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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 한글 -
1973년 4월2일 오전 11시
교회에서 풍금을 치고 있었다.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항상 인도하시고, 방초동산 좋은 곳에서 우리 먹여주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전보 왔네.”
사촌형이 오리길을 왔다.
‘완도교육청에 발령함’ 전보쪽지를 들고 서둘러 왔다.
전라남도교육청에서 온 발령통지 전보였다.
1973년 4월 2일 오후 직행버스가 남쪽을 향하여 자갈길을 달렸다.
부안터미널에서였다.
정읍, 영광을 지나 광주에 닿았다.
해가 저물었다.
숙소를 정하고 1박을 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직행버스가 남쪽으로 달렸다.
다섯 시간을 달려 정오 무렵 완도에 닿았다.
완도교육청에서 학무과장님께서 맞아주셨다.
‘금일국민학교로 발령함’이라고 적힌 발령장을 주셨다.
점심을 먹은 후 2시 배를 탔다.
‘옥소’호였다.
배는 고금도 약산도를 지나 평일도(금일도)에 닿았다.
1시간을 걸었다.
학교가 나타났다.
금일국민학교였다.
1973년 4월 3일
금일초등학교 5학년 2반,
내가 처음 담임한 학급에서 ‘한글이 안되는 아이’를 만났다.
수업을 하는데 따라오지 못했다.
도무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5학년인데 교과서를 읽지 못했다.
공책을 기록할 줄 몰랐다.
숙제도 일기도 하지 못했다.
그냥 앉아있었다.
얌전히 앉아 있기만 했다.
남자 아이였다.
이름이 ‘김OO’였다.
신평리에 사는 아이였다.
부모도 형제도 할머니도 있는 아이였다.
아이들이 말했다.
“쟤는 책도 못 읽어요.”
그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 말도 못했다.
“김OO, 오늘 공부 끝나면 남아라.”
그날부터 한글익히기에 들어갔다.
방과후에 남겨놓고 공부를 시켰다.
한글이 되지 않았다.
도무지 되지 않았다.
일주일이 가도
한달이 가도 두달이 가도 되지 않았다.
단어 하나도 되지 않았다.
한 학기가 모두 갔다.
여름방학이 왔다.
여름방학도 갔다.
개학날이 왔다.
반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김OO’는 오지 않았다.
“핵교 안 댕긴데요.”
같은 마을 사는 아이가 말했다.
가정방문을 했다.
“핵교 안 댕긴데요.”
엄마가 대답했다.
또 가정방문을 했다.
“핵교 안 댕길라나 봐요.”
엄마가 또 대답했다.
또 가정방문을 했다.
“내비러 두세요. 지가 저렇게 안댕길라고 허는디 어떻게 혀요. 그냥 내비러두세요.”
텃밭을 매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차라리 손대지 말 것을… 그랬다면 초등학교는 졸업했을 텐데…내가 아이에게 심하게 했구나.’
돌아오면서
포기가 되면서 후회가 됐다.
당시 학급은 50명 이상이었다.
어쩌다 적을 때도 40명이 넘었다.
해마다 새 학급을 맡아도 어김없이 한글이 안되는 아이가 있었다.
'다시 이런 아이에게는 한글을 안 가르쳐야지' 다짐했는데
직원조회 직원종회에서는 문자미해득 아이에 대한 채찍질이 끊임없이 있었다.
담당사무로 '부진아지도'를 맡기도 하였다.
일단 아이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기로 하였다.
선배 선생님들에게 물어보고 관련 연구 책자들을 찾아봤다.
한글이 안되는 아이가 한글이 되는 방법을 이렇게 찾아 나갔다.
한 선생님께서는 한글가르치기 연구보고서를 내게 주셨다.
연구월보 책자에서 찾아낸
서울대학교 이응백 교수님의 한글가르치기 효과적 방안이 내게 들어왔다.
고기잡이 배를 타는 한 학부모가 나에게 건네준 ‘일본어교본’을 훑어보다가 결정적인 것을 발견했다.
‘오십음도’였다.
세로가 5자 가로가 10자였다.
이것은 신의 선물이었다.
한글은 백사십음절표가 당시에 유행이었다.
세로가 10자 가로가 14자였다.
일본어 오십음도는 5박자면 세로방향읽기가 되었다.
아이들 숨으로도 단숨에 그게 됐다.
한글 백사십음절표는 10박자라야 세로방향읽기가 되었다.
아이들 숨으로 단숨에 그게 될 수 없었다.
일본어 오십음도 방식을 따라보기로 했다.
한글 백사십음절표를 반으로 나누어 칠십음절표 1단계, 칠십음절표 2단계로 만들었다.
먼저 칠십음절표 1딘계만 아이들에게 제시했다.
5박자면 세로방향읽기가 됐다.
단숨에 세로방향읽기가 됐다.
‘가나다라…하’ 14자를 익힌 아이는 세로방향읽기로 70자를 단기간에 익히게 됐다.
‘가거고구기, 나너노누니…하허호후히’ 5박자 읽기는 아이들에게 노래가 됐다.
박자가 잘 맞으니까 합창도 되고 암송도 됐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이 기뻐했다.
아이들은 자꾸자꾸 노래를 불렀다.
한글이 안되던 아이가 한글이 되는 아이로 그것도 단기간에 되는 아이, 기뻐하는 아이로 달라졌다.
한두달 사이에 진도가 펑펑 나갔다. 그리고는 2단계로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게 됐다. 70음절표에 ‘까따싸짜빠’ 된소리를 붙여 95음절표로 개조했다가 모음‘ㅡ’를 제거하여 76음절표로 개조, 4박자가 되게 했다.
부안 위도의 대리국민학교에서는 다른 학급 아이도 가르치게 됐다.
담임교사의 부탁을 받고 가르치게 됐다.
그 학급은 교감선생님께서 담임하던 2학년 학급이었다.
부안 백산국민학교에서는 전교에서 한글이 안되는 아이를 모두 모아 별도로 분단을 편성하여 가르치게 됐다.
교감이 되어 정읍 교암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당시 보건교사가 한글 안되는 아이 하나를 가르치겠다고 하여 그걸 1년동안 도와주었다.
이때의 기록은 ‘부진아지도 사례’가 되어 정읍교육청에 제출되었고 이것이 박사학위논문이 되었고 ‘자음카드한글학습’ 카페가 되었고 ‘엄마인 나도 포기할까?’ 책이 되었다.
교장이 되어 정읍 서신초등학교, 교암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약 5년동안에 27명이 한글을 통달했다. 해마다 평균 5명씩이었다.
27번째 한글을 깨친 아이는 지적장애3급(지능 60)이었다.
남원에서 정읍으로 이사와서 한글을 통달했다.
엄마가 지도해서 이사온지 6개월만에 한글을 통달했다.
그후 고향 남원으로 돌아간 후 엄마는 일기를 썼다.
독서일기를 썼다. 동화책 읽기 독서읽기를 썼다.
날짜별로 번호를 붙여가며 읽은 책의 이름을 적어나갔다.
작은 책만을 읽었다.
2011년 12월초부터 2012년 10말까지 3600권의 책을 아이가 읽었다.
전주지방법원 제6호법정 행정소송 심의과정에서 재판관님은 증인으로 나온 그 엄마의 동의를 받은 후 그 공책을 영상으로 공개하였다.
아이 아빠는 엄마와 아이를 2개월동안 인도네시아에 다녀오게 했다.
임실 대리초등학교에서 온 아이 하나도 그렇게 한글을 통달했다.
엄마가 지도해서 9개월만에 한글을 통달했다.
책을 줄줄 읽게 됐다.
비슷한 시기 2011년 11월 하순이었다.
정읍 교암초등학교 숙직실에서 그렇게 됐다.
한글이 안되는 아이가 한글이 돼 가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온 아이 둘이 있었다.
한글을 통달하려고 책을 줄줄 읽게 되려고 엄마랑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장애가 좀더 심한 아이들이었다.
좀더 수줍음이 많던 아이들이었다.
‘숙직실 한글공부학생들을 모두 각각의 교실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전라북도교육청 장학사 L씨의 학교방문으로 나온 일이었다.
2011년 11월 10일이었다.
더 이상 한글공부학생이 숙직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더 이상 한글공부학생 엄마가 숙직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교암초등학교 숙직실 한글공부가 전면 중단됐다.
교육청 지시에 순응하여 이들은 각각 해당학년의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이 교실에서 견디지 못했다.
며칠 후 이 학생들 4명은 학교 다니는 것을 중단했다.
반 학생들에게 너무 심한 폐가 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전교 학부모들이 긴급학부모회를 열어 도교육청에 민원을 올렸고 더 큰 민원을 만들어 도교육청에 올리기 위하여 교장퇴출 연판장 서명운동이 마을단위로 동창회 단위로 벌어지면서 전교생등교거부가 공공연히 거론됐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집에서 엄마랑 해오던 한글공부를 독자적으로 해 나갔다.
한글익히기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2명은 보름 남짓 후에 한글 1500자 통달이 되어 만세를 외치게 됐지만 한글익히기 각각 초급단계 중급단계 아이 두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숙직실 폐쇄 이후 1년 몇 개월이 지나갔지만 이들은 지금까지도 제자리걸음이거나 포기모드가 돼 버렸다.
이들은 한글익히기 초급단계 한글익히기 중급단계였다. 이 단계는 이들에게 결정적 시기였다. 이들은 이때 필요한 맞춤 코칭이 철저히 차단돼버렸다.
개인별 맞춤과 개인별 조절이 차단돼버렸다.
도교육청의 ‘숙직실 한글공부학생들을 모두 각각의 교실로’라는 청천벽력 때문이었다.
‘교장이 아이들을 교육하면 안돼’라는 청천벽력 때문이었다.
한글이 안되는 아이는 어디로?
초등학교 국어(읽기)는 1학년 2학년 그리고 이어서 6학년까지 각각 2개 학기로서
1-1국어 1-2국어 2-1국어 2-2국어 그리고 이어서 6-1국어 6-2국어 이렇게 12권이다.
그중에서 1-1국어 즉 12권중 첫 번째 책에서는 한글익히기 과정이 나온다. 한글통달과정이다. 자음모음도 나오고 통문자도 나온다. 받아쓰기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제7차교육과정이 나오면서부터는 이 내용이 많이 축소됐다.
제7차교육과정이 나오면서부터는 그렇게 강조돼왔던 받아쓰기지도가 많이 축소됐다.
교육청 장학지도는 의례 1-2학년 받아쓰기였다.
7차교육과정이 나오면서 장학사가 받아쓰기 시험보고 그것으로 학교 표창도 하던 게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1-1국어(읽기)에는 한글익히기가 나온다.
한글익히기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이다.
유치원이 한글익히기를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공립유치원은 한글익히기 담당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유치원이 영어교육을 거부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한글교육을 책임있게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현실이다.
특수교육(특수학급)이 한글익히기를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은 한글익히기를 특수교육이 책임질 일이라고 한글익히기가 안된 경우 이것이 특수교육 책임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장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신연령이 3-4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안되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통합교육 사회성 신장을 말한다. 게다가 한글 익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힘든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면 아이가 더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어설프게 한글 가르치는 것보다 차라리 철저히 몰라서 나라와 사회의 혜택을 입고 편안하게 일생을 살게 하는 게 더 현명한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한글익히기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고 말한다.
혹은 1학년 담임교사가 한글익히기의 책임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현행법상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반에서 한글이 안되는 학생이 발견되면 해당학생의 엄마를 호출하여 엄마에게 과제로 제시한다. 한글이 안되는 학생이 자기 학급 아이라고 해서 이들에게 줄줄 읽는 수준의 한글통달이 안된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결론은 특수교육대상자 선정으로 안내하거나 특수학급 입급으로 안내하려고 노력한다. 1학년 담임교사는 아이가 한글이 안된 게 엄마책임 또는 특수교사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1학년 담임교사에게 과제를 떠맡게 된 해당학생 엄마는 또다시 아이를 직접 가르쳐보기도 하고 학원에 맡겨보기도 하고 개별학습지 교사를 정하여 가르쳐보기도 한다.
이렇게 하다가 포기모드가 되면 장애진단을 받고 국가의 특별보조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때부터 아이에게는 ‘장애’라는 이름이 따라붙게 된다.
‘장애’는 영어로 ‘disable’이다.
‘불가능’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들중에도 특수학교라는 장소 특수학급이라는 장소가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과 좌절에 낙착되는 게 싫어서 특수교육대상자라는 국가 혜택은 받아들이되 특별 장소를 드나들어서 생기는 교내에서 공개적인 낙인은 피하게 하려고 특수학급이나 특수학교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초등학교를 다닐 동안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공립유치원이나 특수교육은 ‘한글놀이’ 수준의 과정은 손을 댄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책임 있게 담당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나라 교육과정 관련 법으로 보자면 한글익히기는 초등학교 1학년에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에게 그 책임이 있다. 1-1국어 교육과정이 오랜 옛날부터 한글익히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글읽히기 마지막학생과 관련해서는 즉 한글이 안되는 학생에 관련해서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가 사실상 그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교사나 나머지 학년 담임교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명약관화다.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교육의 최후 보루인 교육과학부만이 ‘기초학력미달’해소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에 큰 돈을 쏟아부어가면서 채찍질을 맘추지않고 있다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하지만 특수학급 특수학교에 속해있지 않은 특수교육대상자는 국가수준 기초학력평가 통계에서 공식적으로 제외하도록 명시되어있다는 사실과 초등학교 기초학력미달 평균비율 1%인 점은 해당 아이의 경우 공공연히 면죄부를 주어 용서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글익히기 마지막 학생에 관련해서는 전혀 채찍질하고 있지 않다는 게 현실적으로 명약관화하다.
초등학교 창의경영학교(학력향상) 지정과 관련해서 말해본다면 5%가 공공연히 용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가장 무서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교육과학부도 한글익히기 마지막 학생에 관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에서 교장이 한글이 안되는 아이를 체크해가면서 한글미해득자 구제에 채찍질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교육청이 채찍질을 멈추지 않던 시절에는 교장은 끊임없이 ‘독서산’노래를 불러왔다
초등학교마다 갖고 있는 ‘학교교육과정’이라는 두툼한 책에는‘기초학력’이라는 단어가 약방의 감초다.
말은 있지만 문구는 있지만 관련한 채찍질은 어느 순간에 초등학교에서 사라져버렸다.
교장이 1학년 담임교사를 1:1대면하고 한글미해득 아이를 1:1대면하면서 채찍질하는 핵심적 장학활동을 거의 전혀 하지 않게 돼버렸다.
교장이 특수학급교사나 특수학급학생을 1:1대면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교장이 유치원교사나 유치원아를 1:1대면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초등학교에서 문자미해득 아이 구제는 경계선급 아이를 제외하면 그 이하인 하위 2%의 경우는 유명무실이 돼버렸다.
결국 초등학교에서 한글이 안되는 마지막 학생에 대한 관리가 없어져버렸고 책임 있는 관련 교육활동도 없어져버렸다.
이것이 정상인가? 잘 된 것인가? 바람직한 학교 모습인가?
이것이 저들에 대한 최선의 교육인가? 저들에 대한 교육복지, 행복 보장인가?
이것이 한글이 안되는 아이, 관련 학부모의 바램인가?
이것이 초등학교 교사, 유치원교사, 특수교사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인가?
저들이 내 자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놔두고자 할 것인가?
이쯤 되면 모두가 이구동성이 될 것이다.
‘불가능 아냐?’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도대체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이다.
40년전으로 돌아가
2012년 5월 31일 오전 11시 자동차 한 대가 남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정읍 아산병원에서 출발했다.
고창을 지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리고는 함평, 영암을 지나 강진에 이르렀다.
핸드폰은 정말 좋은 것이었다.
40년전에 헤어진 후 5학년 학생과 담임교사로서 만나고 헤어진 후 이제는 50대 제자 60대 스승으로 달라져 있었는데, 길에서 스쳐도 알아볼 수 없으련만 핸드폰은 두 사이를 통화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같이 식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내가 너무 심하게 혼내서 많이 미안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다, 저더러 잘 되라고 하신 건데요”
전 날 밤에는 잠을 자지 못 했단다.
그러고는 약속시간 오후 1시를 맞추어 약속 장소 강진 터미널에 도착 하려고 서둘러 왔단다.
40년 동안 그때의 구박을 떠올리며, 나를 원망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나는 추측했었다.
참 고마웠다.
헤어지면서 상자하나를 건네 주었다.
그 안에는 한글을 ‘가나다라...’부터 시작하여 한글 1500자를 읽혀 나가는 프로그램 책자 7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너에게 한글 가르치다가 실패한 후, 그것이 속상했다. 특히 네가 학교를 5학년 1학기 이후로 그만 두었던게 많이 속상했다. 그 후로 한글 공부하는 법을 이렇게 책자로 만들었다. 이걸 가지면 지금 부터라도 다시 ‘가나다라...’부터 시작하여 한글 모두를 익히게 될거야. 너는 할 수 있을거야.”
2013년 2월 28일 오전 11시 자동차 한 대가 남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남원 광한루에서 출발했다.
해남을 지나 작은 도로로 접어들어 달렸다.
그리고는 완도대교를 지나 완도항구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맡긴 후, 제주도로 가는 배에 오른 게 배의 출발 시각 오후 3시의 2분전이었다.
배는 1시간 40분 걸려서 제주항구에 닿았다.
제주도를 횡단하는 516도로를 직행버스로 달려 서귀포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는 다시 시내버스에 올라 서귀포 신시가지로 가서 아일랜드모텔에 숙소를 잡았다.
서귀포 신시가지 부근은 혁신도시 건설 공사가 여기저기에 한창이었다.
만나면 이 말을 하려고 했다.
‘2013년 12월 13일 아침 진안 톨게이트부근 무주 가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가 많이 부서졌다. 거기에서 내 목숨이 보존된 것은 바로 너에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어. 바로 40년 전에 시작했다가 멈춰버린 그 일이 바로 9개월 전에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시작하게 된 그 일이 여전히 소중하기 때문이었어’
<참고문헌>
초등학교 교사용지도서 국어 1-1, 2000.3.1. 교육부 발행, 114쪽, 2단 7줄-17줄
초등학교 교사용지도서 국어 1-1, 2000.3.1. 교육부 발행, 115쪽, 1단 30줄-33줄
이응백(1981), "국어의 기본 음절표에 대하여", [김형규 박사 고희 기념 논충], 서울대 출판부.
이화진(1999), 초등학교 학습 부진아 지도 프로그램 개발 연구.
<초등학교 교사용지도서 국어 1-1, 2000.3.1. 교육부 발행, 114쪽, 2단 7줄-17줄 >
(이에 7차 1-1 읽기 교과서에서는 절충적 지도 방법을 채택.. 첫째....현장 교사들의 의견과 ...아동들의 학습능력의 수준을 고려해 본 결과 학습 수준을 다소 높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1학년) 아이들은 이미 글자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수업시간이 너무 재미가 없다." 고 호소하였다. 우리 나라는 1990년대 이후 생활 수준의 확대와 높은 교육열로 인하여 취학전 아동들의 문자 해득률이 약 70-80퍼센트에 이르고 있으며, 단순히 글자와 그림만 제시되는 학습내용은 아동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기 쉽기 때문에 .... 따라서 학습 내용 수준을 다소 높게 잡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교사용지도서 국어 1-1, 2000.3.1. 교육부 발행, 115쪽, 1단 30줄-33줄 >
7차교육과정에 근거한 1-1 읽기 교과서는 70-80퍼센트에 해당하는 대다수 아동들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여 그 수준이 다소 높아졌으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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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한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글인 것 같아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오셨고 또 더 나아가리라는 희망이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