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와 문화 I
◎19세기 영국의 역사와 문화
영국의 보수주의
19세기 보수주의의 이론적 체계는 버크 (Edmund Burke 1729-1797)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성' (1790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혁명이 영국에 미칠 파장에 대한 그의 경고는 프랑스 혁명당시 전개된 군부독제 및 공포정치의 위험성이 역사적 경험에 반동하였다는 주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버크는 추상적인 프랑스 혁명이념이 대중선동과 조작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사상은 모든 구질서와 제도를 비판하였기 대문에 과거의 유익한 전통과 관습, 도덕을 부정하였다고 지적하고 보수주의적 세계관의 확립을 호소하였다. 그는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고 인간성의 판단은 신과 역사에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국가는 경험있는 지배층에 의한, 전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비이기적인 윤리적 제도이다”라고 선전하여 영국의 헌장전통을 계승할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의 논리는 반혁명과 식민주의의 옹호론자에게 유용하게 작용하였고 비인체제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비인체제와 영국의 대외정책
19세기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는 정통주의와 세력균형주의를 골자로 하였다. 영국은 실질적으로 미래의 프랑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견제할 목적으로 비인회의을 통해 세력균형주의가 성사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가장 강력한 유럽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영국은 산업원료의 조달을 위해 유럽밖의 시장확보를 위한 해양항로가 필요하여 막강한 해군력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목표는 무었보다도 해상의 재해권 확보를 위해 항해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프랑스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지중해의 몰타섬, 북해의 헤골란트섬, 그리고 케이프식민지와 실론등을 할양받았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산업화 과정에서 실업이 증가하고 경기침체는 악화되여 인구이동, 산업화에 따른 사회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특히 대의제를 통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 개혁세력이 증대하였다. 1816년 멘체스타의 민중봉기는 학살사건으로 변모되여 인신보호법은 그 효력이 정지되었다.
따라서 1818까지 자유주의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강화되었다. 이후 의회는 1822년 형법을 개정하고, 1829년에는 비국교도에게도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1820년대 영국에서의 자유주의적 정책변화의 배경은 1. 구질서을 타도하려는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완화되었고, 2. 경제,사회적인 면에서산업발전에 따른 무역의 증대와 원료공급을 위한 시장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무었보다도 비인체제하에서의 유럽국가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적 운동을 탄압하는 세력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영광스런 고립주의, 세력균형주의, 해양 자유주의 (해군제일주의 및 저지대정책)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822년 스페인 혁명으로 인한 Verona 베로나 회의에서 영국은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무력진압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결정은 스페인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여 무역을 통한 이익이 증대되는 목표 때문이었다. 이후 먼로독트린과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영국은 빈체제에서 완전히 이탈하므로써 비인체제의 5국동맹은 와해되었고, 불간섭주의를 표방하여 특히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영국과 몬로독트린(1823)
영국은 미국에 대한 5국동맹의 영향력 강화에 반대하였다. 1823년 프랑스군이 마드리드에 진주하자 영국 외상 카닝은 미국정부에게 영국과 미국과 연합하면 남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침입을 억제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미국의 몬로대통령도 이에 동의하여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은 합중국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이며, 어떠한 미래의 식민지도 배격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메테르니히 체제에 대한 저지책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몬로독트린은 미국의 외교정책의 기본적 바탕인 고립주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적으로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여파와 특히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사상과 자유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세기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생산력이 증대되고 '세계의 공장”“해지지않는 대영제국'으로서의 위치를 강화해 나갔다. 영국은 세기말까지 세계 인구의 4/1을 통제하고 지구촌의 5/1 지역을 확보하였다. 국내적으로 1830년대 이후 자유 민주적 제도와 의회주의가 조직적으로 정비되 었다. 따라서 60여년의 빅토리아 여왕의 황금시대가 열렸다.(1837-1901) 영국 자유주의의 성장은 대표성에 근거한 법적, 정치, 경제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면서 이루어졌다. 실질적 내용은 1.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 인권사상 2. 법치국가와 삼권분립 3. 참정권의 요구, 선거를 통한 의회주의 4. 자유경제원칙과 자유경쟁 등이 바탕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는 정의보다는 자유, 생존권보다는 정치적 권리, 변혁보다는 개혁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목표는 국민주권의 절대성을 넘어서 국민국가는 정신적, 개인적 즉 종교적, 경제적인 자유를 보장하기를 원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는 정교분리, 권력분립에 따른 억제와 균형원리를 숭상하였다.
A.정치적 개혁
1. 영국의 의회제도
영국은 1830년대까지 산업화에 의한 노동,시민계급이 급성장한다. 본래 양당제도를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양원제는 본래 과두적 성격이 강하고 정책대결의 기능은 상실된지 오래였다. 상원은 세습적 귀족층과 해외무역을 통한 신흥귀족으로 구성되었지만 하원은 자유업, 실업가, 법률가, 은행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투표권자는 성인의 6/1에 해당되었지만 노동자, 농민, 도시시민은 제외되었다. 선거권의 재산과 세금에 따른 제한되었다. 당시 Tory당은 보수당의 전신으로 E.Burke, Wellington등 보수반동주의 왕당파로 대표되었다. 반면 Whig당은 자유당 으로 Grey, Russel등 처음에는 보수적 개혁주의자을 중심으로 후기에는 자유 민주주의주의자의 온상이 되었다. 그들의 지지기반은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자인 도시의 상공인과 비국교도까지 포함되었다. 1830년 7월혁명의 여파가 영국에 미치고, 남부에서는 폭동등 소요사태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선거법 개정운동등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신적 급진파가 성장하는 계기로 발전되었다. 특히 산업혁명은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이 급성장하는 전환점이 마련되여 60년 이상의 토리당의 재집권에 부레이크를 걸었다. 따라서 1832년 선거에서 휘그당이 승리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는 우었보다도 선거법 개정운동을 통해 크게 발전되었다.
2. 선거법 개정운동
제1차 선거법개정은 1832년에 이뤄졌다. 이전에는 200년이상의 전통적 선거법이 유효하여 특히 도시화 인구이동에 따라 선거인수가 모자라도 의석이 배정되는 부패선거구(Rotten Borough)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2000명 미만의 부패선거구는 폐지되고, 대도시 인구에 따른 의석을 배정하고 (예: 런던 10명), 선거권의 확대를 허용하여 성인의 2/1까지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제 2차 선거법개정은 1867년에 이루어 졌다. 주요 원인은 1860년대까지 영국의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난 복잡한 사회,노동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의회는 여전히 귀족들의 쌀롱의 역할에 불과했고 자유무역의 성행은 극심한 노사대립의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1860년대 토리당은 보수당(Disraeli 내각)으로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창당되었다. 2차선거법의 개정은 귀족적 자유주의에서 민주적 자유주의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보수당도 진보적 개혁안을 수용하면서 ' 국민의 정당”으로 부각하였다. 의회는 인구에 따라 선거구를 개편하고 확대시켰다. 또한 성인남자 100만 이상에게 선거권을 확대하여 선거권은 성인의 90%까지 증대되었고, 스코트란드와 아이랜드 지역에도 확대실시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토지세를 인하하고 지방의회의 권력도 재편하였다. 제 3차 선거법 개정은 1884년 선거권을 거의 모든 성인 남자에 확대시켰다. 그러나 1918년에 가서야 제한적 여성의 참정권은 인정되었고, 1928년에 비로서 남녀 평등선거권이 이루어졌다.
3. Chartist운동
인민헌장운동은 1837-1865년 까지 더의 30년간 진행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일부만 수용되었고, 1918년 이후에 비로서 모든 요구가 관철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매년하자는 요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챠티스트운동의 의미는 영국 노동계급의 정치화 의식과 연대의식을 크게 도모시키고 의회민주주의가 성숙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개혁자들은 계급투쟁보다는 줄서기와 서명운동등을 통한 평화적 시위방법를 선호하였다. 영국에서는 1840년이후 곡물법폐지 및 항해조례가 폐지되고 경제적 자유주의 운동은 발전하였다. 노동계층은 노동조합을 통해 단결하고 노사협조체제를 개선시켜 나갔다. 그러나 중산층의 급진주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세력으로 양분되는 과정을 격어야만 했다. 1838년 이상적 사회주의자 오웬 R.Owen등이 중심이된 헌장운동에는 100만명이 서명하여 선거법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미온적으로 반영되고 귀족 및 신흥귀족의 이익만을 반영하는 정부에대한 불만은 고조되었다. 당시 하원에 제출한 청원서의 내용: 1. 남자의 보통선거권의 요구 (선거권의 재산재한 철폐) 2. 무기명 비밀투표의 실시 3. 하원의원의 매년 개선 4. 평등선거구의 실시 5. 의원세습제 폐지 6. 하원의원의 봉급지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로버트 오우엔: 차아티스트(인민헌장)운동의 선구자로 스코틀란드의 면직공장 주인이었다. 그는 초기 사회주의자의 선구자로 모범적인 협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처우개선(교육, 후생, 위생문제)과 조합을 통한 생산적 협동주의와 사회보장책을 요구하였다. (노동자,노약자 질병보험의 실시 요구). 또한 그는 방적공장의 모범사업이 성공하자 1825년 미국 인디에나 농업과 공업이 균형을 이룬 “뉴 하머니” 평등마을을 건설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B. 사회 경제적 개혁
자유무역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운동과 깊은 관련하에 진행되었다.
A. 곡물법 폐지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의 원인은 19세기 초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농산물 폭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곡물에 대한 높은 과세와 수입제한은 소비자의 원성을 사야만 했다. 1839년 멘체스타 반곡물법협회의 결성되고 자유무역주의는 크게 성장하였다. 협회에는 자유상공업자의 대표가 참석하여 정부의 독점에 반대하고 새로운 경제불황 타개책를 요청하였다. 정부는 강력한 대중운동에 타협안으로 관세율 인하와 자유경제 원칙을 허용하였다. 1845년 발생한 자연재해의 피해는 100만명 아일란드인이 영국으로 이주하는 대재앙이었다. 1846년 의회를 통한 개혁은 받아들여지고 자유주의는 부분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프랑스 2월혁명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B. 항해조례법폐지
항해조례는 엘리자베스 1세이후 존재하였고 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더욱 강화된 법률이었다. 내용적으로 영국 및 영식민지에 수입되는 산물(유럽지역제외)은 1. 영국인과 영국상선에 의해서만 수송하고, 2. 유럽에서 수입되는 품목도 영국상선과 생산국 상선에 한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원래 조례의 목적은 해군력 강화를 통한 해운업 발전을 위한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이었고 특히 네덜란드, 스페인등 유럽 제국의 상권을 타도하는데 있었다. 결과적으로 1850년대 산업혁명의 성숙기에 폐지될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수입세, 관세인하등 자유무역주의를 체택하였다. 한편 1860년대 영국은 자유무역적 독점에 최고의 호황을 누리지만 제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1870년대 심각한 생산력 구조변화를 경험하고 제국주의 경쟁시대에 돌입하였다.
C.사회개혁
1832년이후 영국은 사회개혁을 통한 자유주의가 크게 신장되었다. 1829년에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확대실시하였고, 구교도 해방법이 통과되여 아일랜드의 내란위기를 완화시켰다. 1833년에는 공장법과 노예폐지법지 적용되고, 1834년에는 빈민법과 도시자치법등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사회적 제도가 개선과 각종 기간산업이 정비되었고 세금제도도 개선되었다. 특히 아동 및 부녀자의 12시간 노동금지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1847년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되었지만 1850년대까지 열악한 노동조건은 여전히 존제하였다. 1861년에는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형법을 개정하였고, 1867년에는 의무교육의 실시되어 문맹률 퇴치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경제적 자유주의
성장배경은 특히 18세기 후반이래 19세기 중엽까지 영국의 면방직공업의 발전에 있었다. 이에따른 영국 산업자본의 축적은 자유무역적 세계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적 자유방임주의 대두은 영국정부의 역할을 야경국가 또는 경찰국가로 감소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이후 영국도 대륙국가의 새로운 무역과 관세정책에 따라 경제적 통제를 당하면서 보호무역주의로의 정책적 전환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영국 자유주의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경쟁시대에 총체적인 정치적, 법적, 사회경제적, 세계관적 투쟁을 하며 크게 발전하고, 민주주의적 운동으로 확산되여 20세기 대중민주주의로의 기반을 확립시겼다. 188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반대세력인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민족주의자와 세계관적인 대립투쟁이 전개되었다.
19세기 낭만주의
18세기 합리주의 사상은 계몽사상으로 보다 근대적인 삶을 추구하는 근대시민사회가 형성되고 프랑스 혁명을 잉태하였다.(자유주의사상) 그러나 혁명과 전쟁으로 19세기 초 유럽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고 과거와 전통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풍조가 생겨남: 이것이 낭만주의로써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 프랑스: 150년간 지배적 사조)에 반발하였다: 형식과 규범에 얽매인 기교적 도식주의를 비판하고 자연과학 및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에 반발하여 문학에 있어서 법칙성을 무시하였다. 18세기 초,중반 고전주의와 계몽주의가 한편으로 절정에 다르고 다른편으로는 쇠퇴기를 배경으로 싹틈. *정치적 측면: 18/19세기: 1789-1848의 정치적 변혁 (혁명과 반혁명: 공화정, 제정, 왕정복고, 혁명) -혁명과 전쟁으로 인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보다 농후하게 색깔을 띔: -실제로 발생여건은 혁명과 밀접한 연관하에서 해명 및 해석되었다.: -특히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은 2대 발생요인으로 보지만 혁명과 낭만주의 원인과 결과론은 논란이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영국의 낭만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전반에 전성기를 맞는다. *1차 낭만파 3거두: William Wordsworth 윌리암 워즈워드(1770-1850)의 '서곡”, “영혼불멸의 노래”와 Sammuel Taylor Coleridge 콜러리지 (1772-1834)의 “늙은수부”, “크리스타벨”, 익명으로 발표한 “서정가요집”등이 영국의 초기 낭만주의 잘품이다. 워즈워드는 서민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평민의 소박한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인을 유명하다. 또한 그는 범신론적 신비주의적 자연관을 담은 철학시를 발표하여 자연을 명상함으로서 실제를 직관할 수 있는 초월주의를 강조하였다. 콜러리지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와 낭만적 공상을 주제로 시작활동을 하였다. Sir Walter Scott 월터 스코트 (1771-1831)는 “Ivanhoe 아이반호”를 통해 중세생활을 재현하고 과거의 전통과 현실의 차거움을 은유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문학적으로는 골통품 수집가의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제 2차 낭만파의 3거두는 Lord Byron 바이런 (1788-1824), P.B. Schelly 셀리(1792-1822)와 John Keats 키이츠(1795-1821)이다. 그들은 모두 샤프츠버리를 계승하여 미와 진리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특징적인 작품을 통해 낭만주의 미학을 찬양하였다. 바이런의 작품 “Don Juan 돈주앙”과 “차일드 헤롤드의 편력”은 낭만주의 정신으로 당시의 사회악을 비판하였다. 바리런은 신 헬레니즘 운동을 전개하고 1823 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은 실천적 자유주의자였다. 셸리는 무신론자이며.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인 윌리암 골드윈의 제자이다. 그의 주제는 궁극적인 극단론을 통해 사회의 불의에 도전하고 인간의 행복을 갈망한는 것이었다. 키이츠도 바이런과 같은 그리스 예찬론자로써, 그의 작품 “그리스 송”에서' 진리는 미이며, 미는 진리' 라고 노래하였고 미와 지를 동일시한 탐미주의자였다.
영국에서는 1832년 선거법 개정이후 빅토리아시대가 도래하여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황금기가 열렸다. 즉 Pax Britanica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에 Robert Browning 부라우닝 (1812-1889)는 장편시“파라셀수스”를 통해 낙천적 이상주의와 시대정신을 반영시켰고, 워즈워드의 계승자인 계관시인이고 빅토리아정신의 진수를 노래한 Alfred Lord Tennyson 테니슨 (1809-1892)도 운율을 중시한 서정적 장편시를 남겼다. 전체적으로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이성과 과학적 분석을 도외시하고 인간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못하였다. 이는 과장된 서정적표현, 지나친 주관적 감상주의로 표출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낭만주의자는 정치적으로는 다양한 사상에 접목되었다. 따라서 쉴러(독일)는 배타적 애국주의자이고, 워즈워드는 보수주의자였다. 또한 위고 (프랑스)는 사회 민주주의자였지만 쉘리는 무정부주의자였다.
19세기 사실주의
개념: 어원: Latein:realis 실물의 뜻으로 관념과 상상에 대립하는 의미- 처음사용: 쿠르베:'돌께는 사람”: 그는 낙선화 전람회에서 “realist'를 자칭 -철학적: 실재론을 의미: -문예상: idealism으로 심미, 탐미주의에 반대성향:사실을 그대로 보는 현실주의,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 *1830년 부터 19세기 말까지: 프랑스의 고전주의는 완전 후퇴, 낭만주의는 1850년대 이후 쇠퇴하고, 1870년대에 자연과학의 발전로 인한 주관적 감상주의는 철저히 배격된다.
영국의 사실주의
영국의 사실주의자는 1870년대이후 세기말까지의 빅토리아니즘의 황금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을 집요하게 비판하였다. 따라서 사실주의 문학작품의 중심주제는 부르쥬아지의 자기만족의 안이성과 낙천성에대한 공격이었다. 빅토리아니즘 비판은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적 문학을 통해 더욱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다. 영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 Charles Dickens 찰스 디킨즈 (1812-1870)는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와 “두도시의 이야기”에서 중산층의 애환과 산업화에 의한 하층사회를 동정하였고, 카알라일은 “영웅숭배론”과 '의상철학”을 통해 부르쥬아의 속물근성을 공격하였다. 조오지 엘리오트와 버틀러등은 영국소설의 외면묘사를 통한 리얼리즘의 전통을 확립시켰고, 기싱과 Thomas Hardy하아디 (1840-1928)의 작품 테스 역시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현실비관론적 색체를 농후하게 표현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작가들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시대를 통해 나타난 기계주의와 도식주의을 철저히 배격하고 심미주의적 경향을 중시하였다. '미학적 반항운동'을 주도한 비평가 Joh Ruskin 러스킨 (1819-1900)은 윤리적 이상주의 입장에 현실을 비판하였고, 오스카 와일드 역시 역설적인 탐미주의 작품을 통해 사회개혁을 요청하였다. 페비안 사회주의자 버나드 쇼도 현실적 사회문제를 소설의 주제로 채택하였다.
제국주의와 영국
영국의 제국주의과정의 1단계는 대략 16세기 절대주의시대이후 1830년대까지이다. 제국주의론의 발전기초를 중상주의적인 old colonial system에 두고 있다. 구 식민지 국가는 스페인,포르투칼, 홀란드, 영국,불란서의 순서로 나타났다. 물론 제해권을 쥔 네덜란드, 포르투칼, 스페인, 영국등 해상국가는 식민지 경략을 통해 구 식민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Pax Britanica시대가 개막되면서 구 식민지 체제는 쇠퇴하였다. 영국에서의 1830년대 자유주의의 점진적 승리는 무역규제법이 철폐로 나타났고 기존의 중상주의적 요인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이러한 자유무역주의의 발전은 미국의 독립으로 식민지가 유실된 점과 산업혁명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 2 단계는 소위 비공식적 제국주의로 아담 스미스의 자유무역적 국부론이 숭상된 제 2차 산업혁명이전까지의 고전경제학의 시기이다. 고전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 흄, 리카르도등은 부국강병과 국부론, 금은본위제를 기초로한 무역차액주의를 주장하여 신 식민지정책을 조장하였다.
19세기 제국주의로의 변화요인은 자유방임정책에서 잘 나타난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국의 이익을 보호한다). 그들은 실제로 자유무역을 위한 무력사용을 허용하는 입장도 취하였다. 이러한 신 식민지 체제로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1.인구이동 2. 산업구조 3.수출의 변화 (상품수출에서 자본수출) 영국은 1840년이후 뉴질랜드, 서남아프리카의 해안 지역과 홍콩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1870년대 이후 유럽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 획득을 위한 경쟁은 더욱 과열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20세기 초에는 세계의 5/1의 지역과 인구 4/1 확보한 해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용을 보였다. 제국주의의 발전에 따라 산업혁명을 통한 공산품의 생산지의 중심은 런던이었고 주변부인 식민지는 시장,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사회적 분업이 가장 발달되고, 가장 넓은 해외 식민지의 보유한 공업국가로써 자국의 공업이윤을 최대의 목표로한 대외정책을 수행하여 나갔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실각한 1890년 이후 독일의 도전은 영국 공업자본의 현상유지 정책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원인중에 하나인 영국과 독일의 세계제패를 위한 쟁탈전은 독일 공업자본주의가 급성장하여 영국의 독점적 위치를 자극하였기 때문이었다. 소위 독일의 3B정책 (Berlin-Byzantium-Bagdad)과 영국의 3C정책 (Cairo-Celkerta-Cape식민지)의 대결양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 독일은 적극적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1903년 터어키와 철도부설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었다. 이러한 의도는 발칸반도를 거쳐 바그다드와 페르샤만에 이르는 사업으로 중동시장의 면화, 구리 철과 석유등의 자원확보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난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방해작전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의도은 러시아의 발칸 및 지중해로의 남하정책에 배치뇌는 것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서 -특히 스웨즈운하, 이란,이라크, 팔레스타인-와 인도에서의 이권과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와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의 분할경쟁으로 1898년 파쇼다에서 충돌하였다. 즉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였지만, 1904년 영.불협상을 통해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를 상호 인정하였다. 또한 양국은 1907년 러시아를 포함하여 3국협상 체제를 완성하고 3국동맹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측과 대립하였다. 이러한 적대적 제국주의 동맹체제의 성립으로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국제적 분쟁에 직,간접으로 개입됨으로써 세계대전의 위기는 고조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건함경쟁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은 영국과 건함경쟁을 통한 해군력강화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북해와 영국해엽을 위협하였다. 영국은 독일의 이러한 대서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신형 거함 건조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고, 독일도 이에 상응하는 계획을 수행하여 1차대전 이전까지 18:13 의 비율로 맞서나갔다. 특히 독일은 1906년 제2차 함대법을 통과 영국수준의 건함건조계획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도 160척의 낡은 군함을 파기하고 10척의 12인치포 10문을 장비한 거함을 건조하였스며, 1910년에는 6척의 13,5인치포를 장비한 초대형 함대을 건조키로 계획을 세웠다. 하원이 이를 거부하자, 정부는 즉각 의회을 해산하고, 총선을 통해 이를 재가결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