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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부터 몇 시간 동안 히브리서를 공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어렵다. 너무 어려운 내용들이 가득 차 있어서 요절 몇 절 써먹는 것 외에 거의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이해한다든지 가르치는 것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대부분 그렇습니다. 요절 중에 아는 것이 뻔하잖아요.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나머지는 알바 없고.
히브리서 이 한 편지에서 요절이라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딱 그 한절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게 일반 대부분 교회가 그 모양입니다. 일전에 어떤 집사님이 여기서 배운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라고 해서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내려놓고 그래도 에스라하우스 성경 배운 목사라서 다르지 않겠는가? 해서 큰 마음먹고 옮겨 갔는데 별 차이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낙심하고 괜히 왔다 또 돌아갈 수도 없고 거기다가 예를 들어서 왁자지껄 뻑적지근 하는 통성기도라든지 심지어 한편에서는 방언이야기도 나오고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그 안에서 들리는 깨달아지는 진리에 의해서 사람들이 변화를 받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에스라하우스에서 배운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 성도들도 가보니까 똑 같거나 더 못하거나 그렇다는 거예요.
저한테 편지를 하면서도 이걸 고자질하는 것 같아가지고 편지를 쓸까 말까 보낼까 말까 하다가 그렇게 보내왔다고 여러분, 그 사람 한 사람만 그런 말하는 게 아니고 제가 여기서 성경 배운 대로 한다고 해서 어느 도시에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해서 소개해서 보내면 사람들이 가서 실망했다는 거예요. 성경대로 안 한다는 거죠 .여기서 배운 대로도 안 하고.
그래서 참 어렵다. 개혁이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겁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한 건데 당연한 그걸 수용을 못 해가지고 일반교회하고 똑같이 그렇게 하고 말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권 한 권을 통전적으로 이렇게 봐야지 요절 한두 절, 써먹기 좋은 구절 이렇게 보는 그런 기독교 가지고는 세상을 이기지 못해요. 사람도 변화되지도 않고.
여기 히브리서 하면 여기가지가 조금 다른데 구약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 다음에 첫머리가 너무 이상합니다. 보통 편지를 보면 맨 앞에 발신자가 나와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누구는 하고 또 편지를 쓰는 주체, 발신자가 자기를 밝히고 또 인사가 나옵니다. 보통 문안도 하고 그런데 이게 없어요.
지금 신약에 아시는 대로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 4권 중에 3권은 그런 문안 같은 게 없죠. 그런데 누가복음은 문안 비슷한 게 있어요. 간접적으로지만 누가가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또 수신자 되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편지 형식으로 썼거든요. 긴 편지이고 또 사도행전은 누가복음 속편 형식으로 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 하는 형식으로 쓰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약이 거의 다 편지형식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이 세 권만 편지 형식이 아니고 신약 27권 중에 24권이 직접 간접적으로 서간문 형체 편지형식으로 썼다는 거예요. 편지형식에는 반드시 발신자가 누구다 하는 것과 또 문안 앞에 인사 이런 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런 게 없는 겁니다. '옛적에' 이렇게 나와요. 누가 쓴다는 말도 없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뭐가 좀 다르다. 다른 게 왜 다르냐? 그보다 더 난해한 것은 히브리서는 이 첫머리에 발신자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 썼는지를 몰라요. 누가 쓴 편지인지.
그 다음에 우리가 이 히브리서라고 표지를 붙였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는 프로스 에브라이유스, 즉 ‘히브리인들에게’ 라는 말만 그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것은 확실해요. 그래서 이 문제를 까다롭기는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야 해요. 진도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기록했느냐 이런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만 내용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냥 히브리서 기자는 모른다고 하는데 모른다고 하고 넘어가기가 그러니까.
일단 연구하거나 혹은 추측을 해 보는데 27권으로 확정될 때 히브리서라든지 몇 몇 권은 성경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아주 고민을 했던 그런 책들입니다. 7의서라고 신약성경 중에 7권이나 이게 성경에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렇게 고민을 했다는데 그 중에 히브리서는 대표적으로 누가 썼는지 분명하지 않은 걸 어떻게 우리가 성경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 그런데 어떻든 명찰을 달아야 돼. 27권에 들어가려면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성경에 집어넣기는 어려운 거야.
그래서 마지막 시간까지 애를 먹다가 마감시간 임박해가지고 그냥 바울이라고 명찰을 달아라 그냥. 그래서 바울이라고 명찰을 달아가지고 성경 27권 속에 포함시키고 땅땅땅 치고 통과했어요. 통과하고 나서는 그 떼어버려라. 이름도 확실하지 않은 걸 뭐하러 달고 있느냐 하고 떼 버려요. 바울이라고 명찰을 달았다가 떼어버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만 아신다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고 넘어가면 되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언제 썼느냐? 어디서? 언제? 하면 아마도 네로황제 박해가 시작되면서 유대인들 히브리인들이 어떤 기대가 흔들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져 가지고 로마를 심판하고 헤롯왕을 골로 보내고 끝장을 내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게 안 이루어지거든요.
안 이루어지고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네로황제에게서 핍박을 박해를 받아야 되는 입장이 되니까 유대교를 믿던 히브리인들이 교회 기독교로 나왔다가 그 기독교를 다시 배반하고, 여러분 세상 안 믿는 사람으로부터 교회로 회심하고 나오는 걸 컴버터라고 해요. 영어로. 반대로 신을 돌려 신고 기독교를 배반하고 다시 다른 종교로 가는 것을 퍼버터.
그러니까 이 유대교에 있다가 기독교로 컴버터 해 왔다가 다시 퍼버터 해가지고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갈 때 가는 사람 안 말린다 그럴 수 있죠. 또 말려봐야 가는 사람이 돌아온다는 것 어려워요. 여러분 교회문제 종교문제 이런 경우에 한번 교회가 싫어져버렸다 아니면 실망해버렸다 하면서 우리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붙잡기는 거의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해 보아야 얼마 있다가 또 다른 문제에 걸려서 또 떠나고 이렇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히브리서 기자가 유대교를 신봉하다가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 교회로 나왔다가 다시 유대교로 가는 히브리인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래 잘 가라. 떠날 때는 말없이. 이런 식으로 내몰라라 해버린 게 아니고 히브리서 같은 장문의 편지를 써 가지고 어떻게든지 다시 붙잡아보려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을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이 내용을 읽어보면.
그러면 당장 우리가 기본 마인드가 이 순서대로 하면 맨 먼저가 언제인가 하면 네로황제 박해에 의해가지고 유대인들 히브리인들이 다시 기독교를 배반하고 유대교로 돌아갔을 때쯤으로 이렇게 본다면 한 64년부터 박해가 일어났으니까 65-66년도 저는 66년 이렇게 보는 입장인데 66년 정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이게 참 어디서 기록되었는지 나오면 누가 기록한지도 나와버리는 거죠. 어디서 기록했는지도 어려워요. 누가 기록했는지 알면 쉬워지는데 저는 바울이 기록했다고 보는 입장이거든요. 그럼 바로 나오죠. 언제 66년 어디서 로마 마메틴 감옥에서.
누가는 바울이 무엇을 기록했느냐? 이것이 핵심이죠. 히브리서 안에 무얼 기록하고 있느냐, 무얼 기록하려고 이 편지를 썼느냐 그건 간단하지 않아요. 한두 마디로 안 되고 나중에 쭉 한 열 가지로 설명할 겁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대교 있다가 기독교로 나왔다가 유대교로 돌아가니까 어차피 두 종교를 비교 대조하는 입장인 거죠. 유대교는 너희들이 옛날에 있다가 교회로 나왔다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 유대교라는 게 뭐냐 도대체가 유대교가 자랑하는 것 그게 뭐냐, 내 놓을게 뭐 있나 하고 그들이 내 놓고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들,그 유산들 그것 다하고 우리 기독교 안에 있는 진리하고 비교 대조해 나가는 그런 하나의 논문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럼 언제? 66년도. 어디서? 로마 마메틴 감옥에서. 누가? 바울이. 무엇을?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게 더 크다 하는 것을.
어떻게 왜 기록했느냐? 지난번에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볼 때 디모데를 보고 바울이 로마 마메틴 감옥으로 오라고 그랬죠. 오라고 하면 디모데가 목숨 걸고 갔을 거란 말입니다. 갔는데 디모데가 충격적인 소식을 가지고 온 거라. 예루살렘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거죠. ‘이 머선 소리야?’ ‘사도들 왜 다 세상으로 흩어져 가 버렸고 예루살렘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럼 신자들은?’ ‘신자들은 다 흩어져버리고 옛날 유대교로 돌아갔어요.’ ‘뭐야? 어쩌고 어째?’
바울이 그 이야기를 듣자 아주 피눈물을 쏟았을 거라. 바울이 로마서 우리가 볼 때 자기 골육의 친척을 위해서라면 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까지 자기 동족 구원에 관해서 애태우는 이 바울이 디모데가 가지고 온 이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피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래가지고 몇날 며칠 아마도 제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바울이 지금 다시 석방되어 나가 가지고 그 히브리인들을 찾아가서 전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도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유대교가 그나마 조금 교회 나왔던 그 마저도 일껏 나왔다가 다시 배반하고 옛날 유대교로 돌아갔다니 세상에 기가 막힌 얘기죠.
아마도 잠도 안 주무시고 식음도 전폐하고 이러고 있으니까 제 생각에는 누가가 곁에서 좀 재촉 내지는 독촉 내지는 동기부여를 했을 것 같아요. ‘아니 선생님 선생님은 이곳저곳 이사람 저 사람에게 일이 있을 때 마다 당신 자신이 못 가실 때는 편지를 쓰고 하시더니 이렇게 몸져 누워있기만 할 게 아니라 편지라도 좀 써 보시지 그래요.’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디모데 종이하고 준비해 와 봐.’
그래가지고 바울이 거의 기진맥진하다시피 해있던 바울이 일어나가지고 자기 온 남은 여력을 총 경주해가지고 이 편지에 열정을 쏟아 붓는 거예요. 여러분 그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편지를 무한히 길게 쓸 수도 없고 너무 길면 사람들이 안 읽어보니까. 이 글을 쓸 때 유대교의 대해서 통달해야 돼 비교하려면 아니 유대교하고 기독교를 양쪽 정보를 섭렵하고 양쪽을 통달하지 않으면 비교 대조가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바울 정도가 되지 않고는 그 시대에 유대교에 근본이 뭐며 기독교의 궁극적 진리가 뭔지 이 양쪽 다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그 정도 실력자가 바울 외에 있었는가 하면 제가 생각하는 대로는 어렵다는 거죠. 바울이 심오한 얘기를 씁니다.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산을 다 거론하고 그리고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워하는 그것들보다도 예수님이 얼마나 더 위대하신가 하는 것을 계속 비교 대조 이렇게 나가는 서신이 히브리서입니다.
그럼 왜 썼느냐? 그것은 자기 동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로서는 그 예루살렘교회가 회복된다는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히브리인들이 세계만방으로 흩어져가지고 있더라도 자기가 쓴 이 히브리서를 읽어보는 날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인식하고 돌아올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서도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을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라고 그래요. 그들이 뭐 하다가 어떻게 하다가 기독교로 돌아올 수 있느냐? 히브리서를 보면 됩니다.
마태복음을 제대로 보고 히브리서를 보고 이사야서를 보고 레위기를 제대로 보고 이렇게 몇몇 권을 제대로 탁 보면 뻥 터지면서 유대교가 유치한 수준의 어린아이 같은 그런 종교이고 기독교가 이제 완성된 진리로구나 이거! 하고 그냥 전격적으로 돌아서는데, 여러분 그럴 때 유대인이 유대교에 있는 모든 것을 통달한 다음에 이 히브리서나 마태복음이나 이사야서나 이런 책을 읽어가지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해가지고 신자가 되면 우리 신앙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방인들이 요절 몇 절 가지고 구약도 잘 모르고 신약도 잘 모르고 요절만 몇 절 알고 이런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도 제가 볼 때 히브리서는 여전히 유대교에 빠져 있다가 히브리서를 보면 제대로 보면 그들은 유대교에서 벗어납니다. 헤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목적으로 썼다.
그럼 언제? 66년 경에. 어디서? 로마 마메틴 감옥에서. 누가? 바울이. 무엇을? 유대교 유산과 기독교 예수 안에서 발견된 진리를 비교 대조하는 형식으로. 어떻게? 누가가 권유해 가지고 자기 동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썼다. 왜 썼느냐? 오고 오는 세대 누구든지 히브리인 중에서 이 히브리서를 읽다가 유대교에 있는 것은 다 모형과 그림자 장난감 정도 소꿉놀이에 불과하고 진짜 참 진리가 기독교 안에 예수님 안에 있다 하는 걸 발견하는 날 돌아오게 하려고 썼다. 이렇게 하는데 이런 정도 히브리서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나서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조금씩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PPT-히브리인들]
그림을 한 번 보세요. 히브리인들이 지금도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저렇게 하는 걸 예수님은 골방에 은밀한 곳에 가서 내 하나님께 기도하라. 꼭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가서 나는 이렇게 기도 많이 한다 이런 조로 하지 말고 저런 것 예수님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겁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 참 어려운 말인데 이것도 설명하려면 오늘 밤을 새워도 잘 안 될 것 같아요. 히브리인들이 뭐냐? 물론 우리가 그냥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손이 히브리인들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해요. 등을 보면 모르겠죠. 한번 뒤를 돌아서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이삭의 자손도 아니고 야곱의 자손도 아닙니다. 순 백인들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의 90% 그리고 우리 동양사람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우리 동양 사람이고 셈족이니까 우리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10%밖에 안 돼요. 전부 다 백인계열이니까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유대교를 믿은 카자르족이라는 거예요. 유대교를 믿어가지고 이게 그러니까 콧대가 선 거라든지 피부색깔이라든지 머리색깔이나 눈 색깔 모든 것들이 다 대부분 백인 계열입니다.
이 히브리인들에 대해서 지금은 참 어려워요. 유대교를 믿었으니까 히브리인들로 봐야 되느냐 하면 정통파 히브리인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고 지금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이야. 왜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자손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와서 세우는 나라야.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 메시아 안 왔잖아요 자기들이 볼 때. 그래서 가짜라는 거죠.
그러나마나 지금 이스라엘 땅에 그들이 그 땅 쫓겨나면 갈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 가장 막강한 나라처럼 되어 가지고 언젠가 이 이야기 한 번 해야 되는데 사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겉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보다 힘도 세고 더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은 미국 위에 이스라엘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더 높아요. 미국이 시키는 일을 이스라엘은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시키는 일을 미국이 안 하는 길은 없습니다. 영원히.
그래서 사실에 더 가깝게 말하자면 미국이 이스라엘 본국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미국은 순 잡탕이거든요. 그래서 이름만 아메리카합중국이지 사실은 유대인의 나라, 유대인의 영원한 본국처럼 되어 있어요. 그 얘기는 다음 특강을 한 번 하기로 하고 하여간 히브리서에서 시작해서 계시록 가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한 번 한 겁니다.
자, 간단하게 히브리서 내용을 정리하면
1. 구약성경에 많은 선지자들을 유대인들이 자기들 자랑이고 자기들 유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구약에 나오니까. 유대인 경전 유대교 경전 구약에 나오니까 그것을 인정한다고 치자.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신 우월하신 그리스도 옛적에 선지자들로 통해가지고 전한 것들 여러 가지 모양과 여러 가지 부분 부분적으로 조금씩 얘기한 게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조금씩 하다가 이 모든 걸 마지막에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드러낸 예언자가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모든 예언자 다 보태도 우리 예수님만 같지 못해. 맞습니까? 그런 얘기를 지금 하는 겁니다.
2. 그 다음에 유대교하면 천사 이야기가 많아요. 우리 기독교 안에는 천사가 둘 밖에 없어. 가브리엘하고 미가엘, 나머지 있기는 있는데 누군지 이름도 모르고 천사론 자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데 유대교는 천사론이 또 대단해요. 이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왜? 맏아들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모든 천사는 그 앞에 경배할지어다(히 1:6) 하는 것을 읽어보지 못 했느냐 하면서 모든 천사보다 더 뛰어나신 예수그리스도.
3. 또 유대교는 모세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런데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 모세는 그 집 맡은 사환에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집의 독생자입니다. 사환하고 독생자하고 어떻게 비유하겠느냐?
4. 또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해준 여호수아보다도 여호수아도 이름이 여호수아이고 예수님도 여호수아야.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은 6년 반 동안 정복해 나누어 주었지. 그것은 그림자이고 우리 예수님은 죽음의 강 건너 천국의 상속자가 되어 가지고 천국을 영원한 땅을 나누어 주실 분이다. 여호수아가 참 안식을 주셨다면 다윗이 훗날에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왜 그런 말을 했겠느냐? 진정한 하나님 백성에게 영원한 진짜 안식은 남아 있다는 거예요. 영생 복락의 안식은 그건 여호수아가 준 게 아니고 우리 여호수아 예수님이 주신다는 거예요.
5. 또 아론보다 얼마나 위대하신 제사장 멜기세덱 반열이다. 아브라함 때 보면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이 있었는데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경배하고 십일조를 갖다 바치고 그랬어요.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고 야곱의 아들이 레위이고 레위 후손 중에 아론자손들 제사장이니까 새카만 아래입니다. 그런 아론의 제사장들하고 예수님의 레벨이 멜기세덱 레벨에 속해요. 아브라함도 그 앞에서 꿇어 경배해야 되는, 그러니까 너희 아론의 자손들 제사장보다 더 높은 반열에 속한 멜기세덱 반열에 속하는 예수님이 그런 영원한 제사장이다.
6. 그리고 너희 제사장은 자꾸 죽고 바뀌고 그래 자기도 허물이 있어 가지고 맨 날 지성소 들어가려면 자기 죄 때문에 벌벌 떨면서 자기 죄를 속죄하고 그리고 나서야 겨우 백성의 죄를 위해서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그런 성전에 너희 아론의 자손들이 들어가잖아? 그런데 우리가 믿는 멜기세덱의 반열에 속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어 가지고 모형으로 모델하우스로 지은 그런 사람 손으로 지은 그런 성전이 아니라 하늘 지성소에 진짜 성전에 단번에 들어가서
7. 송아지 피가 아니고 염소 피가 아니고 자기 피를 가지고 영원히 죄를 속죄하는 그런 제사장이 우리 편에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웅장한 성전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 염소나 송아지 피보다 더 나은 보배로운 예수님의 보혈의 피.
8. 또 영원히 심판하실 것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왜 그 사람들이 옛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느냐? 예수님의 재림이 안 올 것 같다는 겁니다. 재림이 거짓말 같다. 그러니까 잠시 잠깐 오실 이가 오실 것이고 지체하지 않는다.
9. 그 다음에 진정한 성도라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같이 그렇게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더 자주 모이고 해야지 왜 안 모이고 교회를 안 나오느냐.
10. 그 다음에 너희가 신앙생활을 똑바로 안 하니까 혹시 징계를 받아가지고 낙심하고 그런 모양인데 하나님은 자기가 받으시는 아들들마다 반드시 징계한다. 사생자라면 몰라도 참 아들 같으면 징계하지 않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나 말이야.
11. 그 다음에 또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 믿으니까 장사가 안 되고 어쩌고 해가지고 그런데 과연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이런 이야기를 쭉 해 가요.
핵심은 이런 열 가지 열한가지 정도의 내용이면 끝났어요. 사실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 여러분 정말 그런가 만가 해서 공부를 해 보지만 내용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면 너 유대교 소중히 여기는 선지자 천사 모세 여호수아 아론 성전 염소나 송아지 피 그런 것 7가지 너희가 다 가지고 와 봐. 예수님 만 하나 그게?
이 정도까지 유대교와 예수님에 대해서 달관할 정도의 기자라면 바울이 아니고는 어렵다 저는 그렇게 봐요. 그때 당시에 그래서 저는 바울이 썼다고 하는데 왜 앞부분에 인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 이렇게 안 하고 인사가 없느냐?
그건 글쎄요. 추측이라면 추측이고 가설이라면 가설이 되겠는데 제가 볼 때 이 편지를 바울이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건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저 추측이니까 쓰기 시작했는데 이걸 다 못 써서 다 완성을 못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특식이 나온 거예요. 특식이 나오면 그날 사형집행을 하는 거거든요. 절대 사형을 언제 집행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감옥에도 그렇고 옛날도 다 몰라요. 특식이 나오면 그날이 집행하는 날인데 그걸 보면 사람들이 졸도를 하거나 아니면 오줌이 줄줄 나온다고 해요.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바울은 자 드디어 오늘 나를 부르시는 초대장이 왔다. 나와 함께 즐기자. 하면서 아마 기쁨으로 최후의 만찬을 들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서 끝을 다 못 맺었어요. 그런 걸 미완성의 원고를 유고라고 그래요. 미완성의 유고를 누가에게 위탁을 하면서 ‘이보게. 누가 당신은 일생동안 나와 고락을 같이 했지 않소. 내가 지금 뒤에 쓰고 싶은 말은 이런 말 이런 말들인데 대충 당신은 내 안에 있고 나는 당신 안에 있지 않소. 그러니까 내 대신 뒷부분을 완성해서 내 동족 내 형제 내 골육들에게 꼭 전해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면 누가가 ‘제가 심령을 바쳐서 유언을 따라서 완성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고.
그리고 이제 최후의 변론을 하죠. 사형집행 하기 전에 최후의 변론 기회가 있는데 그때 제 생각에는 아마 디모데가 최후의 변론에 나갔을 것 같아요. 자기 아버지같이 모셔왔기 때문에 디모데는 결코 가만있지 않았을 거라. 그러나 정치범으로 그렇게 지목된 사람은 최후 변론 그런 건 요식행위에 불과하지 돌이키지 못해요. 아무리 디모데가 변론을 잘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바울은 순교하고 너무 바울에 대해서 바울의 무죄를 강변하니까 오히려 디모데가 또 체포되어 가지고 감옥에 투옥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다가 68년도에 네로가 죽어요. 누가는 바울이 순교한 후에 유고 미완성의 원고를 가지고 에베소로 왔을 겁니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감옥에 갇히면서 누가를 보고 에베소교회는 오래도록 비워둘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이 판국에 에베소교회를 가서 지킬 만 할 그런 인물이 누가 선생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고 에베소교회를 부탁합니다 하고 부탁을 했고 누가는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누가가 에베소에 와서 이 히브리서 원고를 다 완성을 할 무렵에 네로가 죽었고 네로가 죽자 디모데가 풀려납니다. 정치범은 그렇잖아요.
풀러났는데도 디모데가 바로 에베소로 온 게 아니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형제들을 돌보느냐고 지체되는 동안 누군가가 이 소식 네로황제 죽은 것과 디모데가 풀려난 소식을 가지고 누가 에베소에 누가를 찾아온 거야. 여러분 히브리서 맨 끝을 한번 보세요. 히브리서 맨 끄트머리를 잘 봐야 돼요. 13장 20절,
(히 13:20~25)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고 끝난 거죠. 사실은 완성된 겁니다. 이 편지는 여기까지 하고 완성이 되었는데 그 뒤에 22절에 추신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하는 것 같아요 .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탈리아에서 에베소에 있는 누가를 찾아온 겁니다. 디모데가 놓인 소식과 네로가 죽은 소식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서 편지가 21절까지 해서 끝나는 뜻하다가 이 사람들이 오니까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기다가 달아 붙이고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내게 문안한다 라고 쓰고 있는 겁니다.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편지 끝을 보면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그럼 맨 앞부분에 아까 왜 발신자하고 문안인사가 없느냐? 반드시 있었다고 봅니다. 있었지만 그럼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이렇게 했을 텐데 누가가 이걸 가만히 보니까 요 부분을 빼는 게 옳을 것 같아. 앞부분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안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히브리인들 유대인들이 바울 하면 흥! 하고 안 읽을 가능성이 있어요. 바울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안 읽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도 원래는 있었는데 누가가 가위를 들고 하늘에 계시는 바울 선생님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쓴 게 중요한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읽어야 되니까요 하면서 그 앞에다 반드시 누가 썼다는 말이 있는 건데 그걸 가위질 했다고 봐요. 그것 아니면 바울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자기가 썼다 하면 히브리인들이 안 읽을 거야. 바울? 흥! 하고 그래서 누가 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용을 일단 읽어야 하니까.
그래서 둘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자기 이름을 뺐다든지 훗날 이 편지를 보내려고 할 때 바울이라는 말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이걸 안 읽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아마도 가위질 했지 않겠나 이렇게 보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하면 히브리서가 왜 이런 모양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 왜 앞에 발신자 문안인사 이런 게 없는지 왜 그 뒤에 디모데가 놓인 이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건지 이런 여러가지를 제가 신약의 여러 서신들과 여러 가지 정황을 다 참작해 가지고 유추한 겁니다. 그런대로 사람들이 저가 이 히브리서에 대해서 소개를 했더니 듣는 사람마다 주장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이 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겠다. 하고 수용을 하는 입장입니다 대부분.
그래서 오늘은 히브리서의 서론이 이렇게 좀 길어졌는데 그래도 서론 혹은 개론 총론을 인트러덕션을 잘 들어야 됩니다. 잘 듣고 정리가 되어가지고 그러고 나서 본문을 읽어가야지 그냥 무대포로 읽어가지고는 맨 또 아는 것 반짝반짝하면 그 아멘 그러고 모르는 것 눈 감아버리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제가 개요를 다 말씀드렸고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썼는지까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다음 시간부터는 본문을 차근차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히브리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나왔다가 믿음의 뿌리도 채 내리지 못한 채 네로황제의 박해가 두려워서 다시 옛날 유대교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기록한 이 히브리서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내용도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학자처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히브리서 끝까지 기록된 원 목적대로 잘 읽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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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