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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가 조정래의 3부작 소설 『정글만리』(해냄)가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제치고 주요 온·오프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2·3위를 휩쓸고 있다.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이 13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국내 출판 초유의 기록을 보유한 작가에게도 이렇게 한 작품이 1·2·3위에 오르는 건 처음이라니 기록 중의 기록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정글만리』는 조정래 하면 떠오르는 역사·민족·분단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전작들이 한국 근현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과 분단의 현실을 그렸다면, 이번엔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췄다. 재벌들의 탐욕을 비판한 『허수아비춤』(2010)에서 무대를 넓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파고든 것이다.
작품에 임할 때마다 “이걸 쓰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사명감이 생긴다는 그가 『정글만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설의 위기라는 지금, 독자들의 심금을 파고든 핵심은 무엇일까. 그 답을 듣기 위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으로 향했다. 『태백산맥』의 무대이기도 한 그곳에서 작가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눠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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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약속 장소는 ‘태백산맥문학관’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문학세계가 응집된 곳이니 두루 이야기를 듣기에 좋을 듯싶었다. 하나 그는 통성명을 끝내자마자 “밥부터 먹자”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전쟁통 배고픔의 기억이 사무쳐 하루 세 끼는 제때 꼬박 챙겨 먹는다”는 그였다.
인사를 겸한 밥상머리 화제는 당연히 신작의 흥행 소식. 만면에 웃음을 띤 그는 ‘기록’을 세운 날이 8·15 광복절이었는데 일본 대표 소설에 ‘완승’을 거뒀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게다가 마침 그의 생일까지 겹쳐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됐다. 현재 『정글만리』의 판매부수는 36만 부(8월 28일 기준)를 달리고 있다.
그가 책을 처음 구상한 건 20년 전『아리랑』 취재 차 중국에 갔을 때였다. 옛 소련이 공산주의로 망해 가는 반면 중국은 여전히 건재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던 게 시초였다. 답은 사유재산 허용에 있었다. ‘내 것’을 가질 수 있게 된 인민들은 열심히 일했고, 14억 인구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됐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본주의적이며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체제”라 느낀 작가는 『허수아비』에 이어 이번 책을 내게 됐다.
그럼에도 조정래의 ‘변신’은 사뭇 낯설다. 20년간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역사와 민족을 노래했던 그가 왜 ‘경제’로 선회한 것인지, 대하 3부작과 『정글만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작가는 민족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시대의 스승이자 나침반이 돼야 한다.『태백산맥』『아리랑』『한강』을 쓸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어떻게 생존해야 하고,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할지가 가장 큰 과제다.”
그는 이어 “중국이 앞으로 20~30년은 계속 발전할 거고, 그렇다면 국경이 맞닿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지 제시해주는 것이 대한민국 작가의 소임 아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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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들이 그랬듯 『정글만리』역시 특정 주인공 없이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며 등장한다. 10년 넘게 중국 주재 상사원으로 있는 전대광, 그의 ‘관시(關係)’로 뒤를 봐주는 세관 고위 관료 샹신원, 의료사고로 빈털터리가 된 뒤 중국 성형시장을 공략하러 온 의사 서하원, 철강 수주건을 놓고 일본 업체에 밀려 좌천된 포스코 부장 김현곤 등이 벌이는 비즈니스 전쟁이 이야기의 한 축이다. 여기에 전대광의 조카이자 베이징대 유학생인 송재형과 그의 연인 리옌링 등이 보여주는 로맨스가 다른 축으로 묘사된다.
소설은 소설이되 읽고 있자면 ‘중국 요점정리’를 보는 듯하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스토리 전개와 함께 중국의 역사·풍습·문화가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마오쩌둥의 대장정부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이르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집약해주는 동시에 비즈니스 이면의 관행까지 가감 없이 묘사된다.
역사학자도 아닌 그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쓸 수 있었을까. 수집한 자료는 방대했다. 중국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수첩이 90권, 중국에 관해 읽은 책도 80권이나 됐다. 현장에는 20년간 여덟 번을 오갔고, 한 번 가면 두 달씩 머물렀다. 거기서 얻은 정보가 또 수첩 20권에 달했다.
그는 소설가라면 “비행기 타고 위에서만 바라봐도” 현장에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직접 보고 들으며 얻은 수확이 컸다. ‘관시’로 사업이 성사되고, 고위 공직자가 뒷돈을 받고, 공무원 한 명이 첩 146명을 거느리는 부정부패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나라가 왜 계속 성장해 가느냐의 의문이 풀렸다.
“현지에서 한두 시간 얘기해보면 속내를 터놓는다. 국민들은 그냥 눈감아 준다고 했다. 왜? 그들 덕에 이만큼 살게 됐고 나라가 망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민심이다. 서양의 관점에서나 크게 문제를 삼는 거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역시 외부의 추측일 뿐이었다. 직접 선거만 아닐 뿐 거주·결혼·사유재산의 자유가 모두 허용되니 인민들은 현 체제에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공산당 체제 아래 단계적으로 리더 수업을 받아가며 1억 명 내외의 인민을 다스려본 성장(城長)들이 당 수뇌부가 되는 걸 합리적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짝퉁’으로 비난받는 중국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했다. “왜 우리나라 기술을 금세 따라 하는 줄 아나. 장인정신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손톱만 한 돌에 돋보기로나 보일 법한 얼굴을 새겨 넣는 기술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나라더라. 이런 중국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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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둘러본 태백산맥문학관에는 너덜너덜해진 『태백산맥』이 전시돼 있었다. 서울대·순천대 등의 도서관에 꽂혀 있던 책들인데,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봤는지 표지를 다시 양장본으로 바꾼 것도 있었다. 실제 팔린 부수보다 10배 수의 사람들이 봤다고 했을 때 독자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만6500장의 원고 역시 이미 애독자 6명이 필사본을 출판사로 보낸 상태. 문학관 측은 조만간 이를 전시하고 감사패를 증정할 예정이다.
이처럼 30년 전 세상에 나왔던 『태백산맥』은 지금도 필독서가 되고 있지만 정작 새로 나온 최근 소설들은 출판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여기에 작가는 따끔한 일성을 했다.
“한국이 영화 하나를 1300만 명씩 보고, 야구 한 경기에 몇만 명이 몰리는 나라다. 그런데 소설 시장이 황폐화됐다니. 독자들은 읽을거리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 만날 술 먹고 연애 소설이나 쓰고 있으니. 공동의 이야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왜 감동을 못 주나.”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한테 문학을 배웠다고 하면 피를 토하는 심정이 된다는 그는 “4·19를 모르고 유신을 몰라 쓸 거리가 없다고 하면 변명이 되느냐”고 한탄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작심한 듯 ‘작가론’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을 봐라. 서자 출신이 양반을 풍자해 능지처참당했다. ‘춘향전’은 또 어떠냐. 그건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조선 중기에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인간 평등을 이루자는 주장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거다. 아마도 중인이었을 작가는 죽임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글을 남겼다. 작가란 그런 것이다.”
그는 현재를 ‘라디오·TV·컴퓨터·스마트폰까지 소설의 훼방꾼이 산재한 시대’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모든 책임을 작가에게 돌렸다. “‘스스로 감동할 정도로’ ‘죽음이 보일 정도로’ 글을 써야 사람들이 읽는 글이 나오지 않겠나. 나는 지금껏 재능이 아닌 노력을 믿었다.”
실제 그는 집필에 들어가면 하루 25장씩 쓰는 원칙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 『태백산맥』을 쓰던 당시 그가 아버지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사연은 지금도 유명하다. “내 인생을 뭐라 해야 할까. ‘자기를 말 삼아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산다’는 말이 딱일 거다.”
그는 향후 10년간의 방향을 이미 잡아 놨다. 한 권짜리 두 편, 세 권짜리 두 편, 단편집과 산문집 이렇게 꼭 10권을 쓸 요량이다. 2년 뒤 파탄에 빠진 이 나라 교육 문제를 파고 든 뒤엔, 인간의 본질과 종교에 관한 책들로 작가 인생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일어서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자와 문학이 왜 있나. 남겨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영토 없는 왕은 왕이 아니요, 독자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영토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 왕만이 남길 수 있는 독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