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기정진 선생은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성리학의 6대가로 지칭되는 분입니다. 특히 이분은 한말의 대 유학자로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한번도 부임하지 아니하신 징사로 조선 중엽의 남명선생과 같이 벼슬에 나가지 않아 더욱 유명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 서찰은 인흥서원을 창건하신 추세문공이 우리 추씨 가승을 모아 두차례나 노사선생을 방문하여 문사에 대하여 여러 자문을 구한 듯합니다. 내용을 보면 추씨가승에 대하여 극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사와 같은 원로의 대학자가 우리 추씨가승을 그렇게 극찬하였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합니다. 간찰 사진과 더불어 서울 대종회의 추석구님께서 한글번역한 내용을 올립니다. 서찰(書札)의 일자가 <戊辰初秋湖南 奇正鎭><庚午初冬湖南病夫幸州奇正鎭>이라하여 각각 1868년과 1870년으로 생각됩니다.
한말 호남 사림의 지주, 기정진奇正鎭(1798~1879)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행주幸州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재우奇在祐이고 모친은 안동권씨이며 1815년(순조 15) 장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계속 살았다. 그의 가계는 5대조인 기정하奇挺夏의 동생 기정익奇挺翼이 송시열에게 수학하는 등 서인․노론․이이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중간에 공백이 있어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 연구를 시작하여 이미 10대 중․후반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뚜렷한 스승이 없이 조용한 방이나 산사에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다. 다음의 글은 당시 그가 어떻게 학문에 정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듣건대 스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한 사람을 낳을 때에 각각 하나의 엄한 스승을 보내어 마음 속에 앉아 있게 한다. 사람들의 병통은 의심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이니 의심하여 구한다면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립된 자신의 학설을 40대에 들어와 비로소 저술로 내놓기 시작하였다. 46세 때 지은 「납량사의納凉私議」는 당시까지 지속되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비판하면서 이일분수理一分殊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며 48세 때 지은 「우기偶記」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문제를 다룬 것이며 「정자설定字說」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있는 정자定字에 대한 해설을 한 것이다. 이어 56세 때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통설理通說」을 저술하였으며, 77세 때는 「납량사의」의 몇 구절을 수정하고 81세 때 그의 이기론理氣論의 핵심을 이루는 「외필猥筆」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저술의 연대순을 따라 그의 사상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기정진의 사상 체계는 호락논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일분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어 심성론에 대한 논의가 좀더 구체화된 뒤 생애 후반에 이를 뒷받침하는 이기론적 토대가 완성되는 과정을 밟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정진의 이기론의 특징은 리理의 절대화이다. 그에게 있어 기는 리와 상대가 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리 안의 일[理中事]’이며 리가 움직일 때의 손과 발일 뿐이라며 이의 존귀함이 상대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또한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고 기의 능동성을 부정함으로써 서경덕의 기자이機自爾이나 이이의 비유사지非有使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 주장을 비판하였다. 성리학에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주로 이황학파에서 보이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이이학파와 이황학파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며 그 강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 대표적인 학파로 기정진학파를 비롯하여 이항로학파와 이진상학파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이전의 성리학설과 다른, 리를 절대화하는 학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들이 모두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향촌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던 재지학자들로 기존의 학파나 학설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처지에 있었다는 점과 당시까지 전개되고 있던 호락논쟁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대응을 해야 했던 사정, 그리고 봉건적 질서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하의 큰 변고가 셋 있으니 부인이 남편의 자리를 빼앗는 것[妻奪夫位]과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것[臣奪君位], 그리고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는 것[夷奪華位]이다. 만약 기가 리의 자리를 빼앗는다면[氣奪理] 저 세 가지 변고는 다음의 일일 것이다. 이 글을 보면 기정진이 왜 그렇게 리를 절대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리절대론자들은 절대 선 세계로의 회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어떤 힘으로도 그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신념에서 가변적인 기보다는 불변적인 리에 절대적인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절대 선의 세계는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봉건적인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였다. 따라서 이들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는데 이는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처음으로 내건 상소였다. 여기서 그는 국방력의 강화와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외국과의 교역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스승의 위정척사론을 계승하여 문인들 역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거나 직접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였는데 기우만․기삼연․고광순․정재규․정의림․이승학․박원영․김익중․오준선․노응현․기재․기동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앞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하였다. 위정척사운동도 무장투쟁의 형식을 띤다는 면에서는 이런 측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경제정책에서도 나타난다. 기정진은 1862년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국가에서 해결 방법의 하나로 삼정三政의 개혁에 대해 구언求言을 하자 과감한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대부의 부패상과 향리들의 부정을 신랄히 비판하고 삼정 문란의 폐해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약용의 ꡔ목민심서ꡕ에서 제시한 바를 이용하여 제반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군포는 폐지하며 환곡은 면제하고 대신 상평을 재건하며, 서원의 유생이 양민에게 끼치는 해독을 없애고 사치하는 풍토를 없애며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향거鄕擧와 이선里選을 거친 다음 시험에 의하여 선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개혁책 중 전면적인 개혁론에 속하는 편으로 기정진은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양민養民 위주의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기정진의 사회경제개혁책은 문인들에게도 이어져 이최선․기양연․나도규 등이 삼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기정진의 사상은 당시 조선사상계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사상의 출발이 당시 조선사상계의 큰 논쟁거리였던 호락논쟁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였으며 이어 조선사회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속에서 리의 절대화를 추구함으로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던 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에서의 리의 절대화 경향은 그가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정진은 위정척사론과 전면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영진, 광주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