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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장 사공노인
백방생은 내심 증평의 지혜로움에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참고 있다가 이제야 그 질문을 해 오는 것이었다. 백방
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녀와는 아까 이미 헤어졌소."
증평은 이에 다시 방긋 미소를 떠올렸다.
"나도 왠지 보이지 않길래 그런 줄로 알고 있었어요. 헌데, 그녀도
없는 마당에 저를 자꾸만 멀리하려고 하다니,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
요?"
백방생은 그녀가 또 다시 자결하겠다고 말할까봐 급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그저 그렇게 되면 낭자에게 손해가 되고 또한
앞으로 나쁜 소문이 나면 혹시 낭자의 혼삿길을 망치게 되지 않을까
해서 걱정되어서 한 소리요."
증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이미 상공의 하녀(下女)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결코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시집가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은 말아요."
(혹시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백방생은 문득 질린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그의 몸은 비록
황진의의 시술로 약간 좋아졌다고 하나 너무나도 비대하여 도무지 매
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백방생은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왜 증평이 이렇게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자가 그런 각오라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말리지 않겠소. 하지만 나
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순간 증평은 기뻐 날뛰며 즉시 신형을 날려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백방생의 목을 껴안고 한쪽 볼에 입을 맞추며 말하는 것이었다.
"고마와요. 저는 상공께서 이런 분이실줄 알고 있었어요. 앞으로 정성
을 다해서 보필하되 결코 조금의 부담도 드리지 않겠어요. 상공께서 어
떤 여자를 만나서 사귀든, 혹은 혼인까지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끝까지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예요."
백방생은 갑자기 소녀의 향긋한 입김과 함께 가슴의 불룩한 융기가
느껴지고 볼에 입맞춤까지 당하게 되자 급히 떼어내려고 했으나, 일순
그녀의 말이 매우 무거운 것을 알고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증평은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쁨의 눈물이었
다.
백방생은 이에 문득 자신에게 반문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도 대단한 사람이었던가?)
백방생은 그녀가 무안해질 까봐 천천히 떼어내며 말했다.
"보물은 이 근방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대체
어디요?"
증평도 그제서야 눈물을 옷소매로 닦고 웃으며 말했다.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그러나 찾으려면 날이 밝아야 해요. 우리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가도록 해요."
백방생은 증평의 손에 이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제서야 정신이 약간 돌아온 듯 했으며 문득 생각했다.
(미처 황낭자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군. 나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
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백방생은 일단 증평에게 그 문제의 보물을 찾게 한 다음에 역시 황진
의를 찾아가 함께 강남으로 내려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증평은 길을 걸으며 밤새도록 얘기를 했다. 모두가 백방생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듣고 나면 유익한 점이 많았다. 대부
분이 그녀가 자라오던 과거의 얘기였는데, 그녀는 비단 지식도 많을 뿐
만 아니라 말을 조리있게 잘 해서 백방생으로 하여금 즐겁게 했다. 백
방생은 그녀를 만나기 이전에는 정신이 몽롱했었으나 이제 갈수록 정신
이 또렷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증평이 어떤 삶
의 의지를 조금씩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날이 새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어느
덧 하나의 강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강가에는 누렇게 변한 갈대잎들
이 무성한데, 타고 건널 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저 쪽으로 가 봐요."
증평의 손짓에 따라서 강의 상류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전면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십여명의 중년장한들이 저마다 손에
병장기를 들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휘몰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간밤에 도적질을 하고 돌아오는 녹림의 무리들인 것 같았다.
심하게 몰아대므로 어린아이들은 쉬지 않고 울어댔으나 그럴 수록 장한
들은 더욱 그 아이들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 포로로 잡힌 무리중에는
남자도 더러 있었는데 모두 늙어서 기동도 못할 정도였다.
"이 부근 복우파(伏牛派)의 놈들이예요. 얼마전에 이 곳에 정의맹이 들
어서서 모두 달아났다가 이번에 철혈부의 놈들과 함께 올라와서 저렇
게 노략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장한들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할수가 없자 이번에는 그 어머니를 채찍으
로 후려쳤는데, 이내 의복이 찢어지고 피가 낭자하기 시작했다.
백방생이 만일 과거의 공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즉시 달려들어 놈들을
몰아냈겠지만, 지금은 저런 녹림의 하류도배들도 상대하기 어려운 입장
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피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악 돌아가려고 신형을 돌렸을 때, 느닷없이 전면에서
한 명의 늙은 노인이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정말 지독하게 늙
어서 얼굴에 주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겨우 겨우 걸어 오고 있었다.
그는 귀가 먹어서 전면에 그 흉한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겨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위태롭게 걸어오고 있는 노인
에게 백방생은 옆으로 지나치면서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노인장, 몸을 피하시지요?" 노인이 만약 계속 간다면 금방
저 복우파의 도적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그것이 안타까워
서 그렇게 말해준 것이었는데, 과연 아니나 다를까 그 노인은 정말로 귀
가 약간 먹어 있었다.
"뭐라구?"
즉각 고개를 쳐들어 그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물어왔다. 노인의 눈빛
는 매우 혼탁하여 마치 그것처럼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
방생은 공연히 그 노인으로 인해 발길이 늦어지게 되자 다소 당황해
졌다. 그는 그냥 가야할까 어쩔까 하고 생각하며 다시 노인에게 말했
다.
"지금 저기에 나쁜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몸을
피하시지요?"
증평은 벌써 저 만큼 앞서 가서 백방생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노인은 고개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뭐라고, 나쁜 놈들이라구? 대체 누가 나쁜데 그래?"
그때 이미 복우파의 도적들은 십여장 밖에 이르렀다. 백방생은 내심 속
이 타서 급히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그게 아니구요. 저의 말은 지금 빨리 이곳을 피하시라는 것입니다.
도적들이 오고 있다니까요."
백방생은 노인이 자꾸 자기만 보고 오해를 하는것 같아서 손짓으로
전면을 가리켰다. 노인은 그제서야 그 쪽을 보고는 가볍게 낯빛이 변하
는 눈치였다.
"이런 이런, 저런 나쁜 놈들이 또 왔군 그래. 아주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고 말고..."
백방생은 노인이 흔들흔들 하면서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어서 피하셔야죠. 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노인은 이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피하긴 내가 어디로 피하나? 이제 죽을 때도 다 되었는데
저놈들에게 한바탕 훈계라도 하고 죽어야 하겠네. 어디 저게 사람의 할
짓인가? 천벌을 받지? 암, 천벌을 받고 말고."
백방생은 더이상 이 노인을 말로 설복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노인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
시 주저하다가 그는 그만 빠르게 노인을 등에 업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살고 봐야죠. 자, 노인장! 어서 저와 함께 이 자
리를 피하시죠!"
하지만 노인은 실수인지 몰라도 뒤로 벌렁 넘어갈 뻔 했기 때문에
백방생은 다시 시간을 지체해야 했고, 이어 노인이 그의 등에서 바로
안정을 했을 때는 이미 자리를 떠날 기회를 잃고 있었다. 백방생은 기실
노인을 업은 다음에는 놈들의 앞에서 달아나기만 하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흐흐, 네놈은 또 뭐냐?"
갑자기 서너 명의 장한들이 그의 앞 길을 가로막으며 흉측하게 웃고
있었다.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야."
노인이 연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백방생은 미소와 함께 말했
다.
"나는 지나가던 사람인데 길을 가려고 하니 좀 비켜주시오."
그 장한들 가운데의 하나가 뜨악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업은 그의
행색을 살피며 말했다.
"뭐라구? 네가 감히 이 어르신께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한다는 말이
냐?"
백방생이 보아하니 그 장한은 태양혈도 거의 밋밋하고 공력의 조예도
높지 않은 것 같아서 역시 자신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 같았다. 백방생
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 다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말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려는 것일 뿐이니 나를 막지 마시오."
등에 업힌 노인은 여전히 그 중얼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아마도 주위의 광경을 보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
지만 그렇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백방생은 그가 가능하면
목소리를 죽여주기를 바랬다. 공연히 이들을 건드려 봐야 이로울 것이 없
지 않은가?
이때 등뒤에서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더욱 심해지더니 누군가가
무엇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한 여자의 애절한 외침 소리가 들려오
는 것이었다.
"아가야!"
백방생은 급히 신형을 돌려 보았다. 그는 이내 안색이 대변했다. 누가
집어던진 것은 이제 갓 돌도 되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였는데, 여인이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가자 근처의 한 장한이 칼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두동
강 냈던 것이다. 그 광경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여인은 이내 절명
했으며 반쪽으로 갈라진 그녀의 몸통에서는 붉은 핏물과 함께 내장조각
들이 섞여나와 바닥과 아이의 몸을 흥건하게 적셨다. 갑자기 지독한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아가!"
여인의 시부모인듯한 두 명의 노부부가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황망히 앞으로 내달렸다. 그들은 아이만이라도 살려 보려는 모양이었
다. 아이는 그 충격 때문인지 이제는 울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다른
장한들이 그 노부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 스스로 약
간 망설였다. 이 일을 그냥 두고 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방생은 이미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백방생은 등줄기 부분의 혈도(穴道)
가 마치 어떤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답답해져 오면서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그가 업은 노인이 그렇게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노인의 미친듯이 중얼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노인은 이제까지 거짓으로 병약한척 했다는 말인가? 백방생이
만일 지금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즉시 그 노인의 혼탁하던 두 눈에서
마치 칼날과도 같은 안광이 폭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은 일부러 백방생을 노리고 있는 살수(殺手)라는 말인
가? 백방생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는 그 와중에도 갑자기 전면에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느닷없이 아이를 구하려고 달려들던 두 노부부가 돌연 두눈에서 엄청난
살광(殺光)을 발하더니 장검(長劒)을 손에 들고 극쾌하게 백방생의 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뒤에서 증평의 앗, 하고 놀라는 외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노부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살수가 변장을 한 모습이었던 것
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장한들은 처음과는 달리 재빨리 두사람에게 장검
만 건네주고 물러가 버리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그만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는 이제까지 죽음의 고비도 많이 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강한 위기를 느껴본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적
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치밀했고 각본도 매우 완벽해 보였다. 등뒤에
서 완전히 제압하고 있으니 이제 전면에서 덮쳐드는 두 사람의 장검
이 그의 몸을 관통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기실 그것으로 그의 몸이 가장 죽음에 근접했다고는 말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이것보다 훨씬 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많았다. 단지 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죽음
에 대해서 보다 안정되었기 때문일까? 뜻밖에도 그러한 전신을 파고드
는 강렬한 위기감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강한 활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방생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르자 이제까지 없던 강인한 정신력이 발
휘되어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사실 비록 공력은 상실되었으나 무학은 그의 몸과 마음속에 살아있
는 상태였다. 그가 일단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움직이자 일순 그러한
잠재된 능력이 발작적으로 튀어 나왔다.
두 사람의 장검이 백방생의 몸을 꿰뚫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이미
그의 몸은 어느새 옆으로 한 자나 미끄러졌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환상적인 동작이었다. 두 노인의 장검이 허공을 베는 순간에 이미
백방생의 등은 옆으로 기우뚱해져서 그 두개의 검날을 향해 부딪쳐 가고
있었다. 등뒤에는 그 노인이 올라타고 있었다. 노인은 자연 그 두개의
장검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주의력이 약간 분산된
틈을 이용하여 백방생은 급작스럽게 노인을 들어 눈앞의 두 사람에게 던
져 버렸다. 그 두 노인은 급히 장검을 회수하여 백방생을 향해 재차 공격
을 시도하려다가 크게 놀라서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의 호기를 놓칠 백방생이 아니었다. 그는 즉각 따라붙어서 그
세 노인의 헛점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헌데 이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느닷없는 일이 발생했다.
백방생의 우수가 마악 노인의 등뒤의 혈도를 누르려는 순간에 갑자기
그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갑자기 맥
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했
다. 백방생으로서는 스스로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기 어려웠다. 다만 처음에는 위기상황이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었는데 나중에는 상대가 수비상태로 전환하게 되자
왠지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긴 당사자도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상대방이야 어떻게 알 수가 있겠
는가? 그 세 명의 살수는 백방생이 갑자기 그렇게 바닥에 뚝 떨어져서
주저 앉아 버리자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백방생이 믿을 수 없는 괴력(怪力)을 발휘하므로 눈알이 튀어 나올 정도
로 놀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어리둥절해지는 것이었다.
지금 백방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운이 하나도 없는 파김치처럼 늘
어진 병약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양쪽은 그리하여 서로 잠시동안 괴이한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그때 갑자기 백방생의 눈앞에 연푸른 비단장삼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바로 증평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달려들어 와서 백방생의 몸을 안고 뛰
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그녀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
이리라. 백방생이 그렇게 증평에게 들려서 달아나자 그 세명의 노살수도
다소 눈치를 채고 추격했다.
사실 그들 세 명의 무공은 증평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증평을
추격하는 것은 그들로선 어렵지 않았다. 다만 조금전에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증평이 정신없이 달리다가 하나의 나룻터에 이르렀다. 아까 그
만행을 벌이던 복우파의 도적들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증평은 그
야말로 최선을 다해 달려서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백방생의 몸이 무공이 높았으나 공력이 상실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방생이 조금전에 너무 심하게 몸을 움직이다가 주화
입마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룻터에는 하나의 나룻배가 묶여져 있었으며 그 배위에는 지금 한창
덩치좋게 생긴 사공이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증평은 그것을
보자 얼른 나룻배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유있게 추격하던
세 노살수들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즉시
앞을 가로막았으며 삼면에서 증평을 포위하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
들의 장검에서 검은 기운이 무려 한자나 뻗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미 최고의 공력을 일으켰음을 알게 했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문득 말했다.
"나를 내려 놓으시오."
웬일인지 백방생은 이제는 거의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운을 잃
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그가 무의식중에 지나치게 진기를 소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증평은 내심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백방생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
다. 그녀는 백방생을 내려놓은 후에도 감히 떠나지 못하고 백방생을 보며
울먹였다.
"이제 어떻게 하죠?"
말을 듣는 도중에도 주위의 검기(劒氣)들이 난무(亂舞)하여 그와 그녀
의 의복이 갈가리 찢겨져 휘날렸다. 백방생은 이제 사태가 지극히 위
태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날카로운 병장기가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사량발천근 등의 무공을 사용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력을 상실당
한 지금에 있어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란 바로 그러한 것들 밖
에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병기는 날카로운 장검이니 무슨 이력타력
(以力打力)의 수법을 쓰기도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백방생은 문득 빠르게 아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아까 그는 분명
히 등에 업힌 노인에게 제압되어 있어서 무슨 이력타력의 수법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순간에 기적같이 움
직여서 적의 공격을 피했으며 게다가 노인을 집어 던지기 까지 하지
않았는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강한 심리적인 격발로 그 힘이 나왔다는
것은 백방생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게
다가 지금은 상황이 위급한 유사시가 아닌가? 백방생은 잠시 쓴웃음을
짓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 장검을 나에게 주시오."
증평은 본래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으므로 두말없이 곧장 그 장검
을 풀어서 백방생에게 건네 주었다.그때까지도 그 세명의 노살수(老殺
手)들은 기수식만 취할 뿐 본격적인 공격은 가해오지 않고 있었다. 그
들은 백방생이 실로 불가사의한 괴력(怪力)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으로서는 이제 장검을 휘두를 힘조차 없는듯 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두어 번 경쾌하게 장검을 휘저어 본 다음에 웃으며 증평에게 말
했다.
"이제 당신은 가 보시오."
솔직히 이번의 그 살수들은 무공이 워낙 대단하여 백방생으로서는
도저히 배겨낼 재주가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바로 마지막 작
별인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평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랬기에 백방생
은 일부러 그렇게 건성처럼 말했던 것이었다.
증평은 그말을 듣자 다소 어리둥절해하는듯 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증평은 곧장 걸어서 세 노인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지금 그 세 노인이
펼치는 포위망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무형(無形)의 검기가 소용돌이를 일
으키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간단하게 증평을 해치
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평은 비록 그 검기의 포위망을 벗어나
면서 의복들이 찢기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주 무사했다. 그것은 사실 세
노인의 시선이 오직 백방생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증평은 일단 그렇게 대담하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나 백방생의 기
대와는 달리, 그녀는 곧장 멀리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주위 십
장밖에서 편안히 쪼그리고 앉아서 백방생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백방생
은 그녀가 기실은 자신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잠시 비켜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백방생은 그녀의 그런 고집스런 행동에 마
음이 답답해 졌지만,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증평은 물론 그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면서도 한사
코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녀는 보기보다 은근히 고집이 강해서 백
방생이 다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 그야말로 뻔했다.
백방생은 하는 수 없이 증평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 세 노인을 바라
보았다. 사실 이제까지 그 무형의 검기는 계속 증가하여 그 검기의 벽
(壁)이 그의 몸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기 드문 최상승
(最上乘)의 검술이었다.
그들은 백방생이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방생이 만일 그 압
박에 못이겨서 조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그들은 즉각 정해진 경로를
따라서 공격해 들어올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교묘하게 배합된 일종의
검진(劒陣)이었다. 그들 살수들은 만약의 고강한 적을 만났을 경우를 대
비하여 그 합격술을 익혀둔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어쨌거나 지금은 그가 먼저 움직여서 변화를 일으키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공력이 부족하므로 이렇게 대치가 계속
된다면 결국 질식해서 죽게 되고 말 것이다. 백방생은 장검을 들어 둥
글게 위로 호선을 그었다. 그것은 무슨 초식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의 장
난과 흡사한 의미없는 동작처럼 보였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한쪽에서 커다란 종이 깨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웬 녀석들이길래 이 어르신의 낮잠을 방해하느냐?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지금 그 세명의 살수들은 오직 공격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설사 바로 옆에서 벼락이 작렬한다고 해도 동작을 멈추지 않을 사람들이
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그 고함소리를 듣게 되자 저절로 공격을 멈
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치 갑자기 내상을 입은 것처럼 안색
이 창백해져서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새 그가
득하던 검기의 폭풍도 사라졌으며 백방생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고함소리는 비록 종이 깨지는 것처럼 크고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러나 기실 천둥벽력처럼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
렇다면 그 소리 자체에 어떤 강한 힘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느닷없이 방금전에 소리친 그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아직까지 나룻배
의 안에서 낮잠을 자던 그 사람이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고 또한 날씨가
낮잠을 즐기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사공은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세명의 노살수들은 한번 그렇게 당한 후에 저마다 경악과 의혹이 섞
인 표정으로 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전의(戰意)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만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의혹 때문
이었다. 불문에는 소위 사자( ?獅子吼)라는 신공이 있다. 그들은 이제까
지 태어나서 이렇게 위력적인 음공(音功)을 들어보지 못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사공은 배안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걸어 나왔다. 그는 뜻밖에도 늙은 노인이었는데 체구가 매우
우람하고 키도 칠척이나 되었으며 피부와 두 눈과 머리카락까지 모두
은은한 자색(紫色)을 띠고 있어서 몹시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만일
그런 사람을 평소에 보았다면 쉽게 질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에게 일종의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자, 증평은 갑자기 표
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즉시 쪼르르 그 사공에게 달려가서 웃으며 말을 붙였다.
"날씨가 다소 쌀쌀하군요. 주무시기에는 약간 춥지 않나요?"
사공은 백방생 등이 있는 곳으로 걸어 가다가 말고 증평을 보며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누군데 감히 나의 일을 걱정하고 있느냐?"
이번의 그 늙은 사공의 말은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크게 울리지는 않
았다. 그러나 그 말투로 미루어 보아 필시 오만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증평은 사실 왕옥파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왔으
니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할 수 있고, 이미 강호에는 상상못할 괴인들
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 온 터였다. 확실히
이 사공노인은 그런 소문보다 더욱 괴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증
평이 겁을 미리부터 먹을 리는 없었다.
"흔히 사해(四海)는 한형제요, 무림인은 동도(同道)다, 라는 말을 들어보
지도 못했나요? 나는 당신의 형제요 동도인데 어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사공노인은 작고 가냘픈 증평이 앞에 서서 조금도 겁먹지 않고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이내 차갑게
말했다.
"내 나이가 얼마인데 너와 친구가 되겠느냐? 그건 그렇고, 어서 가서
너의 그 친구를 불러와라!"
증평은 사공노인이 백방생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소 흠칫하며 말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러죠?"
사공노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너희들은 조금전에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지금 바로
그 일을 해주겠다는데 웬 잔말이 그리 많으냐?"
증평은 이내 사공 노인의 말속에 자신들을 도와줄 생각이 있는 것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여 즉시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 세명의 노인들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들은 이미 심한 내상(內傷)을 입어서 더이상 공격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증평은 은근히 그들이 두려웠으나 이내 백방생에게 다
가가서 그의 손을 잡고 나룻배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서 달렸다. 백방
생은 장검이 자꾸 걸리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그녀의 검집에 넣어주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증평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조금 지나서야 겨우 긴장을 풀고 백방생
에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했어요."
사실 세 노인은 이제 더이상 공격할 수가 없으므로 사공노인도 두 사람
을 더이상 구해줄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일단은 그 사
공노인을 만나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백방생과 증평이 이내 가까이 이르자 그 사공노인은 백방생을 주시하
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정말 훌륭한 인재(人才)로군. 정말 훌륭한 인재야. 내 이 나이에 이르러
여기에서 이런 인재를 만나게 될 줄이야."
백방생은 사공노인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웃고 있다
가 말했다.
"노인장께서 저희들을 구해 주셨군요. 감사드리겠습니다."
사공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큰머리가 흔들리자 강물이 다 출렁거
리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제까지 천상오룡의 이대의(李大義)와 하북팽
가의 팽호이외에 이렇게 거구의 사람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구해준 것은 아니지. 그 보다, 강을 건너겠다면
타지 않겠나?"
사공노인은 손으로 나룻배를 가리켰다. 이 사공노인은 뜻밖에도 백방생
에게는 매우 정중하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 증평은 옆에서 듣고 있으면
서 그 때문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그녀가 의도적으로 친밀하게
굴었을 때는 무시했던 기억조차 갑자기 그녀의 뇌리속에서 사라진듯
했다. 백방생은 그렇다고 사공노인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어서 그만 고
개를 끄덕였다.
"강을 건너게 해 주신다면 타지요."
백방생과 증평이 나룻배로 가서 올라 타자, 이윽고 사공노인이 다가와
서 한손으로 나룻배를 밀고 훌쩍 올라탔다. 나룻배를 다루는 사공노인
의 솜씨는 매우 완숙해 보였다. 마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짓만 하며
살아와서 눈을 감고도 잘 할 수가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노인은
비단 한손으로 가볍게 나룻배를 밀었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올라타는
데도 나룻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처럼 거구의 노인이 올라탔
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실로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백방생은 이미 짐작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공노인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
게 되었다. 그것도 물론 아주 고절(高絶)한 경지의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 명의 이인(異人)을 만나는군.)
강호는 넓고 넓어서 그 안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구름처럼 많다
고 하던가?
사공노인은 이내 가볍게 노를 저어서 배를 강의 깊은 곳으로 몰고
갔으며 잠시 후에는 문득 노젓는 것을 멈추었다.
증평은 아까 그 언덕에서 세 명의 노살수들이 사라져 가는 광경을 눈
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사공노인이 노젓는 것을 멈추자
증평은 곧장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갑자기 멈추는 거죠?"
사공노인은 문득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손을 내저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는 것인가? 이 나이를 먹은 나도 급하지 않은데 너
희들이 뭐가 그리 급하다는 것인가?"
증평은 그가 은근히 나이 운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흥, 정말 나이를 먹었다고 거들먹 거리는군. 고작해야 나보다 백살도
더 먹지 않았을 텐데, 아니 혹시 그보다도 더 먹은 것이 아닐까?"
이때 사공노인은 백방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네 혹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실로 엉뚱하고도 뜻밖의 질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벌써 해가 중천으
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날씨가 흐려서 주위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감돌
고 있었다. 황하(黃河)로 흘러드는 이 강물도 혼탁했고 그리 깨끗하지가
못했다.
백방생은 웃으며 대꾸했다.
"어렸을 적에 간혹 책자에서 읽어본 적은 있지요."
사공노인의 두번째의 질문은 더욱 엉뚱했다.
"자네 혹시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나?"
백방생은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여전히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신선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사공노인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자네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강물속에 산다는 신선인 하백(河伯)이 아니십니까?"
사공노인은 이에 눈빛을 특이하게 빛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잠시 내가 자네의 근골을 검사해 봐도 되겠는
가?"
백방생은 느닷없이 자신의 몸을 조사해 보겠다는 사공노인의 제의가
다소 이상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거절할 것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
다.
"물론입니다. 저는 노인장께서 실망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사공노인은 이에 즉시 두말하지 않고 두 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백방
생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대번에 백방생의 몸을 위로 들어올
리기도 했고 혹은 안마하기도 했으며 혹은 침을 놓듯이 꾹꾹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작들은 기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
랐다는 사실이었다. 사공노인이 이름을 감춘 고인(高人)이라는 것이 정
말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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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