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愛藏품 3題 중 3편.
- 월간 문학바탕 12월호 계제분 -
金 武 一.
3 題, Hifi 음향기기 Gold Mund와 LP음반.
*. 오디오시스템과의 만남.
시간과 세월의 공간은 여기에 머물고 있는데,
사라져 가는것은 우리들의 젊음 뿐이었던가 ?.
얼마전 '한성로타리클럽'의 동료회원인
조각가 유병영교수와 소프라노 손미선,
그리고 테너 이영화, 무용학과 박미영교수의
작품발표를 둘러보던 지난여름에
예술의전당은 짙어가는 녹음과 함께 온통
오색빛 꽃밭으로 만개하여
우리를 반가히 맞는다.
그리고 이웃한 국립문예진흥원에 들려
추억어린 옛 영상자료들을 열람하던중에,
우연히 마주친 빛바랜 음반과 고풍스러운
음향기기는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듯하여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
"1987년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박용찬대표 기증." 이라고 소개된다.
그렇다..!. 당시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나
Main speaker 였던 'JBL 하츠필드' 는
그때 그 사회에 억눌렸던 많은 지식인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 시켜주었던
명기(名器) 였지만, 일반 가정용 오디오의
발 빠른 보급과 CD의 대중화로 인해
안타깝게 문을 닫았었던 그때의 아쉬움이
바로 엊그제인듯 가슴에 메아리친다.
학창시절, 결강의 날에나
모처럼 한가한 주말의
저녁나절에 틈틈히 이곳을 찿곤 했던
그때의 추억은 어느듯 반세기가 흘렀고,
무심한 세월의 쳇바퀴는 쉬지않고 굴러
어느새 인생의 황혼을 바라본다.
모든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이었었지만
우리들의 젊음엔 나름대로의 꿈과 낭만이
계절따라 펼쳐지곤 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청명한 휴일이나 주말, 혹은 분기마다 치뤄지던
기말고사나 전공시험이 끝날 무렵이면
으레이 찿던곳은 백운대의 인수봉이나 만경봉,
도봉산 줄기의 만장봉이나
선인봉 우이암 等이었으며,
당시의 名 배우 '스펜서 트레이스'卿(경)이
출연했던'The Mountain.' 이라는
산악영화는그 시절의 우리들
산악인들에겐 최고의 로망이었다.
유럽의 지붕, 'Alps' 산맥을 連하는
'몽블랑' 절벽에서
조난사고를 당한 동생을 악전고투끝에
구출하던 '트레이시' 경의 名 연기는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을만큼 숭고하였고
이렇다할 야외활동이 쉽질않던 그때,
山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풍이
바로 선풍이었다.
봄과 가을엔 '쟈일'과 각종 등산장비를
울러메고암벽등반과 한강 물살을 가르는
조정(漕艇) 경기에 혼신을 다하던 그 시절...
지금이야 흔해 빠진것이 등산용품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정도의 장비를
제대로 갗추려면 상당한 투자가 요구될만큼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취향이었다.
더욱이 겨울철 동계등반을 위해
산악 Ski Team 과 횡계리 산골마을과
발왕산 봉우리에서 펼쳐지던
우리들의 젊은꿈은
눈처럼 순수했었고,
밤을 지새워 나누던 그림과 음악 화제에
우리들의 꿈은 마냥 부풀었었다.
그때는 전공과목에만 몰두하기도
쉽질 않을때 였었지만,
그래도 그때에 틈틈히 익힌 음악산책은
아마도 우리들 삶에 다양한 활력소로
배양되지 않았던가 싶던 이때에,
나는 서울 세종로 부근에 위치한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의 박용찬대표를
*.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당시 그는 국내 최고의 음반 수집가로서
웬만한 작곡가나 연주가 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제작자라 할 만큼
교양스럽고 세련된 신사로 학생이었던
필자를 무척이나 아끼며 보살펴 주었다.
살아계신다면 아마도 거의
九旬가까이 되셨을게다.
그 분과의 기나긴 인연은
필자가 학업을 끝내고
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후,
예편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인
40대 중반쯤까지 이어졌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울산공단으로
직장을 옮기던날,
명동의 '학사주점' 에서 밤을 지새우며
들려주던 자신의 음악인생은
비록 20여년의세월이 흘러갔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방음효과를 내기위해 천정과 벽면에
고급스러운 자주색 융단을 드리웠던
'르네상스' 를 비롯한 당시의 수준급 감상실들은
학창시절이었던 6,70년대 이후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때의 젊은이들에겐
건전한 교제장소 였으며,
유일하게 고전음악을 들을수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젤' 에 받쳐진 칠판에 백묵으로
곡목을 적은후에 음악이 흘러나와
신청곡을 받곤 했었다.
소란스럽게 잡담 하는곳이 아니고,
단지 음악을 듣는곳이었기에 조용히 들어가
아무 빈 자리만 찿아 앉으면 됐었고,
주변사람들에게 하등에 관심도 없이
음악만 들으러 왔다는 표정으로 폼을 잡는
그런곳 이어서 숱한 음악애호가 들에겐
인기가 많았었다.
어지간한 재력가가 아니면 제대로된
'오디오 시스템' 을 갖추기 어려웠던 그시절에
, '르네상스' 는 호주머니가 얇았던
골수 클래식 애호가나 가난한 음악지망생들의
사랑방인 동시에 '오디오 마니아'
들의 천국이었다.
박용찬 대표는
육척장신의 왕년에 복싱선수 였었는데,
많은이들은 엉뚱하게도 까맣게 염색한
USMC 군복 윗도리차림에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어떤 장애인을
주인으로 착각했었다.
왜냐하면 '시벨리우스' 나 '말러',
'베토벤' 의 교향곡이 울려 퍼질때면
앉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멋에 겨운듯 황홀경에 빠져 나무젖가락을
휘둘러대며 지휘솜씨를 뽐내면서
주인행세를 헀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가을,
박대표는 대구의 향촌동에서
'르네상스'를 열었었는데,
호남지역 호족의 후손이었던 그는,
전쟁 피난길에서도 온갖 세간살이를
마다하고 오직 레코드판과 음향기기만
두어 트럭분을 난짝 싣고 대구로
피란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美國의 클래식 음악전문誌인 'Etude' 는
"코리아의 음악은 전쟁중에도
살아 메아리친다..!."
라고 傳했고, 外信들은 이를 보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바흐' 의 음악은
끊임없이 울려퍼진다." 라고 극찬을 했다.
전쟁중이기 때문이었을까 ?.
이 음악실에서 울려 퍼지던 첫 曲은
바로 '바흐' 의 '마태 수난곡' 이었다.
'르네상스' 에는 시인, 작가, 화가, 영화인,
고등룸펜 등으로 항상 북적거렸다.
시인 전봉건과 이규태기자가 DJ를 맡아
많은 文人들과 지식인들을 끌어 모았다.
그때 전봉건의 한달 수입은 고작 하루에
담배 한갑과 세끼 식사가 전부였으며,
하루일이 끝나면 홀에서 잤다고
필자에게 회고 했다.
당시 이곳에서 전쟁의 시름을 달래며
꿈을 키우던 유명인사로는 詩人 李箱,
이상화를 비롯해 작곡가 홍난파, 전혜린,
안호상박사. 그리고 김환기, 변종화 화백,
영화인 신상옥, 최은희 등이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음악에 심취했었고,
어린시절의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들도
시대를 앞서가던 어머니 이원숙여사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서 장래 세계적인
음악가의 꿈을 꾸었으리라..!.
처음에는 5000여장의 SP레코드판으로
문을 연 '르네상스'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음악인들에게
LP레코드음악을 들려준
역사적인 명소(名所)이기도 했다.
그리고 휴전후 환도하여 1953년쯤인가 ?,
서울 낙원동에 잠시 머물다가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으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음악감상실로 탈바꿈하여
우리를 맞은것은 대략 1960년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이맘때쯤에 우리 아버님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SP판은 1분당 78회 회전판으로 앞뒤쪽에
겨우 두곡만 실렸다가, 대학 초년병시절에
잠깐 얼굴을 내밀던 10인치짜리 LP판은
수명이 짧은 단점으로 이내 단종되고 만다.
이후 독일의 '도이체 그라모폰' 社에서 개발한
앞,뒤판에 열두곡씩 수록되어 새로 태어난
Yellow Label 12인치짜리
제대로된 LP판의 출현은
우리들 마니아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던가 ?.
이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이 지휘하는
'베르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의 연주로
'차이콥스키' 의 교향곡 6번 '비창' 과,
'푸치니' 의 오페라 '투란도트'중에 아리아
'공주는 잠못 이루고 (Nessun Dorma).' 를
33회전 LP판이 닳토록 듣던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 오른다.
그리고 '사라져라 밤이여... 새벽이 되면
나는 이기리, 이기리라..!.' 며 승리를 다짐하던
'아리아' 의 마지막 구절도...
이 감상실에는 1903년에 영국에서 취입한
쇼숑 (Ernest chausson.) 작곡,
소프라노 '마리안 멜바' 의
'리라꽃 필 무렵.(Le temps des lilas.)' 과
대한제국시대인 1908년版 판소리 '적벽가 합주',
명창 방만춘의 '水宮歌' 원본, '
그리그' 가 작곡하고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의 '오페라 전집',
'베토벤' 의 '4중주 18曲집' 等
희귀음반을 비롯해
1만8000여장을 소장하였으며,
박대표는 생전에 필자에게 들려주었던
또다른 일화중에
"전화가 귀하던 그 시절에,
가난한 대학생들이
이곳의 전화를 빌려 신문에 가정교사等,
'알바'구직광고를 내곤 했었다." 던
회고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그때가 언젠가하면
텔레비전이 있는집이 몇이 않돼,
장영철 천규덕과 김일 '아오끼' 의 프로레스링이
펼쳐지는 날이나, 김기수와 '벤베누티' 의
세계 챔피온戰을 하던날,
혹은 월드컵 예선전 때에는
TV가 설치된 다방앞에 입간판을 크게 내세워
중계방송을 선전했었고, 다방 안에는
시합하기 두어시간 前부터 손님들이 몰려들어
제각기 좋은자리를 차지하려고
북새통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때 시합을 알리던 TV화면에 '빵빠르' 는
언제나 오페라 '비제' 의 가극,
'Carmen' 의 序曲이었다.
*. 젊은날의 음악산책
이때 틈틈히 필자에게 들려주던
심오한 음악의 세계와 가슴을 적실듯
아름다운 선률을 일깨워주던 박대표는
지금은 가고 없지만,
그때부터 빠져들던 필자의 음악산책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서 가득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는동안
오랜세월을 함께하였다.
그때는 제대로된 음악체계나 작곡가목록 조차도
옳게 갗추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예컨데 '디스크' 를 한장 구하려면
충무로에 위치한
'베토벤' 社나 '뉴~월드' 社, '명동 음악사',
아니면 세운상가의 '오디오 전문샾' 을
통해야만 어렵게 구할수가 있었고,
혹시 해외 유학생들에게 부탁을 한다 해도
1인당 두장으로 제한되던 시기였었다.
마치 요즘 해외에서 귀국할때
양주 두병으로 제한 하듯이..,
그때, 필자가 제일 먼저 손에 든 첫 '디스크' 는
'멘델스존' 의 '바이얼린 협주곡' 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바이얼린의 음률에
몇날 몇밤을 지새우던 그때의 흥분은
지금도 잊을수 없는 전률이었다.
그리고 '오디오' 와 '디스크' 에 빠져 학업마져도
뒷전이던 어느 추운 겨울날,
충무로에서 '베토벤' 의 '피아노소나타 제 6집' 을
발견하던날의 흥분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소나타' 시리즈를 제 5집까지 어렵사리 구해놓고
마지막 6집을 못 구해 안달이 났던 때였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마침 그날은 학생신분으로 그 만큼의 돈이
수중에 없었고, 욕심은 나고..,
행여나 누군가가 냉큼 집어갈까봐
가게문에 기대어 문을 닫을때까지
반나절을 지키고 서서 칼바람 추위에 떨고섰던
그때의 기억을 떠 올릴때면
지금도 목덜미가 으시시해져
혼자 피시식 웃어본다.
( 이모습을 옆에서 찬찬히 지켜보던 마눌님은
마치 실성한사람을 쳐다보듯, 의아한 눈초리로
필자를 측은하게 들여다보곤 했다.
'이 웬수가 주머니가 바닥나더니
혹시 뿅~ 간거 아닌가..?.'. 하면서...ㅋㅋ...)
그챦아도 몇차례 前期大入試에 낙방후,
운동과 음악과 雜技(잡기)에 몰두하며
고시(高試) 공부를 게을리함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부모님이었기에 암말도 못하고
그날밤 어머니 몰래, 새로 장만해 주신
두툼한 오버코트를 전당포에 잡히고
기어이 그 6집을 사고야 말았다.
그리고 맨날 추위에 웅크리고 다니는 꼴을
수상쩍게 여기시던 어머니에게
범행 전모가 들통이 나,
벌칙으로 내복까지 몽땅 몰수당했던 그 해
그 겨울은 내내 콧물감기 몸살을
달고 다니느라고
유난히도 춥게 보냈다. 어디
그뿐이랴..?. 일년여에 걸쳐 사선(死線) 을 넘어
파월 전투부대 소대장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귀국할 무렵, 남들은 TV와 냉장고,선풍기等
값비싼 생활용품 장만에 열을 올릴때,
필자의 간편한 의낭속엔
'베를린 필' 의 '카라얀' 이 지휘한
'베토벤 합창곡 '과 '파블로 카잘스' 가 연주한
'바하' 의 '무반주 첼로소나타',
'바그너' 의 오페라전집,
그리고 영화 '베니스의 죽음' 에 삽입됐던
'구스타프 말러' 의 교향곡
제 5번 4악장(여름) 等,
희귀한 원판들만 몇장 달랑 들고
귀국선에 오르니,
대대장 차수정중령과 유남규소령을 비롯한
선,후배장교들이 의아하게 묻기를
'김무일중위는혹시 음악학과 전공이오 ?.'
하며 이상한 눈초리로
아래위를 흘겨볼 정도 였었다.
그런가 하면 신혼때,
세간살이 장만에도 급급하여
한푼이라도 절약해야 했던 그때에,
동대문의 어느 古서적방에 '드보르작' 의
첼로협주곡 'RCA 레드씰' 이 나왔다는 소문을
풍문에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놀랍게도 '야노스 슈타커 (Janos starker.)' 의
자필 싸인이 적혀있어 단숨에 애지중지하던
임관기념반지와 그것도 모자라
마눌님의 결혼반지, 시계까지
몽땅 들고 나갔던 기억은
4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호랑이 같은
마눌님의 바가지 메뉴 제1막 1악장의
도입부에 해당된다. 이정도는 약과다.
그 시절에 저축할 생각은 쥐뿔도 않으면서
허구헌날 '마란츠 진공관 앰프' 로부터 시작하여
'맥킨토시 275', '마크레빈슨', '탄노이', '알텍',
'젠센스피커', 그리고 '토렌스 턴 테이블',
'아카이 릴 레코더' 에 이르기까지 필자의 최고급
하이파이 수집행진에 무척이나
속 태우던 마눌님은
드디어 친정과 친구, 시댁, 단골미장원을
차례로 순회하며 양쪽식구들에게
눈물과 콧물시위로 하소연하기에 이르른다.
"큰일 났어요 !. 음악에 미친사람 인가봐요..!.",
그러나 양쪽집의 답변은 다행히도
똑 같은 반응이었다.
"그 사람 그 취미 없었으면
버얼~ 써 삼천포로 빠졌을것이니,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라..!.". 라고...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창업보다
수성(守城) 하기가 몇갑절 어렵다 하시던
mk 회장님의 푸념이 생각난다.
비유컨데 이토록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레코드들도 보관하기가
수집하기 보다 결코 쉽질 않았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 당대를 풍미하던
대가(大家) 들의 성악곡은 다행히도
전(前)과 별 차이 없지만, 실내악이나
관현악曲은 전과 같질 않게
변해 가슴이 아프다.
SP판은 물세척이 가능해 취급하기가
그리 어렵질 않는데, 오히려 LP판은
매우 예민해서 다루기가 여간 힘들질 않다.
레코드보관에 제일의 敵은 먼지와 습기인데
아낀답시고 매일 닦는것도 절대 금물이다.
심지어 흡연자 접근 금지로
몇몇 애연가 친구들의
불평도 만만치 않을 정도였었다.
이토록 소중했던 음반들도 머지않아
필자의 품을 떠날때가 된듯하여
박대표의 전철을 밟아
예술의전당으로 시집보낼 생각이
불현듯 드는 요즈음이다.
별이 빛나던 그때 그 밤들..!. 어언 반세기의
세월이 젊은날의 음악산책과 더불어
江물 흐르듯 無心히 흘러갔다.
나름대로 긴 세월동안 애청해 봤지만
뭐니뭐니해도 '베토벤' 의 교향곡은
'푸르트 뱅글러' 와 '부르노 발터' 의
지휘 연주가 일품이었고,
그의 피아노曲은 역시 '빌헤름 박하우스' 가...
그리고 '모챠르트' 의 현악곡은
'쥴리어드 실내악단' 의 연주... '
쇼팽'은 '루빈슈타인' 이.
아울러 '슈베르트' 의 가곡은
'피셔 스카우트' 의 연주가 최고 였었다.
세월은 흐르게 마련인가..?.
그동안 수많은 세월의 쳇바퀴는
덧없이 굴러갔어도 가슴속에 깊히 새겨진
마음에 양식은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곤 하였다. '르네상스'도,
신세계 백화점 5층에 자리했던 '에스에스' 도,
소공동부근의 '아폴로' 와 '카네기홀',
그리고 明洞에 '돌체'. '쎄시봉' 도,
종로에 '디 쉐네' 와 '여왕봉' 等도
이제는 그리움이 흠씬 풍기던
추억속의 빈 공간으로
영원히 남을것이다.
回想의 나래가 여기까지 이어질때 쯤이면
문득 떠오르는 앳띤 소녀의 얼굴 하나 ~.
音大에서 성악을 전공한다며 궂은날이면
이곳을 찿아, 옆좌석을 미리 잡아주던
긴머리소녀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가
어께에 살며시 기대어 조용히 들려주던
'솔베지의 노래' 가 추억이 아련한 구름속을
나는듯 귓전을 맨돈다.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옛날을 그리워 하고 있을까..?.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베란다 유리창 을
두드리는 이 아침,
나는 오늘도 심신을 정리하고
나의 애장품
'Goldmund Mimesiss 29' 앰프와
'ProAc Reforence 4'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추억어린 이 노래를
들으며 오늘하루를 시작한다.
저 멀리 응봉산 넘어로
가을이 손짖을 한다.
가물가물한 불암산능선에
떠오르는太陽 새벽을 알리는 물안개가
동호대교에 번질무렵
木林森房에서 金 武 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