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잡기
아직 새벽은 시작되지 않았다.
봉황산(鳳凰山)의 의풍성(義風城)은 흑무(黑霧)에 휘감겼고, 저 높은 하늘 위에는 만월(滿月)이 떠 있다.
의풍성의 한 곳, 유난히도 많은 호위무사들이 지키고 있는 백옥루(白玉樓)가 한 채 서 있었다.
그 곳은 구중천부(九重天府)와 의풍성 사이를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누각은 칠층(七層)이고, 일곱 층의 모든 처마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매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곤 했다.
누각 맨 위층, 붉은 궁장(宮裝)을 걸친 미녀 하나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십오야(十五夜) 달이 밝은 날은 자객이 오기 힘든 날이다. 달빛이 밝아 몸을 감추기 힘드니까.'
홍장미인의 눈빛은 아주 특이했다. 그녀의 혈통은 중화인(中華人)이 아닌 듯, 그녀의 눈빛은 새파랗기 그지없었다.
살결이 유난히도 희고 콧날이 오똑한 미인, 벽안아랑(碧眼啞娘) 음야홍(陰也紅).
그녀는 지난밤 내내 여기 서서 무적궁 쪽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분은 나를 소문내라 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그녀의 입가에는 요사한 기운이 흘렀다.
천부적인 색기(色氣)를 지니고 있는 이십칠 세의 미녀 음야홍, 그녀는 손을 들어 운발(雲髮)을 가볍게 다독거렸다.
'며칠 안으로 그들은 살수 하나를 보낼 것이다.'
그녀는 조금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십오야에 살수를 보냈다면, 나는 그들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풍만하고 농염한 몸뚱이가 가볍게 흔들리며 화향(花香)이 흐른다. 젖가슴은 매우 풍만한 돌기를 나타냈다.
이상한 것은 젖가슴이 하나만 부풀어올랐다는 것이었다.
일순,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벌써 이틀째 그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옷을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회색 옷을 걸친 채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눈빛이 흐릿하고 얼굴 모습이 지극히 평범한 자들.
검태랑(劍太郞),
도태랑(刀太郞).
둘은 그런 이름을 갖고 있었다.
'저런 자들을 보내다니… 그 나으리의 속셈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음야홍은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함께 검태랑과 도태랑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순간, 음야홍의 눈에서 불길이 토해져 나왔다.
"흥! 측간( 間)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지?"
아아, 그녀는 벙어리라 했는데… 말을 하다니?
그녀는 벙어리가 아니라, 가짜 벙어리였단 말인가?
"따라다니지 마라, 놈들!"
음야홍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동시에 요악(妖惡)했다.
음야홍은 검태랑과 도태랑을 향해 사나운 눈길을 흘기다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검태랑과 도태랑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한순간, 그들의 눈빛은 뇌전(雷電) 마냥 강렬해졌다.
-강한 기운(氣運)을 느꼈느냐, 검태랑?
-너도 그 기운을 느꼈느냐?
-느꼈다.
-그 기운은 우리들이 경험한 기운보다 강했다. 그 기운은 백 장 안으로 다가섰다!
-아니다. 벌써 이십 장 안에 와 있다!
-찾아보자!
두 사람은 심령적으로 의사가 통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부상사랑(扶桑四郞)!
전설적인 무명을 날리는 동영의 사 인자(四忍者)들이다.
검태랑(劍太郞), 도태랑(刀太郞), 천태랑(天太郞), 해태랑(海太郞).
이들 넷 중 둘이 구중천부까지 왔단 말인가?
휘이이- 잉-!
검태랑의 몸은 옷 빛깔과 같은 흑무(黑霧)에 휘감겼고, 도태랑의 몸은 회색 기류에 휘말려 사라졌다.
"가자!"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거의 일순에 벌어진 일이었다.
벽안아랑은 복도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벽에는 간혹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어 늘 미광(微光)이 뿌려지는 통에 내가고수라면 사위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기관(機關)이 중첩되어 있는 구중천부의 절지(絶地), 이 곳은 정법회의 단리음마저 모르는 음야홍의 비밀 장소였다.
'왠지 덥군.'
음야홍은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듬을 느낀다. 초여름 같은 더위가 몰려들며 피부가 끈끈한 땀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찬물로 몸을 씻자.'
그녀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아침이 되기 전, 단리음… 그 꼬마 계집을 찾아가자. 그 계집이 비록 내게 완전히 속았다고는 하나, 천부적인 천재(天才)이니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음야홍은 교구를 흔들며 걸음을 내딛었다.
물통은 아주 거대한 자기 호로병이었다. 그것은 쇠줄에 의해 한 길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호로병 안에는 마차 세 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청수(淸水)가 들어 있었다.
호로병 바닥에는 거미줄을 닮은 기이한 마개가 달려 있다. 그것을 옆으로 조금만 틀면 호로 속의 물이 십여 줄기로 갈라져서 뿜어져 나온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물줄기는 음야홍의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휘감았다.
음야홍은 옷을 벗지 않은 채 호로 아래에 서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소나기처럼 물줄기가 그녀를 씻어 냈다.
'그래도 덥다니, 모를 일이다. 이 열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음야홍은 아직도 열기(熱氣)를 느꼈다. 물줄기가 몸 구석구석을 씻어 내도 더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 앞에 서 있는 듯하다니…….'
음야홍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쏴아아… 쏴아아……!
물줄기는 세차게 떨어져 내렸고, 그에 따라 그녀의 풍요로운 몸뚱이가 완연한 굴곡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오, 완전한 몸매!
젖가슴 하나가 싹둑 잘린 것이 아주 괴이쩍었으나, 가히 천부적인 우물이었다.
이미 뭇사내를 경험한 듯 젖가슴은 손 하나로 쥐지 못할 정도로 풍만했고, 끊어질 듯 가는 허리 아래 매달려 있는 둔부는 위쪽으로 바짝 올라 붙은 채 잘 익은 복숭아 같은 팽만함을 보였다.
허벅지는 피둥피둥 살이 쪘는데에도 날씬해 보였다.
사실, 여체의 색감은 젖가슴이나 둔부에 있지 않고 미끄러운 허벅지에 있다.
세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 그리고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서고 있었다.
"미안, 목욕을 방해해서!"
날(刃), 핏빛의 날이 물줄기에 혈광(血光)을 아스라하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일각(刻)이나 따라다녔다."
죽립을 쓴 황의인, 그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서는데에도 물이 묻지 않았다.
"누구지, 너는?"
음야홍의 얼굴은 새파래졌고, 검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천돌혈(天突穴)에 맞닿았다.
"네가 부른 사람!"
아래턱을 약간 보이는 황의인, 그는 백무엽이었다.
그가 바로 음야홍이 느꼈던 열기의 원천이었다.
"네가 혼자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으으, 너… 너는 인문(忍門) 사람이구나?"
음야홍은 소리를 내며 손을 쳐들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내가강기(內家剛氣)로 그녀의 진기를 제압하고 기이한 기운으로 그녀의 심령을 제압한 후였다.
'으으, 귀신보다 빠른 자다. 이미 늦었다. 내 목숨은… 이 자 손에 쥐어졌다.'
음야홍은 넋을 잃고 말았다.
"훗훗…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왜냐하면, 죽어서나마 깨끗한 시체를 남겨야 할 테니까!"
백무엽은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백여 가지 방법으로 음야홍을 죽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신(死神)이다. 바로… 바로 이 자가 이제껏 나를 괴롭힌 그 자였다.'
음야홍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 나를 죽이겠단 말이냐? 나를 죽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느냐?"
"미안, 나는 계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그럼 내 입을 통해 비밀을 알고 싶지 않느냐?"
"글쎄, 내가 알기로는 마가(魔家)의 비밀은 점조직으로 보호되고 있어 아래쪽의 일은 알아도 위쪽의 일은 모른다던데?"
"잘 아는군?"
음야홍의 얼굴은 순식간에 자색으로 물들었다.
"훗훗… 물론, 너는 마가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백무엽의 말투가 괴이쩍었다.
"아, 아니라니?"
"너는 정법회 사람이다. 듣자하니 너는 정법회의 군사(軍師)에 호법, 수석당주 노릇을 하고 있다던데?"
"그렇다. 나는 사실 백도를 위해 많은 것을 했다. 네가 그것을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음야홍은 일말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희망이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든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다.
그것만 갖고 있다면 지옥 안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음야홍의 입가에 여릿하나마 미소가 드리워진 건 핏빛 검신을 통해 전해져 오던 가공할 기운이 조금 약해진 다음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보다 애절한 빛으로 변해 갔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진짜 악마도 아니다. 진짜 악마는 마화삼이다. 나는 그의 종일 뿐이다!"
"쯧쯧, 종이 되어 상전을 욕하면 못 쓴다!"
"나, 나를 용서해 다오. 그럼… 진짜 백도를 위해 일하겠다.!"
"훗훗… 그럼 먼저 회주에게 서신 하나를 써라!"
"서신?"
"지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글을 써라."
"꼭 써야 하느냐!"
"그렇다!"
"너, 너는 단리음과 어떤 사이냐?"
"글쎄, 친구라고 할까?"
"친구? 단리음은 좋은 친구를 두었군!"
"훗훗……!"
백무엽은 묘하게 웃으며 검을 쳐들었다.
한순간, 검광이 번뜩거리는가 싶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네가 가져, 이것은!"
이제껏 음야홍의 목젖을 노리던 신검(神劍) 혈사자(血獅子)가 갑자기 음야홍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내 손에 검을 쥐어 주다니? 너는 미친 놈이로구나?"
음야홍은 보검이 손에 쥐어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무엽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으로 바닥에 글을 써라! 그간 미안했다고!"
"미, 미친 놈!"
음야홍은 치를 떨며 우수를 쭉 내밀었다.
슷-!
핏빛이 파도처럼 솟구쳐 올랐다. 혈사자검은 열여덟 개의 영롱한 검화를 백무엽의 가슴에 뒤덮었다.
"죽어라!"
음야홍은 표독스럽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호접만화락(胡蝶滿花落)!
호접세가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필살의 구명절초이다.
츠으- 으- 츳-!
검기가 난화(亂花)처럼 뿌려지며, 백무엽의 전신이 삼엄한 검막 안에 가두어졌다.
그리고 백무엽의 비웃는 목소리가 음야홍의 고막을 아프게 했다.
"너는 지겨운 계집이다. 마가는 그래서 너를 버렸을 것이다."
백무엽은 오른손을 가볍게 쳐들고 있었다.
무수하게 피어 오르던 검화는 환상처럼 사라진 후였고, 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중지(中指) 사이에는 혈사자검이 끼워져 있었다.
"검, 검을 잡아 내다니? 흐으으… 윽……!"
음야홍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솟구쳐 올랐다.
"훗훗… 별것은 없었다. 사실 내가 바란다는 것은 단 하나, 네가 그런 자세를 취해 주기 바랐을 뿐이다!"
백무엽은 손가락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강한 힘이 검신을 타고 음야홍의 경맥 속으로 파고들었다.
찌릿-!
음야홍은 상반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다가 혈사자검이 제 손에 쥐어진 채 비스듬히 방향을 트는 것을 발견했다.
"아, 안 돼! 안 돼!"
그녀는 울상이 되는데, 혈사자검은 정확하게 그녀의 심장 속으로 세 치 파고들었다.
검자루는 음야홍에게 쥐어져 있었다.
뚝- 뚝-!
음야홍은 입을 헤벌린 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너, 너는… 죽고 말 것이다. 마가에 대항한 죄로!"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울컥 핏물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백무엽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마가는 나를 제거하기 위해 너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너도 제거될 것이다. 방법은 모르나, 너도 제거된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숨을 끊었다.
두 무릎을 땅에 댄 채 검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심장에 검신을 틀어막은 자세로 죽은 음야홍!
물줄기는 계속 떨어져 내렸고, 핏물은 그 통에 바닥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였다.
음야홍이 자결(自決)했다는 말은 쉬쉬하는 가운데 퍼져 나갔다.
음양홍이 자결을 하다니?
회주 단리음의 애검 혈사자를 가슴에 꽂고 죽다니?
정법회의 활동은 회주의 명에 의해 당분간 금지되었다.
그리고 천하 각지에 내려졌던 훈령 중 인문을 찾게 되면 희생이 크더라도 제거하라는 훈령 역시 취소되었다.
그 외, 회주가 돌연 폐관에 들었다는 것이 중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기변(奇變), 의혹(疑惑)!
모든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듯했다.
검태랑(劍太郞), 그는 석산(石山)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매와 같은 눈빛으로 그는 돌바닥에 있는 모든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새가 잠깐 내려앉았다가 떠오른 흔적을 찾아 냈고,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불며 잔설(殘雪)을 흩트린 상태라든가, 늑대 세 마리가 빠른 걸음으로 북서쪽을 향해 지나갔고 그것이 세 시진 전이라는 것 등등…….
검태랑은 추종술(追踪術)의 달인(達人)이었다. 그는 바람마저 뒤쫓는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바위면 하나를 유난히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잠깐 정지했다. 희미한 발자국이나, 분명 그의 발자국이다. 이 발자국은 음야홍의 시체 앞에 있던 그것과 같다!"
검태랑은 손을 쳐들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뒤쪽을 바라봤다. 그것은… 누군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았다는 뜻이다!"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이십 년 전 철마신군(鐵魔神君)이란 자를 세 달에 걸쳐 칠만 리나 따라가 암살했을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십 년 전, 반역자이자 자신의 아내인 소영미자(昭影美子)를 만 리 넘게 쫓아가 정부와 함께 일도양단시켰을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었다.
"그는 알아 냈다. 추적당한 지 칠백 리도 아니 되어……!"
검태랑은 땀을 쭈욱 흘렸다.
'그가 무섭다, 솔직히! 그러나 계속 따라가야 한다. 화접(火蝶)의 명이기에!'
화접! 바로 사막지주(死幕之主)가 아닌가?
검태랑은 그녀의 수하란 말인가?
"하여간 가자! 지옥까지든 극락까지든 추적하자!"
검태랑은 중얼거리며 곧 모습을 감췄다.
그는 뿌옇게 타오르는 안개와 더불어 홀연히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 * *
하남성(河南省) 개봉부(開封府).
문화가 번성하기로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이는 곳이다.
과거 한때는 금국(金國)의 수도였던 곳으로, 그 때에는 개봉이 아니라 변경(邊京)으로 불렸던 곳이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 미시 말(未時末),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거리를 메우고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특징이 전혀 없는 얼굴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잔걸음.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면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만리추종(萬里追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흐릿한 눈빛을 던지며 걸어갔다.
벌써 이틀이다. 그가 아주 미세한 흔적을 따라다닌 지도…….
'불쑥 시진으로 들어와 나를 떼어 놓으려 하나,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의 표정에는 여타한 변화가 없었다.
매우 평범한 사람,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을 그저 그만한 사람.
백 사람 중 아흔아홉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시시한 모습.
그것은 그가 십 년의 수련 끝에 터득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자(忍者)의 모습이었다.
한겨울 폭설에 누워 감각 기관을 단련하고, 채찍에 천만 번 얻어맞는 가운데 감각 중 고통을 제거하고, 이빨이란 이빨은 모두 뺀 후 이빨과 똑같이 생긴 호각을 끼워 넣고, 굶주림과 욕정, 호기심과 같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제거하고,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라도 동요하지 않을 무(無)의 마음 하나만을 남긴 대인자(大忍者).
그는 고도의 단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받은 단련은 뛰어나게 하는 단련이 아니다. 그는 평범해지는 훈련을 받았다.
천한 사람으로 보이는 훈련, 그것이야말로 그가 받은 훈련 중 가장 특수한 것이었다.
'내가 뒤쫓고 있는 자는 여지껏 쫓아 본 백여 명의 고수 중 가장 뛰어나다. 그는 이런 일에 있어 나만큼이나 뛰어나다. 그러나 나를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누에실보다 가는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아마도 그러한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눈(雪)이 더 심하게 오면 곤란해진다. 그러나… 끝까지 따르는 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는 너무나도 미세한 잔흔(殘痕)을 따라갔다.
주루(酒樓).
그는 조금 전까지 창 아래에서 죽엽청(竹葉淸)을 마신 듯했다.
주루 안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강호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표행(票行)의 표사들로, 시간이 있기만 하면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지낸다.
그들은 강호의 두 곳에서 벌어진 살겁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벽안아랑 음야홍의 자결!
그리고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山)에서 대폭발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방장(方丈) 고엽선사(枯葉禪師)가 천분만열되어 죽었다는 것!
무사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엽청 주담자가 놓인 탁자를 닦고 있는 점소이가 기억하는 것은 방금 전 거기 앉았던 과객(過客)이 죽립을 썼다는 사실뿐이었다.
'왜 술을 마셨을까?'
뒤따르던 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일은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다.'
눈(雪), 눈은 대지(大地)를 깊이 파묻었다.
드넓은 흰 이불이 펼쳐진 듯 산(山)도, 숲(林)도, 성곽(城廓)도 눈에 파묻혔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 속.
"저쪽으로 가고 있다! 그는 한 번에 이십 장씩을 움직여 가고 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파공성을 내지 않으며 눈 위를 미끄러졌다.
설지비행술(雪地飛行術).
그런데 정통적인 설지비행술과는 격이 다른 사형무흔보법(蛇形無痕步法)이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자다. 매 걸음마다 이십 장씩이라니! 아아, 그는 이미 축지성촌지경(縮地成寸之境)에 이르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산구릉을 다섯 개 지나고 얼어붙은 개울 세 개를 건넜을 때, 그는 그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는 그를 보고 걸음을 뚝 멈췄다.
이 곳은 주위가 환히 트인 곳이었다. 몸을 감출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이제껏 그가 집요하게 추적하던 그 사람의 앞쪽에 있는 죽림(竹林)뿐이었다.
그는 죽림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다듬고 있었다.
"대나무는 눈 속에서도 푸르지!"
그는 대가지 하나를 자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질긴 청죽(靑竹)이 매우 매끄럽게 잘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가운데에서 피가 흐르면… 눈이 피를 감추게 되지!"
"……!"
흑의인. 그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걸렸다. 내가 도리어……!'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자는 나를 유인한 것이다. 으으, 어처구니없이 내가 걸려든 것이다.'
검태랑(劍太郞), 그는 추종의 이력 가운데 단 한 번의 오점을 찍게 된 것이다.
슷-!
그는 청죽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잔가지가 많던 청죽은 하나의 죽간(竹竿)으로 화했고, 그의 손이 두 번 흔들리는 찰나 죽간은 다시 죽도(竹刀)로 화했다.
"어떤가?"
그는 얼굴을 힐끔 쳐들었다.
죽립(竹笠), 커다란 죽립 아래에서 흰 얼굴이 나타났다.
아래턱의 동요는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정확한 모습이 아닌가? 길이가 이 척 오 촌, 도신(刀身)의 폭은 손가락 세 개가 겹쳐질 정도!"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殺氣)가 없었다.
'인 중 인(忍中忍)! 아아, 살기를 숨기는 데에도 나는 졌다.'
검태랑의 입술이 시꺼매졌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모른다. 공포라는 것은 훈련으로 인해 이미 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의 인자로서 수치를 느껴야만 했다.
그는 지고 만 것이다. 상대는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죽도(竹刀)를 깎고 있었던 것이다. 눈 속에서…….
"이 모습을 잘 보게. 이것은 장광도(長光刀)라 하네!"
"장, 장광도? 그럼… 장광류일맥(長光流一脈)인가?"
검태랑은 한쪽 어깨를 기웃거리며 대답했다.
"훗훗… 그렇다네!"
"으음, 장광류는 본막(本幕)에 의해 무너졌지!"
검태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힐끔 살폈다. 온통 눈일 뿐이다. 그리고 검태랑은 흑의를 걸치고 있다. 더욱이 상대는 근처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딛고 서 있다.
'도망칠 길은… 무(無)! 나는 철저히 걸려들었다. 저 자는 절대이다. 한 점의 허도 주지 않는다'
검태랑의 아래턱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 가운데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같이 뛰어난 고수를 보게 된 것은 영광이다. 그대는 내가 중원에 나와 본 두 사람 중 하나다!"
"두 사람?"
"그대와 마화삼(魔花衫)!"
"으음, 역시 마가 사람이군?"
"아니야, 마가는 아니야. 나는 사막(死幕)에서 나왔다!"
"사막?"
"클클… 마화삼은 나의 주인 화접(火蝶)의 주인이다."
검태랑은 웃으며 손을 입에 넣었다.
설마… 입 속에다 병기라도 감추고 있단 말인가?
그는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가짜 이빨로, 치근(齒根) 부위에 공(孔)이 세 개 뚫려 있었다.
"예절 바르군, 중원인(中原人)은! 훗훗, 나를 의심하지 않고 내가 이것을 꺼내도록 기다려 주다니!"
"살기가 없다. 너는 나를 상대로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클클… 하긴 그래. 나는 추종술에 능하나, 싸우는 데에는 백치이지."
검태랑은 웃으며 가치각(假齒角)이라 불리는 것을 입술 사이에 빼물었다.
빼애애- 액- 빽-!
일순, 휘파람새 소리 비슷한 호각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검태랑은 호각을 분 다음, 호각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그렇지만 이 소리를 들은 도태랑(刀太郞)은 달라. 그는 추종술에도 능할 뿐 아니라, 싸움에도 능하다! 그는 막주(幕主) 화접(火蝶) 나으리의 아침 저녁 진지를 해 드리며 몇 초 도법(刀法)을 배웠거든? 그 덕에 동영제이도(東瀛第二刀)가 되었지!"
"도태랑?"
"클클… 그는 근처에 있다. 나는 들켰으나, 그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네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죽을 것이다."
"글쎄, 클클… 하여간 너를 존경한다. 한 명의 무사로서."
검태랑은 웃다가 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작은 비수(忍首)가 들려 있었다. 비수에는 고독이 발라져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목을 찌르려다가는 문득 물었다.
"한데, 주루에는 왜 갔지? 술 냄새가 없는 것으로 보아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한 가지 알 것이 있어서 갔다!"
"무엇을?"
"숭산 소식이다!"
죽립인은 대답하며 자세를 약간 흩트렸고, 그 순간 검태랑의 몸이 흑무에 휘감겼다.
"한 번의 기회마저 찾지 않을 수 없지! 하아아앗-!"
검태랑은 비수를 쥐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슷-!
그는 찰나적으로 십 장 솟구쳐 올랐으며, 돌연 충천(庶天)하는 노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후, 도기(刀氣)가 주위를 무겁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츠으으으- 읏- 츳-!
환(幻)!
모든 것은 허상이고, 실체는 이미 감춰졌다.
침묵할 듯한 살기가 사방에 떨어져 내릴 때였다.
"실수했다, 왜인(倭人)! 이것은 기회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추종술에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른 귀하에게 기증한 한 가지 예물이었던 것이다. 살 희망이라는!"
죽립인은 도를 뒤쪽으로 쳐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네 자 길이의 죽도를 그어댔고, 죽도가 그어짐과 함께 무성하던 청죽림(靑竹林)이 난도질되며 푸른 죽엽이 눈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돌연 혈영(血影) 하나가 나타났다.
"예, 예물이었다고?"
검태랑, 그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복부에는 청죽도(靑竹刀)가 박혀 있었다.
죽립인의 자광일도(長光一刀)라는 실전절기를 시전해서 죽엽 속으로 숨어든 검태랑의 아랫배 기해혈(氣海穴)에 죽도를 박은 것이다.
허리뼈가 끊어지도록 정확히 다섯 치를!
"너, 너는 뛰어나다. 그러나 마화삼은 더 뛰어나다! 지는 쪽은 네 쪽이다. 결국 마화삼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도태랑에게는 괜히 신호를 한 듯하군."
검태랑은 비웃듯이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죽립인은 벌써 모습을 감춰 버린 후였다.
검태랑의 시체는 일각 후 치워졌다. 누군가 나타나 검태랑의 시체를 양지녘에 잘 묻어 준 것이다.
'어쩌면 나도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계속 따를 뿐이다.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추종하지 말하는 하명이 있기 전까지는!'
바로 그 날, 그녀는 운화다루(雲華茶樓)에 있었다.
'무사히 성공했다. 아아, 함정인 줄 알았는데… 하늘이 도왔다.'
설향, 그녀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창 밖에는 서설(瑞雪)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용정차(龍井茶)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찻잔에는 정교한 뚜껑이 덮여 있었다. 뚜껑은 차향(茶香)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남장을 하고 역용을 했는지라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자리는 그가 즐겨 앉던 자리다. 고약한 사람! 아무에게도 주지 않으려 했던 나의 마음을 그리 쉽게 빼앗아 가다니!'
그녀의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화사한 웃음, 그러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그리고 그 웃음은 찻잔의 뚜껑을 여는 순간 거둬지고 말았다.
찻잔 안에는 찻물이 들어 있지 않았다.
찻잔은 텅 비어 있고, 바닥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들을 안내해 주어 수고했다! 이 글을 볼 때, 너는 이미 중독되었으리라!>
대체 무슨 글이란 말인가?
'설… 설마, 내가 함정에 걸렸단 말인가?'
설향은 흠칫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머리가 빙빙 돌고 사지에서 힘이 쭈욱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으으, 독… 독(毒)!"
그녀는 움찔하여 의자를 내려다봤다.
독기는 의자에 앉는 부분에서부터 그녀 하체를 통해 전신으로 스며들었음에 틀림없었다.
"내… 내가 당하다니!"
설향은 휘청이다가 이를 악물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결하자.'
설향은 이빨 사이에 끼어 둔 단약 하나를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은 단약이 깨어지기 이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천장과 바닥에서부터 흑풍이 일어나더니, 그녀의 몸뚱이와 더불어 눈이 내리는 창 밖으로 사라져 갔다.
가히 찰나적으로 모든 일은 벌어졌다.
눈이 내리는 하오(下午), 누군가 구석진 자리에서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최혼술을 써서 비밀을 토하게 하라. 이 기회를 일망타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특히 화정신수궁에 다녀온 자는 꼭 잡아야 한다. 놈은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다. 어쩌면 놈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었다. 희게 반짝거리는 이빨을…….
"네놈들은 독(毒)하나, 마가(魔家)는 더 독하다. 크크, 그것을 이제 알게 될 것이다. 피라미들을 상대하느라 간이 커진 놈도, 전능(全能)한 힘이 무엇인지 이제 알게 되리라!"
호수(湖水).
그림자마저 가라앉는다고 해서 낙영호(落影湖)라고 불리는 호수였다.
그가 거기 이른 시각은 새벽이었다. 호수 물은 큰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물살이 거칠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얼어붙었을 것이다.
'저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조심스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의 눈빛은 뿌옇게 얼어붙은 얼음 조각을 닮아 있었다.
호숫가, 죽립을 쓴 사람 하나가 죽간(竹竿)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물을 바라보며 하나의 석상이 되어 있었다.
'왔다. 그 자는……!'
그의 입가에는 고졸된 미소가 흘렀다.
백무엽, 그는 사흘째 한 사람과 쫓고 쫓기는 내기를 했다.
놀이치고는 꽤나 지루한 놀이였다.
'절대 들키지 않고 빠져 나가려 했는데, 무산되었다.'
백무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를 따르는 그림자 하나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자는 개봉 외곽에서 죽인 자와 한패일 것이다.
'사막(死幕)! 그 곳은 사천황궁(邪千皇宮)과 더불어 변황쌍천(邊荒雙天)이라고 불린다. 마화삼이라는 자가 사막마저 얻었다면, 나의 일은 더욱 힘들어진다.'
백무엽은 평상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은 격동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설향(雪香)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누구에 대해서도 번뇌하지 않았던 무화령(懋花令), 그가 타인 때문에 걱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큰 변화였다.
'꾀가 많은 여인이니, 성공했을 것이다. 아암!'
백무엽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호수를 응시했다.
"이제 낚시를 거둘 때가 되었는가?"
그는 아주 신비하게 웃다가 죽간을 슬쩍 쳐들었다.
'물 속이다. 놈은 저 속에 있다.'
피이이이- 잉-!
낚싯줄이 팽팽히 당겨짐과 동시에, 물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딸려 올라왔다.
회색 옷 조각 하나, 그것이 낚시에 걸려 끌어당겨지는 찰나 백무엽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빠르군, 옷을 벗어 놓고 도망가다니. 하지만 내게는 낚시 외에도 죽립(竹笠)이 하나 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의 왼손이 죽립에 닿았고, 왼손이 내뻗어짐과 동시에 죽립은 뇌룡으로 화해 북쪽을 향해 떠올랐다.
피잉-!
죽립은 십 장 허공을 치솟더니, 한순간 방향을 바꾸어 잡목 숲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제기랄, 들키다니… 두 번이나 거푸. 수치다, 이것은!"
나직한 욕설과 함께 도광이 솟아올랐다.
차아아- 앙-!
속옷만 걸친 자의 허리에 감겼던 연도(軟刀)가 풀리며, 도막이 형성되어 그의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사우환겁(死雨幻劫)- 만로단영(萬路斷影)!"
도광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삼엄한 도막이 형성되어 일대를 완벽하게 차단시켜 버렸다.
무수히 떠오르는 도의 그림자(刀影)!
백무엽의 시선이 여전히 하나의 점을 향해 고정되었고, 백무엽이 집어 던진 죽립이 돌연 회선(廻旋)하며 강풍(强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도막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 정도로는 안 돼. 도법은 좋으나, 내공이 약하다!"
츠츠츳-!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장도를 쥔 자의 얼굴이 시꺼매졌다.
"도막을 찢어발기다니? 대체 내공이 얼마이기에?"
보라! 죽립이 도막을 찢고 얼굴 쪽으로 다가서고 있지 않는가?
파팟-!
둔팍한 소리가 나며 그의 얼굴이 피로 뒤덮였다.
"제… 제기랄, 당했다! 단 일 초(招)에……."
핑그르르 돌며 날아든 죽립이 그의 얼굴 가운데를 쭉 갈라 버린 것이다.
"위대하다, 너는!"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자, 그는 도태랑(刀太郞)이라는 자였다.
그는 잠수(潛水)하여 백무엽을 살피다가 백무엽에게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근처를 피로 물들이며 죽었다. 그리고 그 위로 폭설이 쏟아져 내렸다.
백무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죽립을 발로 차서 물 속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제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는 끝났다. 한데,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설향에게도 이런 거머리 같은 자들이 따라붙은 것은 아닐는지……!"
아아, 마화삼! 그는 얼마나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죽여도 끝이 없으니……!
호수 물이 흔들린다. 폭설이 호숫가를 희게 감춰 버렸고, 호수 물은 거울이 되어 거위털이 쏟아져 내리듯 눈 내리는 모습을 반사시켰다.
그리고 거기 그림자를 담그고 있던 청년의 모습이 스르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