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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Deleuze)의 이론과 생산자로서의 수필가 ‘되기’
- ‘존재의 사유’와 ‘되기의 사유’를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수필과 철학은 너무 가깝다. 따라서 수필은 철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들뢰즈를 수필과 연관시키는 이유 중의 하나다. 철학에서부터 문학, 회화, 사진, 영화, 무용까지 현재 우리나라 인문, 예술학 관련 논문에서 들뢰즈만큼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가 있을까? 그만큼 들뢰즈는 명실 공히 정통파 철학자이면서도, 영화, 문학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이다. 이는 들뢰즈의 철학사상이 단순히 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신념처럼, 철학을 인간의 삶과 문화 등, 우리의 일상과 접목시켰다는 것을 예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수필가로서의 사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존재의 사유고, 다른 하나는 되기의 사유다. 이 ‘되기’야말로 다움의 세계요, 실재의 세계다. 본고는 수필가의 의식과 관련하여 들뢰즈의 이론을 접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착안하여 수필을 쓰는 사람은 문학생산자로서 되기의 수필가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들뢰즈의 <되기>란 개념으로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II. 펼치며
A. 들뢰즈 문학론과 작가론의 요지
들뢰즈가 『앙띠오이디푸스』에서부터 집중적으로 다루는 욕망의 문제는, 욕망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왔던 오이디푸스가 실은 욕망의 본성 규정에 속하지 않는 ‘임의적인’ 전제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욕망의 개념은 프로이트적인 병적 개념이 아니라 니체적 의미에서 긍정적인 힘의 의지 개념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란 그러한 긍정적인 힘의 의지를 창작의 근원으로 삼고, 작품 전체를 통해 그러한 “욕망하는 생산”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는 언제나 오이디푸스의 함정에 갇혀 있는 억압된 욕망이었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창조적 작가는 억압의 오이디푸스적 함정을 파괴하고 욕망의 창조적 힘의 원천을 내비쳐보여주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욕망을 생산한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욕망을 접속하여 그곳에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며, 언제나 탈주선을 그린다. 그 때에 욕망은 무한한 접속과 돌파를 통하여 다양한 탈영토화를 만들어낸다. 분열증적 주체는 욕망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욕망의 흐름과 절단을 체험한다. 오이디푸스의 정신분석은 분열증적 정신병을 신경증으로 환원시켜서 가족 속으로 재영토화시킬 따름이지만, 창조적 작가는 바로 그러한 억압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욕망의 생산과 흐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생산자로서의 작가인 것이다. 이것은 베케트의 작품 속에서도 역시 도덕에는 무감각하지만 산책이나 여행을 통해서 욕망을 생산하고 체험한다. 전체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늘 흐름과 절단을 경험하며 욕망들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 역시 그렇게 분열증적인 모습으로 표현될 때 가장 자연스럽고 진실된 문학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들뢰즈의 문학론과 작가론의 요지가 될 수 있다.
B. 들뢰즈 작가론과 수필가 정신의 상관성
이런 들뢰즈의 문학론과 작가론을 수필에 접맥시켜 보면, 들뢰즈의 탈주의 선이나, 욕망, 되기 등의 개념은 작가의 의식과 관련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보려는 눈을 가진 수필가‘와 일맥 상통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눈을 제1의 눈이라 하면, 현실로부터의 억압이나 제도에 대해 탈영토화를 만들어내는 욕망의 눈은 '제2의 눈’이라 하겠다.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곤충학자 파브르와 같은 열정과 집요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재를 찾는 작가의 자세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데서 어떤 진실을 관찰, 확인, 포착하려는 의지는 작가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제2의 눈'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비하여 '보지 않는다'의 눈, 즉 '제1의 눈'은 아예 어떤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규명해 보려는 의욕도 의지도 그리고 신념도 없는 자의 눈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주의 선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안주의 선을 그리는 현실 외면의, 현실 도피의 작가다. 작가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어딘가 숨어 있는 것에 대하여 기필코 찾아내겠다는 의지의 눈이며 욕망의 눈이다.
'보지 않는다'는 눈앞의 현실을 항상 있는 그대로만 수용하고 인정하고 이에 타협해 보려는 안이하고도 비굴한 눈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눈이란 현실세계에 상응하는 작가의 자세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로 보고 투시할 줄 아는 작가의 눈은 일석 일조에 연마되는 것은 아니다. 흔한 말로 항상 깨어있는 의식, 언제나 팽팽한 긴장미를 잃지 않는 안목, 이런 자세가 작가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대와 사회가 변하는 만큼 문학도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삶의 현실이, 그 현실 속에 몸과 마음을 던져 놓고 있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바뀌는데 그 삶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는 문학이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대를 풍미했던 서사시가 전성기를 누렸던 장르의 힘을 유지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전통의 뿌리를 소설과 서정시에 넘겨준 것은 장르의 정체성을 변화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계승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로맨스가 전성기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뿌리와 전통을 소설에 빼앗긴 것도 장르의 전통을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진화시키면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현대 문명 비평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과학 기술에는 냉혹한 법칙이 있다. 부자들이 단독으로 사용할 때는 제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손을 대면 자동으로 멈춘다.”라고 말했다. 정보화 혁명의 열매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보화 시대인 21세기엔 개인이 의지할 안정된 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다. 정보의 바다를 능숙하게 항해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수집해 이를 유익하게 이용하는 사람만이 돈도 벌고 출세도 한다. 이른바 정보화 사회의 귀족이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게 된다. 반면 정보를 장악하지 못하면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피지배 계층이 될 뿐이다. 여기서 ‘되기’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되기는 변신이다. 그것은 기존의 동일성에 고착되지 않고 다른 존재로 화化해가는 것, 존재론적인 변신이다.
수필의 운명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수필 창작에 대한 새로운 정보, 고급문학으로서의 새롭게 변신한 수필이론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잡기를 쓰는 방식으로, 또는 여기를 적는다는 식으로 수필을 써서는 문학가 중에서도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정신이나 대중의 욕구에 교통하면서 변화된 수필장르의 이론모형을 수용해서 고급문학으로서의 수필 정체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동참하지 않으면 같은 수필가로 명함을 내밀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할 것은 들뢰즈가 말한 대로 긍정적인 힘의 의지를 믿고 욕망을 자기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구미를 잃은 입은 들뢰즈 식으로 해석하면 이미 입이 아닌 것이다. 작가 역시 작품을 써야겠다는 적극적인 욕망을 일구어내지 못하면 이미 작가가 아닌 것이다. 자기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문학은 반드시 그보다 힘이 센 타 장르에 흡수되거나 그 존재가치를 상실함으로써 전통과 정체성을 잃고 만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는 고급문학으로서 당대인들의 예술 철학적 욕구를 반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이란 말은 여기서 실제적이란 말이다. 현대사상은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이라는 세 개념으로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들뢰즈의 되기는 실재적인 되기이다.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학 장르나, 새로운 시대의 철학적 이념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문학 장르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 채 소멸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상상적인 되기, 상징적인 되기 수준으로는 한계가 따른다. 환상성과 유토피아적 이상성을 본질로 갖고 있던 중세의 화려한 로맨스가 사실주의 시대를 맞아 죽음을 고한 것은 바로 그런 모델이 되고도 남는다. 엘리엇의 말처럼,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 정신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 내포하는 힘을 지닐 때, 수필의 미래는 고대 서사시나 중세 로맨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새로운 전통의 길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안성수, 수필학, pp.196~198 참조) 수필가는 위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문학의 위기에서 자신의 창작의지에 힘을 싣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는 것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생산적 수필가로서 ‘되기’로 문학의 중심에 우뚝 설 수필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수필문단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진정한 수필가다운 자세와 의식의 부재다. 타장르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폄하되고 있는 현실에서 수필가의 자세와 의식을 논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 문제는 곧 수필의 오랜 정통과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장르 차원에서의 자기 변혁을 위한 모색의 길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진정한 수필가 ‘되기’는 수필가 집단의 공감대 속에서 형성되는 게 바람직하다.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해 수필계 전체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의 리좀 논리학은 ‘접속’의 논리학이다. 그것은 관계의 생성을 논한다. 관계의 그물이 고착화될 때 관계망이 실체의 역할을 대체한다. 관계 자체가 생성할 때 본질주의가 극복된다. 리좀은 다양한 접속을 통해서 관계가 생성해가는 장이다. 리좀의 세계는 개체들이 일정한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 생성하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해가는 세계이다. 따라서 고급문학으로서의 수필에 대한 인식을 갖춘 수필가들의 왕성한 창작활동과 이를 따르지 못하는 작품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비판, 수필 전문 이론가들의 이론적 체계화 작업 등이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될 때, 즉 이들의 관계가 생성될 때, 수필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어떤 사상이든 외부의 적이 있고, 내부의 적이 있다.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 우리 수필의 현재는 어떠한가. 저급수필의 영향으로 우리 수필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보화시대의 수필가로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수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21세기 사회에 있어서는 수필에 관한 지식만이 의미 있는 자원이다. 창작 배경으로서의 지식은 앞으로 수필창작의 본질이 될 것이다. 문학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수필에 대해 공부하는, 수필의 새로운 작법적 지식에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정서적인 면과 함께 지성에 바탕을 둔 작품이 창작되어야 한다. 지성은 자기 절제를 기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 수필은 고도의 세련된 지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고급수필은 수필에 대한 부정적인 양상을 깨우치고, 그것과 싸우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수필은 그런 역설 기능을 통해 자기 가치를 고양하지 못하고 오도된 이론에 멍든 채, 서슴없이 순응하고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노마디즘이 분절선들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찾듯 우리도 이런 저급 문학의 잘못된 영향을 없애기 위해서는 저급 문학과 고급 문학의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하다는 탈주선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주선으로 가는 욕망이 없는 한 수필의 ‘되기’는 요원하다고 하겠다.
수필론에 대한 지식 또는 정보 부재 또한 ‘되기’의 브레이크다. 부재자에게 수필은 ‘비전문적이고, 일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 속에 얻어진 느낌을 자유롭게 쓴 산문, 넓은 의미에서는 일기, 기행문, 편지 등도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필을 뒤처지게 하는 요인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교육 현장에서 ‘수필’이란 것을 명확하게 이해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에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 여긴다. 때문에 그들은 수필을 ‘주제’나 ‘제재’중심의 문학이 아니라 ‘개성’의 문학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개성도 중요하지만 수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다. 수필 쓰기는 고도의 전문화된 이론적 바탕에서 주제의 전략화 차원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는데, 현재의 수필들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수필을 쉽게 여기는 소위 ‘문학가’들이 수필을 배움이 아닌 ‘느낌’으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존재론적 사유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탓이다.
수필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서 수필에 대해서 안다고 30년대식 구태의연한 수필론을 재탕 삼탕하는 비수필 전공의 문학이론가들의 형태도 문제다. 이들이 수필비평의 일선에서 이론서를 내고 비평을 주도하는 것은 수필의 변화를 차단하고 있는 ‘되기’의 저항 요인이다. 바르지 못한 문장으로 수필 같이 않은 수필을 써놓고도 명수필쯤으로 알고 있는 문장론적 지식 부재의 상상계적 단계에 머물고 있는 수필가도 문제다. 수필에 대해선 배울 필요도 없고, 내 식대로 하면 된다는 수필고문단, 글 같지 않은 글을 써놓고 사회적 지위나 인생 연륜으로 원로나 대가 노릇을 하려는 사람들의 큰 목소리도 문제다. 작가 자신의 끊임없는 자기 정진은 통해 새로운 창작 이론체계를 수용하고,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수필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들에게 수필 쓰기는 주제화 전략 차원이 아닌 ‘체험의 기록’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비평의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수필 이론과 비평의 장이 필요하다는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지면을 창작 작품으로만 채우는 일부 문예전문지 경영 사업주도 ‘되기’의 저항 요인에 속한다. 이들은 왜 비평을 소외시키고 있는가? 비평의 부재와 빈핍도 ‘되기’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일부 수필잡지 경영인들은 글에 대한 비평을 인간에 대한 비평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풍토를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필 문예지를 내는 분도 수필비평을 기피하고, 문학평론가들도 수필에 대한 비평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필을 고급문학의 차원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는 비평을 인간에 대한 비형과 동일시하는 풍토를 무엇보다 개선해야 한다. 내 글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성숙하지 못한 수필가들의 잘못된 형태도 ‘되기’의 걸림돌이다. 들뢰즈의 되기는 실재적 되기다. 예를 들어 ‘학’되기는 학을 상상하는 것도, 학을 흉내내는 것도, 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실재로 학이 되는 것이다. 수필가 되기는 수필가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수필가다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춤의 명인은 단순히 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학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부단한 수련으로 자신의 기를 학의 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수필평단도 문제다. 괜히 원수질 필요 없이 적당히 듣기 좋은 소리로 윤색을 가하여 서로 선심 쓰고 위로 받으며 사는 풍토에서 콩나물은 자랄지 몰라도 풍악을 견디는 소나무와 해풍을 견디는 측백나무는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필평은 사랑의 매에 인식해 왔다. 그래서 월평은 가지각색 제멋대로였다. 수필문학의 길을 밝혀주어야 할 월평이 잡초 같은 잡문을 명수필이라고 추겨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수필을 옹호하고 향상시킬 작가적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급문학으로서의 이론모형 체계가 없어 명수필 창작에 관한 방법론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좋은 수필의 가치 척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평가기준이 없기 때문에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는 리좀적 사유를 해야지만, 리좀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꼭 창조적 삶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맥락에 따라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기를 변화시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의 기에 가까이 가져가는 것이다. 인정주의도, 적당주의도 진정한 욕망이 아니었던 것이다.
III. 닫으며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본격수필가의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이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각종 선험적 원리들, 통일적 주체로서의 기존 수필이론의 틀을 벗어던져버리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접속 속에서 우리 수필가들이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이 들뢰즈의 ‘되기’이론이 이론으로서의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연계될 때에만 의미를 가지는 실천적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되기의 정신으로 수필을 쓰면, 들뢰즈의 철학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군 속에 언젠가 수필가도 들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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