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장 운귀고원(雲貴高原)으로
①
끝없는 추적!
무림군왕성의 일월단(日月團)은 추적의 고수들만으로 이루어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일단 추적하기로 마음먹은 자라면 세상 끝까지 달아난다 해도 일월단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이 강호의 오랜 관례였다.
남궁소연과 여웅.
두 사람은 비록 무림군왕성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일월단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쫓김을 당한 지 열흘.
두 사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남궁소연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일월단의 자객들은 무려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바로 옆에는 여웅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훨씬 더 심각했다. 전신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은 채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보다도 남궁소연을 보호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황보세가의 근처까지 와 있었다.
남궁소연은 무림군왕성을 탈출한 후 황보세가로 향했다. 천하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그녀로서는 찾아갈 사람이 황보수선 밖에 없었다.
"으으.... 남궁소저, 난 틀렸으니 혼자 가시오!"
괴로움에 찬 여웅의 외침이 들렸다.
"안돼요! 우리 둘 다......."
남궁소연의 말은 여웅의 외침이 삼켜버렸다.
"어서 가시오! 나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단 말이오!"
여웅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선혈 속에는 토막난 내장 부스러기가 들어 있었다.
퍼퍼퍽!
섬뜩한 음향이 울렸다. 일월단의 자객들이 일제히 날린 철추가 그의 몸에 박히는 소리였다. 살점을 짓이기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위력의 철추 다섯 개의 그의 상반신에 박혔다.
"크윽!"
여웅은 다시 피를 토했다. 그러나 마치 철탑이라도 된 양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더니 갑자기 우아악! 하고 고함을 발했다.
"저, 저런 미친 놈!"
우드드득!
여웅은 자신의 몸에 박힌 철추를 한꺼번에 잡아 뽑았다. 그 바람에 철추 끝에 살점이 뜯겨져 나왔다.
그는 철추를 모아쥐고 외쳤다.
"지금이요! 어서!"
위이이잉!
그는 다섯 개의 철추를 휘둘렀다. 죽음을 불사한 그의 최후 공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일월단의 자객들은 안색이 변한 채 뒷걸음질쳤다.
여웅은 신형을 날려 남궁소연의 뒤를 막은 채 피를 토하듯 외쳤다.
"지금 가지 않으면 내 죽음이 헛된 것이오!"
"아아! 여공자님......."
남궁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난 틀렸소.... 낭자를 위해 이렇게 죽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오. 사랑... 했었소."
여웅은 최후의 말을 한 후 철추를 휘두르며 일월단의 자객들에게 덮쳐갔다.
'아아! 공자님......!'
남궁소연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여웅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게 할 순 없었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뿌리며 전면에 보이는 울창한 수림을 향해 교구를 날렸다. 그 숲만 지나면 황보세가가 보일 것이다.
"으아아악!"
등뒤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보지 않아도 여웅의 마지막 비명소리였다. 남궁소연이 막 숲을 들어간 순간.
"쫓아라! 반드시 생포하라!"
뒤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것은 옥선공자 호사붕이 내지른 것이었다. 그는 백여 명의 또다른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황금총의 고수들이었다.
만금대인 호금수는 천하를 살만한 황금으로 흑련사와 결탁하여 무림마저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흑련사가 몰락한 후 그는 역부족을 느꼈다.
그래서 특유의 협상술을 발휘하여 천외천과 손을 잡은 것이다.
천외천의 입장에서도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황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과거를 불문하고 만금대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호사붕은 일월단을 지원하라는 천외천의 지시를 받고 추적에 가담했다.
이제 그는 황금총이 아니라 천외천의 외단(外團)이 된 황금총의 백여 명 무사들을 이끌고 여웅과 남궁소연을 쫓게 된 것이다.
천외천에서는 남궁소연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벌써부터 남궁소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그는 수하들에게 생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남궁소연이 숲으로 달아나자 그는 수하들을 지휘하며 황급히 뒤쫓아갔다.
한편, 남궁소연은 여웅의 마지막 비명을 들은 후 절망에 휩싸였다. 비록 울창한 수림을 뚫고 달리기는 하였으나 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탈진한 데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몸은 자꾸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아... 아아!"
결국 그녀는 도주를 포기하고 한 거목의 둥치에 기댄 채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은 쉴새없이 들먹이고 호흡은 거칠기만 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어두웠다.
그녀의 귀에 추적자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틀렸어.......'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머지않아 저들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호사붕에게 끌려가게 될 것이고... 그 다음은.
그녀는 치를 떨었다. 어떻게 될 것인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호색하기로 소문난 호사붕이 아닌가? 종리무의 음모에 걸려 더러운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그녀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 중얼거렸다.
"수선언니, 아무래도 난 그냥 죽어야 될까봐요......."
그때였다.
"낭자, 방금 뭐라고 했소?"
문득 누군가의 물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남궁소연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 소리는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온 것이다.
고목의 가지 위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다.
"당신은......?"
인영이 그녀의 앞에 떨어져내렸다.
"수선언니란 분은 혹 황보수선이란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방립을 쓴 인물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방립을 밀어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록 차디차게 느껴졌지만 본바탕의 얼굴이 영준한 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좌혼이었다.
얼마 전 황보세가에서 술자리가 끝나자 그는 잠자리로 가지 않고 숲속으로 산책을 나왔다.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 우연히 남궁소연을 보게 된 것이었다.
"예, 맞아요. 한데 당신은 누구죠?"
남궁소연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은 제 형수님이 되십니다. 낭자는 형수님과 어떤 사이길래 그분의 존함을 말씀한 것이오?"
좌혼은 사방으로 추적자들이 좁혀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거리는 불과 칠팔 장에 불과했다.
"형수님이라고요? 그럼... 소협께서 괴수신의 관공자님의 아우란 말인가요?"
"아! 형님도 아시는군요?"
좌혼은 환하게 웃었다. 남궁소연은 그의 미소에 눈이 부심을 느꼈다.
'어쩜 사내의 미소가 저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남궁소연은 지금이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라는 것조차 잠시 망각한 채 좌혼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 남궁소연이라 해요. 수선언니와는 친자매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어요."
"아! 낭자가 바로 형수님께서 귀가 따갑게 말씀하시던 무림군왕성의 천향옥녀시구려."
좌혼의 얼굴에는 더욱 편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을 보자 남궁소연은 그지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궁소저, 이제 아무 걱정 마시오. 소생이 안전하게 형수님께 모시고 가겠소이다. 많이 다친 듯한데 제 등이 업히시겠소?"
좌혼은 서슴없이 몸을 낮추며 등을 대주었다.
'......!'
비로소 남궁소연은 이 영준한 사내가 외팔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신체적 결함이 조금도 추하게 보이거나 역감이 들지 않았다. 단지 마음이 아팠을 뿐이었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좌혼의 등에 업혔다.
좌혼의 굵은 목을 껴안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좌혼은 하나뿐인 왼팔로 그녀의 둔부를 받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휙휙휙!
파공성과 함께 사방으로부터 수십 명의 인물들이 나타나며 그들을 에워싸버렸다.
좌혼은 내심 혀를 찼다.
'쯧쯧! 이럴 땐 팔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군.'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여 명은 됨직한 자들이었다.
'제법 녹녹치 않은 자들도 눈에 띄는걸. 곤란하군. 남궁소저를 내려놓을 수도 없고 대적하자니 만만치 않고.......'
이때 귓전에 향기롭고 따스한 여인의 입김이 느껴졌다.
"소협, 절 내려주세요. 저도 싸우겠어요."
"아니외다, 소생만 믿으시오."
좌혼은 씩씩하게 말했다.
그는 그윽한 사향 내음과 따사로운 여인의 숨결, 그리고 등과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오는 부드러운 여인의 감촉을 떨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욕정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나 어쩐지 떨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남궁소연을 업은 채 승부를 벌여 보리라 결심했다.
"흐흐, 도귀(刀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오늘은 전과는 상황이 다를걸?"
옥선공자 호사붕이었다. 그는 옥선(玉扇)을 살랑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잘 만났군! 지난번에는 네놈이 형수님의 원수인지 모르고 고이 보내줬다만 오늘만은 놓치지 않겠다."
좌혼은 호사붕을 보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흐흐! 어이없는 놈이군. 좋다! 네놈의 능력이 얼마나 되기에 큰소리 치는지 알아봐야겠다! 여봐라! 저놈의 한팔마저 떼어줘라!"
스스스!
호사붕의 명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쇄도해왔다.
번쩍!
도광(刀光)이 뿜어졌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난무했다. 두 명의 무사가 목이 잘린 채 날아갔다.
좌혼은 남궁소연의 둔부를 받치고 있던 손을 순간적으로 뗀 후 발도한 것이다. 두 명의 무사를 처치한 후 다시 남궁소연의 둔부를 살짝 받쳤다.
그와 같은 동작은 너무나 빨리 이루어졌으므로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궁소연의 둔부를 받친 후 그는 입으로 도를 문 채 주위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귀... 귀신 같은 놈! 모두 저놈을 쳐라! 목을 베는 자에게는 황금 만 냥을 내리겠다!"
"와아아!"
무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황금 만 냥이 주는 유혹은 대단했다. 그들은 목숨을 도외시한 채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슈슈슉!
도광이 작렬했다. 좌혼은 이빨로 도를 문 채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가 위치를 이동할 때마다 두세 명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워낙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남궁소연을 보호하랴, 무사들을 죽이랴, 신경이 분산되고 공력이 배로 들어가는 바람에 점차 동작이 느려졌다.
'으음.... 이대로는 안된다.'
그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은 악화될 게 뻔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최후의 승부수를 궁리했다.
이때였다.
"좌혼, 남궁소저를 모시고 먼저 돌아가라. 이곳은 내가 처리하마."
"형님!"
좌혼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는 싱긋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알겠습니다. 형님!"
"서라!"
무사들은 그가 신형을 날리자 일제히 앞을 가로막으려 들었다. 그때였다. 좌혼의 신형이 갑자기 오륙 장이나 떠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누군가 그의 등에 부드러운 잠력을 밀어준 것이었다.
스슷!
허공에서 한 인영이 떨어져내렸다.
"호사붕. 제발로 찾아와줘 고맙구나."
낭랑한 음성이 울리는 순간 인영의 모습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듯했다.
"억! 막아라!"
호사붕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다급히 수하들 뒤로 몸을 감추었다. 그 순간 처절한 비명이 폭음과 함께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펑! 꽈릉!
"으악! 크아악!"
나타난 인영은 관운빈이었다. 그는 한 쌍의 육장(肉掌)만으로 무사들을 상대했다. 권장지(拳掌指)가 뻗어나갈 때마다 비명이 터졌다.
천외천 외단 무사들은 무엇이 어찌 되는지조차 모르는 채 눈앞에 신형이 번쩍 하는 순간 황천으로 직행했다.
'으으... 저놈은 인간도 아니다.'
호사붕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는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고 머릿속에는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연신 뒤로 물러나다가 마침내 신형을 날려 죽어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전장에서 한 마장까지 벗어난 후에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런데.......
"가더라도 목은 두고 가야지."
"헉!"
호사붕은 대경실색했다. 눈앞에 유령처럼 관운빈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관운빈의 손이 뻗어왔다. 그는 번연히 눈뜨고 그의 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손이 그의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이럴 수가.......'
그는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관운빈의 손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 시뻘건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퍽!
관운빈의 손아귀에서 무엇인가가 터졌다.
호사붕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눈앞이 안개처럼 뿌얘지면서 의식이 사라진 것이다.
쿵!
호사붕의 몸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
관운빈은 호사붕의 시신을 내려보았다. 호사붕의 왼쪽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호사붕. 모든 것이 업보다. 부디 저승에 가서는 인간답게 살거라."
②
환령.
그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그는 황보세가에 찾아왔고 관운빈과의 만남을 요청했다.
"환령이라 합니다. 마군자 사마을지님의 은덕을 입은 몸으로 그분의 유원에 따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환령은 사마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관운빈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되었구려.... 안된 일이오."
"사마을지님은 한 권의 책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환령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냈다.
"......."
관운빈은 명상에 잠겼다. 책자를 대충 훑어본 그는 사마을지가 남긴 책자야말로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책자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약속하겠소. 그분과 살막주, 청아 낭자를 위해서 반드시 마도와 사승을 내 손으로 처리하겠소."
환령은 그밖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천외천에 대한 정보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는 사마을지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입고 평생 그를 보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사마을지가 천외천에 투신하자 덩달아 천외천에 소속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을지가 죽은 이상 더 이상 천외천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딘가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그분과의 인연도 끝났습니다. 부디... 공자께서 그 분의 원수를 갚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환령은 큰절을 했다.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를 내밀었다.
"환령이라 하셨소? 번거롭겠지만 이것을 장한봉(長恨峰)의 작은 산사에 계신 용선생이란 분께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소. 나보다는 그분이 더 필요할 것 같소이다."
환령은 두 손을 내밀어 책자를 받았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환령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은 모래알이 흩어지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③
두두두두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황보세가의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섯 필의 준마가 내달리며 낸 것이었다. 마상에는 관운빈을 비롯하여 좌혼, 사사영, 황보수선, 그리고 남궁소연 등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천외천의 총단이 있는 운귀고원(雲貴高原)이었다. 관운빈은 환령에게서 건친왕이 천외천주의 득남(得男)을 축하하기 위해 운귀고원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서둘러 출발을 결행한 것이다.
한편 육노인은 관운빈과 밀담을 나눈 후 희색이 만면하여 어디론가 급하게 떠났다. 황보세가의 안주인 운하설은 관운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황보일학의 의형이 되는 태화천주를 찾아뵙겠다며 하루 전에 황보세가를 떠났다.
이남삼녀는 장도에 올랐다.
천외천의 총단으로 가는 것은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었다. 따라서 비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 그들은 한가로워 보이기만 했다.
그들은 운귀고원으로 가는 도중 명승고적이나 풍광이 뛰어난 곳을 만나면 말을 멈추어 구경을 하였고, 수시로 객점이나 주점에서 술자리를 벌이곤 했다.
젊기 때문일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을 이끄는 관운빈이 줄곧 여유만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길을 가면서 앞장 서 온갖 풍류(風流)를 즐겼다.
물론 그가 이런 기행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으나 일행은 그 점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좌혼과 남궁소연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들 두 사람은 부쩍 친해져 가는 곳마다 가까이 붙어 무엇인가를 소곤거리곤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관운빈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④
경동천하(驚動天下)!
강호무림이 흔들렸다. 그것은 무림군왕성의 진정한 실체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제껏 그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천외천의 무서운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남궁소연의 입으로부터 발설된 것이다.
결국 무림군왕성은 천하를 제패하려는 천외천의 주구에 불과했으며, 천외천은 무림군왕성을 발판으로 무림을 장악하려 했다는 사실이 전 무림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심은 삽시에 돌아섰다. 아울러 그간 배격되어 왔던 녹림과 십정회의 연합세력에 대해 무림인들의 관심이 몰렸다.
그와 동시에 무림군왕성에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왔던 인물들이 속속 빠져나와 연합맹에 뛰어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천외천은 더 이상 음지 속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운귀고원에 총단을 둔 채 오랜 세월 동안 암약(暗躍)해 왔던 그들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겨울잠 자던 뱀들이 언 땅이 풀리며 일제히 산천에서 모습을 드러내듯 그들은 강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혈겁의 서곡(序曲)이었다.
바야흐로 무림사상 유례가 없는 대혈겁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혈겁은 뜻밖에도 녹림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녹림 내부에서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사분오열되었던 녹림인들을 규합시키는데 성공한 대종사는 녹림에 숨어 암약하고 있던 천외천의 첩자(諜者) 오백여 명을 색출하여 전격적으로 처단해버린 것이다.
녹림의 구석구석에 잠입해 있던 천외천의 첩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혈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어떤 자는 자다가 칼을 맞고 목이 떨어졌으며, 어떤 자는 술을 마시다 독에 중독되어 피를 토하고 죽었고, 어떤 자는 평소 친한 동료와 바둑을 두던 중 느닷없이 동료가 휘두른 일장에 머리가 으스러져 죽었다.
이 기상천외한 첩자 청소작업은 녹림대종사의 극비명령에 의해 한 날 한 시에 중원전역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천외천의 첩자 오백여 명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제 녹림은 완벽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녹림대종사의 입지가 철벽처럼 강화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십정회와 천외천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애매모호한 처신을 해왔던 정도무림의 인물들은 생사첩(生死帖)을 받았다.
그것은 십정회의 젊은 회주 혜왕(彗王)이 발부한 것이었다.
생사첩의 내용은 간단했다. 천외천을 택하거나 십정회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천외천을 택하면 죽고, 십정회를 택하면 산다는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자들은 단 하루의 여유를 받았다. 적아(敵我)를 구분하려는 혜왕의 의도는 성공했다. 기회주의를 일삼던 자들은 더 이상 양다리를 걸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생사첩을 받은 그날로 천외천이 있는 운귀고원으로 떠나거나 또는 십정회에 가입하겠다는 맹약서(盟約書)를 제출했다.
결국 무림은 천외천과 녹림, 십정회의 연맹으로 선명하게 양분(兩分)되기에 이르렀다.
풍운은 운귀고원에서도 일어났다.
과거 무림군왕성에 의해 패퇴되었던 흑련사의 잔당과 흑도의 방파들이 대거 천외천의 총단으로 몰린 것이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천외천의 배경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무림은 양대진영으로 재편되었고, 바야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띄울 날이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귀주성(貴州省) 안순(安順).
귀양(貴陽)에서 말을 타고 서쪽으로 한 시진 가량 달리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다.
귀주성과 운남성에 걸쳐 광대하게 자리잡은 운귀고원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에 자리잡은 안순은 근자 들어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대부분이 화전을 일구거나 농업 등으로 생계를 꾸리던 마을이 갑자기 외지인들이 북적대는 바람에 마을에 객점과 주루, 심지어는 기루(妓樓)까지 급격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안순이 이렇게 변한 것은 운귀고원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호미나 괭이를 집어던지고 너나할것 없이 자신들의 집을 개조하거나 증축하여 객점이나 주루 등으로 업을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타지에서 상인들이 속속 몰려들어와 금세 마을의 풍경이 달라지게 되었다.
행화반점(杏花飯店).
안순의 북쪽에 자리잡은 반점으로 약간은 한적한 곳이었다. 넓은 뜰을 사이에 두고 이십여 개의 객방이 있는 곳이다.
한 객방.
관운빈 일행이 탁자를 둘러싼 채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약간 무거워 보였다.
"정말 천외천을 칠 건가요?"
무서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황보수선이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관운빈에게 향해졌다.
"물론이오."
관운빈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황보수선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무모한 게 아닐까요? 저들은 일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비하면 우리 다섯 사람의 힘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하하! 이란타석(以卵打石)이란 말이구려?"
"솔직히... 그래요. 전 걱정이 돼요. 또한 굳이 우리만이 단독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천외천을 치는 일을 녹림과 십정회의 연맹과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운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황보소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흑백이니 정사니 하는 것을 믿지 않소. 선악은 겉으로만 판별할 수 없는 것이오. 천외천이 악이기에 정도무림이 선이라는 분류는 옳지 않은 것이오. 따라서 나는 그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을 것이오."
황보수선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쩔쩔 매다가 사사영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전 아무래도......."
사사영은 방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관공자님에게는 필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녀는 그윽한 눈길을 관운빈에게 보냈다. 관운빈은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사영은 죽음의 땅 동사군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을 뿐더러 지옥의 와류에서 함께 환란을 겪은 여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지옥에 가자면 갈 것이고, 함께 죽자면 죽을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무조건 따랐다.
"황보소저. 내가 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걸음을 늦추었는지 아시오?"
"......?"
황보수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남궁소연과 좌혼을 바라보았다. 남궁소연은 무엇을 느낀 듯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언니......."
좌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하, 그것도 맞소만 실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소."
"......?"
좌중의 이목이 관운빈에게 쏠렸다.
"음, 당신들은 맞은편 방에 여장을 풀고 있는 젊은 무사가 누군지 알고 있소?"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벌써부터 우리들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소. 그자는 한때는 동창 소속이었소. 동창의 십이수라검(十二修羅劍)의 수장(首長)으로 냉혼검(冷魂劍) 왕승(王升)이란 자요. 지금은 태화천에서 요직을 맡고 있소."
"아!"
사사영이 탄성을 발했다. 왕승이라면 바로 그녀를 동사군도로 호송했던 무사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그를 몰라보았을까요?"
"호호! 그야 관공자님에게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뜻밖에도 황보수선의 농담 아닌 농담에 중인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다. 사사영의 얼굴은 금세 새빨개졌다.
관운빈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벌써부터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소. 물론 태화천의 용선생이 시킨 일일 것이오. 따라서 나는 일부러 행동을 늦춰 그가 따라오기를 유도해왔소."
일행의 눈이 모두 동그래졌다. 황보수선은 의아한 듯 물었다.
"공자님, 그가 우릴 미행하는 이유는 뭐죠?"
"간단하오. 태화천에서 우리의 동정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오."
"......?"
황보수선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태화천에 분명히 말했소.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오. 또한 임의로 천외천에 가겠노라 말했소. 물론 그것은 태화천이 계획하고 있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오."
좌혼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형님, 말을 자꾸 빙빙 돌리지만 말고 속시원히 말씀해 주시오."
관운빈은 하하! 웃었다.
"알았네. 내 생각엔 태화천도 머지않아 천외천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네. 그런데 우리가 천외천으로 가니 기왕이면 동조해 보겠다는 속셈이 아닐까 하네."
"아!"
"그게 사실일까요?"
중인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특히 남궁소연은 몸을 일으키며 반색을 했다.
"십중팔구 그럴 것이오. 더구나 태화천은 마군자 사마을지가 남긴 역천대계를 밝힌 책자를 건네 받았소. 그로 인해 첩자를 색출해 소탕했으며 천외천과 일전을 결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요."
"......."
"그들은 우리가 천외천을 치는 순간을 이용하려 들 것이오. 말하자면 동시에 양면작전을 벌이겠다는 것이오. 우리 오 인의 힘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관운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인원은 적지만 그들은 무림에 일문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강했다. 개중 가장 무공이 약하다고 할 수 있는 황보수선과 남궁소연만 해도 한때 당대의 후기지수의 선두로 꼽히는 용봉칠영에 속해 있었다.
거기에 검후도귀가 합세했고, 무엇보다도 관운빈이 있는 이상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 것이다.
황보수선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럼 잘되었군요. 태화천이 동조하면 그만큼 승산이 있을 테니까요."
관운빈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렇소. 비록 내 뜻과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라 해도 결국 태화천이 주장해 온 성전(聖戰)에 참여하게 된 꼴이오. 사실 난 그들과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소. 더구나 사마을지로부터 역천대계의 책자를 받아 천외천의 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화천과 연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것은 사실 영매와 좌혼 때문이었소."
사사영과 좌혼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기실 영매와 좌혼은 천외천과 건친왕으로부터 빚을 받아내야 할 입장이오. 더구나 남궁소저까지 합류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내 개인감정을 접어두기로 한 것이오."
좌혼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럼 형님은 태화천의 계획을 모두 알면서도 왕승이란 자가 미행하는 것을 내버려두었구려. 결국 우리 때문에......."
"하하! 좌혼, 너는 이미 내 아우다. 내 어찌 그 정도도 신경을 쓰지 않겠느냐?"
좌혼의 얼굴에는 감동의 물결이 번졌다. 이때 사사영이 해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공자님, 어쨌든 잘된 일이에요. 어차피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태화천이 개입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기회가 좋아졌어요. 우리들의 적은 너무도 강한 자들이에요. 더구나 공자님이 먼저 태화천에 손을 내민 것도 아니고 태화천 쪽에서 공자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굳지 마다할 일이 아니라고 봐요."
사사영의 말에 관운빈은 다소 위로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황보수선이 말했다.
"공자님이 단독으로 결행하려 했다면 굳이 오늘이 아니라도 될 테니 뒤로 미루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들을 생각하여 자존심을 꺾고 태화천과 동조하기로 하신 것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남궁소연도 끼어 들었다.
"수선 언니, 감사의 말씀은 제가 올려야지요. 제가 너무 사사로운 원한에만 집착하여 떼를 쓴 것 같아요. 공자님께 짐만 되는 주제에......."
"아, 아니오. 남궁소저. 당대 최고의 여걸로 꼽히는 남궁소저가 짐이 되다니 무슨 말씀이오?"
이때 좌혼이 투덜거렸다.
"제기랄,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동사군도에서 모질게 매를 맞으면서도 신음 한 번 지르질 않더니 아직도 그자존심 때문에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구료?"
관운빈은 피식 웃었다.
"맞다, 좌혼. 난 자존심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러는 넌 어떠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천외천을 치자고 하지 않았느냐? 흐흠, 만난 지 며칠 안된 남궁소저 때문이냐? 그래서 이 형님과 형수님들까지 사지로 몰아 넣으려는 거냐?"
"아니... 형님! 그게 무슨......?"
"어머!"
좌혼과 남궁소연은 동시에 당혹성을 부르짖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호호호......! 이제 보니 그렇게 된 것이군요?"
황보수선도 교소를 터뜨렸다. 반면 사사영은 곱게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공자님도 참... 짓궂으세요.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꼭 그렇게 밝혀야만 하나요?"
"아이고, 형수님마저 이러시기요?"
점입가경이었다.
관운빈의 반격(?)에 혼비백산해 있던 좌혼은 안절부절이었다. 남궁소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갈 듯 몸을 웅크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야릇한 의문에 싸이고 있었다.
'정말일까? 좌공자님께서 날 좋아하고 계시다는 것이?'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비록 종리무의 야비한 음모에 걸려 그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나락으로 떨어졌었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아직도 순수했다.
하지만 이미 더럽힐 대로 더럽혀진 자신의 신세로는 좌혼의 아름다운 연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편 좌혼은 상기된 얼굴로 연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관운빈과 사사영 그리고 황보수선의 시선을 애써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몰래 남궁소연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침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