤니케」를 여러 차례 발표하면서 회의를 진행했으나 차차 의견이 벌어져 결국 제5호 성명에서 의견의 완전대립이 나와 회담이 결렬되고 만다(차회에서 자세히 다룸) .
이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예비회담에서 결정 된데 따라서 3월15일부터는 남북간우편물교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것은「하지」와 「스티코프」의 기조연설에서 이미 비쳐지고 있다.
즉「하지」장군은 개회식에서『제일 먼저 미군의 목적은 조선에 언론·집회·신앙·출판의 자유를 수립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속시키자는 것이다』고 밝혔지만 「스티코프」는 『공위는 「모스크바」회의의 역사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미·소 양국의 위대한 군대는 제국주의 일본군대를 격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영구히 제거하고 조선을 해방했다』고 하여「해방의 은인」으로 자처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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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공동위원회(19)제21화|문제안(제자는 필자) |
게재일 : 1971년 11월 15일 [5면] |
<남·북 우편 교환(하)> 김선유씨가 펜으로 써서 마련한 가 협정문서는 6·25 때 없어져 버렸다. 이 협정에서는 차편이 있을 때 우편물을 교환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느 사이엔가 1주일에 1회씩 교환되고 토요일에 늘 이루어졌다. 그것도 1차 교환에서 51차까지는 토요일이었다가 52차에서 1백65차까지는 목요일에 교환했었다. 이 사이 몇 번인가는 금요일에 교환되었다.
전회에서 말했지만 소련군의 열차가 개성역에 들어오면 미군이 포위 경계하는 바람에 소련군 측이 불편을 느끼자 46년 봄에는 소련군의 불평을 늘어놓은 주장으로 교환장소가 여현으로 옮겼다.
여현은 38선 바로 북쪽이어서 이번에는 미군열차가 소련군의 포위를 받게되어 불편했다. 미군은 열차를 포위하는 것에 그쳤으나 소련군은 예사로 열차 안까지 들어와 이것저것만져보았다.
우편물 교환 때는 언제나 역두에서 군인들의 포위 속에 교환되었지만 우편물을 교환하고 난 다음에는 신문도 바꾸었다. 1주일 치의 신문을 무더기로 바꾸었다. 담배도 나누어 피웠다. 이쪽에서는 카멜 터키·스타라이크 등 양담배를 내 놓았고 북쪽에서는 일본 사람들한테서 압수한 미도리를 내놓기 일쑤였다.
소련군들도 양담배를 좋아했고 특히 미제 비누를 좋아했는데 나중엔 물건들을 너무 많이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련군 안에서 말썽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뒤는 이쪽서 주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편물 교환이 늘 순조로 왔던 것은 아니었다.
이 때는 우표를 발행하지 않아서 일제 때의 우표를 쓰고 모자라는 요금부분은 다로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 때의 우표는 발행처가 조선총독부였던 것이다. 부터 북에서 오는 편지는 우표가 없었는데 46년 12월 입법의원이 생겼을 때는 북에서 이 우표의 조선총독부에 시비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
북쪽 우편교환원들은 그런 우표가 붙었다면 안 받겠다면서 행낭을 뜯어 뒤지기도 했었다. 이 일로 우편교환이 한 때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48년5월10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남·북간의 우편물 교환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일단 중지되고 한 때는 교환 정지론이 크게 일어났으나 남·북간에 헤이진 동포끼리 소식을 알자는데 나쁜 것이 있느냐 하여 다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당시 북쪽에서 보내오는 편지에는 주소가 없는 것이 꽤 많았다. 주소 없는 편지가 많아서 47년 봄에는 중앙우체국 뒷마당에 편지를 내 놓고 편지 찾아가라는 공고를 낸 일조차 있었다. 그러다가 미 군정청당국은 정직하게도 이 배달불능 편지를 모두 북으로 되돌려 보내 주었다.
이 대 교환된 우편들 가운데는 소포도 있었으나 많지 않았다. 맨 마지막으로 교환 된 것은 6월23일인데 이날까지 교환된 편지는 남에서 북으로 간 것이 1백92만통이었고 북에서 남으로 온 것이 96만3천통이었다.
이 우편물 교환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안부 편지가 오갔으나 북괴는 차차 이것을 조작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약용하려들었다. 남쪽에 잇는 사람이 북에 있는 친척에게 옛날주소대로 편지를 보내면 그쪽에서는 숙청 등으로 친척의 주소가 바뀌었을 경우 등에서 가짜 편지가 오는 것이었다. 차차 선전 섞인 편지가 오다가 6·25가 터진 것이었다.
지금 한창 남·북 적십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20여년 전에 우편물을 교환한 경험에 비추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소공 위에 시작에서 붕괴한지 2년이 남짓한 동안 사귀었던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에피소드 몇 토막-.
하지 중장의 고문 겸 통역이었던 이묘훈 박사는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하지장군과 가까왔다. 이 영만이 싫어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이묘훈은 전혀 인연이 없이 영어 하나로 사귀었던 것. 이 박사는 해방되자 코리아·타임스를 창간했었다. 하지가 한국 상륙 직후인 46년9월15일께 한국의 언론인들을 초청, 간담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이 때 유창한영어로 해박하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가 놀라 경력을 물으니 그가 이묘훈이었고 자신보다 월등히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지는 이묘훈을 고문으로 모셨던 것이다.
공위의 미측 통역으로 활약한 사람 중 허현이 있었다. 이 분도 코리아·타임스의 편집국장 등을 지내고 성균관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는데 통역으로 있을 당시 한국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고 통역·선언서 번역 등에서 크게 이바지했다. 고정훈씨는 노어·영어로 남일과 싸우는 등 일화를 남겼다. 매스컴에서도 인물이 많았다. 당시 합동통신에서 나오던 설국환씨는 언제나 기사를 앞질렀고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80%는 이설씨가 합동통신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현 「브라질」대사 우석찬씨, 말레이지아 대사 김성용씨 등이 기자로 공위를 취재했고 김호진씨(대한적십자공보부장), 신태민씨(현 서울신문논설위원)도 많이 활약했다.
남·북 우편물 첫 교환 때의 일인데 김호진씨와 최경덕씨가 특종사진을 찍어 마감 시간에 내려고 개성∼서울간을 질주하다가 임진강변에서 차가 굴렀으나 다행히 차만 망가지고 무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유택씨의 『부산화폐개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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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우편료 올려 |
게재일 : 1971년 11월 24일 [7면] |
체신부는 24일 국제우편요금을 오는 12월1일부터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새로 실시될 국제우편요금은 항공통상우편요금의 경우 지역에 따라 다르나 평균30%인상되었고 선편 우편요금이 1백%, 항공·선편소포우편요금이 60%, 등기료·통관료·보험료 등 국제우편특수취급요금이 20∼1백20% 올랐다. 체신부는 이번 요금인상이 만국우편연합회의 국제우편 요율 변경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인상된 지역별 새 국제우편 요금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현 요금)
◇항공일반우편물10g
▲일본·중국·「홍콩」·「마카오」=70원(42원)
▲월남·「필리핀」·「라오스」·「타이」=80원(68원)
▲미국·호주·「캐나다」·인도·「파키스탄」=90원(83원)
▲아주 지역·서독·영국 등지 서신=1백10원(1백20원)으로 내렸으나 인쇄물 등 기타우편물은 60%인상
◇선편 우편요금은20g
▲일반서신=40원(21원)
▲엽서=30원(12원)
▲인쇄물=20원(20원)
◇소포
▲선편일본(1㎏)=5백원(2백60원)
▲항공일본=6백50원(3백90원)
▲선편월남=5백50원(3백원)
▲항공월남=8백50원(7백80원)
▲선편미국=4백원(2백70원)
▲항공미국=1천2백원(1천1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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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적십자 회담 기념 우표를 발행 |
게재일 : 1971년 12월 30일 [7면] |
체신부는 대한적십자사건들을 새긴 10원 짜리 2백만 장과 20원 짜리「쉬트」7만장의 남-북 적십자회담기념우표(사진)를 발행, 31일부터 전국 우체국에서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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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석연님, 1965년 것부터 계속 올려주셔서 좋은 자료가 되는군요. 진심으로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1년단위로 올릴 예정입니다...추후에 하나의 파일로 묶을 예정입니다..여러 선배님들께서 기사상의 오류나 보충하실 말씀을 남겨주시면 수정 보완토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